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캄캄한 밤에 차를 운전해서 어디를 가는데 목적지의 주소도 분명히 기억 나지도 않고 전화번호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가고 있는데 퍼득 잠에서 깨고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대표적인 샘플로 김문수 같은 소위 ‘변절’이라고 하는 가던 방향에서 완전히 돌아서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밤 꿈에서 깨어나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처럼 자기가 추구하던 목표가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온 것은 개인적으로는 심리적 해방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은 신념을 지켜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할지라도 개인적으로는 목표가 불분명해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가장 가까웠던 후배가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어서 그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해보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난감하다.
그러나 반면에 흔하지는 않지만 죽음에 직면해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지사적 인간도 있다. 역사는 뜻을 꺾은 이들보다는 뜻을 지킨 인물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인물의 대표젹인 존재가 장준하 선생이다.
뉴욕의 정영민 목사 님이 귀국길에 장준하 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미국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둘째 아들인 장호준 목사가 법적인 문제로 귀국 할 수가 없어 안타깝게도 아버님의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어서 대신 참배해서 영상이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뜻이 귀한 일이라 제자인 진영진 부탁해서 공항에서 태워서 파주에 있는 장준하 선생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하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다함께 부르고 정 목사님은 '한 오백년'을 불렀다.
44주기때는 동갑인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씨를 만났었다. 그 때 호권씨가 자기도 월남에 갔었다고 하길레 반가워서 “어느 부대에서 근무했었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너무 의아해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월남에 가기는 갔는데 부대에 배치되면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있다가 몇 달 있으면 다른 부대로 보내지고 또 다른 부대로 보내자고 하는 식으로 1년을 떼우게 하더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장호권을 그런 식으로 관리를 했던 것이다.
그날 묘소를 찾은 후 포천 평화나무농장에 들렸다가 김준권 선생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장 선생이 추락사를 했다는 근처의 수락산 약사봉에서 살아 있는 돼지 한 마리를 떨어트려 보았더니 창자가 모두 튀어나와 돼지의 제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머리에만 상처를 입고 온 몸이 온전한 채로 발견되었었다. 박정희에 의해서 살해당했던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