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욥기 22장 1절 – 30절) 22: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12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13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15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16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19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20 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 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24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9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30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그가 행한 죄악의 결과라는 편협한 인과응보 논리로 정죄하는 것에 대해서, 욥이 그렇다면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21:7)고 반론한 것에, 엘리바스는 욥을 친구들의 말을 거부하는 불신앙적인 사람으로 정죄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3차 변론(22-31장)이 시작되는 내용입니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원인모를 고난에 대해서 탄식한 것을(3장), 친구들이 모든 고난은 죄악의 결과라는 도식적인 인과응보 논리에 욥의 상황을 억지로 꿰어 맞추어 회개를 촉구한 것이 1차 변론이었습니다(4-14장). 욥이 이에 반박하자, 친구들은 그러한 욥에게 분노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욥을 범죄자로 규탄하고 저주하며 정죄하게 된 것이 2차 변론이었습니다(15-21장). 3차 변론에는 소발이 빠지고 엘리바스와 빌닷이 욥이 행하지 않은 특정한 죄악을 욥의 죄악으로 정죄하는 변론을 하자, 이에 대한 욥의 자기 변론(26-31장)이 길게 나옵니다. 욥의 고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로 공의로운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선과 악이 혼재함으로 인해 존재하는 현세의 불의하고 모순된 상황에서 자신이 겪는 극심한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도식적인 인과응보 논리로만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의 현실을 다 규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극히 편협한 신앙 논리에 갇힐 때, 고난 가운데 힘들어하는 이들을 어떻게 더 고통스럽게 철저히 괴롭힐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욥기서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때로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는 이유이면서도, 의외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핍박과 박해로 여기며, 자신의 편협한 신앙 논리를 옹호하기에만 급급해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1. 엘리바스는 욥의 죄를 어떻게 단정합니까? 편협한 신앙적인 인과응보의 논리로 고통 받는 욥을 위로하기보다 정죄만을 일삼는 친구들에게, 욥은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21:7-9,새번역)라며, 친구들이 주장하는 인과응보의 논리와 달리, 악인들의 심판을 보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습니다. 이에 대해 다시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22:1)라는 반박으로, 욥과 친구들 간의 3차 변론이 시작됩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22:2) 곧 “하느님께서 장사의 힘을 빌려야 하겠다는 말인가? 슬기로운 사람의 덕이라도 입으셔야겠다는 말인가?”(공동번역)라며, 욥의 안타까운 호소에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로서 하나님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이심을 주장합니다. 인간과 초월적인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강조하는 증언이면서도, 하나님은 또한 인간들의 삶 속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몰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편파적인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협하고 편파적인 신앙 논리는 결국 극단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되는데, “엘리바스”는 욥에게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22:3)라는 반박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의로운” 또 “행위가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야 할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지, 인간의 공로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며 또한 공의와 사랑이라는 양면적 속성을 함께 가지신 분인데, 초월적인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대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엘리바스”의 주장이 한편에는 옳지만, 그가 욥에 대한 자기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양면적 속성 중에 한편만을 강조하며 욥을 모함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에게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22:4) 곧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판하시겠느냐?”(새번역)라고 반문하면서,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22:5)는 정죄로, 욥의 고난이 죄악의 결과임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고통 받는 욥이 힘들게 말하는 탄식이 말하고자 한 것에 대해서, 친구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주장만을 일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고 경고합니다. 결국 “엘리바스”는 욥을 죄인으로 정죄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부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목들을 나열하지만, 억측일 뿐 욥과는 관계없는 죄악이었습니다. 첫째로, 번영과 권세를 누리는 자들이 흔히 행하는 전형적인 범죄로서,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22:6)라며, 욥을 불순종적인 신앙과 불건전한 도덕적 가치를 행한 자로 정죄합니다. 둘째로,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22:7)라며,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25:21)는 성경의 정신을 위배한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셋째로,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22:8) 곧 “너는 권세를 이용하여 땅을 차지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이 땅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살았다.”(새번역)라며,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넷째로,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22:9)라며, 욥을 “과부”와 “고아”를 각별한 보호대상으로 돌볼 것을 당부한 하나님의 당부(출22:22-24)를 거부한 부도덕한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앙적 논리를 거부하는 욥에게 그가 짓지도 않은 죄목을 나열하며, 이러한 행악으로 인하여 욥이 지금 고난을 당해 멸망해가는 중이라고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함으로써,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출20:16)고 경고하신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2. 욥을 향한 인과응보의 정죄는 무엇입니까? “엘리바스”는 자신들의 권면을 반박하는 욥에 대한 감정적인 대처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편협한 신앙 지식의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급기야 욥을 모함하기에 이릅니다. 인과응보의 논리가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욥의 고난을 단지 인과응보 논리로만 규정해서 짓지도 않은 죄목을 나열하며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22:10-11)며, 욥을 정죄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빌닷이 욥을 정죄한 내용이기도 합니다(18:8-11).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22:12) 곧 “저 공중에 높이 떠 있는 별들까지도,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지 않느냐?”(새번역)라며, 하나님의 초월성과 주권적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이 이와 달리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22:13-14) 곧 “너는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겠으며, 검은 구름 속에 숨어 계시면서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짙은 구름에 그가 둘러싸여 어떻게 보실 수 있겠느냐? 다만 하늘에서만 왔다 갔다 하실 뿐이겠지!’ 하는구나.”(새번역)라며,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주권적 능력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인과응보 논리로만 인간의 삶을 해석할 수 없음을, 욥이 악인들의 형통 사례를 들어서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21:17,새번역)라고 했던 반론을,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무례함을 저질렀다고 본 것 같습니다.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사회적 죄악을 욥이 저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적인 불신앙의 태도 때문이라고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비난이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재앙을 당한 것을, 그가 남모르게 지은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의 결과라고 고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무죄를 주장하는 욥을 위선의 껍질을 쓴 거짓 신앙인으로 보았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들을 어떻게 철저하게 정죄하게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엘리바스”는 욥에 대한 정죄를 통해서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22:15) 곧 “너는 아직도 옛 길을 고집할 셈이냐? 악한 자들이 걷던 그 길을 고집할 셈이냐?”(새번역)라며, 욥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욥의 재앙을 그의 죄악의 결과로만 보는 “엘리바스” 입장에서는, 어쩌면 회개를 촉구하는 자신들의 권면을 거부하며 계속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깝게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욥 역시도 자기가 겪는 재앙을 자신의 죄악의 결과로만 몰아치는 친구들의 정죄가 고통스럽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비록 “엘리바스”가 욥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말일지 몰라도,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되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의외로 교회 안에서 무식하고 순진한 신앙인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해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경우를 많이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입을 다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자신이 가진 편협한 신앙 지식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입장이라고는 전혀 배려할 줄 모르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수차례에 걸친 욥의 간절한 호소에는 귀를 닫은 채, 욥을 아예 “악인”(22:15)으로 규정하여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22:16)며, 욥이 당한 재앙을 욥의 죄악 때문이라는 정죄를 이어갑니다. 또한 욥을 “악인”과 “경건하지 못한 자”(20:5)로 규정했던 소발처럼, “엘리바스”는 욥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22:17)며, 하나님을 향해 모독적인 발언을 일삼는다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반론으로, 하나님께서 악인들도 형통케 하셨지만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21:14-16)라며 악인들의 불신앙을 안타까워했던 욥의 말을 인용하여, “엘리바스”는 놀랍게도 그 악인이 바로 욥이라고 정죄합니다. 3. 회개의 촉구와 회복을 어떻게 권면합니까? 욥은 고통 받는 자신을 친구들이 편협한 신앙적 시각으로 “웃음거리”와 “조롱거리”(12:4)로 삼아 “조롱하는 자”(17:2)가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22:19-20)며, 경건한 자처럼 행세하며 은밀히 악행을 저지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욥이 조롱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비웃습니다. 안타깝게도 “엘리바스”와 친구들은 이 땅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죄악의 결과로만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악인에 대한 의인의 궁극적 승리가 맞는 말이면서도, 오직 욥을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옳지 않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편협한 신앙적 논리만을 앞세워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2:21)며, 욥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의 주장이 지극히 옳은 말이지만, 욥의 상황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엘리바스”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대언자나 된 것처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22) 곧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주시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을 네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라.”(새번역)고 권면합니다. “엘리바스”가 한 말이 지극히 옳은 것이면서도, 지금 “엘리바스”는 자신과 친구들이 한 말을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주시는 교훈”으로 주장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이,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저지르는 오류와 죄악일 때가 의외로 많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지 조차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욥이 어떤 배경에서 고난을 받게 되었는지(1-2장)를 알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도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처럼 행세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어떻게 회개를 촉구합니까? 첫째로는 욥에게 자신들의 말에 순종할 것을,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22)고 촉구합니다. 둘째로는 욥에게 친구들도 모르게 저질렀던 모든 죄악에서 돌이킬 것을,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22:23) 곧 “전능하신 분에게로 겸손하게 돌아가면, 너는 다시 회복될 것이다. 온갖 불의한 것을 네 집 안에서 내버려라.”(새번역)고 촉구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처음부터 하나님께 징계 받아야 할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아무도 욥의 변론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셋째로는 욥이 부자였다는 이유 하나로 물질적 탐욕을 가진 인물로 정죄하여,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곧 “황금도 티끌 위에다가 내버리고, 오빌의 정금도 계곡의 돌바닥 위에 내던져라.”(새번역)고 촉구합니다. “오빌”은 고대에 최대의 금이 나오는 산지로 표현되던 장소로서,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 “엘리바스”는 이처럼 욥이 물질적 탐욕을 버릴 때,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22:25-26)며, 오직 하나님만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선언합니다. 욥이 왜 고난을 받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고 칭찬하자,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9,11)라며, 욥에 대한 불신을 제기한 것에 대한 시험 때문 아니었습니까? 따라서 욥은 3차 변론을 마칠 때 친구들에게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31:24-28)고 항변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회개하면 얻게 될 축복이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첫째는 기도 응답의 축복으로,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22:27) 곧 “네가 그분에게 기도를 드리면 들어주실 것이며, 너는 서원한 것을 다 이룰 것이다.”(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욥이 자신의 고통을 제거해주기를 구했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는 것을 답답해하는 것에 대해서, 회개만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리라는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둘째는 만사형통의 축복으로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22:28) 곧 “하는 일마다 다 잘 되고, 빛이 네가 걷는 길을 비추어 줄 것이다.”(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욥이 계속되는 재앙의 고통을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19:8)라고 호소한 것에 대해, 회개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셋째는 겸손한 자에 대한 구원의 축복으로,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22:29) 곧 “사람들이 쓰러지거든, 너는 그것이 교만 때문이라고 일러주어라.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회개하지 않는 욥의 “교만”을 지적한 것으로서, 재앙과 고통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겸손히 회개할 것에 대한 촉구였습니다. 넷째는 죄악에서의 구원의 축복으로,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22:30)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욥이 경건한 척하며 친구들도 모르게 저지르던 온갖 악행에서 손을 떼고 회개할 것에 대한 촉구였습니다. “엘리바스”가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극악한 죄인이었던 욥의 회개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통해서 다른 죄인들이 욥과 같이 회개함으로써 구원받는 계기가 될 것에 대한 회개의 효과와 영향력에 대한 표현으로서, 결국은 회개에 대한 강력한 촉구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엘리바스”가 욥에게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22:2)라고 한 질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소발이 하나님께서 선한 자는 축복하시고 악한 자는 징벌하신다는 단편적인 인과응보 논리에 대해, 욥이 반박하면서 하나님께서 악인의 형통은 그대로 놔두면서 무죄한 자를 심판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질타였습니다. 욥이 얼마나 선하게 살았느냐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일하실 뿐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엘리바스”의 주장대로 인간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인간의 악행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나님의 공의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인간의 불의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공의의 하나님인 것만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엘리바스”는 간과했습니다. 자신의 편협한 신앙 논리인 인과응보 논리만을 절대화하여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다보니, 일어난 모순이자 불신앙의 정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람들의 겉모습과 상황만을 가지고 함부로 정죄하지 말 것을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고 일깨웁니다. “엘리바스”는 구원과 축복이 단지 인간의 회개와 돌이킴의 행위에만 있는 것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사랑을 간과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단지 현세적인 번영으로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을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4-45)며, 정죄가 우선하기보다 애정 어린 사랑의 관심을 우선할 것을 우리에게 당부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라는 말씀처럼, 우리 인간의 단편적인 지식과 경험과 생각과 판단으로 세상의 현상과 현실을 규정하고 단정 짓기보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 안에서 우리 신앙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펼쳐가는 보다 온전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