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커밍아웃
생리가 시작됐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무나 불편했다. 일단 방에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생리대를 들고 나가 화장실로 가서 해결을 한 다음 생리대는 최대한 작게 만들어 포장지로 싸서 주머니에 들고 나와야 했다. 너무나 불편해서 처음으로 탐폰이라는 걸 써보기로 했다. 새끼 손가락만한 길쭉하고 딱딱하고 하얀 그것을 나의 그 부분에 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은 사가지고 온 탐폰을 다시 책상 서랍 안에 꽁꽁 숨겨 놓았다.
기숙사 방에 들어가서 현준이 내 탐폰을 높이 들고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을 때는 정말 놀라서 죽는 줄 알았다.
현준이 내게 물었다.
“이게 뭐야?”
“우리 방엔 왜 왔어?”
아직 농구장 일도 서로 풀지 않았고 현준도 아직 나를 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너무나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내 탐폰을 들고 내 방에 서있는 거였다. 난 일단 모르는 척 했다.
“뭔데?”
“여기 바닥에 있던데?”
내가 빽하고 신경질을 냈다.
“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여기 아직 내 방이야.”
난 그의 손에서 탐폰을 낚아챘다.
“그게 뭐에다 쓰는 물건인데?”
난 당황했다.
“...음...아, 나 비염이 심해서 가끔 이걸 코에 넣고 콧물도 닦고 아, 또 코피 날 때도 좋아.”
“그래? 나 좀 빌리자!”
내가 미쳐 말릴 틈도 없이 그가 내 탐폰을 낚아채 갔다.
점심때 식당에 가서 난 자연스럽게 모노 옆에 앉았다. 그러자 모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야! 모노야… 쟤 또 왜 저래?”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내 식탁으로 오다가 날 보고는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아 버렸다. 모두들 나를 피했다. 범이마저 내 눈길을 피했다. 아이들의 ‘호모’ 어쩌구 ‘제임스’ 어쩌구 ’동우’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화가 동우의 짓이라고 믿는 아이들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동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악화시켰다니...
생리가 시작돼서 그런지 감정상태가 기복이 심했다.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맞은편 다른 식탁에서 밥을 먹던 현준이 나의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난 급히 코를 푸는 척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현준이 잠시 망설이다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그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드레곤이 내 앞에 털썩 앉았다. 현준이 급커브를 틀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현준이 급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티오피 아이들이 현준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드레곤이 내게 말했다.
“많이 먹어라, 우리 애기.”
순간 드레곤을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드레곤은 정말 내게 오빠같은 존재다. 나이는 비록 내가 5살이 많았지만 언제나 어른스러운 드레곤이다. 반면에 현준은 동생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앙숙 같다. 나이가 내가 5살이나 많은데도 현준은 날 놀려 먹었다 다정했다 차가웠다 부드러웠다 말을 붙였다 뗐다 정신이 없게 만든다. 하여튼 내 옆에 앉아 준 건 드레곤이다.
갑자기 뭔가 등에 섬뜩한 기운이라도 느낀 것처럼 드레곤이 뒤를 획하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드레곤과 현준의 눈싸움이 시작했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눈싸움은 둘 사이를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끝이 났다. 적어도 드레곤에게는. 드레곤은 다시 밥을 먹는데 열중했건만 현준만 여전히 드레곤쪽을 노려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해 했다.
정말 열아홉의 남자아이들이 하는 짓이란 여전히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드레곤이 가볍게 말했다.
“근데 모노는 그때 어디 있었지?”
“...?”
“우리 농구할 때 말이야.”
“아..그 때 모노 우리 점수 매기고 있었잖아?”
“처음엔 그랬지. 나중에 나갔잖아?”
그럼 지금 드레곤 말은 모노가 범인일 수도 있다는 소린가? 갑자기 울컥 했다.
“지금 모노를 의심하는 거야?”
드레곤이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난 벌떡 일어났다.
“사람 함부로 의심하는 거 아냐!”
“....”
“너 눈엔 모노가 그런 애로 밖에 안 보여? 모노가 애들이 무시해도 그저 가만히 있으니까 그렇게 만만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친구를 의심할 수가 있지? 너희들은 의리라는 말도 몰라? 아니, 너희들은 장난으로 던진 돌이 개구리를 죽일 수 있다는 것도 몰라? 너희들이 심심해서 재미로 하는 말들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생각이나 해봤냐고?”
어느새 식당의 아이들이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드레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이런 너의 행동이 진정 모노를 위하는 일일까?”
드레곤이 나가자 더바틈 애들이 그를 따랐다.
복싱시합을 하루 앞두고 제임스와 떡볶이와 순대를 먹고 학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난 학교의 방화사건에 대해서 물어봤다.
“한을 품은 아이들이 있을 만도 하지.”
제임스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네?”
“아이들이 공부하는 기계도 아니고 앞으로 음악수업 미술수업 체육수업을 모두 축소한다는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맨 처음 방화사건이 있던 날이. 전에는 음악실에 불이 났었고 이번엔 체육관. 뭔가 공통점이 있잖아?”
그런가... 공부라면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인데... 인성교육과 지성교육을 겸비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크라운이 예체능수업을 축소한다니..그건 좀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외국의 유명대학들의 입학기준은 우리나라 대학보다 학생들의 작문실력과 기타 재능을 더욱 비중 있게 심사한다는 것쯤은 크라운도 잘 알 텐데...
그때 우리 뒤에 오토바이가 다가오더니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헬멧을 벗은 이는 싸이보그였다.
“분위기 좋다. 애기야! 둘이 사귄다더니 진짜네. 야, 난 이렇게 보기 전에는 안 믿었었거든.”
뒤이어 선 오토바이의 주인공은 현준이었다.
싸이보그가 현준에게 말했다.
“둘이 잘 어울리지 않니? 애기랑 호모라...”
내가 나섰다.
“선생님한테 그런 말 너무 심하잖아!”
제임스의 눈치를 살폈다. 제임스가 애들을 한방 먹이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의외로 그는 조용했다.
“선생님! 얘들 학생부에 확 일러버려요. 이정도로 선생님을 모욕하는 거면 완전 정학감 아니에요?”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해서 호모는 잘못된 말이야. 그냥 동성애자라고 불러줘.”
내 귀를 의심했다. 뭐..뭐..뭐라고!!!!!!!!!!!!!!!!!!
“그래, 나 동성애자야. 난 남자를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제임스가 날 쳐다보았다.
“모진아... 이상하게 생각진 말아라. 복싱시합 도와준 거는 순수한 의도였어.”
순간 아까 먹은 순대가 올라오려고 했다. 입을 막았다.
현준이와 로보캅이 서로 황당한 시선을 교환했다.
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제임스 앞에서 토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제임스가 오해할 테니까... 자기가 게이라는 소리를 듣고 토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순 없다. 설령 사실이 그렇더라도 말이다.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골목에 숨어서 난 실컷 토했다. 평소에 사회와 환경과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과 차별 없는 사고를 가져왔다고 자부했던 나였다. 제임스가 게이면 어떻고 외계인이면 어때. 그냥 그는 좋은 사람이잖아. 그를 이성으로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이젠...이젠 끝이다. 끝. 우웩!
누군가 내 등을 쳐주고 있었다. 제발 제임스가 아니기를...
건네준 물로 입을 헹구고 돌아보니 다행히 제임스는 아니었다. 현준이었다.
“골프선생 아까 네 표정 때문에 더 충격 받은 거 같다.”
“....”
“난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난...몰랐어.”
“다들 의심은 했지만 확신은 없었지. 그 선생 이렇게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랬구나...그래도 제임스 참 용감하네.”
“제임스?”
“아, 그냥 그렇게 불러. 친구니까.”
현준이가 망설이다 말했다.
“농구할 땐 미안했다.”
“애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
“나랑 같은 방을 쓰긴 했지만 절대 친한 사이가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 아냐?”
“....너 말이 맞나봐.”
“...?”
“나 호모포비아 같다.”
“너가?”
“널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이상한 생각도 들고 ...”
“너 그거 아니야. 호모포비아 절대 아니야....아후, 나도 모르겠다.”
“너에 대한 소문도 있어.”
“나도 게이라고?”
“아니. 트랜스 젠더. 원래 여잔데 성전환수술로 남자가 돼서 우리 학교로 전학 온 거라고.”
난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우습게 여겨졌다.
"뭐? 하하하하...내가 진짜 미치겠다. 아무래도 빨리 떠야겠어."
“뜨다니?”
“아니야.”
“아직 짐 안 쌌더라?”
“말했잖아. 안 나갈 거라니까? 왜? 내가 싸이보그가 KO시킬까봐 걱정 되냐?”
“허풍은....”
“걱정마라. 싸이보그니까 괜찮잖아.”
‘싸이보그니까 괜찮아’라는 영화제목으로 농담한 건데 현준이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현준이의 오토바이 뒤에 타서 학교 기숙사로 돌아 왔다. 내가 현준에게 말했다.
“내가 방 옮길게. 우리 방으로 다시 돌아와. 모노랑 다시 같은 방 써줘. 모노한테는 네가 유일한 친구잖아.”
현준이 대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