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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家門의 일반 내력
1. 本貫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일반국민들이 姓氏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高麗 文宗 이후부터 차차 보편화되었으며 실제로 국민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朝鮮말기부터이다.
文氏의 본관은 南平 단본이다. 문헌에는 南平, 江城, 丹城, 安東, 靈山, 保寧, 善山, 江陵, 河陽, 長淵, 咸平, 坡平, 甘泉, 旌善, 新月 외에도 156본이 있으나 감천, 정선, 신월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종인 남평문씨의 분파이고, 거의 문씨의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감천문씨와 정선문씨는 타성에서 轉化한 성씨로서 남평문씨와는 同姓異本으로 전한다. 즉, 감천문씨의 시조 원길(原吉)은 본디 慶州金氏였는데 선대가 중국에 들어 갔다가 문장이 뛰어나 文씨 성을 賜姓받고 문씨로 改姓했다고 하며, 정선문씨의 시조 임간(林幹)은 본디 全氏였는데 중국에 들어가 문명으로 문씨 성을 사성받고 文씨로 改姓하였다고 전해진다.
南平은 원래 백제시대의 未冬夫里縣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때 玄雄縣으로 개명하여 武州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南平郡으로 개칭하여 혹은 永平郡이라고도 하였으며 羅州牧에 속해 있었고 그 후에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에 편입되었다. 남평지역은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여 벼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무, 배추 등의 채소 재배도 많이 한다. 남평시장은 예로부터 주위 농촌지역의 가축 및 농산물 거래로 유명하며 많은 문화재를 지닌 고장이다.
남평文氏는 남한에만 약 8만가구 37만여명이 살고 있으며 성별인구 순위는 260성중 24위에 속하고 단일본으로서는 7위에 해당한다. 남평문씨는 단일민족의 단일혈통을 자랑하는 특색이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 감천문씨는 전국12.698명, 정선문씨는 8,366명으로 조사된 바 있다)
2. 始祖의 탄강설화
文氏의 大宗인 남평문씨의 시조 文多省은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長者池라는 연못가에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郡主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에 올라가 보니 그 위에 돌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있었다.
기이하게 생각한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文을 성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탄강설화속의 주인공 문다성(시호武成公)이 바로 남평문씨의 시조다. 시조의 탄강연대에 관해서는 문헌마다 기록이 조금씩 달라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일부 문헌에서는 신라 자비왕 15년(서기472년)에 남평에서 출생하여 서기 500년(지증왕1년)에 중시아랑이 되고, 540년(진흥왕1년)에 대국사, 577년(진지왕2년)에 대아랑 대국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문헌(청주한씨보첩 등)에서는 통일신라말 남평에서 출생하여 벼슬은 大將軍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고려 개국공신 29위 중 한 분으로서 南平伯에 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1731년 발간된 대동보에 시조의 벼슬이 고려 개국초의 관직인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으로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추측컨대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지역을 확보할 때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正史에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나주의 남평지방이 삼국시대때 백제영역이라는 것과 시호록에 문다성의 아들 문탁이 고려시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의 탄강연대가 신라말 고려초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위에다 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남평읍 풍촌리 장자못가에 장연서원(長淵書院)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享祠)하고 있다.
3. 家門의 번성기
고려조에서 남평문씨를 고려 명문의 위치에 올려 놓은 중흥조 文翼(시호敬節公)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98년(숙종3년) 좌·우찬성대부(左·右贊成大夫)를 지내고, 급사중(給事中)과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라 상주국(上柱國)으로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名門의 기초를 다졌다.
문익의 아들 文公仁(평장사), 文公裕(예,병부상서,시호敬靖公), 文公元(평장사), 文可觀(조계종대선사) 등 4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그 중 당세에 명필로 유명했던 문공유는 예종(睿宗)과 의종조(毅宗朝)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일세의 명필로 묘향산 보현사에 創寺碑文을 남겨 그의 글씨가 비석으로 전한다.
문공유의 아들 문극겸(克謙 :시호忠肅公)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한 賢相으로 이름이 높았고, 의종때 문과에 급제, 좌정언이되어 환자 백선연(白善淵)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황주판관,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으나 이는 언로를 막는 일이라는 유사의 상주로 합문지후로 전임, 전중내급사로 승진되었다. 문극겸은 의종때 왕에게 여색을 멀리하고 政事를 바로 펼 것을 간하다가 왕이 이를 듣지 않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지금도 충남 공주 유구역사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가는 그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문극겸이다.
1170년(의종24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앞서 좌정언으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의종 역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하자 우승선, 어사중승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해내고, 무신들로부터는 고사의 자문을 받았고, 용호대장군을 겸임, 후에 상장군까지 겸하여 문무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대부소경, 예부시랑, 추밀원 부사, 태자태보를 거쳐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가되고, 1187년(명종17년) 권판상서 이부사가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사후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경남 합천에 그를 추모하는 송호서원이 있다. 그의 아들이 高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 옷감 혁명을 일으킨 삼우당(三憂堂) 익점(益漸 :시호忠宣公)은 남평 문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1329년(고려 충숙왕16년) 강성현에서 세칭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의 아들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1360년(공민왕9년) 문과에 급제하고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을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363년(공민왕12년)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갔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의 폐위론을 의논하자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 황제의 노여움을 받아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월남)에 귀양갔다가 돌아올 때 금수품인 목화씨룰 붓대 속에 넣어온 것으로 우리나라의 옷감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공민왕(恭愍王) 때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자 이태조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러 하였으나 끝까지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왕명으로 그가 살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효자정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때는 왜군들이 문익점이 살았던 마을을 효자마을이라 하여 공경하면서 피해갔다고 한다. 사후에 江城君에 봉해졌고, 조선조 세종 22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익점의 아들 中庸·中誠·中實·中晋·中啓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첬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실의 맏아들 래(萊)는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천문·지리·산수·율려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文氏중에는 고려말 공민왕때 판도판서 벼슬을 지내고 江城伯에 봉해진 文得俊을 시조로 분관, 본관을 江城으로 하는 또 하나의 집안이 있으며 高麗史, 國朝榜目등 일부 문헌에는 문익점이 江城人으로 기록돼 있다.
이밖에 고려조의 인물로는 12公徒의 하나인 정헌공도(貞獻公徒)를 양성한 학자 正,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진 文達漢 등이 있다.
고려조에 남평문씨의 일파는 濟州로 이주하여 제주 토착성인 高氏와 손잡고 연합왕조를 형성한 독특한 역사적 기록도 있다. 高氏는 星主, 文氏는 王子의 작위를 세습하며 독립정권을 유지하다 조선초 본토에 귀속됐다.
朝鮮 개국후 남평문씨는 일부를 제외하고 중앙정계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춘다. 선조들이 이씨왕조에 충성을 거부했으니 가문의 쇠퇴는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 같다. 총 51명의 문과급제자를 냈으나 두드러진 인물은 없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文緯世(익점의 9세손,목사)가 용담 현감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을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투신자살한 장수 文弘獻(지평), 文緯(현감), 文德敎(좌랑), 文益顯(정랑)등은 의병을 모아 구국의 대열에서 싸웠다. 광해군 때 廣州牧使를 지낸 文希聖,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文載道,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文基浩 등이 있다.
그 밖에 文彬(세종,판중추원사), 文天奉(한성판윤), 文尙行(태종,예조참의), 文敬仝(명종,사성), 文瑾(숙종,참판), 文益成(지평), 文敏(판통례문사), 文勵(대사간), 文致(文原君)등이 그 중 알려진 이름.
4. 후손들의 활약
근세에 들면서 文氏는 조선왕조 오백년의 침묵에 반발하듯 약진의 기세다.
上海임시정부 교통장관을 지냈던 文昌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호남 의병장으로 항일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활약하다 대구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문태서장군, 재미교포 항일단체인 大同保國會 회장을 지낸 文護穆,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文一平, 우리나라 최초의 「새국어사전」을 펴낸 文世榮등은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후의 격동기를 의롭게 살다간 의인들이다.
해방후 남평문씨는 정계, 학계, 언론계, 재계, 종교계, 군등 각계에서 다수의 장,차관 및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판검사, 군장성, 종교지도자(文鮮明,통일교교주)등을 배출하는등 후손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5. 集姓村
호남의 명산 월출산의 정기가 서린 마을, 전남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 남평문씨 일문이 「용강에 붉게 타는 노을」「월출산의 자욱한 안개」「토끼동산 허리의 보름달」등 아름다운 산수속에 4백여년 가풍을 이어온 유서깊은 동네다. 마을전체 350여 가구중 300가구가 남평문씨다. 아마도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의 규모 큰 동성부락이다.
이 곳에 남평문씨의 뿌리를 내린 인물은 조선 단종조에 直長벼슬을 지냈던 文孟和, 1454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세조의 패륜에 분개하여 벼슬자리를 훌훌 떨쳐 버리고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서 월출산 기슭 영암으로 이주했다.
장암리의 入鄕祖는 그의 후손인 愛松堂 文益顯, 金長生 문하에서 수업한 호남의 名孺였던 문익현은 임진란때 영암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그 선봉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그를 吏曹正郞에 제수했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고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白蓮 文益周(태인현감)는 이 마을이 낳은 전설적인 효자. 그는 부친상을 당했을 때 묘곁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묘를 지켰는데 하늘이 감복했는지 어느날 그의 집 연못에 핀 紅蓮이 白蓮으로 변했다 한다. 지금도 이 마을 文氏들은 그가 살았던 옛집을 白蓮堂이라 부른다.
그 밖에 집성촌으로는 전북 옥구군 일원, 전남 화순군, 보성군 일원, 전북 김제군 공덕면 일원, 전남 장흥군 일원,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일원, 경남 합천군 일원,경기도 파주군 일원 등이 있다.
6. 역평파의 유래
역평은 지석묘등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신라시대 삼기현당시 이곳 들이 官田으로 驛員들의 식량을 보급하기 위한 들이였던 곳으로 역들이라 불려졌지만 조선중기 남평문씨 四美 敬忠의 둘째 아들 泳이 아들 益昌, 益新과 함께 역평에 들어와서 역평으로 칭하였고 앞들은 모두 남평문씨들이 인수하여 농사를 지어온 것이 4백년이다.
역평은 산을 등지고 물이 풍부하여 들이 비옥하고 풍속이 순후하여 사람이 살기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역평은 세마을로 나누어져 윗역들, 가운데역들, 아랫역들이 있었고 아랫역들에는 충숙공 문극겸을 모신 松湖書院과 사립학교인 대병중학교가 있었다.
고려 공민왕 말년에 충숙공 극겸의 6세손 簡惠公 文瑾(판도판서)이 이성계 일파의 세도를 피하여 합천으로 퇴거하였다. 이로인해 경남일대에 많은 후손들이 나게 되었다. 公의 증손대에 이르러 거창의 大峴派(거창 양민학살사건 때 많은 피해를 입음)가 분파 되었고, 고손대에 昌原파와 高品파가 분파되었고, 현손대에 大枝파와 固城파가 분파되었다. 公의 7세손에 이르러 사미 경충의 큰아들 浣의 후손이 回洞파(도롱골)이고 둘째아들 泳이 지금의 역평파 中始祖이시다.
四美 敬忠은 武官으로 벼슬을 지내다 기묘년 士禍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월여산 밑에 정자를 지어 강산풍월과 친하면서 문정공 남명 조식선생과 교류하였다. 사후에 조정에서 병조참판에 추증하였다.
泳의 큰아들 익창은 종형 익순과 함께 임진란때 함양 황석산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됨에 따라 순절하였는데 시신을 찾지 못해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錄券에는 1등공신으로 올려져 있다.
아우 익신은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충무공 이순신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충무공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합천댐으로 향리가 수몰됨에 따라 선산을 이장시에 公의 시신과 수의가 생존시 그대로 발굴되었다. 수의는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公의 아들 慄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必密은 자손이 없고 둘째 아들 必察은 1남을 두었는데 時遇이다. 세째 아들 필환은 3남을 두었는데 시윤과 시열과 시성이다. 역평마을에 살았던 남평문씨는 전부 文益新의 후손들이다. 직계종손은 합천에 살고 있는 문동식이다.
7. 남평문씨의 계보
남평문씨의 시조는 신라말 전라도 남평현에서 탄강하신 무성공 文多省이다. 공의 벼슬은 대국사,대장군을 거쳐 삼한벽상공신에 이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조로부터 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기록으로 남겨진 계보가 불분명하여 부득이 고려 숙종때 가문의 중흥조 경절공 익을 중시조로 삼고 1세로 하여 가문의 계보를 나눈다.
남평문씨의 파보를 개략하여 살펴보면
중시조 경절공 익을 1세로 하여 2세 경정공 공유, 3세 충숙공 극겸, 4세에 이르러 후식의 후손이 충혜공파, 충선공파(익점), 감천군파, 남제공파로 분류되고 충선공파에서 다시 헌납공파, 순질공파, 의안공파, 시중공파, 성숙공파로 나누어진다. 4세 유필의 후손은 8세 판도판서 간혜공 근의 후손을 간혜공파로 하고 9세 순평부원군 달한의 후손을 순평군파로 한다.
간혜공파는 그 후 9세 세린의 후손이 광릉등 14개파로 분파되고 11세 여충의 후손이 대현,이토례,남계,밀양 4개파로 분파되었다. 12세에 이르러 찬의 후손이 창원파로, 노의 후손이 고품,죽죽,오동골,창후,팔심,가남,장서,율원,오곡 9개파로 분파되고, 13세에 이르러 경화의 후손이 고성,고성심묘 2개파, 경지의 후손이 대지파(대병면 대지리)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14세에 이르러 사미 경충의 큰아들 완의 후손이 회동파(대병면 회양리 도롱골)이고, 둘째아들 영의 후손이 지금의 역평파이다.
역평파의 파조 영의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사미 경충이요, 할아버지는 성균관진사 규이고, 증조부는 홍문관교리 여영이며, 고조부는 진이요, 5대조는 전농판서 세봉이다.
영은 익창과 익신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익창은 임진왜란때 곽준과 조종도와 더불어 창의하여 함양의 황석산성을 지키다 순절하였다. 록권에는 1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우 익신은 통정대부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교류하였다고 충무공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역평파의 가문에서는 익신을 기준으로 종중으로 삼고 후대의 자손들을 기준으로 소중으로 나누어 각종 제사나 시사를 지내는 중심으로 하였다
출처 문씨네 카페
[출처] 남평문씨 家門의 일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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