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19-24절 우리는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명령을 설정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즉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곧 우리의 소유물, 은사, 재능, 혹은 성향을 그렇게 사용해야 하며, 이렇게 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우리의 연약함을 입으시고 우리를 도우러 오셨고, 우리를 돕고자 열망하실 뿐 아니라 주께서 다루고 계신 주제의 사회적 중대성 때문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속 정신과 세상의 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교묘하고 세속은 침투성이 너무 강하므로 우리 모두 이것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너무 교묘해서, 가장 마음속 깊이 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무엇인가? 우리의 동기는 무엇인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실할 때, 보물들이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는 첫째 논거는 상식적 논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어째서입니까? '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째서 보물을 쌓아야 합니까?
'거기는 좀이나 등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보물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보물은 덧없는 것이요, 지나가는 것이요, 하루살이 같은 것입니다.
어디서나 변화와 부패를 봅니다.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모든 것에는 부패의 요소가 있습니다. 좀과 동록이 모든 것에 스며 있어 이것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이것에는 항상 잘못된 것이 있다.
이것에는 항상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모두 갖고 있는 것 같으나 그들은 여전히 또 다른 것을 원합니다. 행복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과 동록의 결과를 영적으로 보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들에만 부패의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로 항상 싫증을 내는 경향 역시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잠시 즐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에 대한 관심을 잃습니다.
우리가 항상 새로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새것들을 찾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유행은 변합니다.
베드로는 이것과 관련해서 놀라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이 속세의 물건들은 모두 부패성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불순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사실은,
이것들이 멸하여 없어질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도 그것을 가지에서 꺾어내는 순간 시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내어던져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생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것이며 모두 사라져 가버립니다.
생명을 가진 것은 무엇이나 죄의 결과로 이 과정 곧 '좀과 녹이 스는' 과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용모도 부패의 과정이 지나감에 따라 어떤 의미에서 추하게 됩니다. 가장 눈부신 재능들도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생의 모든 실패 가운데도 완전한 선이란 것은 없기 때문이며, 순수한 선이란 없기 때문이며, 최고의 진리에도 악과 죄와 거짓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인 것입니다.
주께서 '그렇다,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은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보는 일에 너무 둔합니다.
이생에는 많은 도둑이 있습니다. 도둑들이 항상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앉아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둑이 뚫고 들어와 샅샅이 뒤지고 약탈해 갑니다.
기타 약탈자들도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습니다. 질병, 사업상의 손실, 산업상의 붕괴, 전쟁, 그리고 드디어 죽음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도적들이 우리를 항상 위협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우리로부터 탈취해 가버립니다.
그것은 금전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위안이 되어 주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도적들과 그들의 공격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우리는 도적을 예방할 수 없습니다.
주는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시어 속세의 보물들이 오래가지 못함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어디서나 변화와 부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 곧 긍정적인 면을 봅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하지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놀랍고 영광으로 충만합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한 구절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1:4).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고후 4:18).
하늘의 것들은 멸하여지지 않는 것이므로, 도적이 뚫고 들어와 도적질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직해 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관인이 되시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18-19). 더욱이 거기에 불순한 것은 없습니다. 부패하는 것은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죄나 부패의 요소가 없습니다. 그곳은 영생과 영원한 빛의 영역입니다.
주님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십니다'(딤전 6:16) 천국은 생명과 빛과 순수한 영역이며 죽음에 속하는 것이나 더럽거나 오염된 것은 거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완전합니다. 영과 혼의 보물들은 그 나라에 속하여 있습니다. 주님은 거기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좀이나 녹이 슬지 않고 도적이 뚫고 들어와 도적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식에 대한 호소입니다.
이것들이 참된 것임을 모르십니까?
영적 의미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신
첫째 경고는 이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무시무시한 지배력과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용하신 용어를 주목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는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 주는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섬긴다'는 말씀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용어들은 이것들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무서운 지배력에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사용하신 표현이 풍부한 용어입니다.
이것에 주의하지 않는 한 우리를 지배하게 될 세속이라는 이 가공할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성은 세력이 강력할 뿐만이 아닙니다.
매우 교활하기도 합니다. 인생에 대한 고귀한 태도가 어째서 쇠퇴해 버립니까. 우리가 모두 '땅 위의 보물'의 희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감옥입니다. 이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목을 조입니다. 이 지배력, 이 세력이 우리를 정복하여 우리는 그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주는 이 무서운 위험을 보여 주시는데 너무 열중하신 나머지 주는 이것을 세밀하게 풀고 계십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무서운 위험은 전 인격에 영향을 준다고 주는 말씀 하십니다.
주께서 처음 하신 말씀은 '마음'입니다.
명령의 말씀을 설정하시고 나서 주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감정과 애착심과 우리의 모든 감수성을 지배하고 정복합니다.
우리 성품의 모든 부분이 이것들에 완전히 지배를 받으므로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건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사랑합니다. 그것들을 좋아하는 듯 가장 하지만 사실은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깊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것들이 보다 간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마음을 지배할 뿐만이 아닙니다. 정신까지 지배하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오. 눈이 나쁘면은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가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22-23절)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주께서 '성'한 눈이라 부르신 것이 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신령한 사람의 눈입니다.
이 사람의 눈은 밝아서 사물을 정상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나쁜 눈'도 있습니다. 이중으로 보이는 눈, 곧 눈알의 수정체가 맑지 못한 눈입니다.
안개와 기타 불투명한 물체가 끼이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이런 눈은 나쁜 눈입니다.
이것은 어떤 편견, 정욕과 욕망의 영향을 받은 눈입니다.
이런 눈은 맑은 눈이 아닙니다. 구름이 온통 끼인 듯하고 각양 티와 얼룩의 영향을 받은 눈입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뜻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사람들을 혼란케 한 적이 허다했습니다.
주는 이 표현에서 보물을 쌓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음을 보여 주시고 나서 주는, 마음뿐 아니라 정신까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이 사람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땅의 보물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거의 모든 영역에 있어 사상의 불일치는 전적으로 순수한 사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편견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보물을 사랑함에 의한 이 같은 시력의 혼미는 도덕적으로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약한 것은, 우리의 종교관 역시 이런 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데마(Demas)는 나를 버렸다'고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방탕과 술 취함과 세상 걱정으로 마음을 둔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여 뜻하지 않은 때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도록 하라. 그날이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차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명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기 위하여 언제나 깨어 기도하라'(눅 21:34-36).
우리의 정신을 둔하게 하고 맑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악한 행동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 근심, 생활에의 안주, 우리의 삶과 가정생활을 즐김이나 우리의 지위나 위안물들 역시 폭식이나 폭음과 꼭같이 위험한 것입니다.
따져보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구하는 소위 지혜라는 것이 땅의 보물에 대한 염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끝으로, 이것들은 감성, 지성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의지에도 영향을 줍니다.
우리 주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섬긴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우리는 의지의 영역 곧 행동 영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논리적인가를 주목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인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 곧 우리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세상 보물들은 세력이 너무 강하므로 사람의 전 인격을 지배한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감성과 의지를 지배합니다.
세상 보물은 사람의 영과 혼과 전 존재에 영향을 줍니다. 어느 생활 영역을 보든 간에 이것들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 보물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은 곧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편을 중히 여기고 다른 편을 경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성경에서 두 가지가 모두 우리에게 전체주의적 요구를 합니다. 세속 일들은 전 인격을 지배하며 어디서나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온전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그것들만을 위해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반드시 물질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기타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체주의적 요구입니다.
24절에서 이것을 다시 봅시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편을 중히 여기고 다른 편을 경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타협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인 것입니다.
열왕기하 17장 24-41절을 자세히 연구해 보십시오.
앗수르 사람들이 어떤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자기 백성을 그 지역에 정착시켰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와서 그들의 재산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하게 하신 열방 사람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신이 사자들을 저희 가운데 보내며 저희를 죽였사오니 ... 앗수르 왕이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그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하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되 저도 그곳에 가서 거하며 그 땅 신의 법으로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만사가 잘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우리가 이러 저러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재물을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모욕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최대의 모욕입니다. 우리 모두 얼마나 쉽게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이 죄에 빠질 수 있습니까.
저는 어떤 설교자가 말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인즉, 어떤 날 행복하게 나아갔다가 마음에 큰 기쁨을 안고 들어와 아내와 가족들에게 그들의 암소가 송아지 두 마리, 곧 붉은 놈과 흰 놈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한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이 송아지들의 하나를 주께 바쳐야겠다는 생각과 충동을 느꼈소. 우리는 이 두 놈을 잘 길러서 때가 되면 그중 한 마리를 팔아서 그 수익금을 저축하고 또 한 마리는 주의 사업을 위해 바칩시다' 그의 아내는 어느 놈을 주께 바치겠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은 대답하기를 '지금 그 문제로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놈들을 꼭같이 취급했다가 때가 오면 내가 말한 대로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몇 달 뒤에 그 농부는 매우 비참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부엌에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나쁜 소식이야,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소'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러나 당신은 어느 것이 주님의 송아지인지 결정하지 않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아, 나는 항상 흰 놈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그놈이 죽었단 말이야'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웃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웃지들 마시기 바랍니다. 죽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송아지입니다.
금전 사정이 어려워질 때 우리가 처음으로 절약하는 것은 하나님 사업을 위해 바치는 돈입니다.
맨 처음으로 아끼는 것은 헌금인 것입니다.
'언제나'라고 말하면 심한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당한 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맨 마지막에 지출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들어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들에 대한 태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 자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를 인정하며,
우리 자신을 기쁘게 서슴치 않고 굴복시킨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각자 자신을 검토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