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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마태 4,1 참조). 그런데 ‘유혹을 받다(페이라스테나이)’는 동사가 부정사 구문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악마에게서 유혹을 받으러’ 광야에 나가셨다는 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유혹 기사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지만, 마태오 복음만이 광야에 나가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유혹자는 ‘악마(디아볼로스)’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악마는 예수님의 유혹 장면 말고 두 번 더 언급됩니다. 우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풀이하면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마태 13,39)라고 명시합니다. 다음으로 최후의 심판 대목에서 모든 민족들을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하고는, 왼쪽에 있는 이들에게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고 단죄하는 데에서 등장합니다. 악마는 최후의 심판 때까지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존재이자 마음속의 속삭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은 마음속에 숨겨진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정말이냐고 묻는 유도신문에 넘어간 하와는,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만은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면서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은연중에 토로합니다. 유혹에 제대로 낚인 셈이지요.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 더 강했다면 다른 식으로 반응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유혹에 대처하는 예수님의 방법이 눈길을 끕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어떤 물음으로 도발해 오더라도, 하느님을 굳건하게 믿음으로써 바로 유혹을 차단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공교롭게도 이 말씀은 모두 광야에서 떠돌았던 이스라엘을 숙고하며 나온 신명 6-8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우리 삶을 뒤흔드는 근원적 위협에 맞서 하느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자리입니다.(성서와 함께)
묵상해봅시다
곳곳에 우리를 유혹하는 악마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들 가운데에 더 집요하고 무서운 유혹은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하느님을 얕보거나, 자기 뜻을 제멋대로 하느님 뜻이라고 이해하려고 할 때입니다. 이런 은밀한 유혹 앞에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범죄가 우리를 통해서 재현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려 할 때, 우리는 온갖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매일미사)
오늘의 성경말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알아봅시다
1. 단식과 자선과 기도를 통한 회개의 여정, 사순시기
가톨릭교회는 ‘재의 수요일’인 3월 9일(수) 전 세계 성당에서 자주색 제의를 입은 사제가 참회의 상징인 재[灰]를 신자들의 머리에 얹어 주는 ‘재의 예식’을 거행하면서 사순시기를 시작한다. ‘재의 예식’이란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사용했던 성지(聖枝)를 모아 태운 재를 사제가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 위에 얹거나 이마에 십자 모양으로 바르는 예식을 말한다. 여기서 ‘재의 수요일’이란 말이 생겨났다.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에서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 전까지로, 올해 사순시기는 3월 9일(수)~4월 21일(목)이다. 이날부터 가톨릭에서는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미사 중에 ‘대영광송’과 복음 환호송인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다. 또한 사제는 통회와 보속의 표시인 자색(보라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한다.
또한 신자들은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금식과 금육을 한다. 금식은 만 18세부터 60세까지 지키며, 금육은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킨다. 또한 사순시기 내 매주 금요일과 성 금요일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묵상한다.
◎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의 다짐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1년 사순시기 담화를 통하여 “우리의 나약함을 깨닫고 우리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해성사의 새롭게 하는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결연하게 나아가는 은혜로운 때”인 사순시기에 “회개의 표현인 단식과 자선과 기도라는 전통적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더욱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가톨릭 신자들은 사순시기 동안 평일미사 참례와 성경 읽기는 물론 가난과 질병, 재해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저금통 모으기, 일회용품 사용 자제하기, 주일미사 때 승용차 이용 자제하기 등을 약속하고 실천한다.
▲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2011년 사순시기 운동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안명옥 주교)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을 묵상하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작은 정성을 모으고자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자”는 주제로 4월 15일(금) ‘사랑의 단식재’와 4월 17일(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가난한 이웃을 위한 ‘공동헌금의 날’을 실시한다.
▲ 광주인권재단 ‘함께하는 세상 사순절 특별 강좌’
광주인권재단은 3월 15일(화)~4월 12일(화), 매주 화요일 저녁 미사 후 사순절 특별 강좌를 준비하였다. ☎ 064-234-2737
3월 15일(화) 저녁미사 후 오치동 성당 임동원(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
3월 22일(화) 저녁미사 후 봉선제석 성당 이종석(한반도평화포럼 상임이사)
3월 29일(화) 저녁미사 후 월곡동 성당 정동영(남북평화특별위원회 위원장)
4월 5일(화) 저녁미사 후 학운동 성당 이재정(성공회대 석좌교수)
4월 12일(화) 저녁미사 후 금호동 성당 정세현(원광대 총장)
"우리 자신이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사오니, 사순절의 열심한 수련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시는 성자의 모습을 닮을 수 있게 하소서."(천주교중앙협의회)
2. 3월은 성요셉 성월 - 성인의 생애와 신심
▲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구원 계획에 협력한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 성인.
교회의 수호성인이며 신앙인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마리아의 배필이자 구세주 예수를 기르신 양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그 계획에 협력하셨으며 말없이 온몸으로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드러내신 분,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한국교회 주보 성인이신 성 요셉.
조용하고 신중하며 겸손한 그의 인상처럼 성경에서도 요셉 성인은 '예수의 아버지'(마태 13, 55 루카 3, 23 요한 1, 45)로 묘사되는 것 외에 마태오, 루카 복음 1~2장에서만 잠깐 언급돼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안에 기억되고 있는 성인 역시 성경안에서처럼 침묵 속에 겸손하게 묻혀 계신 듯하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로서 그 지고의 직무를 나누도록 선택 받은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 마리아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 계획에 절대적으로 순명하고 존중을 표했던, 하느님 뜻을 따르는 동반자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이다.
다윗의 가문 요셉
'요셉(Joseph)'은 히브리어의 '더하다'에서 나온 것으로 '하느님께서 후손을 더하시기를'이란 뜻이다. 당대에는 무척이나 흔했던 이름으로 알려지는데, 구약의 요셉 이름을 따서 이름 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복음서에서도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만이 요셉에 대해 언급할 뿐이고 마르코, 요한 복음서에는 요셉과 연관된 내용이 거의 없다. 마태오, 루카 복음서에서도 요셉은 예수의 탄생기, 성장기에만 나타날 뿐이다. 그만큼 요셉의 생애나 출생에 관한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야곱'이라 제시되고 루카 복음서에서는 '엘리'라 밝혀져 있는데 이런 불일치에도 요셉이 '다윗의 가문'(마태 1, 1 루카 1, 27)이란 내용에서는 같은 의견이 드러난다.
출생지나 생애에 대한 기록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진술돼 있어 진위를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예수를 '목수의 아들'(마르 6, 3 마태 13, 55)로 지칭한 부분들은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음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게 한다.
또 루카 복음서를 참고할 때 요셉이 호적 등록을 위해 나자렛 고을을 떠나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음(루카 2, 4)을 알 수 있는데 이로써 베들레헴에 출생지나 연고지를 두고 오랫동안 나자렛에서 생활해 왔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 유다 랍비들은 남자들에게 13~19세 사이에 결혼할 것을 가르쳤다 한다. '의로운 사람' '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지칭되던 요셉은 그러한 랍비들의 말을 잘 따랐을 가능성이 있고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요셉의 활동이 그려지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요셉은 50세 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낳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의 원복음서' '토마스 복음서' 등 위경에서는 요셉을 마리아와 결혼할 당시 이미 나이가 지긋한 노인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이유로 예수의 공생활 이전 숨졌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복음서의 요셉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에 할애되고 있지만 성경 안에서 드러난 요셉은 '의로운 사람' '자비로운 심성' '경건한 성품' '깊은 신심'의 소유자로 비춰지고 있다.
마태오 복음 1장 19절에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의롭다'는 요셉의 평판은 그가 법을 어기지 않고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한 삶의 방증이라 볼 수 있다. 정혼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당시로선 대단한 스캔들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서 '남몰래 파혼하기로 했다'는 것은 법을 준수하면서도 마리아가 공적으로 비난받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인의 '친절하고 자비로운 심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또 천사의 말을 듣고 의심을 떨쳐 버림으로써 마리아를 데려 오고 아기와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나선 장면에서는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경건한 성품'이 드러난다. 그의 굳은 신심은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 구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결례는 남자 아이를 출산한지 40일 후, 여자 아이를 출산한지 80일 후 출산한 여자만이 치르는 것이었고 맏이를 주님께 봉헌하는 것도 일정 비용만 부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온 가족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정결례를 마친 것은 매우 깊은 신심을 지니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결정이다.
성요셉 신심의 역사
요셉 성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공경은 800~900년대 콥트교회 달력에 나타난 흔적으로 더듬어 볼 수 있다. 또 '성요셉 이야기'라는 외경이 4세기부터 7세기까지 대중들로부터 사랑 받았다는 점을 볼 때 성요셉 신심은 일찍부터 움을 틔운 것으로 보이나 교회안의 공식적인 신심은 비교적 늦게 나타난다.
8세기 후반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지는데 9~10세기경 지역 순교자 일지에 '주님의 양부'라는 칭호가 기록된 것을 찾아볼 수 있고 1129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한 성당이 처음으로 요셉 성인에게 봉헌됐다.
이후 성모 마리아 공경과 지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토마스 아퀴나스,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등 학자들이 이러한 신심 전파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알려진다.
이즈음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해 발발했던 십자군 전쟁은 첫 원정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십자군들은 나자렛에 요셉 성인을 공경하기 위한 교회를 건립했다고 기록되는데 성인에 대한 공경과 축제는 성지에 남아 있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노력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3월 19일 성요셉 축일은 12세기 경에야 정착됐다. 그러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성요셉 신심이 보다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계기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출신 교황 식스토 4세가 로마에 축일을 도입하고 전 교회로 확대시키면서부터였다.
이어서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1621년 요셉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격상시켰고, 이때부터 성요셉 공경에 대한 바로크 양식의 그림 조각이 성행하게 됐다. 성요셉 공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총을 받고자 하는 원의들이 퍼져 나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870년 교황 비오 9세는 '퀘맛 모둠 데우스(Quemad modum Deus)' 회칙 반포를 통해 요셉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 회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오 9세는 성베드로대성당, 라떼란대성당, 성모마리아대성당 등 유명 대성당에서 동시에 반포할 것을 원했다고 한다.
20세기에 이르러 성 요셉은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들의 주보로 정해졌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5년 공산주의자들의 노동절에 대응, 5월 1일을 '노동자 성요셉 기념일'로 제정 선포했다.
현대 교회 안에서 요셉 성인은 또한 성가정을 지키고 보호하신 모범처럼 교회의 유지 발전을 위한 수호자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직전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준비와 성공을 위해 나자렛 성가정의 가장이요 성교회 수호자이신 성요셉의 도움을 위탁했다. 바오로 6세 교황도 현대 교회에서 성 요셉의 사명을 '보호와 방위, 수호와 원조'라고 천명한 바 있다.
성 요셉을 특별히 공경하는 달인 3월 성요셉 성월은 1840년대부터 기념되기 시작했다. 의인이며 신앙인의 모범인 그의 덕을 본받고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요셉 성월 신심서는 1850년 처음 발행됐으며 5년뒤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당시 교황 비오 9세는 3월 한 달 동안 매일 요셉 성인께 간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영적인 은사를 베풀었고 1865년 4월 27일, 3월을 특별히 성 요셉에게 봉헌된 달로 설정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89년 회칙 '쾀쾀 플루리에스(Quamquam pluries)'에서 성 요셉의 지위와 요셉 신심의 이유를 명확히 했으며 3월에는 매일 성월기도를 바치도록 권고했다. 또 1909년 3월 18일 여러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제시한 성 요셉 호칭 기도를 인가 보급했다.
교회 전문가들은 이러한 요셉 성월의 목표가 성월에만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월에 행한 기도 모범을 계속 가정과 사회에 뿌리 내리도록 하는데 있다고 밝힌다.
(가톨릭신문)
3. 가톨릭교회교리서
제2부 십계명(十誡命)(2401~2557항)
제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일곱째 계명 : 도둑질하지 못한다
2401항 일곱째 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차지하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것을 금한다. 이 계명은 현세의 재물과 인간 노동의 결실에 대한 관리에서 정의와 사랑을 명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재물을 하느님과 형제적 사랑을 위해 사용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한다.
일곱째 계명은 정의와 사랑, 절제와 연대 의식을 실천하여 다른 이의 재산을 존중할 것을 명합니다. 특히 약속한 것과 체결된 계약에 대한 존중, 저질러진 불의에 대한 보상과 부당 이익의 반환, 자연과 자원과 환경인 자연계 전체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려면 절제와 정의와 연대의식이 필요합니다. 도둑질은 이런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칩니다. 타인의 재물을 빼앗거나 부당하게 차지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민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일곱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빌려 온재물이나 습득한 물건을 일부러 간직하고 있거나 장사할 때 속이는 짓, 부당한 품삯을 지불하거나 품삯을 제때에 지불하지 않는 행위, 타인의 무지나 필요를 틈타서 물건 값을 올리는 것이 그러합니다. 오늘 날에 난무하는 온갖 비리와 불공정 해위는 다 일곱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은 창조주 하느님의 것이며 인간에게는 오직 이를 잘 관리하고 사용할 권리만 있습니다. 이 권리는 장차 태어날 후손들에 대한 의무를 포함합니다. 동물 학대는 물론이고 지나친 동물 사랑 - 인간보다 더 사랑하는 것 - 또한 자연 존중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간의 기본권이나 구원을 위해 필요할 때, 교회는 경제와 사회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며 사회적 차원에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신자들을 가르칩니다. 이 같은 사회 교리는 그리스도 신자뿐 아니라 양심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도 구속력이 있습니다.
노동은 생계유지 수단 뿐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의 삶에 필요한 것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하고 인류 공동체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기업은 사회에 대하여 경제적 책임뿐 아니라 생태학적 책임도 지고 있습니다. 기업은 이윤의 증대뿐 아니라 인간의 선익도 유념해야 합니다. 국가는 통화 안정과 공공서비스 외에도 개인들의 자유와 재산에 대한 보장을 확고하게 하며, 경제 분야에서 인간의 권리를 감시하고 조정해야 합니다. 노동 환경과 관련하여 사회는 시민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교회는 처음부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을 실천하여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면, 재물에 지나친 애착을 갖거나 재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성 대 그레고리오). 오늘날 교회가 벌이는 자선 사업은 모두 이러한 정신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질적 자선 외에, 불우한 사람을 참아주고 용서하고 충고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가르쳐 주는 행위는 영적인 자선이며,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영적 자선 행위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를 하시면서 심판 판결의 기준을 애덕실천이라 하셨습니다. 의인들에게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하시고, 죄인들에게는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45).”하셨습니다.
여덟째 계명 :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2464항 여덟째 계명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금한다.
말이나 행실로써 진실을 어기는 것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진리 또는 진실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참된 것을 보여 주고, 말로써 참된 것을 표현하고, 필요한 경우에 참된 증언을 하는 덕목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간직하면서 정의가 요구 할 때에는 진리를 증언해야 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 교인에게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죄는 거짓말입니다. 말은 진실을 전하는 수단인데 거짓말은 남을 속이려는 의도로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진리이신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왜곡시킵니다. 인류의 첫 범죄도 거짓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창세3,3-5). 거짓말은 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타인의 인식 능력을 해칩니다. 가벼운 거짓말은 작은 죄가 되지만, 정의와 사랑의 덕을 심각하게 해칠 때에는 중죄가 됩니다. 타인의 있는 과실(過失)을 타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알리는 것을 비방(誹謗)이라 하고, 없는 잘못을 타인에게 덮어 씌어서 남에게 알리는 것을 중상(中傷)이라 합니다. 이 역시 이웃의 명예를 해치는 행위이며, 지나친 찬사나 아부, 자랑이나 허풍 또한 진실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진실을 알 권리는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계명에 따라 진실을 알리는 게 좋은지 아닌지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정보를 제공하고 진상을 밝히라는 모든 요구에 대해서 타인의 선익과 안전, 사생활 존중, 공동체의 공동선이 요구할 때에는 침묵하거나 조심스럽게 대처해야 합니다. 특히 작업상의 비밀은 엄격히 지켜야 합니다.
대중 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은 공동선에 이바지해야 하고, 그 내용에서는 진실하고 또 정의와 진리를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대중매체를 바르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인간의 정당한 권리와 존엄성과 도덕률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서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인식하고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이 타고난 재능으로 진, 선, 미를 재현함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가지 예술을 보호하고, 전례와 교회 시설에서 거룩한 예술의 향기를 시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홉째 계명 :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2529항 아홉째 계명은 육체의 욕망이나 탐욕을 경계하도록 해준다.
성경에서 아홉째 계명과 열째 계명은 원래 ‘한마디 말씀’(탈출20,17)으로 아홉째 계명은 육체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고, 열째 계명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합니다.
육체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기 위하여 마음을 정화하고 절제의 덕을 닦아야 합니다.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고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사랑과 정결이라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자기 마음을 일치시킨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육체의 깨끗함과 더불어 신앙의 순수함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숙함은 절제의 덕의 일부로서 인간의 신비와 사랑의 신비를 보호합니다. 또한 사람의 언어 행동을 단정하게 정리 시키고, 과도한 호기심을 억제하며, 경망스러운 유행을 따르지 않게 하여 신중하고 고결한 인품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적 정결에는 사회 분위기의 정화가 요구됩니다. 선정주의나 퇴폐풍조를 배격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특히 자유라는 이름으로 청소년들이 이런 불건전한 성 문화에 접근하게 놓아두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진리와 고결한 마음과 인간의 도덕적 정신적 존엄성을 존중하도록 교육할 책임이 부모와 교사, 교회와 국가에 있습니다.
열째 계명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2552항 열째 계명은 부(富)와 그 힘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발생하는 무절제한 물욕을 금한다.
열째 계명은 탐욕과 세상 재물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을 금합니다. 부(富)와 그 힘에 대한 지나친 집착, 이웃의 재물에 해를 끼치고자 하는 부당한 마음을 금하는 것입니다. 열째 계명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기심을 몰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웃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여 그 재산을 옳지 못한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이웃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은 죄악의 근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도록 권고하십니다. 진정한 행복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 현세 재물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행복을 누리게 될 때에 충족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본다는 말은 곧 그 분을 소유한다는 말로서, 하느님을 뵙고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탐욕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쾌락과 권세와 물질에 관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서울교구 소공동체)
손석준엘리야
전남대학교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http://love.chonnam.ac.kr/~sohns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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