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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삶의 여유 대한민국 구체-세부-심도 연대표...
103kys 추천 0 조회 406 22.04.26 08:15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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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2.04.26 11:51

    첫댓글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참고 많이 할께요.

  • 작성자 22.04.26 14:21

    호응 감사하고
    참고 많이 부탁드리구
    주변에도 알려 주세요.

  • 작성자 22.05.29 23:34

    @103kys 정확히 6개월후1394.11.26일자 개성에서 출발하여29일자 한양 도착한 태조-이성계 & 건국 & 혁명1등공신-정도전 & 왕사-무학대사 일행들 의한 공식천도628주년으로서 인왕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국사=왕사'계월헌'무학대사(本名:박자초) 유좌묘향(酉坐卯向)論='서좌동면西坐東面=서좌동향西坐東向'기반화 제안 비하여<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제안자 건국 · 혁명1등공신-'삼봉'정도전 임좌병향(壬坐丙向)論='제왕남면帝王南面=제왕남향帝王' 궁극수용 / 09월 27일(음력 08월 24일)도평의사사 상신(上申)따라 한양-한강이북 지역 수도 결정/11.26일자 ~ 11.29일자 개성 출발 - 한양 도착 및 공식천도 단행 되어짐.1395년-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임좌병향(壬坐丙向)論 의하여 대략10개월간 걸친 전국 사찰의 승려들과 1만 5천여 백성들을 적극동원된 국가공사 끝09월말~10월초순 무렵 한양부 -> '한성부' 개칭 · 경복궁 준공 및 조선왕조 실질정궁 경복궁 완공

  • 작성자 22.05.29 23:34

    @103kys 첫째로,서울은 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에서 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을 관장하고, 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을 관장하는데, 조선왕조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장자보다는 지손들이 훨씬 잘되었으며 여인네(원경황후&명성황후etc)들과 외척(민씨일가etc)의 발호가 드세었다. 또 동쪽이 허(虛) 하다보니 동쪽에 있는 외적(일본-무장왜구)의 침입에 약했다.둘째로, 황천방(黃泉方)이라고 하는 건방(乾方) 즉,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인 자하문 고개가 푹 꺼져있어 황천풍(荒天風)을 받아 험한 일을 많이 당하고, 서북쪽(중국-무장오랑캐)에 있는 적들 군사침입 관련 속수무책이었다. 셋째로, 좌향(坐向)이다.궁궐의 좌향을 남향으로 하느냐 동향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유학자인 정도전과 승려 무학대사는 의견을 달리 했는데 왕은 남향을 하여야 한다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서울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다. 만약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 으로 동향을 하였다면 자왕향(自旺向)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길한 방향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인왕산 대신 북악산(북현무)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 작성자 22.05.29 23:35

    @103kys 우백호인 인왕산(높이 330m)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높이 110m)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동쪽 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만 옹성을 쌓고 허약한 좌청룡의 지기를 돋우기 위해 산맥 모양의 之자를 넣어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다.다른 한 가지는 경복궁이 남면(南面)하고 있어 관악산의 화기(火氣)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 같이 끝 봉우리가 불꽃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 풍수지리학 차원 火山으로 관악산은 오행상 불=火해당되어 그 불기운 관련 궁궐을 누름으로서 화재가 빈번발생 할 것이라고 예언됐다. 이런 불의 기운 악영향 궁궐내 불이 날 것 예방목적 광화문 좌우양쪽 해태상을 세웠다.

  • 22.08.10 09:08

    고조선윗대에배달국등누락됨

  • 작성자 23.04.12 22:51

    < 503 대 36 > 우리에게 일본이 더 큰 원수국인가 !! 중국이 더 큰 원수국인가!!결론부터 말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503:36으로 중국이 더큰 원수다.일본은 부스러기 라도 남겼지 중국은 가져만 갔다!!일본에 위안부가 있다면 중국에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다!!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 부터 1895년 하관(시모노세끼) 조약때 까지 500년간 조선을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모화관)을 세우고 영은문의 전신 홍살문도 세워 중국 사신을 영접해 오다가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때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영은문으로 이름까지 바꿔 세운 것이다.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지만 사실 그들은 500년 이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조선은 무력을 사실상 단념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 간 나라였다.중국황제가 승인을 해야 왕이 될 수 있었다.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진이 빠졌다.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다. 사신이 한 차례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떨었다.중국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자들이 조선에

  • 작성자 23.04.12 23:16

    @103kys 찾아와 본전의 몇 배를 뽑았다.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영은문이었다. 중국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단 의미다.1894년 발발한 일,청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일본의 이등박문과 청국 이홍장 간 체결조약문 "청국은 조선이 완전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라고 선언하여 조선은 중국의 500년 지배에서 독립할 수 가 있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서대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목적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독립'하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만 인식 하는데 서대문에 있는 독립관이나 독립문은 36년간 지배해 온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목적 아닌 500년 간 지배받던 중국의 영향력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목적1897년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돼 지은 것이다.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는 민주화 운동세력 집권 후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묻히고 잊혀졌다.조선불행역사 원흉인물 - 친명사대주의 정책 입각/주장자x 숭유억불정책주의자 - 충청북도 단양 태생 / 봉화 정도전xxx!!!이런 시각상 우리에겐 8.15만 광복절아니라 4.17도 광복절만큼 둘 다 기념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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