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슈퍼스타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자살율이 제일 높은 나라라는 말이 나온 지도 꽤 오래된 일이다. 그리고 자살율이 제일 낮은 나라로는 칠레와 뉴질랜드와 아일랜드라고 한다. 칠레는 사는 일이 즐거워서 라고 하고 뉴질랜는 평화롭게 살 수 있어서이고 아일랜드는 독실한 종교적 배경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는 즐겁지도 평화롭지도 않고 확고한 삶에 대한 가치관도 부재한 나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몇 년전 많은 팬을 거느렸던 대통령의 자살, 유명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과 행복 전도사가 직업이었던 사람의 자살, 그리고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청소년의 동반 자살, 대선 정국에서 야권 단일화를 주장하며 자살한 사람 등. 참 자살의 유형도 다양해 보인다. 신경 정신과의 저명한 의사인 양창순박사의 말에 의하면 몇년 전 기업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자살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분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보세요' 라고 주문했더니 90% 이상이 손을 드신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땅에 하루에 자살하는 사람이 4~50 명 정도 된다는 통계가 있고 이는 교통 사고 같은 사고사 보다 높은 수치라고도 한다. 이쯤 되면 자살 공화국임에 틀림없다. 자살자들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높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자살을 하는데 나 같이 미미한 사람이야 죽어야 마땅하지 않을 까 자위하기도 한다고도 한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필자는 십수 년전 암 4기로 진입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고통스런 치료의 과정을 겪은 경험이 있다. 고통스럽다기 보다는 끔찍하게 무서웠다. 내가 죽는다는 데 자식이나 아내, 친구들이 무슨 소용일까? 다만 철저하게 혼자 버림받았다는 공포감에 시달렸다. 그동안 필자가 읽은 책, 사상, 종교 등은 별 도움이 못 되었다. 간혹 교인들이 와서 찬송가를 부르고 위로의 기도를 할 때도 어서 빨리 죽어 천국에 가라는 주문처럼 들려서 오지 못하게 했다. 병문안 오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았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철저한 소외감이 동반된 깊은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할수 있었던 것은 단지 생존본능에 의지해서 암 부위를 넓게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과 주변의 다른 멀쩡한 세포까지 태워버리는 방사선 치료를 의사의 처방대로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받았고 혹시 미세하게라도 남은 암부위가 있을까 염려되어 독한 항암제를 주치의가 그만 먹으라고 할 때까지 복용했다. 하지만 완치 판정을 받은 지 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어두컴컴한 방사선 치료실에 홀로 누워있던 일이 꿈이 보이곤 한다, 여리지만 둔탁하게 돌아가던 방사선 치료 기기의 소리도 들리곤 한다, 간절히 살고 싶었기도 했지만 죽는다는 것이 너무 낯설고 무서웠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나마 치료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 그마저 없었다면 어쨌을까? 생각하면 왜 이 시대가 돈이 제 1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지 절실하게 공감하게 된다. 이런 성향을 지닌 필자도 종종 자살을 생각하곤 한다. 그러니까 생존본능과 자살본능은 모든 생명이 함께 지닌 유전자인듯 하다. 이도 모두에 인용한 양창순 박사의 책에서 얻은 정보이다. 중국의 한 동물원에서 새끼곰의 고통스런 비명 소리를 들은 옆 우리에 있던 어미곰이 죽을 힘을 다해 철창을 부수고 새끼곰의 우리로 들어갔다. 산채로 새끼곰의 쓸개즙을 채취하는 과정에 고통스럽게 지르던 새끼곰의 비명 소리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어미곰은 그러나 신음하는 새끼곰의 몸에 채워진 쇠사슬을 풀수는 없었다. 어미곰은 결국 자신의 새끼를 꼭 껴안아 질식시켜 죽이고 자신도 벽에 머리를 찧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래들도 자신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에 봉착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홍익인간 사상과 생명 존중을 가장 큰 가치로 삼아온 우리 민족이 왜 극단적인 방법인 자기 살해를 하는 세계 제 1위의 지경에 이르렀을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지나친 경쟁사회, 이젠 거의 치료가 불가능해 보이는 물질만능의 만연 등을 원인으로 진단한다, 신문과 티브이에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돈 문제, 누가 얼만큼 횡령하다 감옥 가고, 사람들이 먹는 식품가지고 떼돈 벌려다 들통나고, 보험금을 타내려 가족을 살해하거나, 심지어는 인육이나 장기를 팔기 위한 살인 등.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상의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에 익숙해지면서 은밀히 자리잡은 상호간의 돌이키기 힘든 불신과 불안이 극으로 몰리다 보면 최후로 선택하는 사회와의 소통 방법이 자기 살해본능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회을 이지경을 몰고간 사회 환경과 지도자들을 탓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진 않는다는 것도 확실하다. 왜냐하면 뿌리 깊게 쌓인 화나 슬픔 고독을 타자가 풀어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들의 분노나 외로움을 대리만족의 형태로 만져주는 댓가로 돈더미에 앉은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스타, 종교적, 명상적, 철학적 스타들이 양산되는 시대이긴 하지만 결국은 단독자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로선 스스로 화나 슬픔 등을 추스르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생이란 늪에 헤맨다. 그리고 이 시대를 담당할 슈퍼스타를 기다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 돈이 없어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젊은이가 없는 나라, 적어도 굶어죽거나 자살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로 이끌어 줄 슈퍼스타는 진정 오시는 것일까? 아니 슈퍼스타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혹시 슈퍼마켓의 대형 냉동 저장고에서 아직 주무시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다. 슈퍼스타는 분명 우리의 내면에 있고, 우리의 내면에 냉동된 슈퍼스타를 스스로 꺼내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깨워야 할 슈퍼에너지는 대체 무엇일까? 이는 각개인이 생래적으로 타고난 강력한 생존본능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 어떤 일이 닥치든 사는 날까지 살아내야 하는 절대 의무와 천부적 권리가 생존본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어김없이 살아온 사람은 가고 새사람이 올 것이다, 그래도 이 생에 머무는 동안 우리 모두 슈퍼스타가 되자. 왜냐하면 죽음은 서두르지 않아도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맥문학 2013.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