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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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공사는 착공되었고 전체 작업원들은 한공 마당에 모였다. 시공사가 그들을 한 사람씩 확인한 후 1킬로미터 남짓한 철길 건너의 신흥변전소로 이동시켰다. 공사 시작점은 변전소 인출구였다.
조 감독은 1년 넘는 공사에 함께 할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인사한 후 빠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을 최우선 목표로 작업에 임해달라고 했다. 작업은 어떠한 경우라도 검전과 접지가 우선이고, 안전띠 사용도 생략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자재와 공구를 전주에 올리고 내릴 때도 꼭 밧줄을 사용해 주길 당부했다.
작업자는 전공과 인부로 분류되었다. 전공은 주로 대도시에서 모였지만 인부는 모두 대전 사람이었다. 잠시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첫날부터 전공들은 서로 간 자신의 작업 방식이 맞다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고성이 오가면서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다. 준하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여 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공들은 일본 사람 밑에서 일을 배운 걸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전주와 전선 애자 호칭을 일본말로 부르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듯했지만 준하는 못 들은 척 넘겼다. 서로 소통하며 작업을 멈추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다.
승압공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려면 변압기와 개폐기, 애자, 전주를 전압에 맞는 규격으로 교체하고 전기를 사용하는 수용가 설비도 맞게 고쳐야 한다. 하지만 미국 원조자금과 세계은행 차관, 정부 산업 근대화 예산 등을 끌어와 벌인 공사였기에 하나도 긴축, 둘도 긴축을 앞세우는 바람에 그 기준은 지켜질 수 없었다.
1961년 전력 3사 통합 후 정부는 전국 전력 계통의 전압을 통일하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3300볼트 체계는 점차 폐지하고 6600볼트로 표준화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대전은 당시 성장 속도가 빨라 지방 중점 승압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군사정권 초기의 산업화 정책도 여기에 한몫했다.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전력 부족이 경제성장의 최대 병목‘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화력발전 증설과 송전선 확장, 배전 승압, 농어촌 전화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게 됐다.
공사 현장의 변두리 지역 외진 곳은 선거 때의 혼란한 분위기를 틈타 살아있는 수목에다 전선을 동여매서 전기를 공급한 곳도 가끔 나타났다. 아무리 긴축이라도 새로 전주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가끔 전선 절도단이 낮에 전기가 죽은 걸 알고 구리로 된 전선을 걷고 철선을 깔아놓은 곳이 나타나도 다시 동선으로 바꿔야 했다. 이땐 원도심과 관청이나 권력 기관이 소재한 지역만 밤낮으로 24시간 전기를 공급하면서 ’특선‘이라 불렀고, 나머지 지역이나 특히 변두리는 야간에만 자정까지 공급하는 ‘일반선’이었다.
전주 위에 전선을 지지하기 위해선 자기나 유리로 된 절연체인 애자가 필요했다. 애자가 견디는 절연 성능은 전압별로 달랐기에 승압 공사에서는 기존의 애자를 전량 바꿔야 했다. 이땐 공사장에 자재를 실어 나르는 장비도 손수레뿐이었다. 10미터 전주 하나에도 대여섯 명 인부가 손수레에 붙어 도심 도로를 통과하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전공과 인부 등 작업자를 총괄하는 시공사 현장대리인은 서른 중반 대전 사람으로 업무 감각이 빨라 시공 도중 발생하는 문제도 기민하게 대처했다. 시공사가 발주처에서 받아야 할 공사대금이 공사 감독이 작성하는 서류에 달렸으니, 그는 그림자처럼 준하를 따라붙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기별 재료 명세서'엔 50여 종 자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기별’에서 ‘기’는 전주 낱개를 일렀다. 명세서에서 맨 위 칸은 전주갓이었다. 목주 꼭대기에 빗물이나 눈이 들러붙어 수분이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함석으로 만든 모자였다. 완목이나 암타이도 크기별로 서너 가지였고 각각에 볼트와 너트가 따랐다. 전주에 얹힌 변압기는 교체하지 않았지만 훼손되었거나 부싱에 금이라도 갔으면 바꿨고, 변압기의 개폐기인 COS도 마찬가지였다.
발판못은 없는 곳이 나타나도 전선 도둑이 오를 것을 우려해 다시 박진 않았다. 한 번씩 전주를 세울 때 전주의 쓰러짐을 막기 위해 근가를 철선으로 감아서 붙이기도 했다. 기별 재료 명세서 서류철은 시공사 젊은 직원이 휴대하고 준하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새로 전주를 세우면 전주와 전주 사이 거리를 줄자로 쟀고 전주에서 철거한 전선은 마이크로미터로 그 굵기를 확인했다.
공사 시작 첫날, 공사 감독이 그렇게도 신신당부한 안전사고 예방은 결국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1년 2개월 동안 매일 50여 명이 전주에 매달려 작업하면서 2명 사망, 1명 중상인 안전사고를 기록했던 것. 당시엔 시공사도 작업자도 안전의식은 거의 밑바닥 수준이었다.
전선로의 전기를 끊은 휴전 상태에서 작업자가 전주에 매달려 작업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개폐기를 투입하여 송전한 사고가 그 첫 번째였고, 전기가 살아있는 활선을 죽은 사선으로 오인하여 벌어진 사고가 두 번째였다. 두 번째 사망사고는 감독 지시대로 검전기만 사용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안타까운 재해였다. 전주 위에서 작업을 마치고 내려올 때도 당시 나무로 된 전주는 미끄러지는 사고가 빈발해 안전띠를 풀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했는데도 이를 어기고 전주를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날카로운 암반 바닥에 추락한 사고가 세 번째였다. 첫 희생자 출상은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속을 공사를 통해 서로 동지가 된 작업자들이 시공사가 제공한 광목 복장을 걸치고 상여를 멨다. 장지는 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판암동 철길 굴다리 위 비탈진 야산이었다. 두 번째 희생자도 대전 사람이었다. 2월 초, 차디찬 북풍에 눈발이 흩날리는 속을 장례 행렬은 대흥동 육군 병참학교 뒤 야산을 올랐고 이때도 상여꾼은 공사 작업자들이었다.
대전천을 경계로 동쪽 시가지 공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날도 준하는 어두워진 뒤 평소처럼 현장에서 사무실로 돌아와 시공사 현장대리인과 당일 시공한 내용을 확인했다. 이날도 한반도의 허리이자 내륙인 대전의 여름밤은 후텁지근했다. 준하가 사무실 서류 정리를 마치고 회사 정문을 막 벗어나려는데 펑, 펑, 하고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멀리서 들려왔다. 동란 초기에 멀리서 들려오던 포성을 그는 떠올렸다. 그러곤 대전천 하류 쪽에서 두세 차례 더 섬광이 번쩍였다.
이때 당직 근무 중인 보수반 차량이 정문을 막 나서고 있었다. 높은 송전선로 철탑에서 취객이 자살소동을 벌인다는 신고를 받았다고 했다. 준하가 맡은 공사 현장은 아니겠지만 분명 배전 선로에도 영향은 있을 것 같아 그도 차량에 올랐다. 대전역을 지나 대전천 둔치의 철탑에 도착했다. 자전거로 이곳을 지나던 초로의 사내가 그때까지 현장에서 철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가 목격한 자살자의 행동은 놀라웠다. 실연한 청년이 마신 술이 화근이었다. 만취한 청년은 마시던 소주병을 손에 든 채 철탑 밑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가서는 울부짖듯 큰 소리로 여자 이름을, 서너 차례나 부르짖더란다. 그러곤 병에 남은 소주를 입에다 대고 나발을 분 뒤 철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사각 철탑 한쪽 모서리엔 작업자가 오르내리도록 볼트가 상하로 50cm 간격으로 붙어 있었다. 만취한 상태에서도 청년은 발판을 하나하나 잡고 철탑이 벌인 팔까지 올랐고 살아있는 15만 4천 볼트 송전선로 전선에 닿으려고 몇 차례나 팔을 내리뻗었지만, 만취한 몸이 중심을 잃어 실패하자 다시 여자의 이름을 몇 번 더 외치고는 송전선로 위로 몸을 날려버리더라고 했다. 펑, 펑 소리가 연속으로 들린 건 청년의 몸이 처음 송전선에 닿은 순간 스파크와 함께 포성처럼 일대를 진동시켰고, 윗단 선로에서 불붙은 사체가 타면서 사지가 분리돼 아랫단 선로에 닿으면서 제2, 제3의 스파크가 굉음으로 포성처럼 지축을 흔들더란다.
대전MBC 악단은 매년 연말이면 지역 내 관청과 국영기업을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펼쳤다. 회사에선 ’MBC 노래자랑‘에 출전 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자, 해오던 방식대로 부서별로 할당해 버리고 끝냈다. 타 부서보다 고령 직원이 많은 공무과에서는 하필이면 바쁘게 공사 현장에 매달리고 있는 송준하를 거기에 추천했다. 준하는 노래자랑 날짜로 잡힌 날은 승압공사 전체를 통해서 가장 난공사인 유성 온천지구 공사를 해야 하므로 출전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공무과 주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때도 무대에서 부를 곡목을 열흘 전에 미리 받는 것은 MBC 악단도 그 곡을 연습하기 위해서였을 터이다. 준하는 주무의 독촉을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해 전에 세상에 나온 노래 <못 잊을 대전의 밤>을 써내고 말았다. 대전에서조차 시들한 반응을 보여 강당에 직원들이 모이더라도 이 노래를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 같아 그는 이 노래를 골랐다.
그러면서도 노래를 연습할 시간도 없는 준하를 출전시킨 공무과 주무가 그는 원망스러웠다. 젊은 사람이 벌써 반년 이상 사무실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주무는 주무대로 이 기회에 얼굴 좀 제대로 보이라고 준하를 찍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준하가 대전역에서 가까운 목척교를 자주 건너다닌 건 공사가 벌어진 현장을 질러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도 ‘가로등 희미한 목척교에 기대서서……’란 노랫말 시작부는 준하가 맡은 승압 공사를 말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사자가 시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겠지만 새로 설치한 밝은 가로등을 두고 희미하다고 한 것은 당혹스러웠다.
준하는 대전에 처음 발 디딘 후 회사 위치는 대전역에서 비교적 가까운 인동이었는데도 하숙은 거리가 뚝 떨어진 효동에다 정했다. 걸어서 출근하면서라도 그는 대전이란 도시를 느끼고 싶었다.
외벽에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단층 하숙집 지붕은 유럽풍의 주홍색 기와였다. 목재로 둘러친 낮은 담장은 밖에서도 화단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북이 고향이라는 하숙 여주인은 한 번씩 꽃밭 주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곤 했다. 준하 눈엔 그런 하숙 주인이 퍽 행복해 보였다. 한 번씩 늦게 둔 고등학생 아들 혁재가 홀어머니 속을 썩이는지 비명에 가까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제외한다면.
준하 옆방엔 공군 박 중사가 들어 있었고 그도 이북이 고향이었다. 박 중사의 공군기술교육단 영내엔 하사관 숙소가 따로 없었던지 하숙에선 부대가 10킬로미터 거리가 훨씬 넘는 거리인데도 말없이 열심히 오갔다. 그가 충북 영동으로 장가가던 날, 하숙에선 준하 혼자만 결혼예식에 참석했다. 식장에서도 그는 평소처럼 별로 말이 없었고 긴 전통 혼례에서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식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부대 내엔 본인의 결혼을 알리지 않았는지 이날 군복 입은 하객은 보이질 않았다.
꽃피던 봄에 첫발을 디딘 대전에서 준하가 처음 맞는 겨울. 으스름 저녁이 되자 하숙집 너른 화단에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장기에 눈이 많은 고장에서 자란 탓인지 준하는 남달리 눈을 좋아했다. 망연히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낯선 청년들이 마당을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 생김새나 옷차림은 첫눈에도 귀공자처럼 보였다. 두 청년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안부를 물으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해왔으나 하숙 주인 임 여사는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의외로 냉랭했다. 그렇게 어정쩡한 만남으로 두 청년이 방으로 막 들어갔을 때 대문에선 또 다른 누가 초인종을 눌러댔다. 당시 유행하던 하얀 털모자에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성장한 아가씨 둘이었다. 청년들은 쌍을 지어 한꺼번에 하숙에 들어서기가 미안했던지 서로 떨어져 도착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두 아가씨는 곧바로 먼저 도착한 청년들 방으로 들었고 방안에선 금세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