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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적산.,해상왕 장보고 기념관.
'청해진 유적지' 완도군 장도 & 해상왕 장보고'
2017.10.25 전남 내외뉴스통신
전남 완도군 법화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실을 입증할 만한 유구, 유물이 다수 발굴됐다.
완도군(군수 신우철)은 25일 "완도군 장좌리
법화사지 정밀발굴 현장설명회를 통해 법화사가
1200년전 장보고 대사가 창건한 것이 확실시 된다,"
이번 정밀발굴은 완도군이 문화재 발굴업체인
(재)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에서 3~9월 이뤄졌다.
발굴결과 법화사지 사역 전체에 장방형 담장 설치.
‘ㅁ’자형 중정지 중심으로 건물지가 대칭
마주하는 배치 구조를 보이는 것으로 조사.
정밀 구조가 돋보이는.,건물지 암거식 배수로
또한 각종 역사적 사료와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고 있는 유구와 유물이 시기적으로
장도 청해진 유적의 유물과 상당부분 일치.
완도 법화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중기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됐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장보고 대사가 활동 당시
중국 법화원과 제주 법화사
그리고 완도의 법화사를 통해
대사의 해상활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이번 발굴은 큰 의이가 있다.
서귀포 법화사지
............제주도 법화사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
통일신라시대 절토(제주도 기념물 제13호)
법화사 일원으로 건물로는 법당 등이 있다.
법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인 관음사(觀音寺)의 말사이다.
신라 때 장보고가 창건했다고 한다.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799년(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존재
한다고 나와 있으며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
2015.01.08 서귀포 법화사지.,건물지 유구,
법화사지는 고려의 비보사찰(裨補寺刹)
국가 지원을 받는 한라산 남쪽 대표적 사찰
발굴 결과, 고려의 왕궁지인 개성의 만월대와
몽고 왕궁에서 출토되는 '용 & 봉황문 막새' 출토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원나라 양공이 만든 미타 삼존 불상이 봉안.
명나라가 이 불상을 근거로 제주도 지배권 의도로
사신을 파견하자, 이를 눈치 챈 조선 태종은 동불상을
직접 한양으로 이송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
이 운반 과정은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싣고 올라갈 때 동원된 짐꾼이 수천명에
이를 만큼 장대하였다고 한다.
........................................
제주 법화사지는 장보고 유적이며
고려의 비보사찰로 이어진 것 같다.
법화사지는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일대
지형은 해발 160~170m에 이르는 완만한 평지.
법화사지 앞에는 구봉산(165m)
동쪽에 강정천(江汀川)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중문 한천(漢川)이 자리.
“해가 지면 뱃길이 끊겨
생활이 불편했던 주민들
강진에서 완도까지 장보고대교
노선을 택하면 아름답고 매력적인
남해안 풍경 속으로., 달릴 수 있다.”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 앞바다의 작은섬인 장도에 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당, 일본'3국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도는 섬 전체에 계단식 성 흔적이 남아있다.
장도 앞바다를 제외한 주변바다는 수심이 얕아
방어용 목책을 박아 외부접근을 막도록 만들었다.
성터 안에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근에는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가 남아있다.
완도군(莞島郡)은 소백산맥 지맥인
해안산맥의 말단부가 침수되어 생긴
'유인도 54, 무인도 147' 도서들로 구성.
완도·고금도· 청산도· 보길도· 신지도 등
섬들은 모두 지질시대에는.,육지와 연결.
그러나 후빙기(後氷期)의 해수면 상승으로
여러 개 섬으로 분리되어 현재의 섬이 되었다.
"도대체, 청해진은 어디에 있는걸까?"
많은 이들이 청해진을 찾다가 푸념한다.
필자도여러번 완도를 찾았지만.,같은 생각.
완도 '청해진 드라마 촬영 세트장' 구경이 고작.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신 드라마 촬영 세트장이
장보고의 '청해진'인줄로 착각.
2017.10.09 완도., 해신 드라마 세트장.
장보고 드라마 세트장
드라마 세트장 건너편.,장도.
청해진 유적지는 완도 해안 밖
오른쪽 허리에 있는.,섬 속의 섬.
'완도'의 부속섬으로
완도 곁에 붙어 있다.
완도군 내 다도해 방향.
고금도.
약산도.
신지도.
3섬이 병풍처럼 애워싸고
완도 품에 안긴듯한.,장도.
장도는 장보고 고향이며
그가 20대까지 살았던 곳.
현재, 무인도이며.,작은 섬.
201개 섬이 모인
전라남도 완도군.
그는 왜 이 외딴 곳 작은 섬에
청해진(淸海津)을 설치한걸까?
맑을 淸
바다 海
나루 津
'맑은., 바다를., 만드는 나루'
'단지, 해적 소탕을 위한 곳일까?
그만큼
완도군 265개
'다도해' 섬들은
해적 소굴이었을까?
55개 유인도
210개 무인도.
완도 - 완도읍, 군외면
고금도 - 고금면
금당도 - 금당면
노화도 - 노화읍
당사도 - 소안면
보길도 - 보길면
생일도 - 생일면
소안도 - 소안면
신지도 - 신지면
여서도 - 청산면
조약도 - 약산면
청산도 - 청산면
완도군(莞島郡).
동북쪽으로는 고흥군,
여수시에 북서쪽으로는
해남군, 강진군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경계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와 인접
전라남도 최남쪽.,도서군(島嶼群).
.......................청해진(淸海鎭)..........................
전남 완도군 완도읍 청해진로 1380-138 (장보고공원)
사적 제308 호 - 장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 작은섬 장도에 있다.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도는 섬 전체에 계단식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장도 앞바다를 제외한 주변 바다는 수심이 얕아
방어용 목책을 박아 외부접근을 막도록 만들었다.
성터 안에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근에는.,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가 남아 있다.
'해상왕 장보고'의 고향은 장도이며 이곳이 곧.,청해진.
........................................................................
장보고(張保皐)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경에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이지만 그의 생년월일.
출생지에 대해서 그 어디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서남해안 해도(海島) 출신으로
그는 20대 젊은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낸 것.
신라 출신의 장보고가 어떻게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었고,
또 어떤 경위로 무령군의 소장까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시대적인 상황으로 그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8세기경부터
지방민들의 유민화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들 중 상당수가
당나라로 유입된 이후
무역상인, 유학생들과 함께
신라방(新羅坊) 집단 거주지를 형성.
그러한 점들을 볼 때
장보고의 당나라행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또한 당나라 지방군에서 그가
높은 직책을 영위했던 것을 보면
무예 실력과 용맹함이 남달랐을 것.
이런 사실이.,삼국사기. 열전.
'장보고' 편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 44,
열전 권 4, 장보고
'장보고와 정년(鄭年)은 모두 신라 사람,
그들의 고향과 부조(父祖)는.,알 수 없다.
두 사람이 모두 싸움을 잘했다. 또한 정년은
바다 밑으로 50리를 가며 물을 내뿜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좀 미치지 못했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年齡)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모두 당(唐)에 가서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槍)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 '장보고' 편 -
828년(흥덕왕 3) 귀국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 설치.
장보고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전부터
당나라에서 해상무역에 관여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특히 신라의 무역상들을 괴롭히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등 활약을 펼쳐
당나라 신라 거주민에게 명망 높았다.
장보고가 이러한 활약을 펼칠 당시 동북아에서는
'신라, 당나라, 일본' 3국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발달.
이들 삼국의 무역은 당나라 조공무역을 기반으로 발전.
그러다가 9세기에 접어들어 공무역이 쇠퇴하고
사무역이 발달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해상왕 장보고의 등장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당나라에서 해상무역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던 장보고.
귀국 후 제일 먼저 청해진을 설치했다.
청해진을 설치한 이유는 신라인들이
해적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신라인들의 안전한 해상무역을 위한 군사기지.
당시 신라인을 노비로 사고 파는 행위는
당나라 내부에서도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
당나라는 이미 816년(헌덕왕 8)에 일명
신라노(新羅奴) 노비에 대한 매매를 금지.
하지만, 해적들의 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라 일부 유민들까지
군소 해상 세력을 형성하고 동족을
당나라에 팔아넘기는 중간상인 역할.
장보고는 이러한 불순한 해상 세력의 활동이
'신라, 당나라, 일본' 해상무역의 걸림돌로 판단.
그래서, 그 척결을 다짐하고 청해진의 설치를 추진.
'삼국사기'는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해 대왕흥덕왕을 뵙고 말하기를,
"중국 어디를 가나 신라인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고, 해적들이 사람을 약취해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바랍니다." 했다. 청해는 신라
해로(海路)의 요지로 지금 완도(莞島)라 하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청해에 설진(設鎭)하게 하니, 그 후로
해상에서 신라인을 파는 자가 없었다.
- 삼국사기 권 44,
- 열전 권 4, 장보고
이 기록만 보면 왕이 군사를 내 주어
청해진을 설치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 청해진의 설치와 운영은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청해진은 신라의 기존 군영들과는
그 성격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청해진
대사(大使) 직책은 장보고에게만 쓰였다.
청해진은 무역선단을
이끌고 입국한 장보고가
본인의 역량으로 해상기지를
꾸린 후, 왕에게 재가를 받은 것.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던
신라조정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청해진 설치로
동아시아 지역 해상권력의
구도는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장보고는 건전한 무역 활동을
방해하는 해적들부터 소탕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해적들을 많이
상대했던 터라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의 뛰어난 항해술을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직접 건조한 선박은 우수한 성능과 규모를 자랑.
청해진이 설치된 완도는 지리적으로 당나라와 신라,
신라와 일본을 잇는 중간지점에 있어 여러 가지로 유리.
.
그렇게 해적들이 사라진 바다에서
장보고는 거침없이., 제해권을 장악.
튼튼한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장보고의 무역선단은 당나라와 일본을
넘나들며 해상 무역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렇게 장보고는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해상 왕국을 건설.
해상권을 장악한 그의 활약이 커질수록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는 점점 늘어났다.
그는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지 세력을
결집해 독자적인 지방 토호 세력으로 성장했다.
한편, 당시 신라의 중앙 정계에서는
진골 귀족 간의 왕위 쟁탈전이 한창.
36대 혜공왕 이후 심화된 왕위 다툼.
신라 중앙정부 정치력은 약화되었다.
이 때문에 신라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수많은 유민들이 나라를 등지고 떠나가는 상황.
그럼에도 권력을 향한 귀족들의 다툼은 더욱 심화.
장보고가 한창 청해진에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836년(흥덕왕 11), 장보고에게 청해진 설치를 허락했던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왕실에서는 다시 한번 왕위 쟁탈전.
원래 후계 서열상으로는
흥덕왕의 사촌동생인 상대등
김균정이 왕위에 오를 차례였다.
그런데, 또 다른 사촌동생인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김제륭(金悌隆)이 삼촌 김균정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왕실 종친들은 각각 김균정과 김제륭의 편으로 나뉘어
무력 충돌을 일으켰으나 결국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이 되었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김우징은
간신히 몸을 피해 장보고에게 의탁.
장보고는 귀국 후 흥덕왕을 알현할때
시중이었던 김우징과 안면이 있었다.
아마도 김우징이 청해진 설치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장보고가 김우징과 그의 식솔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동안 왕실에서는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희강왕(僖康王)이 왕위에 오를 때 한 편이 되어
도움주었던 김명이 아찬 이홍(利弘)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희강왕은 난이 일어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명은 838년(민애왕 1)에 민애왕(閔哀王)이 된다.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해로 피신해 있던 김양이 김우징을 찾아왔다.
그는 김우징에게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거사해 왕권을 차지하자 했고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김우징은 김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나서, 장보고에게
군사를 내어 줄 것을 요청.
"옛 사람의 말에 의분(義憤)한 일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했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복종하겠다."
이렇게 말하며 장보고는
군사 5천 명을 내 주었다.
이때 장보고는 군사를 이끌 책임자로 정년을 지목.
정년은 장보고의 오랜 벗이자 동생으로, 당나라에서
함께 무령군 소장으로 활동했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사이가 나빠져 신라에 들어온후 서로 등을 지고 살았다.
정년은 특별한 직업도 없이 굶주리며 살다가
사정이 급해지자 청해진 장보고를 찾아왔다.
장보고는 과거를 묻지 않고 정년을 맞아 주었다.
그리고 거사를 앞두고는 정년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아니면 화란(禍亂)을 평정치 못한다."
그러고는 그에게 군사를 내 주었다. 이것은 정년에
대한 장보고의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정년은 장보고의 군사들을 이끌고 김양을
총대장군으로 하는 김우징의 반란군에 합류.
반란군은 관군과 맞서 승전을 올리며
경주까지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였다.
반란에 성공한 김우징은 839년(신무왕 1)
왕위에 올라 신무왕(神武王)이 되었다.
신무왕은 자신을 지원한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을 내리고
식읍(食邑) 2천 호를 주었다.
장보고의 지원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말았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김경응(金慶膺)이
왕위에 올라 문성왕(文聖王)이 되었다. 문성왕 역시
장보고의 공로를 잊지 않고, 진해장군 직위를 주었다.
이는 진골 귀족의 지위에 해당했다.
청해진에서 해상권을 장악하며 견고한
세력을 구축한 장보고는 이제 중앙에서도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섰다.
그러나 장보고의 출신 성분과
너무 커져 버린 세력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여보내는 문제였다.
왕이 이 문제를 의논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의 딸을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니 조정 신하들이 간하길,
"부부의 도(道)는 인간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도산(塗山)으로 인해 일어나고, 은나라는
신(㜪)씨로 인해 창성했으며, 주나라는 포사(褒姒)로
인해 망하고, 진나라는 여희(驪姬)로 인해 문란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이에 있으니 어찌 삼갈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해도(海島)의 사람이거늘 어찌 그 딸로 왕실의
배우(配偶)를 삼으려고 하십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 《삼국사기》 권 11,
- 〈신라본기〉 권 11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했던 장보고의 계획은
이처럼 중앙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
신라를 넘어서 당나라와 일본을 넘나들며
막강한 해상왕국을 건설한 천하의 장보고였다.
게다가 지금 신라왕은 장보고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 앉지도 권력을 행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장보고의 출신을
문제 삼아 배척하려
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분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왕과 중앙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장보고를 무시
했다기보다는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장보고의 불만이 커질수록
왕과 중앙 귀족들의 불안은 더 커졌다.
장보고를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역으로 화를 입게 될까 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이때 염장(閻長)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왕과 중앙 귀족들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염장은 김우징이 민애왕을 치기 위해 일으킨
반란군에 속한 장수 중에 한 명이었는데 그가
스스로 "장보고를 암살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장보고가
눈엣가시 같았던
문성왕은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자신이 왕을 배신했다며
장보고에게 거짓으로 투항했다.
평소 무장들을 좋아했던 장보고는
아무런 의심 없이 염장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술을 대접.
그러다 그만 술에 취했는데,
염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보고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베었다.
846년(문성왕 8), 해상왕국 건설.
해상왕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장보고는
그렇게 자객 염장에게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장보고의 죽음으로
청해진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신라의 해상 무역은 급격히 쇠퇴.
염장이 청해진을 장악하려 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어 실패했다.
또한 여전히 불안한 신라의 중앙 정치는
남도 청해진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장보고 때문에 위축되었던
군소 해상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되찾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결국 828년(흥덕왕 3)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시작된
신라의 해상강국의 꿈은
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20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나고 말았다.
장보고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뛰어넘어
운명을 개척한 거상이자
위대한 무장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장보고가 이룩한 시절만큼
해상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던 적이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패권을 차지한 나라들은 모두 해상강국.
그런 점에서 볼 때 장보고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의 죽음 이후 누구도 해상 장악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완도군(莞島郡)...
3개읍 9개면 247개리
인구 : 52,831 (2016)
면적 : 396.36㎢
군청은 완도읍 군내리
동쪽은 고흥군·여수시,
서쪽은 해남군·진도군이 바다 건너 있고,
남쪽은 바다를 경계로 제주도 제주시와 경계,
북쪽은 해남군·강진군·장흥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22′∼127°15′,
북위 33°09′∼34°27′
전남 남단에 군으로
55 유인도, 210 무인도.
특산물 : 전복·멸치·김 등.
완도대교로 육지와 연결된 완도.
대한민국 내륙 최남단에 위치하며,
완도항은 제주항과 가장 가까운 기항지.
.
완도 지역은 신석기유적 패총 등이 발견되어
서남해안 섬들처럼 신석기시대 선사인 거주지.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었던 이곳에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인 829년(흥덕왕 3)
청해진 설치 후,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장악.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은 폐지되었다.
고려 초기의 사정은 상세하지 않으며,
주민이 언제 다시 거주했는지 모른다.
고려 초, 완도라 불리게 되었다.
지방행정단위도 파악되지 못하고,
탐진현(耽津縣: 강진)에 속하였다.
완도 지명은, 풀과 나무가 무성해
왕골풀과 같다고 하여 완도라는 설.
“청해진은 조음도(助音島)에 있다.”의
조음도(좋은 섬)가 빙그레 웃는[莞] 좋은
섬으로 의역되어 웃는 섬[莞島]이라는 설.
금산봉송(禁山封松)의 섬은
즉 국원(國苑)의 섬과 같아,
원도가 완도로 와전 설 등.
모두 다 확실하지 않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의 난.
삼별초군의 송징(宋徵)이 완도를 점령해서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에 대항해 항전을 벌이면서
세미선을 털어 주민들을 구휼했다는 설도 전한다.
그 뒤 주민들은 마을마다 사당을 지어놓고,
송징을 향토의 신으로 모시어 이를 증명한다.
여말에 이르러 왜구가 자주 노략질
주민의 거주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1449년(세종 31) 거주금지령.
이때는 강진현 소속 도서였다.
1475년완도읍 군내리 가리포(加里浦) 축성.
1522년(중종 17)에는 첨사(僉使)를 두었다.
이때 강진과 해남의 두 군에 분속되어 있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왜구가 가리포 및 해남의 달량진
(達梁鎭)에 침입해 절도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과 가리포 첨사 이세린(李世麟) 생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완도 지역도 전화에 휩싸였는데,
1598년 이순신이 고금면 덕동리에
수군본영을 설치하고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협력해 왜군을 물리쳤다.
1882년(고종 19) 가리포진첨사
이상돈(李相惇)의 탐학에 대항해
허조(許祚) 등이 민요(民擾)를 일으켰고,
동학운동 때에도 완도군민 다수가 참여하였다.
1895년 갑신정변 때에
이곳 고금도로 귀양 와서
인연을 맺은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의 건의로,
1896년에 영암·강진·해남·장흥의
4군에 딸린 섬들을 떼어
완도군으로 독립시켰다.
소속 주요 도서는
완도·신지도·금일도·
청산도·소안도 등
유인도 75개,
무인도 135개로서,
총 17개 면을 관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팔금면은 무안군에,
득량면은 고흥군에,
추자면과 보길면의 횡간도는
제주도 북제주군(현재의 제주시)에,
보길면의 삼마도는 해남군에,
군내면의 가우도는
강진군에 이속시켰다.
1919년 3월 15일에는 송내호(宋乃浩) 등
수백 명이 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듬해 1월 22일에도 고금면 도남리에서 정남균(鄭南均)
등의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이 있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 및
일본에서 항구조선노동조합 및
노동자야학 등을 조직했으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송내호를 비롯
소작료인하운동 및 일본의 조선신문편집원인
정남국(鄭南局), 광주학생운동 때 성진회(醒進會)의
회원이었던 문승수(文升洙)·장석천(張錫天) 등이 있다.
1943년 10월 1일완도면이 읍으로 승격
1949년 4월 1일에 고금면 조약도가 분리
되어 약산면이 설치되었다. 1980년 12월 1일
노화면과 금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8년의 완도교 개설로
완도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며,
1982년 10월 1일노화읍 보길도에
보길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6년 4월 1일
금일읍 금당출장소가 금당면으로,
노화읍 보길출장소가 보길면으로 승격.
1989.4.1 금일읍 생일출장소가 생일면으로 승격.
........................
.........................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완도는 강진에, 보길도 등은 영암에 속하는 등
이 지역은 독립된 행정체계로 결집되지 못했다.
1521년(중종 16) 완도에 가리포진이,
1596년(선조 29) 신지도에 신지도진.
정유재란 중 이순신이 고금도에 수군의
본영을 옮긴 것 등을 통해서 이 일대가
서남해안 바닷길 요충지 임을 알 수 있다.
1896년(고종 33) 영암·강진·해남·장흥에
48개의 큰 섬과 52개의 작은 섬을 분리해
19개면 완도군 설치로 독립된 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고금면·금일면·청산면·
노화면·군내면·군외면·
신지면·소안면으로 재편.
팔금면은 무안군에,
추자면은 제주군에
이관되었다.
1922년 군내면이 완도면.
1943년에 읍으로 승격되고,
1949년 고금면의 일부를
분리해 약산면을 신설했다.
1980년 금일면과
노화면이 읍으로 승격.
1986년 금일읍 금당출장소가 금당면으로,
노화읍 보길출장소가 보길면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는 금일면 생일출장소가 생일면으로 승격.
전체적으로 인구 유출 지역이다.
1970년의 인구는 14만 5,339명으로
1960년의 2만 9,597명에 비해 10년간
무려 391%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1970년대 이후로
계속 감소하는 추세.
1980년 12만 6,732명,
1995년 7만 4,033명,
2000년 6만 7,039명.
1980년~2000년 사이에
약 45%의 인구가 감소.
2000년대에도
감소추세 지속
2005년 5만 9,065명,
2010년 5만 4,869명,
2015년 5만 3,014명.
2016년 인구
5만 2,831명,
2만 5,590가구,
가구당 2.06 명.
군내 인구의 약 35%가
완도읍(1만 8,996명) 거주.
면 단위에서는 생일면(857명)에
인구가 가장 적게 분포한다(2016).
고흥반도와 해남반도 사이에
201개의 섬으로 이뤄진.,완도군.
이 섬들은 소백산맥의 한 줄기인
해안산맥이 침강하면서 이뤄진 것.
대체로 해발300~600m 산이 분포한다.
완도 상황봉(644m)·백운봉(600m)·숙승봉(432m),
보길도의 적자봉(425m), 생일도의 백운산(483m),
조약도의 삼문산(397m), 청산도의 매봉산(385m),
소안도의 가학산(359m) 등의 산들이 솟아 있다.
하천은 산 중심 방사상으로 흘러
바다에 유입되므로 유로가 짧다.
대모도·소안도·보길도·신지도·청산도 등
남쪽 해안은 해식애가 발달되어 있으며,
보길도·신지도·완도 북안, 노화도 간석지.
기후는 북서부에 있는
해남반도가 북서풍을 막아주고,
근해를 흐르는 난류의 영향으로
따뜻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13.9℃ 내외,
1월평균기온 2.4℃ 내외,
8월평균기온 25.6℃ 내외,
강수량은 한국의 3대 다우지.
연평균강수량 1,471.5㎜ 정도.
.
주요농산물 : 보리·쌀·고구마·마늘·유채
등이며, 감귤재배도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이 군 중심산업 총 10,325척 어선.
연안에서 고등어·삼치·멸치·조기 등의
어획과 김·미역 등의 양식이 이루어진다.
특히 김 생산은 전국 생산량의 35%를 차지.
군내 2006년 현재 2개 광구.
납석· 고령토 생산이 활발하다.
금일읍·완도읍·노화읍에 주로 분포한
총 157개 공장 대부분 수산물가공공장
종업원수는 1,688명에 이르고 있다.
상설시장은 모두 완도읍에 있다.
정기시장은 완도읍 군내장,
군외면 군외장, 고금면 고금장,
노화읍 노화장, 금일읍 금일장.
완도교를 통해
완도 만 뭍과 연결.
노화읍·소안면은 목포,
고금면·약산면은 강진군
마량면과 더욱 밀접하다.
청산도·보길도·노화도·소안도
등지 군내 정기 여객선이 운항.
군내 섬들간 교통은 좋지 않다.
선사시대 유적 빗살무늬토기가
고금면 덕동리에서 출토되었으며,
완도읍·노화읍 등지에 150기 고인돌.
특히 청산면 읍리지석묘
(전남 문화재자료 제116호)는
선사시대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완도읍 장좌리 장도에는 청해진유적.
불교문화재로는 완도읍 군내리 신흥사.
고금면 덕동리 옥천암(玉泉庵)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완도향교. 완도객사.
이순신이 정유재란 때 수군본영.
묘당도이충무공유적(사적 제114호),
보길도윤선도유적(甫吉島尹善道遺蹟),
고금면 청룡리 도요지,
청산면 읍리의하마비(下馬碑)
천연기념물로는
완도읍 주도(珠島) 상록수림
보길면 예송리의 상록수림,
완도 예송리 감탕나무) 등.
특히 상록수림이 울창한 주도.
국민관광지 신지면 신지도해수욕장.
기암괴석 소안군도 등이 대표적 관광지.
보길도 윤선도 유적지인
부용동과 예송리해수욕장.
구계등(명승 제3호)으로 불리는
완도읍 정도리 해안도 인상적이다.
숙박시설과 우체국·파출소·관광안내소 등의
편의시설은 신지도와 보길도에 집중되어 있다.
연간관광객이 약 353만 8,197명에 달한다(2006).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제주-완도 간 쾌속 페리호가 운항되고 있고
제주도와 연계 해상관광지 발전이 기대된다.
향토문화제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청해제와 장군당제.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강강술래와 세시놀이 등
강강술래는 특히 유명하다.
설화로는
마귀할멈과 구무섬 전설
피내리고랑전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노동요는
〈청해엮자〉·〈새보는노래〉·
〈농부가〉·〈베틀노래〉·〈제초가〉
그 가운데 〈청해엮자〉는 장보고를 노래.
그밖에도 〈사랑가〉 등이 있다.
2006년 의료기관은 병원 1개소,
의원 17, 치과의원 7, 한의원 6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30개소가 있다.
.
.
2014.7.4 완도항
'청해진.,장도.
장보고의 꿈이 서린.,장도 청해진
약 천여개 목책 흔적.
장보고., 동아시아 해상 네크워크
완도 부속섬 장도
장도.,장보고공원
전라남도 완도 '부속섬' 장도 청해진은
장보고가 설치했던 해상무역의 거점이었다.
장보고는 청해진 중심으로 신라 해상무역 장악.
당시, '청해진 ~ 당나라'를 오갔던 견당무역선.
장보고 무역선 복원 모형은 안압지 출토 신라 배,
고려 동경에 그려진 선박 등에서 특징을 추출한 것.
장보고 선단은 이러한 무역선을 통해
당대 해상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2014.8.6 전쟁기념관.
'해상왕' 장보고.
신라 해상 무역의 발달
846년.,'장 보고 반란사건'
한국 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다.
846년 신라 문성왕의 지시로 염장이 장보고를 암살.
900년 궁예가 후고구려, 견훤이 후백제 건국(후삼국시대)
9세기 전반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키운 청해진 대사 장보고는
재력과 무력을 갖추고 군진 대표세력으로 성장.
이어서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들이려는 등 정치 권력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중앙정치 권력 암투에 휘말려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의 손에 죽음.
신라 46대 문성왕
(재위 839~857) 8년
846년에 일어난 일이다.
재력과 무력을
갖추었던.,장보고.
신라는 851년 장보고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이었던 청해진을 해체.
이곳 거주민을 벽골군(김제)으로
집단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반란 세력의 근거지를
아예 없애기 위한 조치.
장보고는 생전에 단순히
해상 무역을 넘어 당나라와
일본에 각각 매물사(賣物使)와
회역사(廻易使)를 경제 사절단으로
파견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외교교섭까지 시도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장보고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일본에서는
그를 ‘해신(海神)’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 장보고가 당나라의
산동 성 문등현(文登縣)에
세운 사찰 법화원(法華院)은
200~300명의 신도들이 몰리면서
현지 거주 신라인들의 중심지 역할.
.
비록 중앙 정치의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지만,
9세기 전반 장보고는 해군 및
무역기지 청해진에서 독자적인 힘을
키운 대표적 군진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9세기 후반에는
패강진(浿江鎭, 황해 평산)과
혈구진(穴口鎭, 강화),
당성진(唐城鎭, 경기 남양)
등에서 이 같은 군진 세력이
속속 등장한다.
이들은 재력과 무력을
동시에 가진 지방 호족,
당시 정치적 혼란을 겪던
중앙 귀족 세력, 나아가
신라 왕실에 대한 새로운
위협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패강진과 혈구진에서
가까운 송악(松嶽, 개성)에서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재력과
무력을 확보한 대표적인 호족이
작제건(作帝建)이었으며, 그 손자가
바로 훗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
.......................
완도군 주요 섬들
........................
1. 금일읍(金日邑)
군의 동부 해역에 위치한 읍.
면적 28.28㎢, 인구 3,947명(2015).
읍 소재지는 화목리.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평일면(平日面)이라 하여 일정·동장·척치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896년완도군이 신설되면서
평일면· 생일면(生日面)·
금당면(金塘面)을
통합해 금일면으로
개칭되었다.
1962년에 금당출장소를,
1971년에 생일출장소 설치,
1980년금일면이 읍으로 승격.
1986년금당출장소가 금당면으로 분리
1989년생일출장소가 생일면으로 분리되었다.
평일도 중심으로
북쪽에 충도(忠島)·신도(身島)
등 유인도 10개, 무인도 33개 분포.
주섬인 평일도에는 망산(望山, 235m)
등 100∼200m의 산지들이 산재해 있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쌀·고구마·유채·마늘 등.
평일도 섬 주위와 생일도 북부 해안의
넓은 간석지 또는 천해(淺海)를 이용한
해조류의 양식업도 활발하다. 그리하여,
연간 김 150만속, 미역 4만 2,451톤,
다시마 3만 8,398톤을 생산하며,
멸치·장어·도미·농어·문어의
어획량도 많다.
소금의 생산도 많으며,
선착장·방파제·방조제·물양장
등이 있어 양식업에 도움주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보다
주로 수산업에 의존한다.
농가가 195가구,
어가가 1,735가구.
완도· 녹동· 회진· 마량으로
운항하는 정기여객선이 있고,
섬 안에서의 교통은 버스와
택시가 교통편의를 제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화목(花木)·신구(新龜)·
척치(尺峙)·장정(莊亭)·
충동(忠東)·월송(月松)·
동백(桐栢)·사동(沙洞)·
장원(長圓) 등 9개 리.
2. 노화읍(蘆花邑)
군의 남서 해역에 위치한 읍. 면적 32.06㎢,
인구 5,669명(2015년). 읍 소재지는 이포리.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노화면이라 하여
포전·이목·지방 등 2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보길면의
16개 리를 병합해 노화면이 되었다가
1980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보길출장소가
보길면으로 분리되었다.
넙도·서넙도·어룡도·노록도
등 4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주도인 노화도는 100m 이내의
소구릉이 곳곳에 산재하고 그 사이에
평야 경지면적은 논 4.1㎢, 밭 7.3㎢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참깨·마늘
등이며, 기후가 온화해 감귤도 재배된다.
연안의 바다에서는 도미·멸치 등의 어획이 많고
각 도서의 연안에서는 김양식이 연간 135만속 생산.
질 좋은 전복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이포리 도청리 84.7㏊ 염전. 소금 생산.
지금은 많은 염전이 폐쇄되고 대신
그곳에서 새우 양식을 하고 있다.
내화벽돌과 타일의 원료가 되는
납석을 29만 2781t 규모로 노천 채굴해
전량을 일본·대만 등지에 수출하고 있다.
완도읍을 연결하는 정기여객선이 있고,
섬 안에는 버스와 택시가 교통편의를 제공.
문화유적은 대당마을에 지석묘,
동천리와 도청리에 봉수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교.
이포(梨布)·도청(都廳)·
등산(登山)·고막(古幕)·
신량(新良)·구석(久石)·
동천(東泉)·충도(忠道)·
내(內)·방서(防西) 등
10개 리가 있다.
3. 완도읍(莞島邑)
군의 서부 해역에 위치한 읍.
면적 54.18㎢, 인구 1만 9031명(2015).
읍 소재지는 군내리이다.
본래 완도군 소재지이므로 군내면이라 하여
군내·대가용 등 1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야소 등이 군외면으로 편입되고
군외면의 망리 등을 병합해
다시 군내면이 되었다.
1922년완도면으로 되었다가
1943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부는
상황봉과 백운봉의
능선을 따라 산지가 발달.
남부는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구릉과 계곡이 발달되었다.
서해안 화흥포 연안의 화흥평야와
동해안의 장좌평야 등 좁은 해안평야가
산재해 있고 간척평야도 많다.
다도해 난류의 영향으로
온난한 해양성기후가 나타나며,
난대활엽수림이 무성하다.
읍의 시가지가 전개된 지역은
구릉성의 동망봉(東望峰)·남망봉(南望峰)·
서망봉이 둘러 있고, 북쪽에 1종지정항인 완도항.
경지면적은
논 4.0㎢,
밭 6.7㎢.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마늘·양파 등
감귤도 재배된다.
수리시설로는 저수지 9개소,
소류지(小溜地) 5개소가 있다.
지형·기후 등의
지리적인 조건이 좋아
수산양식업이 발달하였다.
김은 87만 8,000속,
미역은 1만 5,558t 생산.
연근해는 어족이 풍부해
삼치·멸치·고등어·도미·
전광어 등의 어획이 많다.
완도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는
국도가 완도∼해남간을 지나고,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비포장 지방도.
광주∼완도
직행버스 완행버스
자주 운행된다.
완도∼목포
쾌속선
정기 여객선,
완도∼제주
쾌속정이 운행되고 있어
연안 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문화유적은
군내리 천연기념물 상록수림
완도객사·조개무지·신흥사· 성지,
정도리 구계등,
장좌리에
청해진유적(사적 제308호)·
장군사당·법화사지,
죽청리에
완도향교
(문화재자료 제107호),
완도객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2개 교.
군내(郡內)·가용(加用)·
죽청(竹靑)·장좌(長佐)·
대야(大也)·망석(望石)·
중도(中道)·정도(正道)·
화흥(花興)·대신(大新)
등 10개 리가 있다.
4. 고금면(古今面)
군의 북부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46.48㎢, 인구 4,602명(2015).
면 소재지는 농상리이다.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고금면이라 하여
용지·청학 등 3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농소면·조약면을 통합해 고금면
1949년조약도가 약산면으로
분면되어 현재에 이른다.
유인도 3개
무인도 14개
등 17개의 섬.
면의 서부는
봉황산·덕암산(德巖山, 189m) 등
200m 내외의 산지가 발달하였다.
동부와 남부에 협소한 평야가 산재.
경지 면적은 논 6.8㎢, 밭 8.1㎢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참깨·마늘·고구마.
연안의 간석지에서는 연간 굴 30t,
김 100여 만속, 미역 3,000여t이 생산된다.
덕동리와 가교리에는 21.3㏊의 염전이 있어
연간 1만 1,000가마니의 소금을 생산한다.
교통은 버스가 관내 운행,
도선으로 강진군 마량항까지
운항하여 육지의 국도와 이어진다.
문화유적은
교성리의 고인돌군,
덕동리에 이충무공유적
청룡리에 도요지,
상정리에 상정당,
가교리에는 이순신이
축조한 가교성지(駕轎城址),
그 주변에는
고려총(高麗塚)과
고인돌 등이 있다.
농상리에 경주 김씨,
봉명리에 밀양 박씨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
농상(農桑)·덕동(德洞)·
세동(細洞)·도남(道南)·
덕암(德巖)·가교(駕轎)·
청룡(靑龍)·봉명(鳳鳴)·
상정(上亭)·회룡(回龍)
등 10개 리가 있다.
5. 군외면(郡外面)*
군의 북부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42.91㎢, 인구 3,540명(2015).
면 소재지는 원동리이다.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군외면이라 하여
당인·삼장 등 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내면을 병합하였다.
이 면은 완도 본도(本島)의 북반부와
7개 유인도, 7개 무인도로 이뤄졌다.
남부 완도읍과의 경계에
상황봉·백운봉·숙승봉 산지.
북부 해안지역에도 200m내외
구릉들이 솟아 있다.
남부 산지에서 흘러내린
소하천들 주변에 좁은 평야.
경지면적은 논 3.0㎢, 밭 5.9㎢.
보리·쌀·고구마·참깨·김 등이며,
임야가 넓어 밤·도토리 등 생산.
또, 연안에 간석지가 발달해
김·미역·석화 등 양식어업 발달.
특히, 김은 주민의 가장 큰 소득원.
완도와 육지 사이에 달도(達島).
달도의 북쪽은 남창과 연륙되었고,
남쪽은 완도대교로 원동리와 이어져
완도∼해남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지나
외부와의 교통은 편리하다.
해상으로는
역시 원동에서 목포와 관내
여러 섬으로 연결되는
정기여객선 운행.
불목리 앞 고마도(古馬島)에는
1591년(선조 24)에 설치했다가
수심이 얕아 강진군 마량으로
이전한., 마도진(馬島鎭)터.
당인리는 본래 당인리(唐人里)로서
신라 때 청해진에 내왕한 중국인들의
출입항이라는 사실이 구전되고 있다.
삼두리에 밀양 박씨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분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
원동(院洞)·불목(佛目)·
황진(黃津)·신학(新鶴)·
대문(大文)·삼두(三斗)·
당인(唐仁)·영풍(永豊)
등 8개 리가 있다.
6. 금당면(金塘面)
군의 동북부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14.26㎢, 인구 1,074명(2015).
면 소재지는 차우리이다.
본래 금일면이었으나
1962년금당출장소가 설치되고,
1986년금당면으로 승격되었다.
3개 유인도
5개의 무인도.
면내는
200m 미만 구릉지 대부분
산지가 70% 이상을 차지하며,
밭이 논의 2배가 된다.
총 연장 38㎞에 이르는 해안선은
곳곳에 비교적 넓은 간석지를
이루고 있어 염전이나
양식장으로 이용.
연안에 난류가 흘러 연중 온화한 기후.
동백나무 등 상록활엽수림 곳곳에 자생.
주산업은 연안어업과
양식업 및 밭농사이나
규모가 작아 영세하다.
해조류 2만6,827t,
어류 958t이 생산.
차우리의 금당광산에서
도자기의 원료 고령토 생산.
교통은 인근섬에 여객선이
매일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고흥군 거금도와 도양읍 연결.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차우(車牛)·육산(陸山)·
가학(駕鶴) 등 3개 리.
7. 보길면(甫吉面)
군의 남서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32.62㎢, 인구 2,900명(2015).
면 소재지는 부황리이다.
본래 노화면이었으나
1982년보길출장소가 설치되고,
1986년보길면으로 승격되었다.
2개의 유인도, 15개의 무인도.
면의 중앙에
격자봉(格紫峰, 425m)·
광대봉(廣大峰, 311m)·
망월봉(望月峰, 364m)
등의 산들이 해안 근처까지
있어 급사면을 이룬다.
대부분이 산지이며
좁은 간척지를 제외하면
평야는 거의 없어
경지면적 15% 미만.
주요 산업은
연안어업과 양식업 및
밭농사이나 규모가 작아 영세.
위도가 낮고 연안에 난류가 흘러
연중 온화한 기후지역이기 때문에
동백나무·상록활엽수림이 곳곳에 자생.
완도·노화·소안 등으로
여객선과 소형선박 운행.
화흥포항에는
국내 최초의
완도어촌민속전시관
이 세워져 있다.
문화유적은
정자리에 남은사(南隱寺)·황칠목,
부황리에 윤선도유적지가 있다.
윤선도가 이곳에 와서
부용지(芙蓉池)를 만들고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를 지었다.
장좌리에는
장보고유적지
(사적 제308호)
가 있다.
예송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와 감탕나무가 있다.
곳곳에 해식애와 천연림이 어울려
다도해 절경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부황(芙黃)·예송(禮松)·
정자(亭子)·중통(中桶)
등 4개 리가 있다.
8. 생일면(生日面)
군의 남동부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15.11㎢, 인구 864명(2015년).
면 소재지는 유서리이다.
본래 금일면이었으나
1971년생일출장소가 설치
1989년생일면으로 승격되었다.
2개 유인도
7개 무인도
중앙에 백운산이 있고,
사방으로 소하천이 흘러
해안에 이른다.
섬의 북쪽과 남서쪽
및 동남쪽에는 약간의 논과
밭이 있을 뿐이며,
경지면적은 241㏊로
논 0.7㎢, 밭 1.6㎢이며,
전체 80% 이상이 임야.
면의 전지역이 남해안에 위치해
연중 온화한 기후지역이기 때문에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난대림이 무성.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데,
총 483가구 중 어업가구는 299가구로
전체의 78% 이상이 수산양식업과 어업.
주요 수산물은 멸치·삼치·장어·숭어 등,
양식물로는 미역·김·다시마·톳 등이다.
총 양식 면적은 1,800㏊에 이르는데,
미역양식 면적이 90% 이상인 1,690㏊.
어선은 소형 어선이 대부분이어서
주로 연안어업이나 양식업에 종사한다.
교통은
북동쪽의 평일도와
북서쪽의 조약도를 연결하는
여객선이 매일 운행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유서리에
학루암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와
중학교 분교 1개 교가 있다.
유서(柳西)·금곡
(金谷)·봉선(鳳仙)
등 3개 리가 있다.
9. 소안면(所安面)
군의 서남부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28.21㎢, 인구 2,745명(2015년).
면 소재지는 비자리이다.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소안면이라 하여 횡간도·
북사· 월항 등 1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8개 리가 되었다.
소안도·횡간도(橫看島)·
자개도(者開島)·구도(鳩島) 등
4개 유인도
6개 무인도.
주도인 소안도는 북부와 남부가
좁은 연결부로 이어져 있는데,
북부에는 대봉산(大鳳山, 338m),
남부에는 부흥산(夫興山, 228m) 등.
주요 농산물은
보리·쌀·마늘·참깨·유채 등.
주민의 주요 소득원은
수산업으로서 멸치와
오징어가 어획되며,
연안에서는 연간 김 57만여속,
미역 1,300여t이 생산된다.
특히 김은 완도군
전체 생산량의 60%.
정기여객선이
완도항과 목포항
으로 운행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비자리에 소안진(所安鎭)터.
미라리에 소나무,
비자리·맹선리에 후박나무
등 노거수가 보존되고 있다.
월항리에 김해김씨,
맹선리에 전주이씨,
미라리에 평산신씨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
비자(榧子)·이월(梨月)·
가학(駕鶴)·맹선(孟仙)·
진산(珍山)·미라(美羅)·
당사(唐寺)·횡간(橫看)
등 8개 리가 있다.
10. 신지면(薪智面)
군의 중앙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31.51㎢, 인구 3,650명(2015).
면 소재지는 대곡리이다.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지형이 큰쥐 같아.,신지도면.
송곡·신리·덕월 등
1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6개 리가 되었다.
유인도 2개
무인도 11개.
서쪽 반도에는 상산(象山, 324m),
중앙에는 노학봉(老鶴峰, 225m)·범산(151m),
동쪽 반도 끝에는 기선봉(141m)이 있으며,
이들 산지 사이에 협소한 경지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콩·마늘 등이다.
연안의 양식어업이 주된 산업으로
연간 김 54만여속, 미역 2만 5000t 생산,
동고리 해안 곳곳에 미역 양식장이 산재,
미역가공 공장이 있다.
근해에는
멸치와 문어의
어획이 많다.
면의 서반부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명사십리해수욕장, 동고해수욕장 등은
피서철에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2006년 완도읍과 이어지는 2.36㎞의
신지대교가 준공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송곡리의 영주암
만호진(萬戶鎭)터.
동헌지(東軒址)·
광장지(廣場址)·
장청지(長聽址)·
형장지(刑場址)·
봉수대·포대 등.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대곡(大谷)·신상(新上)·
송곡(松谷)·신(新)·
월양(月陽)·동고(東古)
등 6개 리가 있다.
11. 약산면(藥山面)
군의 동북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28.84㎢, 인구 2,478명(2015).
면 소재지는 장룡리이다.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조약도의 이름을 따서
조약면(助藥面)이라 하여
우두·천동 등 17개 리를 관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금면과 통합되었다가
1949년 분면되어
약산면이 되었다.
4개 무인도가
속해 있다.
면의 중앙에
삼문산(三門山, 397m)이 솟아 있어,
북서부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이다.
남해안 연안의 간석지에는
김과 미역의 양식이 발달해
연간 김 90만 속,
미역 1만 2천t 생산.
특히, 김은 완도에서 제일 먼저
이곳 김씨가 양식하기 시작해
해태를 ‘김’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전설도 구전되고 있다.
삼문산의 바위틈에는
삼지구엽초 등 한약재로
쓰이는 129종의 약초가 있으며,
이것을 먹고 자라는 약산흑염소는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통은
버스와 택시가 운행되고 있으며,
여객선이 완도읍과 녹동·여수로 운행.
문화유적은
삼문산 정상의 봉수터,
해동리에 사지,
득암리에 베틀굴.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
장룡(藏龍)·우두(牛頭)·
관산(冠山)·해동(海東)·
득암(得巖) 등 5개 리.
12. 청산면(靑山面)
군의 남부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41.95㎢,
인구 2,514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 도청리.
본래 완도군 지역으로 청산도 이름을 따서 청산면.
양지·중흥·지리 등
2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서면(麗瑞面)의 동·상·중리를
편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1년에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청산도·대모도·여서도·소모도·장도 등
5개의 유인도와 9개 무인도로 이뤄졌다.
본섬인 청산도에는 매봉산·보적산(330m)·
대봉산 등의 산지가 많고 북서 해안과
동쪽 만 지역에 취락이 발달하였다.
농경지는 비교적 좁아
논 3.8㎢, 밭 5.3㎢이다.
보리·쌀·참깨 등 소량 생산.
근해의 어장이 풍요해 삼치·고등어가 많이 잡힌다.
연안에서는 연간 5,000여t의 미역을 양식하고 있다.
청산도 내에 버스와 택시가 운행되고 있으며,
정기여객선이 완도읍과 목포에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각지의 고분과 고인돌을 비롯해
당락리에 당리성(堂里城), 부흥리에 백련암,
읍리에 하마비·지석묘·읍리성(邑里城)이 있다.
한편, 면의 최남단 여서도(麗瑞島)는
아열대 상록수림이 울창하며, 물이
맑아 천연의 수족관을 이루고 있다.
면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속.
문화유적으로는
읍리고인돌(문화재자료 제116호),
읍리하마비(문화재자료 제108호).
읍리에 제주양씨(濟州梁氏),
청계리에 충주지씨(忠州池氏)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가 있다.
도청(道淸)·신흥(新興)·
국산(菊山)·지(池)·당락(堂洛)·
읍(邑)·청계(淸溪)·부흥(復興)·
양중(陽中)·상동(上洞)·동촌(東村)·
여서(麗瑞)·모도(茅島) 등 13개 리
해상왕 장보고
장보고가 취급한 무역상품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름 첫글자 ‘보배 보’에 정답이 있는듯.
해상왕 장보고는 무역 상품 선정 능력이 탁월.
그의 주력 무역상품은 신라청자 및 도자기류.
완도 산지에서 직접 무역상품을 수출한 것 같다.
과거, 경주는 신라 무역상품 유통 중심의 국제도시.
청해진은 생산지 중심의
국제무역항 역활로 성장.
산지와 유통을 일치시켜
생산원가를 절감 함으로서
무역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 것.
그래서, 완도에서도 섬속의 섬 외딴 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무역 중심지로 삼은 것.
그의 전략적인 무역상품은 군마(軍馬)였을 것.
고려는 원나라에 군마를 조공무역으로 거래.
조선 역시 명나라 청나라 조공무역은 군마(軍馬)
통일신라는 당나라에 조공무역 상품으로 군마 제공.
...............
...............
8~9세기는 동아시아 중앙집권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의 토호들이 각지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쌓아가며
독단적 세력을 형성해 나가며 지방분권적 체제로 전환.
신라 삼국통일 과정에서 동아시아는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중에 하나는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횡단항로의 개척.
이는 나당 연합군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를 원활하게 통할 수 있게 해주는 항로.
이 항로 개척으로 동아시아 문물교류가 급진전.
당, 신라, 일본은 상호 공무역을 통해서
동아시아 삼국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삼국은 국가 간의 사무역을 금지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역을 유지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8C 후반부터 율령체제 붕괴조짐이 나타나
공무역이 후퇴하면서 사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
9세기 들어와 동아시아 삼국 공무역체제가 무너지며
당, 일본을 오가는 신라 상인들의 사무역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는 외래 사치품이 발달하여
신라와 일본에서는 엄격한 신분질서의
틀이 붕괴될 지경었는대 사무역 주도자는
신라상인들이었고, 이들을 조직, 관리하고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 시킨 인물이 장보고.
통일신라 사람인 장보고의 이름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궁복' '궁파',
하지만 중국 일본 기록에는 모두 장보고.
당시 신라에서 평민은 성씨를 갖지 못했다.
때문에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에 있을 때
궁복의 ‘궁’과 비슷한 ‘장’을 성씨로, 궁복의
‘복’의 음을 따라 만든.,'보고'가 이름이 된 것.
일본은 장보고의 ‘보’를 ‘보배 보’(寶)자로.,표기.
이는 무역을 통해 거액의 이윤을 얻었기에 붙인 것.
장보고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해안지방 해도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보고의 고향은.,장도.
청해진이 설치된 완도지역.
장보고가 해도인(海島人)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신라에서 귀족신분이 아니었음을 대변한다.
당시, 당나라는 백성과 지배층 사이의 차별이 없고
누구나 과거를 통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였다.
장보고는 당나라로 건너가서 30세 쯤에
서주 무령군 소장이라는 군직에 올랐다.
그리고, 평로군 진압전에 참전하여 재당
신라인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
무령군 소장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전략가적 소양을 쌓았고,
이로써 해적 퇴치 수완을 발휘.
또한 당, 신라, 일본의 해양세력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동아시아 국제무역을 장악하였고 국제적 거부로 성장.
이런 과정을 통해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 사회에서는
대중적인 인기와 신임을 받으며 강한 리더십을 키운 것.
당시 신라에서는
당 조정의 금령에도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신라노(奴)’는 중국연안 곳곳에서 매매.
또한 서남해 연안지대나 도서지방의 여러
군소해상세력들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을 노비로 붙잡아 인신매매도 성행했다.
동포들이 해적선에 끌려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본 장보고.
828년에 귀국한 장보고는
당에서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신라 왕실의 재정적 후원자를
자임하며 흥덕왕에게 완도에
군사기지 건설을 승인받았다.
그리고는 청해진을 설치해
해적들을 퇴치한다는 명분 하에
군소해상세력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재당 신라인사회와 유기적인 연계를 꾀해
나·당·일 삼국 간의 무역을 장악해 나갔던 것.
장보고에게 내려준 ‘대사’라는 직명이,
청해진이 독자적 세력집단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한중일 삼국 중계무역으로 해상왕국 건설.
장보고는 국제 해상무역활동을 통해 대성공.
그가 조선술. 항해술이 뛰어난 것도 한몫 했다.
일본의 엔닌의 일기에 일본 조공선이 그의 도움이
없으면, 출발을 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다음으로는 장보고가 국제사회에서
전폭적인 신뢰와 공인을 받았기 때문.
신라 흥덕왕에게도 지지를 받았으며,
국제무역으로 얻은 부의 일부를 관계국에
환원해, 당국의 협조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하는 등 자신에게 우호적이 되도록 만들었던 것.
일본이 장보고의 이름에
‘보배 보’를 사용하는 것은
도자기도 생산했기 때문이다.
청해진은 국제 무역 거점을 넘어
상품 생산지로도 발전시킨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국제 항로를
서남해안 지방으로 집중시켰던 것.
해로의 최고 중심지로 성장시켜
인적, 물적 교류를 활성화 시킨 것.
<장보고 암살과 청해진 폐쇄>
그러나 장보고는 결국 암살되고
그의 해상왕국도 사라지게 된다.
우선 신하가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우징이 찾아왔다.
이에 의분을 느낀 장보고는 정치에 나아간 것.
또한 납비문제도 일어났는데,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을
둘러싸고 군신들이 반발을 해 좌절.
그렇게 신라왕실과 장보고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암살을 당한 것.
그 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쇄하고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마침내 청해진은 국제무역항 기능을 상실.
<장보고에 대한 평가>
.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비록 을지문덕이 지략이 있고,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의 사서가 아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위대함이 알려지지 못할 뻔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김부식이 장보고를 본받을만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해’는“바다를 맑게 한다.”는 뜻으로,
해적을 소탕하여 해양을 국제적 평화 교류의
공간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단어.
장보고는‘청해’라는 말뜻에 맞게,
해양세력이 성장하고 통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9세기 동아시아 해양질서를
회복하고, 평화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동아시아 해상왕국을 이룰 수 있었다.
장보고 사후에 청해진 일대에서
벽골군(김제)으로 강제이주 조치를
당했던 도공들과 말을 키우던 마부들.
그들은 그후 벽골군에서 계속 살았을까?
그들은 김제에서 뿔뿔히 흩어져 하동, 강진,
제주 등지로 옮겨 갔거나, 일본 중국으로 진출.
완도에는 청해진 시절에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