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콘텐츠에서 찾아낸 철학사상의 흐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에서 철학사상의 흐름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치히로는 우리들과 사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 속에서 방황하는 과정이 나타난다.
그 과정 역시 치히로가 의도한 대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소한 실수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다른 세계 속에서 치히로는 살기 위해 일을 하였고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다.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치히로는 센 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 고난을 겪으면서도 도움을 주는 존재를 만나서 극복하기도 한다.
결국 도움을 주는 존재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지 덕분에 자신의 이름인 치히로를 되찾게 된다.
우리는 철학 사상가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름 즉,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다하고 있다.
서양 철학자와 동양 철학자 역시 우리와 동등한 사람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와 철학자와의 다른 점은 그저 책과 논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표현하는 것이 철학사상의 흐름을 대변해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이름을 되찾아오는 과정 역시 철학사상의 흐름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의 정체성은 다르며, 우리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다르기도 하다.
우리는 저마다 사소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터에서나 아니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숨겨지거나 바뀌고 있다.
일터에서는 직위로 불리거나 공동체에서는 별명으로 불리거나 가상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 즉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 존재는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 , 가족, 친구 등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도와준다.
마르크스 옆에는 엥겔스가 있었고, 공자와 맹자, 예수는 제자가 있었다.
마르크스가 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표현하고자 했지만, 그 과정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정체성인 책을 마르크스의 노트를 해석해 작성해 주었다.
공자와 맹자는 제자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언행을 각각 논어와 맹자로 나타낼 수 있었다.
예수는 제자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 널리 퍼질 수 있었다.
나를 아껴주고 존경하는 사람이 나의 정체성을 대신 써주고 보존하고 퍼뜨리므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에서 철학사상의 흐름을 찾아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인 이름이 생겨나고 우리는 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 노력 중의 하나가 자신이 찾은 어느 정도의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표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타인에게 알려지고 타인 중에서 나를 아껴주고 존경하는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그 사람이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 표출하는 것에 도움을 주거나 표출된 것을 보존하여 널리 퍼트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을 쓰인 것이 보존되어 널리 퍼트리는 것이 철학사상의 흐름이다.
첫댓글 요즘처럼 다양한 도구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꼭 "책"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구만 필요한 것은 아니랍니다. 센과 치히로라고 하는 영상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이렇게 까페 글쓰기로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이름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다만 이름을 붙이는 사람과 그렇게 불리는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잘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지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사람과 그렇게 불리는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다른 생각을 통해 이름을 붙이는 사람의 생각이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 붙이는 사람 조차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그렇게 불리는 사람의 생각이 채워주면서
이름을 붙이는 사람 생각의 완성도를 더 높여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는 있지만 그 부정적인 것을 다른 사람이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시도로 인해
이름을 붙이는 사람의 생각을 더 널리 알려지고 다른 사람도 이름을 붙이는 사람의 생각을 느끼면서
이름을 붙이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 자신의 색깔로 다시 나타내서 자신의 철학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철학이 탄생되고 다양한 철학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4차원적소년(15이진성) 철학의 탄생, 다양성이라는 말 좋군요. 사회학과이니까 이름을 붙이는 행위, 곧 "명명"이라는 행위의 정치사회학적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댓글이었어요.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지배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성서에서는 인간이 피조물에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대신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일방적일 뿐 아니라, 대상의 특징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 폭력성이 수반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댓글에서 바람을 밝힌 것처럼, "이름 붙이는 조차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그렇게 불리는 사람의 생각이 채워"주는 바람직한 관계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해요.
@호밀밭파수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더니 다들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판단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자신은 판단 당하기 싫으면서 남한테는 하는 이 행위야 말로 폭력성이 있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하나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사회학을 배우면서 위선적인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저 자신이 위선적인 사람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대신 국어/국문학과 철학을 복수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점점 극복하고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처럼 인문학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인문학이 다양한 사람들의 행동, 생각, 표현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