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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71편: 노인이 주의 의의 구원을 간구함
[1-3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피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수치를 당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는 다 누더기 옷과 같다(사 64:6). 우리의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의밖에 없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고 그의 복을 받을 자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값없이 주시는 의 안에서(롬 3:21-22)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얻는다.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시로, 언제나 가서 거할 바위이시며 우리의 반석이시며 산성이시다. 또 그는 우리의 구원을 명하시는 자이시다. 그것은 아마 천사들에게 내려지는 명령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환난 중에도 너무 염려할 것이 없다.
[4-6절]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손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를 정도로 개인적으로 친밀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악한 자들, 불의한 자들, 흉악한 자들 가운데서 위협을 느끼고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한다. 또 그는 하나님을 “주 여호와” 즉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셔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자로 부르며 그를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라고 고백한다. 그는 세상의 것들, 즉 돈이나 자녀를 소망으로 삼지 않았다. 또 그는 현실의 고난 중에서 낙망치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으로 그의 소망을 삼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알았고 그를 섬겼고 그를 의지하였다. 더욱이, 그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태에 있을 때에 벌써 그를 택하시고 붙드셨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엡 1:4).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7-9절]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시편 저자는 나이가 많이 든 자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이 든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대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한 느낌을 가졌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께 “나의 견고한 피난처”라고 말하였다. 견고한 피난처는 어떤 환난과 역경도 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또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라고 말했다. 참 신앙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시편 저자는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기도한다. 사람은 젊어서 힘있게 일할 때에는 자기 능력대로 대접을 받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지만, 늙어 힘이 쇠약한 때는 때때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인간 관계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것은 영원 세계를 결정하는 관계이다.
[10-13절]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원문에는 1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절에서 자신을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기를 구한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그의 원수들이 그를 위협하고 당을 지어 그를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고 그를 건질 자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를 모해하려 하였다. 시편 저자는 그때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한다. 시편에는 ‘속히’ 도와주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구한 기도가 종종 나온다(시 22:19; 38:22; 40:13; 70:1, 5; 71:12; 141:1). 성도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 같고 더디 도우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신다(고전 10:13).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파하셔서 그들이 수치와 욕을 당케 하시기를 구한다. 그런 기도를 올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와 의의 증거를 위해, 또 땅 위에서 도덕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이다.
[14-16절]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시편 저자는 ‘주의 의’ 곧 하나님의 의에 대해 또 말한다. 본 시편에는 ‘주의 의’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2, 15, 16, 19, 24절). ‘의’는 도덕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주의 의’는 하나님의 긍휼과 대속(代贖)의 은혜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성도들을 그들의 행위대로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긍휼과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대하셔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의 대속 제물 됨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증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의를 이루셨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롬 10:2-4),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 되셨다(롬 3:21-22; 고전 1:30).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을 항상 소망하며 더욱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구원, 또 기도 응답과 승리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더욱 더욱 찬송하기를 결심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종일 전하며 주의 의만 진술하겠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방 세계에 나아가 전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만 전하기로 작정하였었다(고전 2:1-2).
[17-18절]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白首)[흰머리]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교훈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신 6:4-7).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성경 진리로 교훈해야 하고 자녀들은 그 교훈을 잘 받아야 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흰머리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간구한다.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사람은 평안을 잃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실수하고 범죄할 것이다. 생애의 끝날까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지켜주시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소원하는 자는 깨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르게 살고 고의로 불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을 전하는 자가 되었고 또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되기를 구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대해 말하기를,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벧전 2:9).
[19-2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大事)[큰 일]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하나님의 의는 지극히 높고 고상하며 순결하며 그것은 큰 구원의 일로 나타났다. 이런 큰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여주셨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지고 성도가 당하는 심히 어려운 많은 일들도 다 그러하다. 의인은 고난이 많다(시 34:19). 우리의 실수에 대한 징벌의 고난이든지 단지 인격 훈련을 위한 고난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것들을 많이 경험케 하셨다. 그러나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주신다(시 34:19).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다.
[22-24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에메스)[진리](KJV, NASB)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비파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의 진리를 찬양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도에게 참으로 복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노래하고 악기 연주를 해야 옳다. 또 시편 저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찬송은 기쁘고 즐거운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고난받을 때 기도하지만, 구원을 체험할 때 찬송한다. 시편 저자는 또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하겠다고 말한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행위가 완전한 자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로 수치를 당케 하셨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한다.
본 시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할 바위와 산성이 되신다. 우리는 평소에도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특히 환난 때에 그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긍휼로 주신 의, 곧 구약시대에는 제사 제도로 상징되었고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밝히 드러난 의이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우리는 이 의를 의지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며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여 얻는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노년을 하나님께 의탁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늙은 때, 흰머리가 될 때 버리지 않으시고 힘이 쇠약한 때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노후를 그에게 의탁하자.
넷째로, 우리는 남은 여생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전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셨고 또 지켜주심을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의를 증거하자.
(간증: 몇년(2006년)전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성전에서 주님께 원망으로 애절하게 기도하였다. 꿈에 주님께서 찾아왔어“고난이 유익이다”(약할 때 강하다)말씀을 들려주시며 복음 성가중“주님 예수 나의동산”복음성가와 찬송가202장을 들려주셨고, 환난으로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됨을 감사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꿈에 에스겔 책을 보여주셨는데 나의 영이 에스겔서를 알게 하셨고. 에스겔 선지자 사명 파숫군 사명(영의 파숫꾼으로 복음을 지켜라고 말씀 해 주셨다,롬16:17-26.빌3:17-20.계시록3:20.)을 주셨다. 그리고 15년 사역에 대하여 칭찬으로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11톤 화물차량에 포도송이 열매가 반차가(마지막에 완차) 실어져 쌓혀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좁은 문 좁은 길로 끝까지 주신 사명 (에스겔 사명. 빚진자의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힘을 주셨다. (눅22;42-43.고전 9:18-27.요한1서 2:15-17) 성령교회 김 종표 목사.아멘)
(간증:2018.7.중순경 주님께서 세상의 영웅과 호걸들과 바벨탑신앙(대형교회의 인본주의 신앙)의사람들을비유적으로 "흰 쟁반위에 담긴 뚱등거리로 보여주셨다'.(요일2:15-17.계3:20-22)즉 천성가는 천로역전의 주인공과같이 좁은문, 좁은길 들어 가는것이 천국 가는 길 임을 가르쳐주셨다. 주께서 고린도후서 4장10-11절 말씀이 진리(교리)라고 문자로 꿈에 보여주셨다. (고후4:1-18)성령교회 김목사.2018.11.8.)
(간증: 20전에 사명을 받을 때 주께서 그림 한장으로 환상을 보여주셨다. 즉 넓은 평야같은 곳에 넓은들에 아침에 햇살에 무력 무력자라 나는 벼들을 보여주시면서 저들에게 열매를 맺게 사역해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 20년 올해 가을에 그 벼들이 노란색을 황금색으로 물들어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열매 맺게 하는 것을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 장소 그 자리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2018.12.2. 성령교회 기도원 김목사.)
(간증: 부산에 어느 대형교회목사님의 기독교 칼빈 교리 말씀을 인덧넷으로 듣고 잤다. 주의 성령님께서 꿈에 그림 한장으로 해석해 주셨다. 그 교회가 자아실현 하는 사회주의 일인 독재 중국의 시 진핑 주석으로 비유해 보여주셨다. 즉 하나님나라를 구현 하지 않고 자기나라 자기왕국(세속과 세습) 담임목사 독재국가 형식적으로 하나님나라 구현하는 정상적인 교회사역라고하지 내용적으로는 자기왕국 독재국가 세속(세상)나라와 같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헌 구두를 구두약으로 딲으니 빛나는 새 구두가 되는 것을 보여주셨다. 지금까지 잘못된 비 진리의 신앙을 고쳐라고 가르쳐주셨다. 즉 세상의 안목과 자랑과 인본주의로 마귀에 속아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맛을 나는 소금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생명력으로 빛을 내어 새 생명을 살리는 밀알로 살아갈 것 가르쳐주셨다(고후4:7-18). 즉 하나님의 자녀 본질로 살아갈 것을 가르쳐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소경 따라 가면 둘 다 구덩이 빠진다고 가르쳐주셨다. 즉 믿음은 들음에 나므로 잘못된 비 진리를 들음으로 구원에 탈락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소원은 하나님나라건설입니다.(행1:3-8.주기문내용) 그런데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에 대한 실상(세습과세속의 자기왕국. 담임목사의 일인 독재왕국)을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해주셨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신앙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부인과 자가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10:38-39,눅13:22-30) 한국에 정통합동 신학박사(총신교수)이며 대형교회 담임 했던 목사님(신 성종)의 꿈에 지옥을 보고 온 간증에 의하면 대형교회와 잘나가던 목사님들이 지옥에 많이 와 있다고 하였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18장에서 마지막 날에 인자가 세상에 올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 하셨다. 성령교회.2019.1.30. 김 목사)
(간증: 로마서 7장22-25절에 묵상하는데 주님의 성령께서 그림 한장을 보여 주셨다. 성경의 진리대로 살지 않고 세상적인 욕심과 명예와 자기욕망(잠재의식)의 충족으로 사는 자는 흙탕물 속에서 뱀과 각종 더러운 벌레 와 짐승으로 비유해주셨다, 세습과세속의 대형교회의 자아실현 하는 자들은 두 주인(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보여주셨다. 오직 믿음(의)으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은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의인들의 삶(기적의 삶)이라는 것으로 보여주셨다.(요한15:1-14.빌3;17-21,눅4:7-18)
(간증: 어느 악귀에 잡힌자를 치유 기도하는데 그 환자의 입으로 성령께서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케함은” 찬송가 부르면 치유가 된다고 하여 치유를 받았다. 또한 성경책을 얼굴에 대면시킨바 떨면서 그 입으로 ‘내가 진화론 마귀인데 무저갱으로 들어간다면서 빠져나가는 현상을 보여주셨다. 그 진화론 마귀가 고등학교 대학교 등에서 수업할 때 들어와 정신을 혼미케 하여 그 인생에 대한 많은 부작용을 주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막아야 한다. 그렇치 아니하면 청소년 학생들에게 악한 마귀를 넣는 교육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옥을 보내기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마귀를 보내기위해서 만들었다고 하시고 그렇나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마귀에 미혹되어 따라간다고 말씀하셨다. 2019.2.3.김목사)
(간증: 대구에 어느 교회 목사님은 15년전에 교인이 100명정도로 부흥이 약간되자 자기의 욕심으로 2억원으로 칠곡쪽에 융자를내어 교회건축하여 목회하다가 부흥이 되지아니하자 망한사실이 있다. 다리의 골절과 여려가지 불운으로 만시창이된 상태로 본직을 만나 심령기도한바. 성령께서 망하게된 원인을 가르쳐주셨다. 즉 주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함으로 그런결과를 가져왔다는 주님의 응답이입니다. 즉 다웟는 항상 전쟁에 나갈때에는 먼저 하나님께서 기도하여 전략( 전투의 결과는 ... 올라가지 말고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기습공격을 하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받고 전투하여 승리한 사례가있다.그리고 다리 골절로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 맞아 부작용으로 고소하여 소송중에 있는데 주님의 성령께서 소송에서 승리 하지못할것이다고 가르쳐주셨다. 해결방법으로는 다웟의회개와같이 하나님의 (義)를 입어라는것입니다. 하나님의를 찾으라는 것이다.의란 한자로 양자(羊)밑에 나我가 들어가야 승리하는 義자가된다. 즉 하나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義와 희락과 평강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셨다(롬14:17)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나라의 삶은 주님과함께동행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것입니다.또한 요한15장7절에 에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말씀을하셨다.아멘.(2019.2,26.김 목사)
-대한민국 교회가 미혹의 영에게 구원관이 점령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란 말씀은 믿지 않는 이방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믿는 우리를 향해 하신 말씀임을 왜 모르는지 갑갑합니다.
교회만 다닐 뿐 육적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는 믿는 자라고 하겠지만, 이들은 실제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입니다.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성령도 받았고 은혜도 맞본 우리 같은 진짜 믿는 자들을 향하여 좁은 길로 들어가란 외침입니다.
성령을 받고 은혜를 맛보고 주님의 영광도 본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육신의 의지대로 악의 길로 행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데 이런 성경말씀은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바울이 말한 로마서의 그 믿음구원론만 단단히 믿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주장들을 하는지 비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 상항이 와도 주님이 찾아가시고 절대 구원을 잃지 않게 한다는 마치 칼빈의 구원예정론같이 몰고 갑니다.
귀한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듯 현대 교회는 육신은 어떤 죄를 범해도 주님은 우리 영을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는 교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이단으로 몰면서도 구원파의 교리를 은근히 각색해서 천국문을 넓은 개선문으로 만들고, 교회만 나와 등록만 하면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자라고 칼빈의 구원예정론을 인용해서 속이고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게 아니고 초청을 받는 것입니다. 초청과 택함은 전혀 다른 뜻입니다. 여기만 통과하면 다 구원이라고 미혹하니 이들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 보혈의 피를 얼마나 값싸게 만드는지 예수님이 통곡할 노릇입니다.
이렇게 천국에 가는 게 쉬우면 왜 믿는 우리에게 간절한 심정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로 걸으라고 하셨겠습니까?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이 이 정도로 가볍게 느껴지게 하다니…빌립보서에 나온 이 말씀이 농담인가요? 성령을 받아서 주님이 다 천국으로 알아서 인도 하시는데 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겠습니까? 내 안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이를 거스르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갈 때 성령은 근심하고 우리를 떠나므로 우리가 멸망하니 내 안의 성령님을 소멸치 말고 주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여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겠지요.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우리는 근본적으로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휘하에 있어서, 죄로부터 자유롭기가 매우 힘듭니다. 언제라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조건에 놓인 우리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들도 죄를 짓지 않거나 혹은 죄를 지어도 매일매일 세마포 옷을 빨라는, 즉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아니던가요? 사실 회개도 성령님이 인도하시지만 이마저 거부하면 성령님은 떠나시지요. 좁은 문, 좁은 길..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받아 천국 가면 모든 죄에서 완벽하게 해방되지만 이 세상에 살 때까지는 죄의 그늘에 늘 있기에 방심하지 말고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살라는 뜻이겠지요. 성령님이 들어와 우리의 구원이 무조건 백 퍼센트 이루어진다면 성경책이 뭐가 필요합니까? 성경책은 말씀대로 살고 세상과 분별하여 구원을 위해 올바른 길을 가라는 주님의 추상같은 지침서입니다. 성경이 필요한 이유가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 회원분들은 절대 니골라당의 구원관에 미혹되지 마시기 강력히 바랍니다.믿는 자는 늘 거룩하고 주님의 신성을 좇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애쓰면서, 믿음으로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유지하여 주님으로부터 잘했다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이 말씀은 주여주여 외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령을 받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는 능력을 행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성령을 받고 능력까지 행했는데 왜 지옥으로 가는 운명일까요? 이유는 단 한가지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을 거슬려 자기 의를 위하여 자기 소행대로 행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런 자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어떤 자들이 갈까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즉 말씀에따라 행함으로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기준이란 추상같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순종은 거룩한 행함으로 반드시 열매 맸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반드시 물어보시는 게 있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다가 왔니, 말씀대로 순종은 했니?” 여러분~ 이 질문에 자신 있습니까? 아무리 성령을 받고 능력을 행해도 육신의 소욕대로 가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만 받으면 천국 간다고요? 성령만 받으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로봇처럼 컨트럴 해서 성령만 받으면 다 천국에 간다고요? 머리로만 외치는 믿음이 아니고 순종함으로 믿음을 외치는 자들을 만나겠다는 말씀입니다. 부디 싸구려 구원론, 누구나 다 들어가는 구원론에 속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까지 거룩한 행군을 하십시오. 천국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매일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마음의 두 법이 싸우더라도 늘 승리하는 삶이 되십시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비웃었다. (14절) 이에 예수님은 말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5~16)
시대를 분별 못하는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앞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위선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에 의해 폭로될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 될 수 있다. 이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양적 교회 성장론자들도 사람들 앞에서 옳다 인정을 받으려고 교세 확장에 몰두한다. 그 결과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명예와 영광 그리고 부귀도 한꺼번에 얻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종국적으로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이들 목회자들에게 경고한다.
“모세나 선지자가 세례 요한까지이다”라는 말로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거짓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예수님은 보여야 했다. 세례 요한 이후는 바로 예수님의 시대를 말한다. 세례 요한 이후부터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 사람들은 의롭다 칭함 받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인류의 구속을 성취함으로 이런 새로운 시대는 열릴 것이다. 이런 시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존재의 의미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히 받을 것이다. (눅 16:17~18, 갈 3:10)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 비교
이 후 예수님은 곧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하셨다. 이를 감안한다면 본 비유는 좁게는 14~18절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배경하지만 넓게는 앞에서 이미 언급된 ‘탕자의 비유’와 ‘불의한 청지기 비유’까지 배경 한다. 그렇다면 종래 교회 강대상에서 보이는 이 비유에 대한 상식적인 해석은 잘못이다. 이 비유의 주목적이 지옥과 천국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많은 목회자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부차적(副次的)인 목적이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한다. 이 부자는 물론 종교적인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들 앞에 높임을 받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날마다 호의호식하는 인물로 예수님에 의해 설명됨이 아주 흥미롭다. 이 부자 또한 불쌍한 사람인 거지 나사로에게는 무관심했다.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산다는 점에서 거지 나사로는 유대 사회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거짓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핍박과 멸시를 당하는 의인일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교회사에서 수없이 반복된다.
현세와 달리 사후(死後) 이들 사이 차이가 너무나 벌어졌다. 부자로 상징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음부에서 고통을 당할 것을 이 비유는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멸시했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렸다. 이제 이 두 사람 사이 대화에 우리는 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곧 비유의 주목적이 기술되기 때문이다.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첫째 부탁은 나사로를 시켜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할 물 한 방울을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요구는 이렇게 거절당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 16:25~26절) 겉으로 보아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증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의 주목적이 아니다.
구원의 도를 말하는 구약 성경
이 때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부탁(눅 16:27~28)을 했다. “나사로를 자기의 아버지 집으로 보내 형제 5명이 자기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권면해 달라!” 이 요청은 부자가 음부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렸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를 안 부자는 자기의 5형제들만이라도 자신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를 원했다. 음부의 고통이 너무 크고 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에게 대답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9)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뜻한다. (눅 24:44) 구약 성경은 구원 얻기에 충분했다는 뜻이다. 구약 성경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된 메시아를 믿음으로 구원을 선취(先取)했다. 그러나 비유에서 부자로 상징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부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날마다 율법을 비롯한 구약을 읽고 묵상하면서도 메시아를 전혀 믿지 않았다. 그 대신 이들은 율법적 행위를 자랑하고 직위를 이용하여 세상 영광과 명예 그리고 부귀를 얻고 누리며 사는 일에 만족했다. 이들의 이런 노력은 합당한 대우를 받아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이들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초림주인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당연히 이들은 음부의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적 신앙보다 말씀 신앙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6:30)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이적을 늘 좋아했다. (고전 1:22) 비유 속의 부자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모세와 선지자가 남긴 하나님의 말씀보다 초자연적인 이적을 더 선호했다. 이것은 부자가 구약 성경의 핵심인 메시아를 전혀 몰랐다는 증거였다. 메시아 신앙이 없다면 이적을 더 좋아하고 추구하며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 신앙 이외 이적 신앙은 구원에 무용하다. 그의 잘못된 신앙을 안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가 본 비유의 주인공이어야 하며 비유의 주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예수님이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의 기록에서 메시아를 만나 믿지 못한다면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나타나 죽고 부활한다 해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절대로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말씀 신앙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서로 칭찬하는 바리새인들
“그럼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했을까?”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해 정확히 답한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 5:44)
마음의 동기가 잘못되어 이들은 날마다 구약을 연구하고 묵상할지라도 메시아를 믿지 못한다. 이들이 율법을 말하는 목적은 율법의 의에 대해 서로서로 칭찬하고 그리고 이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영광을 받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 자세가 이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믿지 못하게 방해했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마찬 가지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기복주의처럼 잘못된 신앙의 동기로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를 이루어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바리새인들이 율법 행위에 근거한 의를 자랑하고 서로에게 영광을 돌렸다. 마찬 가지로 교회 성장론자들도 교세를 근거하여 서로 등급을 매기고 서로 칭찬하며 하나님보다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한다. 이런 잘못된 성향은 결국 이들로 하여금 재림하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목회의 바벨탑을 쌓아 자랑하며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말하는 구세주 예수님을 이들이 진정 믿었다면 이들은 헛된 일을 버리고 자기부정의 삶에 힘쓰며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못해 한국 교계가 항상 시끄럽다.
결론
본 비유는 외형적인 것에 근거하여 자기 의를 자랑하기 좋아하는 목회자들은 마침내 자신을 구속한 예수 그리스도께 불순종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마저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들은 자신을 높여주고 명예와 영광을 주는 세상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예수님의 재림을 이들은 무의식적으로도 싫어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돈과 세상을 좋아하여 초림주 예수님을 싫어했던 것과 같이….
이것은 이들이 스스로 부른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믿는다면 거지 나사로처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며 사는 치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수가 늘어나 조국 교회가 정화되고 개혁되길 바라면서….
(간증: 어느 악귀에 잡힌자를 치유 기도하는데 그 환자의 입으로 성령께서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케함은” 찬송가 부르면 치유가 된다고 하여 치유를 받았다. 또한 성경책을 얼굴에 대면시킨바 떨면서 그 입으로 ‘내가 진화론 마귀인데 무저갱으로 들어간다면서 빠져나가는 현상을 보여주셨다. 그 진화론 마귀가 고등학교 대학교 등에서 수업할 때 들어와 정신을 혼미케 하여 그 인생에 대한 많은 부작용을 주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막아야 한다. 그렇치 아니하면 청소년 학생들에게 악한 마귀를 넣는 교육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옥을 보내기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마귀를 보내기위해서 만들었다고 하시고 그렇나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마귀에 미혹되어 따라간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특별히 전도자 사역를 시작할때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무저갱 같은 불속에서 고통하는 지옥이 있음을 알게해주셨어 너무나 감사합니다.(눅16:1-13) 2019.2.7.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