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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말입니다
이번 주말은 봄꽃 여행이라도 한번 해보십시오
평안한 아코회원님들의 주말이 더 행복해지시기 바라며
오늘은 봄 밤에 어울릴만한 글 한편 내려 놓고 갑니다
조금 긴 글 싫어하시는 분도 한번 구독해 보시라 권합니다
우리들 삶에서 우정이란 건 어떤 건가 진지하게 다뤄 본 단편소설입니다
언제나 아코회원님의 아름다운 시간 소망합니다
불루보트
우정여행
- 부우웅
갑자기 부산해 진 객실에서 눈을 떴다.
거제를 돌아올 때 깜빡 잠이 들었는데 내항으로 들어서면서 울린 고동소리에 선실은 갑자기 부산해졌고 나도 선잠을 깨고 일어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선실의 동그란 알루미늄 창까지 들어 올려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스라이 어둑해지는 부산항의 정경이 눈에 낯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기억에 남는 곳들이 눈에 잡혔다.
- 다왔심니더 퍼뜩 일어나이소
말투는 억세지만 까칠하지 않은 내 옆자리 부인이 모자로 얼굴을 덮고 두 사람 정도의 자리를 차지한 체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남자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인이 멋쩍게 웃었다.
- 멀미한다 캄시로 술을 먹었어예 그러찮아도 배타면 어지러운데 여독치주/旅毒治酒라카면서 마시더마는 이래예
나도 부인을 보고 의미 없이 마주 웃었다.
- 다 왔심니더 어서 일어나이소 어서예
부인이 모자를 벗기고 남자의 머리를 흔들자 간신히 남자가 눈을 뜨고 어리둥절해서 사방을 훑어본 후 귀찮은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낯설지 않은 백발의 깡마른 얼굴이었다.
- 보소 보소
누군가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선실 밖으로 나가려는 내 등 뒤에서 탁하게 들렸으나 나는 무시하고 선실 문을 열었다.
부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연이어 들렸다.
- 보이소 쎄엔님예 부르네예
다급한 부인의 말에 무심코 뒤돌아보니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으로 부인이 깨우던 남자가 웃고 있었다.
- 내 모르겠나?
- 누구 말하는 겁니까?
- 내다 내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친숙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당돌한 말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 글쎄요
남자는 답답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며 퍼석하게 웃었다.
- 니 제비 맞재?
- 누구신지?
- 하 자쓱 니는 항개도 안변했네 내 똥돼지 아이가 김해똥돼지 도곤이 김도곤이 말이다
내 별명 제비라고 정확히 부르는 그를 자세히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김도곤은 아니었다.
그가 김도곤이라면 세월이 아무리 흘렀다 해서 내가 친구를 못 알아 볼 리는 없었다.
180cm 키는 엇비슷해도 불과 50kg도 나가지 않는 남자의 중량이 105kg이었던 내 친구 김도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고 앞머리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 백발의 남자는 내 기억속의 김도곤과 전혀 비교되지 않았다.
- 햐 이자쓱 이런데서 만나다니 참 반갑다야
계속 아는 척하는 남자를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어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의 왼손을 오른손으로 와락 끌어당기며 남자가 다시 말했다.
- 그동안 오데 있었노? 제비 니 참 안변했다 그대로네?
- 이 쎄엔님이 제빙기요?
- 그래 일마가 제비다 오늘이 며칠이고? 야를 요게서 만난거 봉께 오늘은 손 안타는 날인갑다
계속 나를 제비라고 부르는 그 남자가 김도곤 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기억을 정조준 해봐도 역시 영점이 맞지 않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부인과 다시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의 오른팔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는 분명히 검은 가죽장갑 낀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을 잡고 있었다.
만약 김도곤이 라면 오른손이 없어야 했다.
졸업 무렵 이웃여학교 여학생에게 냉가슴 앓던 김도곤에게 연애편지를 대필해 준적이 있었다.
김도곤은 내가 써준 대필연애편지를 3일이나 벼르다 간신히 그 여학생에게 전해 주었지만 그러나 연애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학원 앞에서 김해 가는 통학열차를 놓치고 이틀은 역전대합실에서 자고 하루는 우리 집에서 자면서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도곤은 떨리는 가슴으로 주머니에 간직했던 연애편지를 그 여학생에게 슬며시 건넸다.
허지만 너무 긴장했던 김도곤이 그 여학생에게 전한 것은 왼쪽 포켓에 넣었던 내가 써준 대필연애편지가 아니고 부모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오른쪽 호주머니의 낙제점수가 고스란히 기록된 성적표였다.
그리고 그 후 졸업 때까지 다시는 그 여학생을 만날 수 없었다.
초연의 좌절과 번민에 괴로워하던 김도곤은 졸업 후 자원하자마자 월남전에 참전해서 정글에 그의 오른손을 두고 왔다는 정확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그의 오른손을 유심히 쳐다본 것이다.
- 아 이팔 때문에 그러나? 이 팔은 가짜다 디지털 팔이다 봐라
나의 시선을 의식한 남자가 얼른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검은 가죽장갑을 벗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착각할 정도로 섬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나를 보고 껄껄 웃는 그가 김도곤 임을 비로소 확신했다.
- 어떻노? 진짜같재? 요새는 세상 참 좋다 아이가?
- 아 네가 김도곤이 맞구나
- 그래 자쓱아 니 머리 참 좋은 놈이었는데 기억은 영 하꼬라이다 친구도 몬 알아보는 그 대가리 머할라꼬 가지고 다니노?
미안하다 도곤아 네가 너무 변해서 몰라봤다 계절 같은 세월 때문에 자네를 몰라 본 것만 아니고 자네의 오른손이 자네를 의심하게 했구나 정말미안하다 라고 말하며 나는 두 손으로 김도곤의 오른손 의족을 잡았다.
- 니 꼼장어 오랜만에 묵어보재?
- 응 참 오랜만이다 그러니까 40년은 됐나보네
- 꼼장어 맛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그런데 막걸리 맛은 영 아이다 머라카몬 좋겠노? 꼼장어는 옛날 영도다리고 막걸리는 부산대교하고 같다카몬 이해 될랑가모르겠다
김도곤은 43년 만에 찾아 온 부산에 대한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스듬히 보이는 구 영도다리와 부산대교를 비교해서 말하며 자갈치시장의 제일 후미진 마지막 조그만 그의 식당 안에서 우리를 위해 열심히 안주 만드는 부인을 불렀다.
- 니도 여 온나 오늘은 영업도 때리치아뿌리라
- 다됐심니더 지금 갑니더
부인이 꼼장어와 막걸리를 마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안주로 가오리 찜을 내왔다.
- 가오리 찜입니더 막걸리에는 꼼장어보다 더 좋아예 그런데 참 많이 변했지예?
- 너무 변했네요 이 친구 105KG짜리 유도선수였는데
- 그기 아이고예 부산 말입니더
- 아 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내일 내하고 우리 그때 싸돌아 댕기던데 다 한번 돌아보자 니도 갈끼재?
- 가게는 우짜고예?
- 내 친구 찾았는데 영업이 문제가? 제비 일마이거 아니었으몬 내 고등학교도 졸업 못했을끼다 이참에 신세 갚아야재
김도곤이 금방비운 노란 양은 잔을 내게 넘겨주며 자신의 부인을 쳐다보자 부인은 내가 들고 있는 잔에 찰랑찰랑 술을 채우며 다시 웃었다.
- 술은 넘치야 제맛이라 안캅니꺼? 지는 제비쎄엔님보고 머라캐야 하능기요?
- 머라카기는 내가 학교 댕길 때 쎄이야 캤응께 아주버니라 캐야재
- 그렇네예 요 부산은 우짠일입니꺼?
- 네 통영에 볼 있어 갔다 그냥 한번 둘러 가려고 왔습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빈말이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둘러 댄 말이었다.
- 하이고 우리도 언제 아주버니처럼 여행이나 한번 번듯하게 했으몬 좋겠심니더 나는 이 할배하고 평생 살면서 제주도도 한번 못가봤심니더
- 울릉도는 가봤다 아이가 울릉도나 제주도나 다 섬 아이가
- 아주버니는 제주도 가봤지예?
- 네 회사영업소가 있어서 자주 다닌 편이었습니다
- 제주도에 영업소도 있나? 그라몬 니 회사가 제법 큰 모양이재? 허기사 제비 니는 꼭 크게 될끼라고 믿었다마는 그래도 상당히 성공했네? 직원은 몇 명이나되노?
- 응 뭐 그저 한 칠팔십명
- 직원이 그렇게 많은께나 제주도에 영업소도 차렸능가베예 우리는 평생 이 가게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 봤심니더
- 잘됐다 이참에 제비절마 덕 좀 보자 우리 다음 달에 제주도 한번 갔다오자 제비절마가 니 생일인데 우리 밥이야 안 믹이 주겄나?
- 참말이라예?
- 내가 언제 빈말하더나?
- 하이고야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칸다카더마는 그 말이 딱 맞아삐리네예
- 우리 제주도 가는 배만타면 그다음엔 니가 다 알아서 해 줄끼재?
- 그럼
나는 그 이상 더 언질을 줄 수 없어 엉뚱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역사 선생님이 원술랑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김승호의 아들 최무룡이라고 말한 후 체벌하는 선생님의 출석부를 오른팔로 막아내며 당당했던 모교의 유도선수 김도곤이 오른팔을 잃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 팔은 자네가 월남에서 귀국하기 한 달 전에 잃었다면서?
- 그때 머할라꼬 자원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소대에 신병이 하나 왔는데 오자마자 말라리아에 걸려 내가 대신 지원 나갔다 팔만 한쪽 날리고 말았다 아이가
- 자네의 천성으로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거야
- 하도 오래돼서 이름도 잊아삤다 하여튼 그 우범지역 마을에 콩 고르러 갔는데 늙은 사람 몇 명만 있고 아무도 없더라
- 콩 고르다니?
- 베트콩 말이다 베트콩 골라낼 때는 노인이라해도 깔보면 안 되는데 제대말년이라 그랬는지 그 노인이 불쌍하더라 그래서 살려줄라꼬 마을 공터로 끌고 나오는데 그 노인이 허리춤에서 사제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딱 뽑대 그래서 내가 그 노인의 손을 꽉 잡았지 그라고 쾅하더니 내 팔에서 피가 흐르데
- 아프지도 않고?
- 아픈기 머꼬? 처음엔 내 손이 없어진 줄도 몰랐다 그기 콜라깡통으로 만든 사제 수류탄이어서 그랬지 진짜였으면 이 손 대신 머리통 날라갔을끼다
그리고 40여년이 흘렀다.
자갈치시장에서 마주보이는 부산대교의 데코레이션 불빛을 바라보며 김도곤과 졸업 후 헤어진 그 지난 세월을 부인과 함께 밤새도록 되짚어 올라갔다.
- 얼른 시마이하고 들어가자 오늘은 유난시리 춥다
- 네 어무이
부인은 어머니의 말에 대충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김도곤이 가게에 불쑥 나타났다.
- 아지매 내 막걸리 한잔만 주소
- 안된다 인자 문닫을라카는 중이다
- 달라카몬 주는 기지 머가 그리 말이 많노? 내 이팔 봐라 내 이 한 쪽팔 너그들 대신 월남 가서 잃어삐맀다 그런데 너그는 내한테 술 한 잔도 안준다꼬?
- 팔 잃은 기 자랑이가? 오데와서 또 행패 부릴라카노?
- 이 썅년들이 너그도 인간이가?
술에 취한 김도곤은 금방 정리하려던 두 모녀의 가게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이미 김도곤의 주살이 알려진 자갈치시장안의 사람들은 이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참견하려 들지 않았다.
구경꾼이 더 늘어나는 만큼 김도곤의 행패도 더 심해 졌다.
그때 부인은 김도곤의 앞으로 걸어가 다짜고짜 김도곤의 뺨을 후려쳤다.
야들한 처녀가 우람한 김도곤의 뺨을 때리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 하고 소리 질렀다.
그 소리는 김도곤의 행패를 잘 알고 있는 구경꾼들이 다음에 나올 김도곤의 반격과 무참하게 당할 처녀의 처지가 걱정스러운 탄식이었다.
처녀에게 얻어맞은 김도곤이 너무 황당했는지 움찔하는 사이 부인은 연거푸 두 차례 더 김도곤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뺨 세대를 얻어맞은 김도곤은 그제야 왼 주먹을 들어 부인을 내리칠 자세를 취했다.
부인은 김도곤의 그런 위세에 쫄지 않고 오히려 더 김도곤을 엄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 니 아직 왼손은 남아 있네 그 손목대기 몬내리 놓겠나?
구경만하고 있던 주위사람들과 부인의 어머니도 무서워 떨고 있는데 김도곤의 덩치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처녀의 몸으로 겁 없이 김도곤을 제압하는 부인을 모두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그 손목대기 사람팰라고 가지고 다니나? 참 몬난 자슥이네
부인의 단호하고 칼날 같은 추궁에 얼이 삐졌는지 아니면 너무 어처구니없었는지 김도곤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왼 주먹을 들고 서 있기만 했다.
부인은 주방 앞에서 겁에 질려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떠 오게 해서 막걸리 잔을 김도곤에게 내밀었다.
- 손은 이런데 쓰는 기다 자 받아라 아 어서 퍼뜩
저항력을 잃어버린 맹수처럼 김도곤은 슬그머니 왼팔을 내려 부인이 내미는 막걸리 잔을 받았다.
김도곤이 막걸리 한잔을 비우는 사이 부인은 가게 앞에 늘어선 구경꾼들을 쫓았다.
그리고 부인은 김도곤을 의자에 앉게 한 후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 보소 아재 내 아재 행패부리고 다니는 거 몇 번 봤심니더 그런데예 나는 아재가 천성이 난폭해서 그런 거 아이라는 거 압니더 이제 자학은 그만 하이소 만약 두 팔 다 잃었다면 우얄뻔 했습니꺼? 살인이라도 저질러야 분이 풀릴 거 같습니꺼? 아입니더 사람이 사는데 손 한 개가 문제 아입니더 마음이 중요한기라예 굳은 의지만 있다면 세상에 몬할 끼 뭐있겠습니꺼?
고개를 떨어뜨리고 묵묵히 막걸리만 마시던 김도곤이 술잔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먹으려하자 부인은 얼른 안주를 젓가락으로 집어 김도곤의 입으로 가져갔다.
김도곤이 부인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 드이소
김도곤은 부인이 넣어주려는 젓가락의 안주를 먹지 않고 한참 더 부인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나갔고 나가는 김도곤의 등을 향해 아재 갈 데가 없으면 우리 집에서 함께 고생한번 해 볼랍니꺼?라고 부인이 말했다.
김도곤은 가게 문을 열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생각해보고 고생할 각오되면 언제든지 오이소
김도곤은 그날 그 시간이후 다시는 자갈치시장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거의 한달 이상 김도곤이 자갈치시장에 나타나지 않아 모두 그에 대한 기억을 거의 잊어갈 무렵이었다.
- 왔능기요?
부인이 테이블을 정리하다 문 앞에 서있는 김도곤을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지만 김도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기굴하게 서 있기만 했다.
부인은 김도곤의 왼팔을 끌어 당겨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 밥은 묵었능기요? 아직 밥 안묵었능가베? 내 얼릉 밥차려 줄께요 잠시 기다리이소
부인은 재빨리 띠끈한 국밥을 말아 김도곤 앞에 놓았다.
말없이 국밥을 먹는 김도곤을 쳐다보던 부인이 국밥을 뜬 김도곤의 숟갈 위에 김치를 올려 주면서 말했다.
- 아재는 다른 남정네보다 몽둥이가 한 개 모자 랑께 그만큼 더 열심히 해야 삽니더 어차피 우리 옴마 힘이 딸려 사람하나 쓸려던 참이었심니더
국밥을 다 먹고 난 김도곤은 먹었던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가서 내려놓은 후 한바탕 손님들이 휩쓸고 지나가 어지럽게 늘려있는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바닥을 쓰는 동안 부인은 김도곤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고 김도곤이 다시 나타나자 놀랐던 부인의 어머니는 그제야 얼굴의 긴장을 풀고 김도곤의 눈치를 살폈다.
- 이 사람 아니었으면 지금 나는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 지나간 일 갖고 별 이야기 다 합니더 그만하이소 아주버니 부담스럽게
바닷바람과 햇볕에 그을리고 잔잔한 세월의 금들이 주룩주룩한 얼굴의 부인을 나는 천천히 다시 쳐다보았다.
구석구석 면밀히 살펴보아도 그렇게 다부져 보이지도 않고 강인해 보이지도 않는 그냥 평범하고 여려 보이는 보통부인이었다.
나이에 비해 주름하나 없던 아내의 고운 얼굴이 부인의 얼굴에 오버랩 되었다.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버틴다는 말이 무색하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나는 철저하게 빈손이 되어버렸을 때 집을 나가버린 아내를 찾지 않았다.
대신 선산을 둘러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나의 인생을 조용히 마감하려고 작정한 이 여행에서 김도곤을 예기치 않게 만나 김도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착잡한 심정으로 회의와 번민에 휩싸였다.
- 지가 처녀 때는 원래 숫기가 없어 잘 쏘다니지 않은 편이었어예 그런데 우연히 용두산에서 이 할배 고등학교 때 유도시합하는 거를 본적이 있었심니더 그때 심판 오심으로 우승은 못했지만 담담하게 심판판정에 순종하고 우승한 사람의 손을 번쩍 들어 주는 이 할배가 참 대단하게 보입디더 그런 사람이 망나니처럼 그라고 다니는 거 본께 마음이 참 아푸데예 운동한 사람이 본성은 착하다 아입니꺼
- 착하몬 머할끼고? 착하다고 밥믹이 주는 세상이가?
- 그래도 자네가 복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훌륭한 부인을 만날 수 있었잖나?
- 하모 그건 맞다 이 사람 식견이 다른 여자들하고 틀렸응께 나 같은 인간하고 살아 준거지
그렇게 말하고 김도곤이 질펀하게 웃었다.
웃는 그의 이마에 깊은 일자주름이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그 주름은 부인의 이마에 있는 주름과 너무 닮아 내 입가에 미소가 흐르게 했다.
부부란 살면서 닮는다 했는데 이 부부는 닮은 것이라고 이마에 깊게 패인 9시15분 같은 일자주름 밖에 없었다.
식당 문을 닫고 뒷집을 얻어 식당 안에서 통로를 낸 두 사람의 침실로 옮겨 계속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필요가 없었는데 김도곤이 내 손목시계를 보면서 불쑥 시간을 물었다.
나는 나의 손목시계 대신 벽에 걸린 낡은 벽시계를 보고 시간을 말했다.
- 네 시 다됐네
- 저 똥시계 말고
- 할배도 참 시간만 잘 맞으면 됐지 맨 날 저 시계보고 똥시계라 카요?
- 제비 저 아가 찬 시계하고 우리 시계하고 맞능가 볼라카는기다
내가 다시 나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말해 주자 김도곤은 히죽 웃으며 내 손목시계를 구경이나 한번 하자고 했다.
- 이기 자동이재? 자동은 언간한 자동차 한 대 값이라카던데 맞나?
김도곤이 내 시계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구경하는 사이 부인이 얼큰한 매운탕을 새로 끓여 오면서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을 가져와 내게 내 밀어 보였다.
- 아주버니 이 사진말인데예
부인이 내민 흑백사진 속엔 김도곤과 나를 비롯한 8사람이 여전히 옛 모습으로 있었다.
- 그거는 와 또 가지고 왔노? 없애빠라캤는데 참 말 안듣네
- 이거를 와 없앱니꺼 이 사진봉께 진짜로 아주버니는 한나도 안변했네예? 옛 모습 그대롭니더 그런데예 이 사진보면 분명히 우리할배 애인이 있능 거 같은데 누군지 영 알 수가 없어예
나는 흐느끼듯 웃었다 잊힌 잊을 수 없던 시절의 얼굴들을 흑백사진에서 모두 볼 수 있어 반가웠기 때문이다.
- 이건 연애하던 애들이 아닙니다
- 그라몬 뭐라예?
- 내가 팔공자 사진이라 안캤나
- 할배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이소 이 여학생이라예?
부인이 마디 굵어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여학생은 그 그림 중 제일 인물은 떨어졌지만 방송작가로 성공한 김명숙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또 웃었다.
- 그라몬 이 아라예?
- 그 그림 속엔 김도곤이 짝이 없습니다 도곤이 말처럼 팔공자사진일 뿐입니다
- 그라몬 인물이 비상한 이 여자는 누굽니꺼?
부인이 다시 찍은 사진 속 여학생은 관광호텔 딸 박수현이었다.
부인이 손가락으로 박수현을 찍자 김도곤이 대뜸 흐드러지게 말했다.
- 내가 몇 번이나 말했나? 그 아가 제비 일마 애인이었다 안카더나?
어느새 여명이 안개처럼 걷히고 찬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왔다.
김도곤과 부인이 물건 떼러 새벽경매장에 간 사이 나는 맞은편 섬 영도를 바라보며 몇 마리의 약아빠진 갈매기들과 함께 선창에 서 있었다.
갈매기는 아침거리를 찾으려고 어부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었고 나는 어젯밤 부인이 흑백사진 속에서 찍었던 박수현을 상상하고 있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던 박수현은 그래도 좋다면서 나를 사랑했던 여자였다.
멈추어버린 옛 얼굴이지만 문득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흑백사진을 꺼냈다.
사진은 네 번 접은 종이와 함께 나의 왼쪽 안주머니에서 나왔다.
어제 배안에서 김도곤을 만나기 전의 시간을 가만히 더듬어 보았다.
분명히 충무에서 배를 타기 전 오른쪽 가슴 안주머니에 넣어 뒀던 접은 종이가 왼쪽 가슴 안주머니에서 흑백사진과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네 번 접은 종이가 김도곤의 대필편지처럼 이상했지만 나는 네 번 접은 흰 종이를 다시 오른쪽 안주머니에 넣고 흑백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박수현이 아직도 변하지 않은 그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 어이 제비야 와서 이거 좀 밀어라
김도곤이 부인과 리어커에 짐을 잔득 싣고 힘들게 오고 있었다.
내가 김도곤의 리어커를 끌자 김도곤은 리어커의 뒤로 가서 부인 대신 리어커를 밀었고 부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 아주버니한테 이런 일 시킵니꺼? 이런 일 아무나 하는 줄 아는 가베?
- 제비는 맨 날 공중에 날라 다니기만 하는 줄 아나? 이런 일도 해봐야재 그래야 고생하며 사는 우리 오랫동안 기억할거 아이가
나는 복잡하게 얽힌 시장의 사람들 틈사이로 김도곤의 리어커를 끌며 김도곤은 종이나 섬유처럼 얇고 질긴 그래서 결코 추락하지 않을 삶이란 생각을 했다.
인생에서 절망을 느끼거나 희망을 바라보는 것은 삶의 높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끌어보는 리어카라서 숨이 차고 비틀거리긴 했지만 김도곤의 작은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나는 김도곤의 삶을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학창시절 졸업 무렵이었다.
김도곤을 불러 낸 담임이 거의 백지에 가까운 김도곤의 성적표를 들고 몹시 걱정스럽게 말했다.
- 자네 이 성적으로 어떻게 졸업할 것인지 심히 걱정스럽다
그때 김도곤은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보고 담임에게 쎄엔님요 세상사는 이치가 일등이 있으면 꽁지도 있는 법이라요 일등은 자칫하면 2등으로 밀려 날 수 있지만 꽁지는 아무리 밀려나도 꽁지 아입니꺼? 지는 앞으로 사는 것도 꽁지로 살낍니더 왜냐면요 꽁지만큼 편한 기 없거든예 그런 꽁지가 졸업은 하몬 머하겠습니꺼? 라고 소신 있게 말해서 담임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고생했습니더 힘들지예?
어느 틈에 막걸리와 김치 한 토막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와서 이마의 땀을 닦는 내게 고분하게 내밀었다.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리어카 끌고 왔는데 숨이 차서 실린더처럼 헐떡거리는 나를 보고 웃으며 부인은 김도곤을 나무랐다.
- 그 보이소 아주버니한테는 이런 일이 안 맞아예 당신은 몸에 배어 아무렇지 않아도 아주버니한테는 버거운 일입니더 다시는 이런 일 시키지 마이소
- 머라카노? 제비 절마 서울 가서 사업하는데 이것도 경험이 될끼다 요새 워커샵이라는 말 안 들어 봤나? 이런 일 할라꼬 돈 주고 간다카더라
- 맞습니다 진작 이런 일도 해봤어야 하는데 해보니까 할 만합니다
그리고 3일 동안 나는 김도곤의 밑에서 조수처럼 김도곤의 식당 일을 도왔다.
간곡하게 붙드는 김도곤을 뿌리칠 수 없었다기 보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도곤은 식당에서 나를 못된 양반집종놈 다루듯 했다.
요기나 식사하고 나간 손님의 자리가 조금만 어지럽혀 있어도 분통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불호령이 떨어 졌고 이틀째가 되자 빈정거리는 핀잔까지 섞었다.
- 제비 니 작은 가게라고 이런 일 우습게 보는 가베? 니는 번듯한 큰 회사사장이지만 나도 이 식당에서는 사장이다 그러니까 서울 너그 회사에서 하든 가락은 이자삐고 일해라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라라 안카더나?
- 그래도 친구끼리 너무 합니더 자기가 3일만 있다 가라고 사정사정 붙들어 놓고 하루 종일 쎄빠지게 일만 시키는기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꺼?
부인은 내가 힘들어 하는 것을 눈치 채고 김도곤을 나무랐으나 김도곤은 내가 3일간의 체류일정을 끝낼 때까지 두 손 가진 놈이 무슨 일을 못해? 라며 숨 쉴 틈 없이 일만 시켰다.
김도곤 밑에서 이틀을 일했는데 물 습진이 생겨 손바닥이 가쓰오부시처럼 일어났고 밤이 되면 부어오른 발의 통증을 맥주병으로 굴려 달랬다.
3일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 내일 아침 KTX 일반석 첫차 끊었다 니는 특실만 이용했겠지만 나는 간이 뜨거버 특실표는 몬샀다 특실이나 일반석이나 도착하는 거는 매 일반이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 참말로 해도 너무 하네예 둘도 없는 친구라카면서 3일 동안 그렇게 부리묵고 일당도 안주면서 차표하나 특실 끊으면 안 됩디꺼?
그러나 나는 서운하지 않았다.
내 일생을 털어 이번처럼 이렇게 고생해 본적이 없었지만 알 수 없는 격정이 울컥 치밀어 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김도곤의 손때가 묻어 빤들빤들한 가게 금고 안에 나의 시계를 몰래 풀어 놓고 새벽손님 때문에 역으로 마중 나올 수 없는 김도곤과 부인을 가게 앞에 세워둔 채 가급적 종종걸음으로 버스를 타기 위해 뛰듯이 걸었다
시속298km라는 자막이 화면에 뜰 때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누르스름하던 들판이 하얗게 서리꽃에 덮여 있었다.
그 들판에 이른 아침햇살이 불그스름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지나가는 홍익요원에게 커피를 한잔 사마시기 위해 호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었다.
익숙하게 잡혀야 할 지갑이 없었다.
깜짝 놀랐지만 부산진역으로 오는 버스타면서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 넣지 않고 안주머니에 넣은 것이 생각나 오른쪽가슴호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었는데 출근카드만한 물체가 잡혔다.
빛이 바랜 예금통장이었다.
그리고 호주머니 바닥에 또 하나의 작은 물건이 있었다.
오래되긴 했지만 금세 나무향이 터질 것 같은 동그란 목도장이었다.
나는 얼른 내가 입고 있는 버버리코트를 벗어 확인해 보았다.
분명히 나의 옷이었다.
통장을 펼쳐 보았다.
거의 10년 동안 한 번도 인출하지 않은 금액이 깨알 같은 숫자로 서너 줄을 남겨 놓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줄줄이 찍혀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에 쪽지가 접혀있었다.
쪽지엔 4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구불구불한 김도곤의 글씨가 눈에 선명했다.
제비야 내 니 유서봤다 좌절하지 말고 이거 갖고 다시 날아라.
니는 두 날개가 안 있나 나는 한쪽날개로도 잘날고 있다.
다시 날아서 박씨 물고 온나 니 올 때까지 안 죽고 기다릴끼다 알겠재? 니 믿는다.
김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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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편한 밤되십시오
좋은 소재의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고맙습니다,
네^ 장군님
정말감명깊게읽었읍니다 내 인생에 뭔가는 몰라도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친구란 옛말에 부모 팔아 산다고 했습니다..좋은 독후 평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잘읽어 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감상합니다.
네 탱구님
마지막에 뜨거운 감동이 밀려오네요. 감사합니다.
삼삼일님 소설의 기본이니까요 언제나 클라이막스가 끝이죠?
정말 감동적인 글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친구의 우정이 아닌가 싶네요. 나도 이런 멋진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천하문장가 님
돌아 보면 좋은 친구 김삿갓님 주변에도 있을 겁니다...삿갓님의 감성이 느껴지는 독후평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창작에 많은 도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삶이 묻어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끈끈한 우정의 글 감명 깊었습니다. 필자가 참말로 그런 막다른 형편 이었다면
더욱 더 친구의 우정이 값 있었을것 같네요. 용기내어 양팔을 갖었으니 힘있게 날으십시요......
뜻있는 용기 그리고 응원주셔서 고맙습니다 차후 창작에 많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샛님도 행복하고 화이팅하는 그런 날들로 채워 가시옵기 바랍니다
감동소설 우정여행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 ~~
고바유님 주말 행복하게 보내셨습니까? 내일 주일은 더 행복하소서
여행...좋죠...ㅎㅎ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세요..ㅎ
감사합니다..
기차 탄 기분입니다..ㅎ
기적소리 들릴 듯한 밤이네요
좋은 주말의 밤되십시오
화려한 글 감사합니다 좋은 주일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행복한 주일되십시오
몇번씩보게되네요 진정한 친구들 이야기 내곁에도 이런친구가 있음하네요 아름다운 우정이야기 와 은은히 다가오는 행복한 노래 장시간 즐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권도희 님
편하고 행복한 주일되셨나요? 권도희님 곁에 왜 이런 친구 없겠습니까? 있지만 상황설정이 안되어 못느낄 뿐이겠지요 ...친구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랍니다 오늘밤도 남은 시간 행복하시기 바랄께요 고운 꿈도 꾸시고요.....안녕^
감사합니다^^* 내일을 위한 편안한 저녁시간 되세요.
이븐현지님^-^아름다운 꿈 꾸는 행복한 밤 되십시오..늦은시간인데도 흔적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동적인 글 감사히 잘보고 갑니다
토영님 깊어가는 밤 평안하시길 빕니다
가슴찡한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감동적이네요.감사합니다.좋은글 주셔서~~
시골참새님 좋은 아침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