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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嚴恒燮 (1898 ~ 1962)】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 참사"
1898년 9월 1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금사면(金沙面) 주록리(走鹿里)에서 승지를 지낸 엄주완(嚴柱完)과 청풍 김씨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형은 엄승섭(嚴承燮)이고, 동생은 엄홍섭(嚴弘燮)이다. 조부 엄세영(嚴世永)은 농상공부아문(農商工部衙門) 대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외조부 김규식은 규장각 제학과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호는 일파(一波), 호적상 이름은 엄경민(嚴敬民)이며 중국 귀화명이기도 하다. 그밖에 엄대형(嚴大衡), 예빗 엄, 스테니슬레이(Stanislas)라고도 불렸고, 영어 이름으로는 데이비드 엄(David Um)을 썼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졸업반에 다니고 있을 때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보성전문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제7회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국내의 한성정부가 통합한 이후 임시정부 법무부 참사(參事)로 임명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경기도 여주군 담당 국내 조사원으로 선발되어 지방 유력자·재산가·학교·종교 등 상황을 조사·보고하였다.
1920년 항저우(杭州) 지장대학(之江大學) 중학부에 입학하여 중국어·영어·프랑스어 등을 공부하였고, 1923년 여름 졸업 후 상하이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비서국원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어·중국어와 영어·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젊은 인재로 주목받았다. 한편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프랑스조계 공동국(共同局)에 취업하여 받는 월급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3년 중반 독립운동의 최고기관과 방략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결렬된 후, 김구(金九)와 이동녕(李東寧) 등 몇몇 인사들만이 임시정부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였다. 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하고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곤궁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조계 공동국에서 받는 월급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해주었고, 공동국에서 얻은 정보를 임시정부에 제공하며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붙잡히지 않게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이 프랑스조계지로 들어와 한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려면 프랑스조계 당국의 양해를 구해야했기에, 공동국에서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피신시킬 수 있었다.
1924년 4월 5일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가 창립되었을 때 창립 발기인 18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26년 결성된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위원으로 참가해 재정난에 직면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1926년 12월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자, 대통령·국무령과 같은 단일지도체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헌법개정 기초위원으로 집단지도 체제인 국무위원제를 도입하는 헌법개정안 초안을 기초하였다. 이 개정안은 1927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약헌」으로 공포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돕던 아내가 사망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이 재혼을 주선하여, 중국 세관에 근무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사망한 연병환(延秉煥) 딸인 연미당(延薇堂)과 1927년 3월 20일에 결혼하였다.
한편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표방한 민족유일당운동에 호응하여 1927년 11월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 상해지부에 참가하였다. 1928년 9월 24일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상하이지부 중앙위원이 되어,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과의 협동전선운동을 모색하였다.
이어 1928년 1월에 결성된 인성학교(仁成學校) 유지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인성학교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국무령 김구와 함께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임시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활동을 펼치고, 안공근(安恭根)과 함께 내무부 선전위원에 임명되었다.
1929년 말, 유일독립당 결성 운동이 좌절된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우익 계열만으로 정당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된 한편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여파로 1930년 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었다. 이때 김구를 보필하며 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31년 한국교민단(韓國僑民團) 의경대장(義警隊長)을 맡아 임시정부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노력하였다. 또 임시정부의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의열투쟁을 지원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尹奉吉)의 홍커우(虹口)의거가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 경찰은 의거 관련자들의 검거에 열을 올려 안창호(安昌浩)가 붙잡혔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청사와 거류민단 사무소, 그리고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한인들의 집들도 습격당하였다. 이때 한인애국단장 김구를 미국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박사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힌 안창호를 위한 ‘안선생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의 회계를 맡아 안창호 석방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피치의 집에 피신한 김구를 향한 일제 경찰의 체포망이 좁혀오자, 중국 국민당 정부와 교섭해 자싱(嘉興)의 천둥성(陳棟生) 집으로 김구를 은신시켰다. 또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 역시 자싱에 있는 추푸청의 아들 추펑장(褚鳳章) 집으로 피신시켰다.
1933년 봄 난징(南京)에서 이루어진 김구와 장제스(蔣介石)와의 면담 때 박찬익(朴贊翊)·안공근(安恭根)과 함께 김구를 수행하였다. 독립운동 세력의 단일 신당 결성을 표방한 한국대일전선통일운동(韓國對日戰線統一運動)의 결실로 1935년 7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되었다. 민족혁명당에서 임시정부 폐지 주장이 제기되자, 임시정부 폐지를 전제로 한 통일운동 참가를 거부하였다.
1935년 10월 자싱에서 열린 제28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민족혁명당에 참가한 국무위원 5명을 대신할 보궐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때 임시정부의 세력 기반이 될 새로운 정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35년 11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창당되었다. 한국국민당의 이사 7인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는 동시에 선전부장을 맡았다.
1936년 11월 하순 임시의정원 제29차 회의에서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37년 임시정부에서 주최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을 때, 임시정부 결산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임시의정원 제30차 회의에서 재정분야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어 1938년 10월, 아내 연미당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陳線靑年工作隊)를 결성하고 대원으로 활동하며 홍보·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한편 중일전쟁(中日戰爭)으로 임시정부가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등지로 이전하는 상황에서 1939년 8월 치장(綦江)에서 민족주의 좌·우파 5개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통일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재차 우파진영 3당인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통합하여 1940년 5월 8일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통합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여당으로서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重慶)에 정착한 이래 김구 주석 판공실 비서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설을 준비하였다. 이때 임시정부와 광복군 소식을 알리는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배관기(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拜觀記)」, 「광복군에 관한 보고」, 「대한철혈남아 사방에서 운집」 등의 글을 미주 『신한민보』에 게재하고 신한민보의 중경 통신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1945년 광복 때까지 지속적으로 주석 판공실 비서와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1년 10월 15일 개원한 제33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붕준(金朋濬) 의장 탄핵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이후 새로운 의장에 송병조(宋秉祚)가 선출되었고, 외교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한중 양 국민의 우호증진을 통한 연합항일을 표방하며 결성된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에 참여하였다. 1944년 4월에는 좌우연합의 통합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통합 정부의 선전부 국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가족을 남겨두고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하여 건국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 국내지부 건설에 몰두하는 한편, 김구를 도와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위 반대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또 민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1947년 3월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소재 원효사에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를 설립하였다.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을 양성하려는 교육과정에서 강사를 활동하며 운영을 맡았다.
단정 수립 저지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남북협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살해당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어진 6·25전쟁 때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여주로 가던 도중에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가족을 고향 여주로 내려 보내고, 자신은 조완구(趙琬九)·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김붕준·윤기섭(尹琦燮)·유동열(柳東說)·명제세(明濟世)·박건웅(朴健雄)·원세훈(元世勳)·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1962년 7월 30일 심장병과 고혈압 악화로 사망하였다. “내가 일 욕심이 많아 그동안 여러 사람과 다툰 것이 후회되오. 통일을 못보고 먼저 가게 되어 억울하오. 통일의 제단에 한 줌 흙으로 바치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현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저서로는 『김구선생혈투사(金九先生血鬪史)』(국제문화협회, 1947)와 『도왜실기(屠倭實記)』(국제문화협회, 1946), 『김구주석최근언론집(金九主席最近言論集)』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