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307.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취사선택의 도사들. 등 )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취사선택의 도사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따라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하는 것을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이렇게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유행을 따르는 것이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망치는 길입니다.
그리고 나쁜 친구가 아니더라도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에 인생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작정 따라쟁이가 아니라 오늘 주님 말씀대로
따라야 할 것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이 있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에 단순한 요한이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따라쟁이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한숨 소리에 자기의 한숨 소리를 맞추었고,
프란치스코가 눈물을 흘리면 덩달아 눈물을 흘렸으며,
프란치스코가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면 자기 손도 치켜들었고,
프란치스코를 본뜨려고 무엇이든 프란치스코를 따라 하였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요한처럼 우선 따를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제1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고,
그다음은 예수님을 잘 따른 성인들이며
하느님께로 그리고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할 사람을 선택해야겠지요.
그런데 따를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성인들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눈높이를 낮춘 상태에서 취사선택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수없이 선을 보고 다 퇴짜를 놓는 사람처럼
너무 눈만 높고 까탈스러워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대로 누구의 말과 행위에 있어서
따라야 할 것은 따르고, 말아야 할 것은 아니 따르면 되는데
실은 그것이 바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인이 있으면 성인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요,
성인이 없어도 누군가의 좋은 점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나쁜 점을 따라 하지 않는 것도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가르치는 것은 그대로 하되
그들의 행실만은 따라 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외엔 인간 그 누구도 아버지로 여기지 말고,
주님 외엔 아무도 스승으로 여기지 말 것이며,
인간의 말과 행위 중에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면 따르고,
부합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식별할 주체적인 눈을 가져야겠지만
그렇다고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교만스레 다 퇴짜를 놓음으로써
아무에게서 아무런 가르침도 받지 못하는
그런 배움의 빈털터리, 따름의 빈털터리가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다만 취사선택의 도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각 사람의 장단점 중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잘잘못 중에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취사선택의 도사 말입니다.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옛말에 권력의 끝자락에서 ‘동문 밖에서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을!’하고 후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결국은 후회하고 맙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권력과 권위는 분명 다릅니다. 권력을 가졌어도 권위는 살 수 없고, 권력의 힘은 없으나 권위를 가져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떤 젊은이 자기의 전생을 알고 싶어서 유명한 최면술사를 찾아갔답니다. 최면술사는 최면을 걸고 '자. 지금 무엇이 보이나요?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젊은이가 '네. 사람들이 보입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요?' 최면 술사가 물었습니다. 다시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네, 모두 저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쁜 여자가 제 앞에서 춤을 춥니다.' 최면술사가 말했습니다. 네, 됐습니다. 눈을 뜨세요! 하나, 들 , 셋.
최면에서 깨어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전생에는 왕이었나 봅니다.' 그러자 최면술사가 대답했습니다. ' 아닙니다. 당신은 왕이 아니라 돼지 대가리였습니다.'@@@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가 되면 요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한다. 강론을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어른들에게 공손해야 한다. 미사를 성심껏 봉헌해야 한다. 재정에 투명해야 한다. 수도자들에게 잘 해야 한다. 이렇게 요구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은 그런 요구사항을 채우지 못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오솔길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읽고 마음에 새기라는 뜻입니다. 사제에게 요구되는 것들 중에 연습해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판단력’입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교우들은 사제의 의견을 묻곤 합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사제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세상의 일이 무를 쪼개듯이 확실하면 좋은데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덧셈과 뺄셈처럼 딱 떨어지면 좋은데 미분과 적분처럼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관계의 문제는 수학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는 이익과 손해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념과 사상의 문제처럼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방식이기에 죽거나 살거나 입니다. 그곳에는 이해와 화합이 자리 잡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의견을 물었던 때가 몇 번 있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를 천마산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비가 더 내릴 것 같으니 안전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지금의 자리에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자고 했습니다. 시흥 5동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뒷산의 토사가 밀려와 아파트의 옹벽이 무너졌습니다. 서울시장이 방문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뒷산의 높이를 깎아 내자고 했습니다. 시장도, 구청장도 저의 의견을 존중했고 뒷산이 9m 정도 낮아졌습니다. 덕분에 성당에 마당이 생겼습니다. 사목위원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돈이 들더라도 마당을 좀 더 넓히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도의 마당도 거져 생겼으니 이쯤에서 만족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본당신부인 저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책임을 지더라도 조금 더 마당을 넓히자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입니다. 왕은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명분을 택한 신하들은 끝까지 항쟁하자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겨울이 깊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왕도 신하들도 궁색하였습니다. 실리를 택한 신하들은 쿨하게 청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은 궁궐로 돌아갈 수 있고, 전쟁도 끝나니 백성들도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왕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역사는 왕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도 명분과 실리에 때문에 의견이 둘로 나뉘었던 일을 보았습니다. 명분을 택하면 조금의 손해를 감수 할 수 있었습니다. 실리를 택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이전에 감정이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 이전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골이 채워지면, 오해가 풀리면 명분도, 실리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랑과 겸손이 만나면 명분과 실리는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이를 키운 적이 없어서 그 힘듦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음을 막연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데도 나름 최고의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큰 존경심을 품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더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부모의 자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선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리고 밝고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서 만났던 한 어린아이가 생각납니다. 부모와 함께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정신없이 뛰놀았고 또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잘 놀고 있으니 그동안 성물방에 잠시 다녀온 것입니다. 저와 이야기하며 놀고 있다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엄마 아빠를 찾는 것이었지요. 어느 순간 말이 사라지고 대신 눈물을 터뜨립니다. 잘 놀던 아이가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엄마 아빠가 없다는 생각에,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사라졌고 신나게 뛰어놀던 열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고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러 슈퍼마켓에 가시지도 않고, 성물 구입을 위해 성물방에도 안 가십니다.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또 열정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또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계속 조잘거리며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야지만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했을까요? 혹시 말만 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말만 하는 기도를 통해서는 아무런 감응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좋은 모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정작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자신의 열심만 과시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말’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자신감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진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섬김, 경청, 회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23,11)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봉사보다는 저는 섬김이라는 순수한 우리 말을 더 좋아합니다. 복음의 핵심적 요소가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뿐일 것입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바로 이미 고인이 된 이 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의 사목 표어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진정한 리더십도 섬김의 리더십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의 사람, 성 베네딕도도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성규머리45-46)
학원보다는 역시 저는 우리말 배움터를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바로 마산에 있는 여자 트라피스트회 수녀원 정문 기둥에 쓰여 있는 글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평생학인 수도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영어가 서비스(service)요, 섬김의 직무는 바로 서비스업임을 깨닫습니다.
서비스업하면 지금도 생생한 30년전 1인6역에 분원장직 소임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1990년대 중반에 제 나이도 40대 중반이었고 사제는 저 혼자였습니다. 1년 365일 혼자 미사와 강론, 신학교 강의, 면담성사, 손님접대, 전화받기, 주방책임, 분원장직, 참 분주했던 때였습니다.
당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전천후全天候로 뛰었고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결연한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종전불퇴의 충일한 정신으로 살 때 였습니다. 수도원 생존의 문제가 참 절박한 때였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자작 좌우명시도 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밤중 피정 신청 전화에 잠결에 퉁명스레 전화를 받았고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지체없이 사과하여 간신히 수습했습니다. 바로 이때의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입니다.
“아, 나는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이라면 첫째, 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 편안해야 하겠구나. 음식점이나 병원, 학교를 보면 금방 들어나듯 주님의 서비스업인 교회나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다. 과연 주님의 서비스업 수도원에 속한 나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며, 영적 실력이 탁월하며, 수도원의 내외적 환경은 좋은가 자주 성찰해 봐야 하겠다.”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인성, 영성, 환경을 일컬어 주님의 서비스업 3대요소라 칭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결론같은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충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결론하여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바로 겸손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다투어 순종하라는 사부 베네딕도의 말씀이 있는데 참으로 다투어 섬기는, 다투어 겸손한 공동체라면, 참 멋진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참 좋은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경청과 회개의 삶이 그 답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강조되는 바 경청과 회개로 사순시기를 맞이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개인의 내적회개로는 부족하고 적극적 사회참여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에 충실함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경청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가 회개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과 순종의 사랑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회개란 하느님 안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옴을 뜻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대상이 허영과 외적 삶에 치우친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바 당대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모든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모셔선 안된다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바로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며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우리 삶의 중심은, 우리 공동체의 중심은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참 선생님인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충실함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새삼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주님의 선언이 참 눈물나도록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론적으로 절대 평등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우상들을 배격, 배제하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겸손한 존재로, 우뚝한 존재로, 의연하고 당당하게 위축되지 말고 참자유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경청과 회개, 섬김의 겸손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경청과 회개, 섬김의 삶에 더욱 정진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 아멘.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덕목 중에 하나로 ‘실천’을 이야기하십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말을 실천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천’이라는 말을 기도의 주제로 삼고 묵상하다 보면 떠오르는 한 마디의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께서 주님의 형제들과 주님을 찾아오셨을 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 마리아께서 참으로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주님께서는 드러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실천’이 바로 우리 주님의 형제와 누이가 될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덕목이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싸 안아주어야 합니다.’ 제가 매일 미사 중 강론 시간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위의 말들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고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은 말들인지요.
어쩌면 실천은 포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사랑도 용서도 감싸 안아줌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라고요.
말로만 하는 신앙과 신앙생활, 이제 슬슬 정리해 볼까요? 쉽지 않겠지만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실천 말입니다.
---------------------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문제가 생깁니다.
요즘은 휴대폰이 카메라를 대신하고 있지만 제가 학생 때만 해도 필름 카메라는 사용했었습니다. 카메라 하나와 그 렌즈가 들어있는 가방을 누군가 메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요즘은 물체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자동으로 거리를 조정해서 가장 예쁘게 사진을 찍어줍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직접 거리를 맞추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멀어도 사진은 실패했고, 가까워도 실패였습니다. 선명하고 예쁜 사진은 거리를 잘 맞춘 사진이어야 했습니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거리 조절은 필요합니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티를 너무 많이 볼 수 있어서 불협화음이 나기도 합니다. 또한 너무 멀면 점점 서로의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가정에서도 이런 거리는 필요합니다. 서로 너무 가까워서 상처를 주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무 멀어지면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데면데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3030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만큼의 나이기를>
보이는 나
보이지 않는 나
둘이 하나이기를
보이고 싶은 나
보이고 싶지 않은 나
둘이 하나이기를
애써 보이려 하지 않고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늘 나임에 감사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나이기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