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에게
이병률
아버지와 목욕하러 온 아이
아버지가 머리를 감으며 거품을 헹구는데
샴푸를 아버지 머리에다 자꾸 짜대는 아들
다 헹구었을 만하면
또 짜고
다 헹구었을 만하면
또 짜고
아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아이의 머리카락 많이 자라라고
머리를 빡빡 밀어준 적 있을 것이다
아이가 크면서 아이 머리를 감겨준 적도 몇 번 있을 것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코 밑을 궁금해 하고
배꼽 한참 아래를 슬쩍슬쩍 내려다본 적도 있을 것이다
한쪽은 웃음을 참느라 한쪽은 씻어내느라
두 엉덩이 계속 실룩거린다
두 사람 사이를 가려주는 듯 수증기가
수줍게 메아리를 만드는 것 같다
북해도의 원주민 아이누 부족은
사내아이의 앞 머리카락에 구슬을 장식해 주고
아이가 첫 사냥에 성공하면 머리카락 끝을 잘라
구슬을 분리해주는 의식이 있다는데
아이야
이제는 너도 세상의 급소를 알았으니
머리카락 끝을 조금 잘라
목욕물에 흘려보내주어야겠다
----애지, 2024년 봄호에서
예전에는 아주 흔했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하러 온 풍경을 거의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저출산-고령화탓’으로 아이의 출생률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가정이 현대식 목욕탕 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친구가 되면 ‘아들 바보’가 되고, 아버지와 딸이 친구가 되면 ‘딸 바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아들 바보’와 ‘딸 바보’의 아버지는 그 얼마나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인간들의 초상이란 말인가? ‘아들 바보’와 ‘딸 바보’는 ‘부자유친의 미덕’이면서도 우리 인간들의 사회가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며 그만큼 넉넉한 풍습의 미덕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정은 우리 인간들의 근본 토대이며, 그래서 ‘가화만사성’이라는 교훈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소년에게]는 ‘부자유친의 드라마’의 한 장면이면서도 그 구성의 원리상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희극(성년의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버지와 목욕하러 온 아이”는 “아버지가 머리를 감으며 거품을 헹구는데” 오히려, 거꾸로 “샴푸를 아버지의 머리에다 자꾸 짜”댄다. “다 헹구었을 만하면/ 또 짜고/ 다 헹구었을 만하면/ 또” 짠다. “한쪽은 웃음을 참느라 한쪽은 씻어내느라/ 두 엉덩이를 계속 실룩거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가려주는 듯 수증기가/ 수줍게 메아리를 만”든다.
하지만, 그러나 “북해도의 원주민 아이누 부족은/ 사내아이의 앞 머리카락에 구슬을 장식해 주고/ 아이가 첫 사냥에 성공하면 머리카락 끝을 잘라/ 구슬을 분리해주는 의식이 있다”고 한다. 아이누 부족의 구슬 분리의식이 성년의식이듯이, 이제는 그 소년도 “세상의 급소를 알았으니/ 머리카락 끝을 조금 잘라/ 목욕물에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버지는 아들의 보호자이자 울타리가 되고, 이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는 ‘아들 바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제 소년은 하루바삐 무럭무럭 자라나 아버지의 품과 울타리를 뛰쳐나가 자기 자신만의 가정과 그 세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들 바보’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종교의식과도 같으며, 이 어린 아들이 자라서 전인류의 스승이 되기를 기원하는 아버지의 기대와 희망과 염원이 가득 담겨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아들 역시도 아무것도 모르고 철 모르는 시절 아버지와 살을 부비고 장난을 치며, 모든 점에서 아버지의 성격과 인품과 종교와 사상을 배워나가게 된다. 전지전능한 신들이란 이처럼 아버지가 성화된 것이며, 이 ‘아버지-신’에 대한 찬양은 자기 자신이 속한 집단과 그 아버지 종교에 대한 예배에 지나지 않는다.
첫 사냥의 성공과 소년이 어른이 되는 성년의식, 그리고 대학졸업과 취업은 최고급의 격세유전이자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대반전의 신호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아버지의 시대는 저물고, 아들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소년에게]는 어린 아들이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수없이 자기 자신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