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맞이 노정애
쉰 살의 시작은 좀 특별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그날 만은 나에게 선물 같은 날이 되었으면 했다. 홍콩의 침사추이.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터다운이 0을 알릴 때 꺼졌던 도시의 조명들이 일제히 불을 밝히면서 ‘Happy New Year’ 외친다. 어둠을 깨고 나온 빛이 세상을 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도시의 빛들이 물에 쏟아져 출렁이는 그 곳에서 영화 속 주인공처럼 50살의 새해를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내일이면 쉰이 되는 날. 나는 홍콩이 아니라 정동진행 야간 열차에 앉아있었다. 홍콩에 못 가면 정동진이라도 가자는 야심찬 계획을 식구들에게 공표할 때 남편은 유별을 떤다며 뜨악한 표정이었고 딸아이는 그저 놀러 간다는 생각에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연말에 바쁘다며 선수를 치는 남편에게 우리끼리 가도 된다고 선심을 베풀자 혼자 있는 게 싫었는지 함께 가자고 했다. 새해 맞이용 왕복 열차표를 예약했다. 12월 31일 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주변을 보니 친구들과 오거나 모임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시작부터 한 잔 하는지 시끌벅적 요란했다. 연인들끼리 온 커플은 꼭 붙어 앉아 노트북에 저장된 영화를 보면서 준비해온 간식을 먹었다. 담요를 함께 덮고 알콩달콩 깨가 쏟아졌다. 처음 타보는 야간 열차에 아무 준비 없이 탔다. 편안하게 한 숨 자고 나면 정동진에 도착할 것이라 생각했다. 낡은 열차의 좌석은 좁고 불편했다. 주위는 시끄럽다. 쉽게 잠들기가 힘들었다. 기차는 왜 그리 천천히 가는지. 연말이라 연일 이어지는 술자리에 지쳐있던 남편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화산처럼 달아올라 있어 눈을 마주치기도 겁이 났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그냥 집에서 조용히 보냈어야 했나 싶어 슬슬 후회가 밀려왔다.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해가 뜰 때까지 기차에 앉아서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모두 내리라고 했다. 시간 맞춰서 서울 가는 기차에 타라는 안내 방송만 나왔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 해변으로 갔다. 그곳에는 영하10도를 밑도는 강추위에도 들뜨고 행복한 표정의 웃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추위를 피해볼 생각에 들른 카페나 식당은 먼저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다들 너무나 부지런했다. 아침 6시. 한 방송사의 신년 맞이 특별 무대가 해변에 만들어져 있었다. 삭풍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나운서가 환한 얼굴로 새해 덕담을 했다. 무대 주변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곧이어 유명한 남자 트로트가수가 나오더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무대 위의 그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볼과 손은 꽁꽁 얼어서 붉었다. 무용수들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몇 겹으로 무장하고도 발을 동동거리는 나. 무대 위에서 흔들림 없이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붇는 그들. 사는 게 쉽지 않음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 일출 시간이 다가왔다. 사람들이 해변으로 모여들었다. 어디서 그렇게 다 쏟아져 나왔는지 인파로 출렁였다. 바다를 보며 수평선 너머의 일출을 기다리는 그 시간. 모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이런! 아무리 기다려도 수평선 너머에서는 해가 뜨지 않았다. 해는 해변의 오른쪽 낮은 산 위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들어내는 해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벅찼다. 조금 전까지 힘들고 짜증이 났었다. 사서 고생한 이 여행을 후회하며 식구들 눈치만 살폈다. 그런 지친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왠지 올해는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았다. 힘든 일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해처럼 내 마음에도 솟아 올랐다. 남편과 아이의 얼굴에도 태양의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우리는 해가 다 오를 때 까지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하나의 태양이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해 하나씩을 선물했다. 우리는 자신의 해를 한 덩이씩 안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똑 같은 열차인데 한결 편안하게 느껴졌다. 열차안 사람들도 더 밝은 표정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새 해를 내 것으로 품고 소담하게 시작하나보다. 그해 나는 새로운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 같았다. 나만의 해를 가슴에 품고 지낸 1년은 지난해와 달랐다. 삶에 큰 변화는 없었는데도 더 좋게 느껴지곤 했다. 매년 새로운 해를 선물 받고 싶어졌다. 다음 해는 장거리를 피해 서울 남산에서, 그 다음은 장거리도 추위도 피할 수 있는 63빌딩 꼭대기에서 일출을 보았다. 새 해를 내 것으로 하는 행위니 어디를 가도 상관없었다. 멀리 홍콩까지 가고 싶었던 마음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나만의 해를 품는 특별한 새해 맞이 행사가 정착된 것이다. 행사의 요령이 조금 더 늘었다. 나만 몰랐지 우리 동네에는 공원의 전망대가 해맞이 명소였다. 그 날만 특별히 일찍 문을 연다고 했다. 따로 예약할 필요도 없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여유롭게 그 곳으로 갔다. 전망대에 있는 카페도 문을 열어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일출을 기다렸다. 동네사람들을 만나고 딸아이 친구들도 만나니 오순도순 정답다. 저 멀리 도심의 집들 사이로 해가 떠올랐다. 우리들은 그 순간 함께 박수를 치며 환호 했다.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건네며 따뜻하게 한 해를 시작했다. 새해 출발부터 훈훈했다. 역시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더 좋은가 보다. 그날 이후 더 이상 먼 곳으로 가지 않는다. 1월 1일 아침이면 동네 공원으로 가서 전망대에 오른다. 새 출발하는 마음으로 유효기간 1년의 붉은 해 한 덩이를 선물 받는다. 곧 새해다. 무탈하게 보낸 지난해에 감사하며 가슴 벅차게 나만의 해를 맞을 것이다. 세월 가는 것도 두렵지 않다. 올해는 또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릴까?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선다.
노정애
부산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책과 인생>> 2003년 11월에 <도둑놈과 도둑님>으로 등단 <청바지>, <마지막 선물>, <향기에 취하다>외 다수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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