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김창준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6. 3:32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한국인물기행 김창준
인기멤버
2024.05.26. 21:38조회 4
댓글 0URL 복사
민중신학 이전의 민중신학자 ‘김창준’(1890~1959)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학장 변선환) 대학원 건물 현관 벽에는 이 학교가 배출한 자랑스런 인불들의 흉상이 붙어 있다. 그 바로 밑에 새겨진 시인 박두진씨의 송가는 그들을 이렇게 기리고 있다.
“..가장 먼저 깨어 있어 깃발쳐든 이들이어/ 캄캄한 그 밤의 어둠에 불을 지른 이들이어/ 뜨거운 그 사도정신 십자가의 가르침/ 자유와 그 자주독립의 깃발 쳐든 이들이어/ 정의와 그 겨레 해방을 소리외친 이들이어/ 서로 갈리는 분파보다는 겨레 모두 하나라/ 하늘의 뜻 하늘에서처럼 땅에 이루기 위하여/ 3·1선언 민족대표로 솔선하여 나선/ 감신충신 일곱 대표 빛나는 이름...”
그러나 흉상의 명단은 이필주, 신석구, 오하영, 최성모, 신홍식, 정춘수 등 6명에서 멈춰 있다.
남한 기독교계가 공식적으로 그를 끌어 안기에는 아직도‘위험한 인물’인 나머지 한 사람이 바로 김창준(1890~1959)이다. 그는 민족대표 33명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냈다는 사실 때문에 역사에서조차 이름이 지워져버렸다.
다만 최근 들어 김흥수 교수(목원대), 조이제 목사, 연규홍씨 등 몇몇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그가 주장했던 신학사상과 실천과정 등이 역사의 무대에 올라 그를 새롭게 기억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진영 일부에서“민중신학 이전의 민중신학자”라는 이름을 얻고 있다.
기독교사회주의 이론화
김창준은 1890년 5월 3일 일찍부터 기독교 바람이 불던 평안남도의 조그만 농촌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06년 강서군 반석면 야소교 소학교를 졸업한 김창준은 미국인 선교사 문요한(J.Z. 무어)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 1910년 평양 숭실중학, 1914년 숭실전문, 1917년 협성신학교 등을 졸업했다.
감리교의 협성신학교를 마치자마자 목회자의 길에 오른 그는 미국인 선교사 빌링스가 담임목사로 있던 서울‘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전도사로 일하던 중 3·1운동을 맞는다.
일제 관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함께 중앙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YMCA 청년부 간사로 있던 박희도의 권유로 3·1독립선언서에 서명했는데, 그의 역할은 이갑성과 함께 평양과 선천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는 지방법원의 심리과정에서 일본 검사가 무엇 때문에 독립을 희망하느냐고 묻자“그것은 조선인의 지위권리가 일본인과 동일하지 않고 학대를 받고 있는 일에 대해 일반이 불평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대답한다. 그의 이런 대답은 똑같은 여러차례 질문에 매번 똑같이 이어졌다.
조사 과정의 꼿꼿한 자세 탓인지 1920년 10월 30일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주모자급이 아닌데도 2년 6개월의 징역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는다. 이듬해 12월 23일 가출옥으로 경성교도소 문을 나온 그는 22년 9월 제15회 미감리교 조선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뒤 2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시카고 개렛신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학의 기초과목과 농촌지도력, 사회이론을 3년 동안 공부해 두 대학에서 신학사와 문학사 학위를 받고 26년 12월 27일 귀국한 그는 중앙교회의 목회일을 하다 33년 4월 감리교신학교의 전임교수(실천신학)로 부임하면서 자신의 신학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40년 10월 이 학교가 폐교돼 교수직을 그만둘 때까지 <신학세계> <청년> 등 기독교계 잡지에 기고한 30여 편의 글은 기독교신앙과 민족현실 사이를 해명하려는 양심적 지식인의 신학세계를 엿보게 하며 해방 뒤 좌파계열의 민전 참여와 남북협상을 위한 북한행 등 일련의 인관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설명해주는 단서로 남아있다.
32년 7월 <신학세계>에 발표한 논문‘맑스주의와 기독교’는 그 시대 신학자 중에는 매우 드물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박한 분석을 통해 기독교 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전개한다. 그는 이 글에서 기독교는 개인주의가 아닌,‘사회주의’라고 못박고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신앙을 미신과 구별하며 기독교의 사회이론을 보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르크스주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기독교세계관 테두리 안에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 이념 중 가장 비판적으로 바라본‘계급투쟁’에 대해“계급의 이익 위에서 계급적 지배계급을 향하여 투쟁하며 이 계급투쟁이 사회진화의 필연”이라고 인식하면서도“아래계급이 웃계급을 압박하나 웃계급이 아래계급을 압박하나 독재적으로 사람을 압박하긴 마찬가지”라고 계급투쟁의‘폭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매소부와 기독교의 급선무’(33년 1월<신학세계>)라는 논문에서는“매음녀의 한 큰 원인은 생활난에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우선 이 제도에서라도 일반 노동자의 임금에 대해 생활하여 나갈 만큼 여자나 기술자나 무기술자나 할 것없이 임금 최저한도를 누구에게든지 생활하여 갈만한 정도에서 정하고 그 후로는 역량에 따라 더할 것이다”고 강조, 매춘부 등 사회문제의 사회경제적 접근을 시도한다.
교회 사회적 무관심 질타
그는 부의 분배문제도 언급해“예수는 개인을 위해 부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형제사회를 성취하기 위해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라면서“중요한 것은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 사회 시민의 공익증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조선의 천국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학세계> 33년) 김창준의 사회참여 논리는 교회의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질타로 이어진다.
“교회는 신성하고 사회는 불성실한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 사이에 큰 담을 둘러막고 아주 큰 간격을 두루고 있다. 이 때문에 예배당에 가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계시고 상점에 가서 물건을 팔 때는 하나님이 없으며 예배시에는 참말을 하나 상업이나 정치를 할 때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인들이 많다.”(‘조선의 천국운동은 어떻게 할까’ <신학세계> 34년 11월)
그렇다면 김창준이 주창한 기독교사회운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이에 대해 “정치적 공정, 경제적 공정, 사교적 공정, 민족적 공정을 이루고 성적 도덕, 아동학대 등 모든 사회적 죄악을 파멸하는 운동”(‘조선의 천국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신학세계>34년)으로 이해했다.
40년 병사한 아들 보라의 장례식을 마치고 쓴‘아들을 보내면서’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글쓰기를 그만두고 재직했던 신학교마저 일제에 의해 폐교당한 뒤 교회의 일선에서 사라진 그의 행적은 해방 때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인 목사 사와 마사히고의 논문‘한국공산주의와 윤리, 김창준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그는 이 기간에 경기도 양주에서 운둔생활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다른 자료(선우학원·홍동근 공저‘주체사상과 기독교’등)를 종합하면 그는 북만주 변강성에서 긴 망명(또는 항일운동)생활을 마치고 해방직전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 되었다. 45년 10월 5일 미군정이 행정고문에 임명한 11명의 인사들중 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 가운데 절반이 목사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엘리트 관료들이 기독교신자였다.
평안북도에서 기독교사회주의 민주당을 조직해 공산주의에 대항했다 월남한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며“이 용을 멸할 자 누구냐?”(<건국과 기독교>1949)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그 당시 기독교인의 일반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계의 상황과 해방공간에서 벌인 그의 일련의 활동은“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자기를 위하하여 더 유익했을지도 모를 사람”(장병욱<한국교회유사> 1980)이라는 지독한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김창준이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진로를 선택한 것은 47년 1월 9일 좌파계열의 연합전선체인‘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확대중앙위원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1947년 1월 30일자 <독립시보>는 그의‘신참인사말’을 이렇게 전한다.
“8·15 이후 국제교화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좌우합작에 노력했으나 덮어놓고 좌우합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대구의 10월 인민항쟁을 보았다. 여기서 경제적 공평이 없는 곳에 정치적 평등과 세계 평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도교 청우당과 같이 처음 민전 중앙확대회의에 참석해 허헌, 박헌영, 여운형, 김원봉, 김기전 등과 함께 6명의 의장단에 선출된 그는 며칠 뒤인 2월 4일‘민전에 참가하는 이유’라는 성명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더욱 분명히 했다.
그는 이 성명서에서 민전에 관여한 이유로 3가지를 제시하면서 첫째, 특권계급의 편에 서는 것보다는 예수의 정신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가까운 친구가 되고자 하는 것이고 둘째, 십자가를 부르짖는 속에는 경제적 공평의 제도까지 병행되지 않으면 안되며 셋째, 우리 민족의근본적 해방은 근로대중의 승리로 말미암아 올 것과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 약소민족해방은 세계인민민주주의의 최후 득승으로만 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통일조국 건국을 위한 가장 적합한 체제는 인민민주주의라고 믿은 그의 확신은 그해 2월 24일 시천교 강당에서 자신의 주도로 발족한 기독교민주동맹의 창립선언문에도 반영돼 있다. 이 선언문은“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은 일부 특권게급의 이익을 두둔하거나 전제와 압박에 추종하는 것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인민적이요 평화적이요 정의감이 굳센 곳에 있다”면서 인민적 민주주의의 국가건설에 참가하는 것이 기독교의 양심적인 사회적 실무를 완수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14명과 함께 북쪽의 초청을 받고 북한에 건너간 그는 그곳에 주저앉아 남한의 교회·정치 일선에서 사라지고 만다. 북한에서의 행적은 단편적인 것만으로 남아 있다. 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상임위원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서기장으로 뽑힌 그는 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라는 고위직으로 올라 59년 5월 29일 뇌일혈로 숨질 때까지 파리, 모스크바, 프라하, 빈 등지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북한대표로 참석했다고 한다.(사와 마사히고)
일제시대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비판했던 기독교이론가가 해방공간에서 실천하는 행동가로 활동하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북한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한 연결고리를 제공할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죽고 없거나,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도 일방적인 것뿐이어서 정확한 사상적 변모과정은 알 길이 없다.
북 의회 부의장까지 지내
전택부(76·YMCA 명예총무)씨는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주장이“당시 기독교 청년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었다”라고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김창준 밑에서 4년 동안 신학공부를 한 원로목사 나사행(77)씨는“그는 말끝마다‘좋습니다’를 하는 습관이 있어‘좋습니다’가 별명이 될 만큼 호인이었다”고 회상하며“정치적 이유로 흉상 명단에서 글 빼놓은 것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신학세계와 활동을 연구한 연규홍(한신대 강사)씨는 “김창준의 월북이 단순히 그가 48년까지 견지해온 민족주의적 기독교운동 노선의 단절과 선회라기보다는 1930년 이후부터 그가 이론화한 기독교사회주의의 과학적 틀에서 10월 인민항쟁을 통해 자각한 민중현실의 발견 끝에 내린 선택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댓글 쓰기
[출처] 김창준|작성자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