허찬란 신부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신명기 26,16-19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라
주일학교 1학년 때부터 교리 선생님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 마치 가능한 일처럼 자연스럽게 고정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잘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완전하신 아버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인간인 우리가 원수마저 사랑할 수 있는 성덕을 갖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전국 성직자, 수도자 성령세미나에 참석하였을 때 지도를 해주셨던 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제 죄,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한계를 오늘도 당신의 십자가에 맡기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제로서 숱하게 많은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던지며 살아온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원수에 대한 증오와 그 무게를 다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왔을까요?
제주교구 허찬란 신부
**************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신명기 26,16-19
마태오 5,43-48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게 하는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된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6개의 대당명제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면,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이들 대당명제는 예수님 특유의 '너희는 들었다'는 기본명제(基本命題)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반명제(反命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명제로 훈시된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곧 '더 옳게' 사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나마 '옳게' 산다고 하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더 옳게' 살기를 실천하기는 분명히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사는 방법과 이론은 배웠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보다 더 엄청난 요구가 제시된다.
예수께서 우리더러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48절)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걸음마도 채 배우기 전에 달리기를 하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주저 않지는 말자.
어제 복음과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첫 번째 대당명제를 통하여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우쳐 주셨다.
'살인하지 못한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탈출 20,13; 21,12-17)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옳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방법은 살인은 물론이며, 형제에게 폭언도 욕도 성도 내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 마음속으로 원한도 품지 않는 것이며, 원한이 있다면 즉각 화해를 청하는 것이었다.
어떤가? 이만큼 하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좀 소극적이지 않는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더 옳게' 사는 방법이 결국은 소극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는 소극적인 행동을 넘어선 적극적인 행동에 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살펴보자.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고,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하느님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마태오가 반명제를 만들기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
는 대목을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야 어찌 되었던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44절)는
반명제를 선포하신다.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지 않는 행위는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고,
화해를 청하는 일은 다소 적극적이기 하나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타협하는
일종의 중립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어떠한가?
이는 정히 적극적인 행동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의 악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벌하시고,
착한 사람의 선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상을 내리신다면, 이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추구하는
'옳게' 사는 것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악인이나 선인을 보시고도 당장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신다면,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더 옳게' 사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면(45절),
이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행위로서 그분의 '아가페 사랑'에 일치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하느님의 완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완전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거룩함'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니 너희도 완전하게 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 11,44-45; 1베드 1,13-21 참조)는
하느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간단한 표현이나 동정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를 통하여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나아가는 길은
머리통에 가시가 박히고 두 손과 두 발이 못으로 뚫리는 엄청난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는 길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
배미애 마리진 수녀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신명기 26,16-19
마태오 5,43-48
완전한 사람
초대교회사 문헌을 보면, 결혼생활을 법률이나 관습 등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당시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부부애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 가정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혼인에 대한 순수한 신뢰를 지키며 새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도록 지키고 보호한다.
이교도들은 이를 조롱하고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면서도, 한편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처럼 혼인 생활이 보호받고
남편에게 존경받으며 품위 있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무엇으로 가톨릭 신자임을 보여주며 살아 있는 표징이 될 수 있을까?
대중식당에서 성호를 긋고 식사하는 것인가?
주일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인가?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토록 조롱을 받으며 굳세게 지켰던 신앙은
모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버림받고, 살인자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으며,
모든 죄인을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믿음을 실천했기에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들로 드러났던 것이다.
오늘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복음 말씀은 계속된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완전해지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뛰어넘어야 할 두려움은 무엇인가?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의 초월정신을 닮고자 하는 열망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게,
쓰러져 가는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
착한목자수녀회 배미애 마리진 수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