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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0 (화) 윤석열 취임 첫 만찬… 신라호텔, '긴장감' 팽배
"저희도 전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신라호텔 관계자)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첫 공식 행사인 '내·외빈 초청 만찬'이 열리는 신라호텔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번 만찬에 대해 신라호텔 관계자는 9일 "(만찬에 대해선) 전혀 해줄 말이 없다"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대통령 취임 공식 만찬이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옮기고, 취임식 당일인 5월 10일부터 청와대가 완전 개방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자연스럽게 대통령 취임 만찬도 청와대가 아닌 신라호텔 영빈관으로 낙점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인 1978년, 청와대에 별도 영빈관이 건립된 이후 청와대가 아닌 민간 호텔에서 대통령 취임식 만찬이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만찬 준비에 공을 들이며 준비 상황을 직접 진두지휘 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 9일 오후 3시께 기자가 방문한 신라호텔 영빈관 주변은 평소와 달리 경찰차는 물론 경찰 사이드카가 연속으로 주차해 있었고, 대통령 경호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목격됐다. 신라호텔 로비에는 '대통령 취임식 안내 데스크'라고 적힌 영문 표지판도 등장했다.
영빈관 정문은 큰 병풍을 둘러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했다. 그러나 병풍 안 내부는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영빈관과 별도로 신라호텔 본관 2층 대연회장(다이너스티홀)에는 국군 군악대의 연주 연습이 한창이었다.특히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왕치산 중국 국가 부주석이 취임식을 앞두고 신라호텔에 도착하며, 신라호텔에는 중국 오성홍기가 게양돼 취임 만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왕치산 부주석은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중국 귀빈 중 최고위급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중국 측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중 양국 관계 개선 의지가 높다는 점을 방증한다. 윤석열 당선인의 취임 만찬주로는 국산 농산물로 만든 우리술 6종이 선정됐다. 이 6종의 술은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전라, 제주 등 전국적으로 꼼꼼히 지역 안배를 했다. 이날 만찬에는 충북 영동군 와이너리에서 만든 '샤토미소 로제스위트' 와인은 물론 ▲경기 양주 '벌꿀 허니문' 와인 ▲제주산 청주 '니모메' ▲전북 무주산 '붉은진주 머루' 와인 ▲강원 홍천산 '너브내 스파클링 애플 라이트' ▲경남 사천 '3004' 참다래 와인 등 6종이 사용될 예정이다.
이번 취임 만찬에는 5대 그룹 총수(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와 주요 경제단체장(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들도 함께 한다.
일각에선 '호화 취임 만찬'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 측은 "이번 (호텔신라) 만찬이 기존 청와대 영빈관 이용 때보다 단 50만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며 이를 일축했다. 호텔 업계에선 이번 대통령 취임 만찬을 계기로 신라호텔 위상이 더 높아질 것으로 봤다. 호텔업계 한 관계자는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호텔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어 홍보 효과가 엄청나다"고 전했다.
마지막 퇴근길 나선 문재인… "성공한 전임 대통령 되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날인 5월 9일 "오늘 저는 근무가 끝난 저녁 6시에 정시 퇴근했다"며 "대통령으로 일하는 동안 첫 퇴근인 동시에 마지막 퇴근이 됐다. 하루 근무를 마치는 퇴근이 아니라 5년 근무를 마치는 퇴근인데 마지막 퇴근을 하고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아 홀가분하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 인근 사랑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환송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에게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저의 퇴근을 축하해주니 정말 행복하다. 앞으로 제 아내와 전임 대통령으로서 정말 보기 좋게 잘 살아보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분들 덕분에 무사히 임기를 마칠수 있었다. 여러분들 덕분에 임기중 여러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잘 극복하고 위기속 더 도약했다"며 "선진국이 됐고 선도국가 반열에 올랐다. 전적으로 우리 국민들 덕분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위기를 함께 넘을 수 있게 해주신 우리 국민들게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 드린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특히 "오늘로서 청와대 대통령 시대가 끝난다"며 효자동과 청운동 등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있는 이곳 인근에선 교통통제와 집회, 시위 등 소음 때문에 불편이 많았을 것"이라며 "역대 대통령을 대표해서 인근 지역 주민들게 감사 드린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감사 인사 말미에 시민들에게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까?"라고 물은뒤 "성공한 전임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러분 덕분에 행복했다. 사랑한다"며 마지막 퇴근길 인사를 마쳤다.
'이재명 대항마' 김부선 차출설… 이준석, "공천 희화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5월 8일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공식 출마한다고 밝히자, 국민의힘 측에선 이에 맞설 인물로 윤희숙 전 의원과 김부선 배우를 저울질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김부선 차출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이재명 상임고문은 이날 인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국민의힘 내부에서 ‘이재명 저격수’로 꼽히는 김부선씨를 계양을에 공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이준석 대표는 같은 날 페이스북에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김부선씨 공천을 검토한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이재명 후보의 명분 없는 출마 못지 않은 공천의 희화화”라고 일갈했다. 이어 “김부선씨는 본인의 출마에 대해 당에 공식적인 경로로 문의하거나 소통한 바가 없으므로 김부선씨에게도 실례되는 일”이라며 “당 관계자들이 이런 흥미 위주의 이야기들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준석 대표는 또 다른 글에서 “이번 보궐선거를 앞두고 저는 한 가지 원칙을 세우겠다. 계양을에서 도전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더라도 1년 10개월 뒤에 치뤄지는 22대 총선에서도 뛸 때 동일 지역구에 출마하는 것을 확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준석 대표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공천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계양주민에 대한 국민의힘의 도리”라며 “저는 1년 10개월 뒤(제22대 총선)에도 계양구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 이름으로 공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준석 대표는 “수도권에서 왜 국민의힘의 의석이 계속 선거 때마다 줄어 들었는지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면서 “우선 첫째로 수도권 정서와 전혀 맞지 않는 정치적 행위를 지속해왔기 때문이고, 둘째로 어려운 지역에 아무도 도전해서 노력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준석 대표는 “인천 계양을 선거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것은 상대 후보가 송영길이라는 중량급 정치인이었던 것도 있지만, 꾸준히 도전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지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힘줘 말했다. 이른바 ‘이재명 대항마’로 국민의힘에선 윤희숙 전 의원이 계양을에 출마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날 뉴시스에 따르면 윤희숙 전 의원은 “지난주에 당이 부르시면 따르겠다고 얘기를 이미 했다. 이미 제 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냥 (공천 과정을) 보고 있다”라고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강대강' 치닫는 청문회… 尹측 임명 강행 조짐
5울 9일 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여야 공방이 최고조에 달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이 정호영 보건복지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고발 조치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의 인사청문 보고서 재송부 요청에 맞서 민주당이 초강수를 던진 셈이다. 정부 출범을 하루 앞두고 18개 중 5개 부처 장관 후보자만 보고서 채택 절차를 통과하면서 '내각 검증'를 둘러싼 난타전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민주당이 이날 정호영, 원희룡 후보자에 대한 법적 조치를 단행하면서 청문 정국이 고발전으로 확전됐다. 윤석열 당선인이 이날까지 인사청문 보고서 송부를 요청한 점을 고려하면, 민주당에서 '협조할 수 없다'고 답한 셈이다. 신현영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정호영 후보자를 자녀의 의대 편입 특혜, 병역 비리, 위장전입, 농지법 위반, 임대사업 미신고, 국유재산 위반, 업무상 배임,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 등으로 빠른 시간 안에 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업무추진비 현금지급 관련 공직선거법 위반, 허위 기재 관련 김영란법 위반, 비영리 사단법인 불법 기부행위 관련 정치자금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 예정"이라고 했다. 국토위 민주당 간사 조응천 의원은 "윤석열 당선인이 지난 5월 4일 원희룡 후보자 인사청문 보고서 송부를 오늘까지 요청했다"면서 "하지만 민주당 국토위원들은 후보자 보고서 채택이 절대 불가함을 말씀드린다"고 못 박았다. 민주당은 윤석열 당선인 측의 재송부 요청을 '대국민 선전포고'라고 보고 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비대위 회의에서 윤석열 당선인 측의 재송부 요청에 대해 "문제 투성이 인사들을 취임도 전에 임명 강행하겠다는 것은 공정과 상식을 바라는 국민들과 맞서겠다는 선전포고"라며 "인사권자 대통령의 독선과 전횡을 막을 방도는 없다. (다만) 명백한 불법 혐의의 후보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윤석열 당선인 측은 이날까지 정호영, 원희룡 후보자를 비롯해 이상민 행정안전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박진 외교부장관, 이종섭 국방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보고서를 재송부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날 여야 합의로 인사청문 보고서가 채택된 건 이종섭 국방부장관 후보자 뿐이다.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준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민주당은 총리 임명 동의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가 소집되면 의원총회를 열어 적격 여부를 최종 판단할 계획이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윤석열 당선인 측이 문제 없는 총리 후보자를 자신 있게 추천했다고 생각한다면 대통령 취임 후 국회에 임명 동의를 구하면 될 일"이라며 향후 의총을 통해 입장을 확정하겠다고 했다.
특히 청문보고서가 채택된 장관 후보자가 5명에 그치면서 정권 출범 후에도 '청문회 난타전'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날까지 한화진(환경부), 추경호(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이종호(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이정식(고용노동부), 이종섭(국방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서만 인사청문 경과보고서가 채택됐다. 민주당이 '부적격' 후보자들에 대한 지명 철회를 거듭 압박하는 반면 국민의힘에서는 '발목 잡기'라고 비판하고 있다. 공수를 교대한 양당이 정권 초 주도권 잡기에 열을 올리면서 강대강 대치도 길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독재 맞선 '저항시인' 김지하 별세
"삶과 세계는 이제 나에게 쓸쓸하고 외로운, 그러나 빛으로 환한, 그동안 닫혔던 문을 열어주고 있다. 나는 이 문으로 들어가 대립과 투쟁을 넘어선 평화와 상생과 화해와 큰 창조의 사상 및 논리를 거리낌 없이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지하 회고록/학고재, 2003)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 등 독재 정권 시절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활동하며 고통과 수난의 세월을 겪은 김지하(81·이하 존칭 생략) 시인이 5월 8일 별세했다. 전남 목포 출생인 고인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목포 문학'에 '저녁 이야기'라는 시를 낸 후,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비' 등의 시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등단했다. 아홉 살 때 한국전쟁을 맞은 그의 본명은 영일(永一)이다. 지하(芝河)는 지하(地下)에서 따온 필명으로 알려졌다.
그의 회고록에서도 엿볼 수 있듯 김지하는 진보와 보수, 저마다의 사상과 이념으로 극단적으로 갈린 한국 사회에 화해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던졌다. 그러다 보니 이념 논쟁에도 곧 잘 휘말렸다. 특히 고인이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 내용은 진보 진영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글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소름 끼치는 의사 굿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말했다. 당시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자 이에 분노하는 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고인은 생명 사상을 강조하면서 목숨을 버리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외면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1960년대 독재 정권을 향해 펜을 들어 저항했던 시인이 변절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 칼럼으로 고인은 결국 보수와 진보 모든 진영에서 비판받는 일종의 논쟁적 인물로 굳어졌다.
◆ 진보·보수 모두에 쓴소리… 그는 타고난 반골일까
반골(反骨)이란, 뼈가 거꾸로 된 것을 말한다. 결국 어떤 명령이나 권위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기질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지하 본인은 스스로 자신은 반골 기질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2009년 5월29일 전북일보에 기고한 칼럼 일부를 보자. 그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반골은 아니다. 타고난 기질은 도리어 매우 유순하고 착했다. 오죽하면 어릴 적 별명이 '울냄이', '찔찔이','징게맹게', '순둥이' 따위였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시절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내가 머저리에서 저 유명한 반골 김지하로 변한 것은 대학생 때다. 대학생 때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있었고 숨어 다니던 내가 피신처에서 들은 피투성이 소식 때문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실제 그는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고 이듬해 4·19 혁명에 참여한다. 이어 민주화 운동에 전면으로 나선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서울대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등에서 활동했다. 반골 기질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적 물줄기가 휘몰아치는 큰 사건 고비마다 쓴 소리를 내뱉던 김지하는 필화사건에 연루, 고초를 겪는다. 언론과 문인 통제를 강화하던 1960년대 '이영희필화사건', '분지필화사건' 등 여러 필화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다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던 김지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이른바 '오적(五賊)'이라 지칭하며, 그 치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을 1970년 5월 '사상계'를 통해서 발표했다. 김지하를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 1970년대 대표적인 필화사건인 '오적필화사건(五賊筆禍事件)'의 시작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문헌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오적'의 유포를 막을 요량으로 '사상계'의 시판을 중단했다. 당장 6월 2일 새벽 1시 50분께 중앙정보부와 종로경찰서 요원들에 의해 '민주전선'10만여 부가 압수됐다. 이어 6월 20일 김지하와 함께 '사상계' 부완혁 대표, 김승균 편집장, '민주전선' 김용성 출판국장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시 '오적'이 "계급의식을 조성하고 북한의 선전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이유로 유죄를 구형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시인 김지하는 피고인으로 재판에 넘겨진다.
김지하는 법정에서 "담시 '오적' 은 일부 몰지각한 부정 부패자와 이의 단속에 나선 경찰 비위에 대한 권선징악을 판소리 형식으로 풍자한 것이며 계급의식을 고취시킬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1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과 사회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꼬집은 시인과 이 시를 활용하는 야당을 박정희 정부는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 김지하는 법정에서 재판부와 자신을 기소한 검찰을 향해 단 몇마디로 자신을 변호한다. 당시 김지하를 변호한 '1세대 인권변호사' 고(故) 한승헌 변호사가 한겨레에 2009년 1월29일 쓴 칼럼을 보면 김 시인은 훗날, 그 재판을 회고하는 글에서 "재판이 열리고 변호인 반대신문이 진행되자, 선생(변호인인 필자)의 그 간결하고 세련된 유명한 꼭지따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김지하는 일종의 즉문즉설 형식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변호인이 "피고인은 공산주의자입니까? 라고 묻자 "아닙니다" 라고 답한다. 이어 변호인이 "그럼, 왜 이런 재판을 받게 됐습니까?라고 재차 묻자 그는 "나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를 두고 한 변호사는 "강타였다. 사건의 실체를 한두 마디 물음으로 요약해 간단히 드러내버리는 거였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혹했던 시절은 결국 시 '오적'을 실었던 월간 '사상계'를 뒤흔들었다. 사상계는 1970년 9월29일자로 등록을 취소당했으며, 취소 이유는 자체 인쇄소를 지니지 못한 출판사의 경우 인쇄 계약을 체결한 인쇄소 책임자를 잡지의 인쇄인으로 등록하라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상계는 정부를 등록취소처분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1971년 10월26일 서울고법 특별부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김지하의 주장이다. 그의 생각과 철학이다. 김 시인은 자신의 시를 어떤 사회적 혁명을 선동하는 거대 담론으로 말하지 않고, 일종의 해학과 풍자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 철학은 훗날 40여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이어진다. 일각에서 변절이라 손가락질을 했지만, 애초에 자신의 철학은 그대로 흔들리지 않고 이어진 셈이다.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십수년이 흘러 민주화 정부가 들어서고 김지하의 오적도 잊혀갈 즈음 과거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민청학련)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수감돼 사형선고까지 받은 김지하는 2013년 1월4일 무죄를 선고 받으면서 또 한번 오적을 꺼내들었다. 김지하는 당시 열린 공판 진술에서 자신의 시는 오로지 풍자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부패된 자들을 고발했던 것"이라며 "우리나라 시의 가장 큰 영역은 '풍자'"라고 말했다. 또한 시를 통해 사회를 고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시인이므로 시를 통해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며 "싸이의 '젠틀맨'이나 '강남스타일'도 모두 풍자인데 법으로 제한하면 르네상스를 어떻게 구현하고 창조경제를 일으키겠느냐"고 역설했다.
김씨의 변호인도 "오적 시는 국가의 부정부패를 풍자한 시"라며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한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또 김씨는 "체포돼서 고문이 있었냐'는 변호인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면서 재심 개시 사유도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수 개의 범죄사실을 유죄로 인정해 하나의 형을 선고한 판결에서, 그 중 일부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재심청구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인정된 경우에는 판결 전부에 관해 재심개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재심사유가 없는 범죄사실을 재심사유가 있는 범죄사실과 함께 하나의 형을 선고했다는 우연한 사정으로 오적필화사건을 다시 심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김지하의 '오적'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말았다.
재판 직후 그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오적에 대해 "내가 오적을 쓸 때도 사업가들이 뇌물 주는 건 욕하지 않았어. 하지만 국고금 빼먹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한다고 했어. 내 신념이야, 아니 민중의 신념이야. 장사꾼이 뇌물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데 국고금이라는 건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거기에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집권한 자들이) 돈을 쳐먹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부하는 목포 광주 한(恨)의 천재들이? 망월동 피값 받은 외에 또 받아?"라고 다시 한번 정부를 비판했다. 그의 비판 대상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오로지, 정치권과 고위 관료 비리에 대한 비판적 견해만 있을 뿐이었다. 독재 정권 시절에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으며 비판한 오적이 민주화 정부에도 그대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그의 불호령에 당시 많은 시민들이 공감했다.
◆ 중도 노선 지향한 김지하… 朴 지지 선언 사과도, 이후 촛불집회 긍정적 평가
그런 김지하는 정치적으로는 중도 노선을 걸으며 화해, 통일, 환경, 교육 등 사회 현안에 집중했다. 지난 2006년 11월 9일 그는 '화해상생마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90년대 '저주의 굿판' 칼럼을 끝으로 사실상 시국발언을 자제하던 김지하가 이제는 환경과 생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치권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중도라는 관점에서 볼 수는 있겠지요. 박정희시대는 경제개발을 했지만 독재정치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고, 민주화세력은 자기희생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때로는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사쿠라, 변절자, 배신자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2008년 5월 촛불집회 당시 시집 (이룸)을 들고 나와 "조직도 지도자도 없이 질서를 유지하며 집단 이성 합의에 의해 비폭력으로 유지된 촛불은 우주적 사건" 이라고 평가했다. '못난 시들'은 촛불집회에 관한 시들로, 허례허식을 벗어던진 진솔한 형식으로 구성, 어렵지 않고 좀 쉽게 시를 쓰라는 아들의 충고을 받아들인 시집의 형태였다. 훗날 그는 2012년 대선에선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해 또 다시 '변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2016년에 쓴 '바보1'에선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최순실이를 몰랐고/ 그 애비/ 최태민이를 몰랐다./ 그렇다./ 바보만이 그럴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 촛불집회 ·미투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전해 주목받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에는 비판적인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이후 2018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김지하는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편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해오다 5월 8일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씨와 결혼한 고인은 유족으로는 아들 김원보(작가)·김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화관 관장)씨 등이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시집으로는 '남(南)'(1984), '살림'(1987) , '애린 1'(1987), '검은 산 하얀 방'(1987),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나의 어머니'(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화개'(2002), '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 (2012), '흰 그늘'(2018)등이 있다. 1975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2002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제10회 대산문학상, 제17회 만해문학상, 2003년 제11회 공초문학상, 2005년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2011년 제2회 민세상 등을 수상했다. 1993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2006년 제주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명지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국대학교, 원광대학교에서 석좌교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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