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85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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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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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yieOfbY0Fc&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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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바오로 사도는 수인이 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기쁨이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옥중서한들을 읽고 묵상하다보면 참으로 큰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에페소서, 필립피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이 네 개의 편지를 옥중서한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옥중서한 한편 한편은 참으로 매력적인 편지들입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깊은 감옥에서의 큰 고통 속에서도, 담장 너머 그리스도 신자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격려하고 고무하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들에서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에페소서에도 옥중서한이라고 분류하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주님 안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는 권고합니다.”(에페소서 4장 1절)
갇힌 몸이 되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을 난감해하고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몰랐으면 하는 마음에 쉬쉬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를 보십시오. 그는 수인이 된 것을 기쁘고 당당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주님 때문에,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인해 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인이 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처럼 수인이 되고, 옥중서한을 썼다면 내용이 사뭇 달라졌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갇힌 것에 대해 하소연했을 것입니다. 빨리 탄원서를 쓰고 많은 사람의 서명을 받아 판사님에게 제출하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지하 감방이 너무 춥고 배고프니, 사식을 넣어달라, 영치금을 두둑이 넣어달라, 이런저런 생필품을 보내 달라, 요구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를 보십시오. 그런 요구 사항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몸은 비록 묶여있었지만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영혼은 평화롭고 행복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잘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하고 주님만으로 충분했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이해하지 못할 현실 앞에서도 평화로운 내적 상태를 잘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극도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 찬미와 영광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굶주림, 박해와 학대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 교우들에게 건네는 권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 4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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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2)하느님의 다양한 초대 앞에>
기후나 날씨의 변동, 천재지변을 예측할 수 있는 징후들이 있습니다. 요즘 인간들을 가장 큰 공포에 빠지게 만드는 대지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지표가 기울어지거나 융기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인간들보다 감각 기능이 예민한 동물들이 미리 감지하고 대피하기도 한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전의 자연에서 징후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이렇습니다. 쥐나 비둘기, 까마귀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온순했던 개들이 갑자기 사납게 짖습니다. 고양이들이 나무 위로 올라가 안절부절 못합니다.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난폭한 행동을 합니다. 바다에서는 낫선 물고기 떼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동면해야할 뱀이나 개구리들이 밖으로 나옵니다.
저도 가끔씩 잘 알아맞히는 감지능력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전날 밤 하늘에 달무리가 보이면 그 다음날 어김없이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더군요. 갑자기 개구리 울음소리가 커지고 잠자리 떼가 낮게 날면, 그리고 흙냄새가 나면 틀림없이 30분 내로 비가 왔습니다.
이런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예측하면서 미리 미리 대비하는 인간들이었지만, 가장 큰 징조,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에 대한 징조,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 도래에 대한 징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는 풀이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너무도 한심했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한 어조로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우리 매일의 삶 안에서도 다양한 징조, 징후들이 다가옵니다. 그때마다 그 징표들이 의미하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노력, 그것이 필요합니다.
멀쩡하던 건강에 적신호가 왔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주 시름시름 아프고 상습피로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병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하고 잘 보살피라는 하느님의 요청입니다.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라는 표시입니다. 극단적인 일 중독이나 다양한 중독 증세에서 벗어나 좀 쉬라는 부르심입니다.
전혀 예기치도 않았던 실패나 좌절이 내게 찾아왔습니다. 빠져나갈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좀 더 겸손해지라는 신호입니다. 좀 더 자세를 낮추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좀 더 큰 그릇으로 거듭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든 환난이 찾아왔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생일대의 큰 시련입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난관입니다. 그것은 빨리 하느님께 돌아서라는 요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 인간만사란 것은 원래 다 그렇게 불완전하게 한계를 지닌 것임을 빨리 알아차리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정말 피하고만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달아나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을 통해 우리를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부르십니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전한 세상으로, 고통과 눈물의 세상에서 행복과 희망의 세상으로 건너오라고 부르십니다. 여기가 다가 아니라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죽음은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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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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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피하려면: 내가 합의해야 할 대상과 합의금이 무엇인지 알아야!>
연예인 박수홍 씨의 친형이 구속되었습니다. 박수홍 씨는 근 10년간 100억 이상을 횡령한 혐의가 있는 형을 고소하였습니다. 그 이전 20년 것도 있지만 그것은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박수홍 씨는 목숨을 끊을 생각도 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형제, 모두에게 등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대로라면 박수홍 씨는 친형제나 자녀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용당하였습니다.
박수홍 씨는 이렇게까지는 않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형과 7대 3으로 재산을 나누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형의 재산은 100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생이 번 돈 중에서 상당 액수를 가질 수 있었지만, 형은 그 합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수홍 씨는 고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그렇게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7-58)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가서 그 값을 다 갚아야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그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마지막 심판 때 나를 고소하는 자일까요? 당연히 내가 피해를 준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해를 준 대상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됐다고 할 때까지 말입니다.
저도 운전병으로 군대에 있을 때 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군용 트럭으로 프라이드 승용차 한 대를 폐차시켰습니다. 다행히 그 차 운전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0만 원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저는 군 재판에 넘겨지어 그에 해당하는 만큼 옥살이를 해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그 돈을 여기저기 꾸어 마련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지어 피해를 주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녀가 누구에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대상은 부모입니다. 그 사랑에 반하여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자녀에게 그 죗값을 보상하도록 오히려 합의금을 내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큰 죄를 짓는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 ‘양심’입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소합니다. 양심의 고소를 당하는 이는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고 미워합니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심은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들어주신 우리 자신을 잘 돌볼 수 있게 하여주신 하느님의 법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멈추려면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해 주신 것처럼 하느님 자신이 합의금을 내어주셔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은 ‘가죽옷’이 그 합의금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해 주셨습니다. 그 합의금을 받는 순간이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입니다. 고해성사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으로 나의 고소자인 양심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치 제가 군제대를 하고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을 원치 않고 내 힘만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것은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도 부모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고해성사를 해도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가시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완전한 합의금을 주셨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가라앉으면 미움도 가라앉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을 심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비가 심판을 이깁니다. 내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만나느냐, 따듯한 부모로 만나느냐는 내 안의 양심 가책을 당신 피로 잠재워 이웃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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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코로나 이후로 염색을 하지 않아서 머리카락이 하얗습니다. 모자를 쓴 모습과 모자를 벗을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모자를 쓰고 마트에서 맥주를 샀습니다. 직원이 저의 아이디를 보자고 하고, 젊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로 모자를 벗었더니 직원이 저를 잘못 보았다며 웃으며 맥주를 팔았습니다. 운동 중에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운동을 마친 후에 모자를 벗고 인사하였습니다. 저의 머리 색깔을 본 사람은 제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고 웃으며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직 머리카락이 검은 동창 신부와 미사를 함께 봉헌할 때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제가 동창신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검은 머리에 유난히 동안인 동창신부와 하얀 머리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저의 모습이 그렇게 보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3년 전 염색을 할 때의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보면 10년은 차이가 나 보입니다. 다시 예전처럼 염색을 할까 생각도 하지만 60이 되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과 지성, 자본과 물질이라는 ‘틀’에 갇혀서 참된 진리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던 빌라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던 유다처럼, 베드로처럼 우리도 그렇게 참된 진리를 외면하고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뿐인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식별’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든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세상은 돈을 목적으로 하고, 이윤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돈과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잊혀지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 외롭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늘 같은 방향을 향해서 움직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같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일의 날씨는 예보하면서, 내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느냐!’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에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세상의 뜻을 헤아리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외모를 가꾸려는 마음만큼, 내면의 정신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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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예수께서는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교회는 신부이며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봄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징조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본질을 알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도 또한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는다. 재판관은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모두 치르기 전에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옥리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 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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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현대인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4차 산업 혁명의 물결로 급변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미리 갖추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학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가 지금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변화일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미래 역량을 기르고자 열심히 노력하라고 주문합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가올 미래를 궁금해하고 이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주변에 용하다는 분을 찾아가 점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도 어쩌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지 모릅니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미리 대비함으로써, 오늘을 좀 더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현상들은 때때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지표가 됩니다. 기후 현상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래전부터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지금의 기후 현상을 분석한 다음, 앞으로의 날씨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합니다. 오늘 복음도 이스라엘의 날씨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서쪽에 있는 지중해에서 만들어진 구름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되면, 유다인들은 비를 예측하는데 실제로 비가 옵니다. 이스라엘 남쪽 사막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 유다인들은 곧 날씨가 더워질 것을 예측하고 또 실제로 더운 날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요 골자는 그렇게 날씨를 예측하는 일에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면서, 왜 메시아가 와 있는 지금 상황, 곧 ‘이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굼뜨냐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현존과 활동으로 이어진 ‘이 시대’의 사람들은 분명한 표지와 표징들을 보았음에도 곧 다가올 종말과 심판을 준비하는 ‘회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모양입니다. 분명히 보았는데도 못 본 척하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나무람을 우리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과연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구원의 표징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하며 다가올 미래를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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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사제 피정 때 40년 넘게 사제 생활을 한 신부님이 피정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피정 중에, 살아오면서 감사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노트에 썼답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이삼일 동안 쓴 이름이 500개도 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사제로 지낼 수 있도록 이렇게나 많은 분이 애써 주셨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들이 해 준 것만큼 감사의 보답을 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분은 고맙다는 표현도 전해 드리지 못한 채 하느님께 돌려보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남은 인생은 그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은인들에게 직접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주위의 이웃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겠노라 다짐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을까요?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른 경우는 얼마나 많을까요?
감사해야 할 은인들에게 일일이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미안한 사람들에게 죄송함을 다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남은 인생을 보답의 삶, 속죄의 삶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땀방울을 기꺼이 흘리며 우리의 은인들, 우리에게 피해를 받은 이들에게 보답과 속죄를 할 때, 우리 삶은 위선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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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정석 라파엘 신부님]
<순간의 선택이...>
한동안 인터넷에 엽기 급훈이라는 것이 소개되었습니다. 신세대 취향에 맞게 톡톡 튀는 여러 가지 급훈이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를 들면 ‘○○○가 보고 있다’라는 게 있는데 ○○○은 그 반 담임 선생님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내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총 12개의 급훈이 있었지만 생각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옆 반 급훈이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열심히 공부하자’, ‘정직한 사람이 되자’라는 틀에 박힌 급훈이었는데 그 반 급훈은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정확한 상황판단을 위해서는 차가운 지성이 필요한 법이지요. 이웃과 사소한 싸움이 원수지간으로 변하는 일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감정에 휩싸이다 보면 정작 지금 벌어지는 일의 시작과 끝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일 자체에 휩쓸려 낭패를 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차가운 머리’가 필요한 법인데 뜨거운 가슴이 앞서 나가면서 머리까지 익혀버리기 때문이겠지요. ‘아주 끝장을 보자!’라는 식으로 덤벼들기 전에 일의 전후를 냉정히 바라보고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도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 어울리는 화끈한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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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하신 첫 말씀이다.
바로 이 "오늘"과 더불어 우리 인간의 실존은 역사의 새로운 시간으로 돌입하였다. 이 시간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결정적인 시간이 된다. 이 시간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기 때문이다.(루카 11,20)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위기이자 동시에 그 완성을 의미한다. 문제는 사람이 과연 이 시대의 징표를 파악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루카 10,22),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는 능력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와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예언자들과 제왕들은 과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류 역사의 다른 시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지금 보고 듣는 것을 그들도 보고 듣기를 원했지만 불가능했다. 그 때와 지금은 전격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아는 제자들에게 곧 들이닥칠 마지막 날에 대하여 준비하고 기다릴 것을 거듭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다수가 섞여 있는 군중을 향하여 시대의 징표를 깨닫지 못함을 한탄하신다.
당대의 사람들은 구름과 바람의 변화를 보고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정작 중요한 시대의 징표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통하여 시대의 징표를 알려주었건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다. 오히려 예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들이었다.(루카 11,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의 기적, 즉 회개의 설교 외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으며(루카11,29-30),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루카12,31)고 하셨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거나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하나 하나가 이미 충분한 기적이요 표징이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우거나 얄팍한 자존심으로 일상을 재촉할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탓하며 나쁜 습관에 소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판단을 앞세워 그에 따른 올바른 행동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57절) 타인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법정에 이르러 실형을 받기 전에 서둘러 화해하여야 한다.(58절)
마지막 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59절) 실형이 연옥이라면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풀려나지 못할 것이고, 실형이 지옥이라면 거기에서 나올 기회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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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루카 12,49-53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함께>
함께해야 하는 것은
함께하기 싫어도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하면 안 되는 것은
함께하고 싶어도
함께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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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숫대야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을까요? 당연히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세숫대야가 흔들려서 물이 계속 출렁거릴 때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잘 보려면 물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해서 물의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부정적 생각이 자기를 더 힘들게 하는데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이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내 마음에 나를 똑바로 볼 수 없으니 자기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니 제대로 살기 힘들게 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다. 침묵 속에서 잔잔한 내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를 알아봐야 하는데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 나라를 꼭꼭 숨겨 놓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위선적인 마음으로 징조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징조가 보여도 무시하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기예보를 과학화하여 기압의 수치로 나타내지만, 하늘을 보고 또 바람의 방향을 보고서 날씨를 알아맞히는 것은 옛날부터 계속되고 있습니다. 농사일을 위해, 전쟁의 작전을 짜기 위해서도, 그리고 바다로 항해하기 위해서도 날씨 아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을 보고, 바람을 보면서 날씨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맞췄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징조는 어떠할까요?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행적과 메시지만 봐도 메시아가 여기에 있고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보고도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계속해서 세상 것과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몸을 흔들다 보니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닥칠 멸망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세상보다 주님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잔잔한 내 마음을 만들 수 있으며, 그 마음을 통해 하늘의 징조를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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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평화의 끈>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공동체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애초부터 쉽지 않고 그래서 애써야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애쓰라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리 애쓰지 않고 일치를 이루려고 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조금 애쓰다가 일치점을 찾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기에 바오로 사도는 조금 더 아니, 많이 애쓰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늘 제게는 들립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표현들만 봐도 일치는 많이 애써야 이루어지는 것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겸손, 온유, 인내심, 사랑을 가지고 참으라고 합니다.
서로 참아 주라고 하는 것부터가 서로 불편하고, 서로 불쾌하고, 그래서 서로 힘들게 하며,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합니다.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형이고,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면,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그래서 참아야 할 것이 애초에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외 없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고, 그래서 힘들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고 서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갈리는 것입니다. 바뀌라고 요구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과 사랑을 지닌 사람은 참을 것이고, 그것이 없는 사람 곧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내 마음에 들게 바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은,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참기 위해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이 바탕이 된 사랑을 지니려 애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른 곳, 곧 코린토 전서의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며(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지요.
이런 것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실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이것을 우리는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모든 것이 내 맘에 들도록 다 좋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려 애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시는 일치를 얘기합니다.
평화의 끈?
끈은 하나로 묶어주지요. 그런데 불화는 묶어주지 않고 갈라서게 하니 아예 일치의 끈이 될 수 없고, 당연히 평화라야 하나로 묶어주는 일치의 끈이 되는데 제가 보기에 이 평화도 성령의 평화여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내 맘에 들기를 애초부터 바라지 않고, 사랑의 성령은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기에 우리는 사랑의 성령으로 평화롭게 일치를 이룰 수 있겠지요?
바자회와 관련해서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자회를 8시에 끝마치는 것으로 공지되었는데 이웃의 불평도 있었고, 봉사자들도 그때까지 봉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이 파악되었습니다.
그래서 6시에 바자회는 접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무리를 위해 봉사해주실 형제님 계시면 많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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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며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낼 때 하느님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4)라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 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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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시대의 징표를 헤아리는 식별의 지혜 -
“자리 탓하지 말자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나라이다”-2022.9.18.
수도원 홈페이지 묵상란에 마지막으로 올린 시입니다. 한 달간 이러저런 시련과 어려움으로 긴박하게 지냈던 한 달이기에 시상이 떠오를 여유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오늘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하늘나라이며 식별의 지혜도 선물 받습니다. 다른 곳 아닌 오늘 여기서 찾아서 살아야 할 행복입니다.
하루하루 일기 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어제는 참 평화로웠던 하루였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여러 착한 분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제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이자 최고령의 1922년생 만 100세 사촌 형님을 찾아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100세 연세에도 총명하시고 눈도 맑고 어린 아이처럼 착하고 순수하시기에 저리도 주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혼자 계실 수 없어, 효자로 소문난 두 아들과 평생 43년 동안 충복忠僕처럼 형님을 섬겨온 기사님이 서로 교대하며 24시간 함께 하며 돌본다 합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 부부가 방문하여 약 2주간 아버지를 시중 들고 있었습니다. 집안 식구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기에 참 밝고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사촌 형님의 고백성사 보속 말씀 처방전도 미리 A4 용지에 붓펜으로 크게 써갔습니다.
“두려워 말라, 성철 사도 요한!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이 말씀은 저의 여섯째 숙부가 임종 전 일주일동안 꼭 잡고 지냈던 말씀입니다. 이어 조카인 글라라 따님으로 부터 예쁜 책과 더불어 감사의 메시지가 담긴 서신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제 강론을 숙독하는 신심 좋은 조카입니다.
“신부님, 잘 지내시지요. 매일 받아보는 신부님 강론은 정말 마음에 잘 와 닿아요. 이런저런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그날의 성인 이야기, 여러 묵상 제목, 그리고 자연의 풍요로움을 잘 조화시켜서 항상 흥미진진하면서도, 마음을 정화시켜 주지요.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진정성 가득 담긴 내용에 감사했습니다. 큰 건강 바라지 않습니다. 죽는 그날까지 매일 강론 쓰고, 미사 봉헌하고 걸을 수 있는 건강 주시어 일상에 충실할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고 이는 제 유일한 소원입니다. 참 좋은 축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도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자체가 중요하고도 힘든 수행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의 수도공동체를 이뤄 살 수 있음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방향이 같기에, 하느님 중심을 바라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촉구하는 바오로 사도의 금과옥조의 말씀이 참 적절하고 고마워 전부 인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하나의 영성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에 속한 신자들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 되어 살 때 참 행복이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분열보다 고약하고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악마가 끊임없이 즐겨 시도하는바 분열이요, 하느님이 끊임없이 시도하는 바가 개인은 물로 공동체의 내적 일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일치의 삶을 날로 깊어지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바치는 우리 수도공동체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말라.”
베네딕도 규칙에 나오는 성인의 두 명령입니다. 그리스도 중심, 하느님 중심의 일치의 삶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 하느님의 일인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주님을 닮아 단순과 순수,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의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시대의 징표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도 선물 받습니다. 결코 복음의 식별력 없는 무지한 군중들처럼 꾸중 듣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시대의 징조를 풀이할 줄 모르는 이들, 지혜의 눈, 혜안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래서 눈먼 맹신, 광신인 것입니다. 개신교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성경을 신문 보듯 하고, 신문을 성경 보듯 했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시대의 징표를 헤아리기 위한 예언자적 자세입니다.
이어지는 복음의 주제는 “늦기 전에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무엇보다 회개와 화해는 늦출 수 없습니다. 그날 맺힌 것은 그날 풀어야 합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이자 은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자에게 주시는 이런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차고 넘치는 정보와 지식의 시대, 분별력의 지혜가, 혜안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중심의 일치의 삶을 굳게 하시며, 참 좋은 분별력의 지혜도 지니게 하십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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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12,56)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오늘 복음(루카12,54-59)은 '시대를 알아보라'는 말씀과 '늦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시대의 모습을 '나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지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성령의 불로 인한 혼란과 분열이 아니라, 육의 행실들의 결과인 혼란과 분열이 가정과 나라와 지구공동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정치판의 싸움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먹을 것이 없어 기근에 허덕이는 이들과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가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종말의 모습인 '재난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0-11)
이렇게 보여지고 있는 이 시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로 오늘 복음 후반부의 말씀인 '늦기 전에 얼른 화해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는 나와 너의 회개와 공동체의 회개가 점점 더 혼란과 분열을 크게 하고, 그것이 세상 종말을 앞당기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지금 이 시대는 '화해의 시대, 회개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애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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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Xn9lfyYA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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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 56)
올바른 길로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생명의 길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이란
신앙인들이
먼저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먼저 함께
살아가는
화해와 평화가
필요합니다.
화해와 평화를
담고 실천하기에는
마음과 정신이
너무 얕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올바른 삶으로
바뀌길 싫어하는
우리의 문제점들을
주님께서는
잘 가르쳐주십니다.
새로운 대안과
새로운 안목이
필요한 우리의
생활입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신앙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듭니다.
위선자에서
벗어나는
올바른 길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은
물고 뜯고
싸우는 삶을
멈추고
인간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임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인간성의 파괴는
자연의 파괴이며
신앙의 파괴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화해와 용서라는
맑은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함께 잘 살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치를
이 시대에 가장
잘 적용시키는 길은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적극적이고
올바른 실천으로
이 시대의
징조를 깨닫고
올바른 표징이
되는 길입니다.
이 시대를
올바르게
풀이하는 길은
주님과 함께
올바른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실천이
참된 풀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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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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