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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예리항 '조기 파시'
1960년대 흑산도에 처음 발딛는 사람은
예리 항에 닿으면 두번 놀랐다고 전한다.
바다 위에 형성된 거대한 어시장인.,'파시'.
먼저 흑산도 섬의 크기에 한번 놀라고
예리항 어선들과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섬 답지않게 번화한 규모에 또 놀랐단다.
1960년대 파시가 사라진 건,
뭍과 섬을 잇는 육로가 뚫리고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였다.
차츰 유통구조도 변했고
보다 싱싱한 상태로 해산물을
대도시까지 나를 수 있게된 때문.
결국, 목포에 수산물공판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수산물의 거래는 해상이 아닌 육지로 옮겨지면서
1960년대까지 성행했던 파시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목포항 ~ 삼학도 일대' 파시 축제.
150척 배를 연결해서 '파시'를 재현.
복잡다단한 삶의 향기가 뒤엉킨 목포.
삼학도는 몇해에 걸친
연육공사와 간척공사로
육지와 하나가 될 무렵에는
흥청대던 목포 파시도 사라졌다.
'삼학도와 운명을 같이한 목포 파시.
'유달산 입구 오거리'의 '예술인촌'과
막걸리집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목포는 개항과 함께
형성되었던.,대도시.
비린내 가득한 목포항.
1987년 목포는 개항했고
전남 최초로 근대문명 세례.
호남 곡창의 쌀과 면, 소금 등이
목포로 몰려와 일본으로 건너갔다.
거대한 화물선들이 일본을 오가며
목포는 항구로서의 기능이 커져갔다.
1930년대 목포는 전국 6대 도시로 성장.
4대 항구로 번영까지는 파시가 일조했다.
큰돈이 거래되다 보니, 어부, 중개상, 잡상인
등이 몰려와 일대 성시를 이루며 선술집 불야성.
목포항에 어선이 몰려오면 돈이 몰리고
그 돈을 따라 색시집 여자들도 몰려들어
목포항은 더욱 풍요롭게 성황을 이루었다.
그 이전까지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중심은
영산강을 따라 깊숙히 들어가 있던 나주 영산포.
그무렵, 목포는 유달산 자락에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일본이 목포를 거점도시로 키운 것은
영산포에 비해 큰 배를 접안할 수 있고
목포 앞바다 수많은 섬들은 천연 방파제.
그래서, 목포를 최적의 항구로
조성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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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하면, 1960년대 옛 가요로도 알려진
'흑산도 아가씨’와 ‘흑산도 홍어’가 떠오른다.
흑산도는 직접 가기에 너무 먼섬으로 느껴진다.
실제로도 흑산도는 육지에서 머나먼 섬이다.
목포에서 93km 떨어져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
맑은날 동쪽 수평선 산맥들은 비금도 같은 섬들.
흑산도에서 가장 가까운 홍도마저 가물가물
흑산도는 사방이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외딴 섬.
'길이 8km, 폭 4km, 면적 19.7㎢' 규모의 작은 섬.
인근에는 영산도, 대둔도, 다물도, 대장도 등
'10개 부속섬' 유인도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데
'흑산군도' 이들 섬들이 모여 흑산면을 이룬다.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장도,
가거도, 만재도, 태도 등이.,흑산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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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인 828년에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 곳에 성을 쌓으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조선 숙종 때는
흑산진이 설치되는 등 서남해안 국방 기지였다.
망망대해에 있는 섬이라 예부터 유배지로 사용.
천주교 신자인 정약전이 신유박해로 이 곳에 유배.
조선 말기의 유학자 최익현도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
최익현과 정약전의 유적지가 남아 있으며,
장보고가 쌓았다는 상라산성은 전남 문화재.
신안군에 편입된 것은 1969년.
흑산항-(흑산도아가씨동상)-지석묘군 또는
해안길-흑산성당-박득순 미술관-최익현 유배지
- 배낭기미 해변-새조각공원-흑산도아가씨 노래비
-상라산 봉수대터 (거리 8㎞, 소요시간 4시간 20분)
목포-흑산도 쾌속선 동양고속(www.dyferry.com, 061-243-2111),
남해고속(http://namhaegosok.co.kr, 061-244-9915) 하루 4회 운항,
07:50, 08:00, 13:00, 16:00. 1시간 50분 소요. 흑산도-목포 복편 쾌속선
09:30, 11:00, 15:30, 16:00. 흑산도 여객선터미널(061-275-8111,275-9323)
진리해안길은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해안누리길’
‘대한민국 해안누리길’은
인위적인 보행길 조성이 아닌
자연그대로 이미 개발된 바닷길.
우리나라 해양문화와 역사,해양산업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을 엄선한 것.
목포에서 93km 떨어진 흑산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흑산항을 벗어나면 마치 80년대에
시간이 멈춘듯한 마을을 지나 원시
자연 상태 도보길을 경험 할 수 있다.
흑산도 아가씨 동상을 시작으로 흑산성동,
박득순 미술관, 배낭기미해변과 상라산성 등
흑산도 특유의 멋진 해안경관을 경험할 수 있다.
흑산도에서 가장 높은 문암산(405m)
섬의 면적에 비하면, 꽤 높은 편이다.
이 때문에 흑산도는 섬 전체가
산악지대로 들판을 볼 수 없다.
오랜 세월 밀려드는 파도에 깎여
해안은 백사장이 적은 대신 단애층.
망망대해 바다와 거칠게 맞서고 있다.
‘흑산도 아가씨’는 1960년대 흑산도 예리항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린 바다시장인 파시의 산물이다.
파시가 서면, 2천여척 이상 배가 몰려들어 일대성황.
술집과 다방이 성업하면서
외지 아가씨들이 몰려 들어
많을 때 사오백명 쯤 되었다.
그당시 이들을 "흑산도 아가씨"라고 불렀고,
그렇게 흑산도에 왔다가, 섬마을에 정착하여
고향을 떠나온 아가씨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다.
1964년 발표한.,'흑산도 아가씨'(이미자 노래)
대흑산도에는 이 노래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12굽이길"이라는 S자형 고갯길을 감돌아 올라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는.,대흑산도 상라봉.
아슬아슬한 급경사면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해안도로는
대흑산도 명소인.,"상라리고개"
1960년대 조기잡이배 가득찼던.,흑산도 예리항.
이곳 어부들은 세찬 파도를 헤치며 조기, 홍어. 고래.
성어기 파시에는 제철 생선, 수산물 경매 및 고래 해체쇼.
섬과 섬 사이로 배를 밟으면서
건너갈 만큼 어선이 많았던 곳.
바다 위에서 성어기에 각처에서 모여드는 어민들
이때 형성되는 '계절적인 어시장'이 파시평(波市坪).
흑산도 조기 파시, 부안군 위도.인천 옹진군 연평도.
계절 따라 북상하며
이동하는.,'조기 파시'.
전라남도 여수시 거문도
완도군 청산도.,'고등어 파시'.
제주 추자도.,'멸치 파시'
경북 울릉도.,'오징어 파시'
신안 비금도.,'깡다리 파시'
신안 임자도.,'민어 파시' 등.
임자도 민어 파시는 일제강점기에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앞 타리도에서 열렸고
해방 후 1980년대까지 인근 재원도로 옮겨 대성황.
섬과 섬을 잇는 배다리를 밟으며 건널만큼 어선이 많았다.
전남 영광 칠산바다, 충남 보령 녹도,
전북 군산 고군산군도, 황해 용호도 등
파시에서 유래되어 유명한.,파시평(波市坪).
1960년대 '고래 & 물치'
.
1960년대에는 물치(바다사자류), 고래.
해체 작업도 성행한.,흑산도 예리 구룡포.
우리나라 행정구역 상, 최서남단 해역에 위치한 섬으로
목포 서남방 해상 92.7㎞(동경 125도 26′, 북위 34도 41′)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다.'해서 흑산도라 불리우는 섬.
본섬 면적 19.7㎢,
해안선길이 41.8㎞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
논농사는 전무한 실정이다.
'목포 ~예리항' 쾌속선 2시간.
.
흑선도는 수산업과 관광산업에 크게 의존하며, 예리항은
동지나해와 서남단 인근어장 전진기지로 중국어선들이 많이
입출항 하고 있으며, 대규모 관광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최서남단 소흑산도(가거도)는
어업전진기지로 개발되고 있다.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영산도, 다물도, 대둔도, 홍도 등은
천혜의 관광보고로 문화유적이 많으며,
신안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또한, 해안을 따라 연장 24km 일주도로가 닦여져 있어
흑산도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섬 여행의 제 맛인 해상관광을 하려면 예리항을 출발해
열목동굴 ~ 홍어마을 ~ 범마을 ~ 칠성동굴 ~ 돌고래바위 ~
스님바위 ~ 촛대바위 ~ 남근석~거북이바위(2시간 30분 소요).
흑산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많은 인물들이 유배생활을 하던 섬.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자 조선후기 문신인
정약전 선생이 유배생활 15년 동안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자산어보'를 남겼다.
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란 친필은 흑산면 촌리에
있는 손바닥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지장암 앞에는
후일 그의 문하생들이 면암 최익현 유헌비를 세워
선생의 애국정신과 후학양성 뜻을 후손에게 전한다.
그리고, 한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던
초령목(招靈木)은 가지를 꺾어 불전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는 나무인데 주위에는 상록수림과
성황당이 있으며, 진리 지석묘 군락지, 삼층석탑
및 석등과 사촌서당 같은 수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흑산도 인근 도서로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된 홍도, 영산팔경과 석주대 문바위의
절경을 품은 영산도, 촛대바위와 시범마을 다물도,
연중 바다낚시의 명소로 이름난 상·중·하태도, 그리고
바다낚시와 중국 땅의 닭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서해의 최서남단섬인 가거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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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군도(黑山群島).
섬구성 : 본섬1 , 부속섬 10.
총면적 : 49.25 ㎡(부속섬 포함)
'서복'의 고대항로.,소흑산도(가거도)
.........가거도(可居島 : 小黑山島)........
산세가 높고 웅장한 절벽으로 형성된 절경.
독실산(639m)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으로
'가히 살만한 섬'이라 하여 가거도라는 이름.
가거도는 '가도 가도 뱃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섬'
다시 뭍으로 나오기도 쉽지 않아 '가거든 오지마라'는
우스갯소리도 가거도의 이름 옆에 따라다니는 외딴 섬.
멸치, 조기, 갈치, 다랑어, 돔
등 온갖 고기들이 모여 들기에
연중 많은 낚시객이 찾는 섬이며,
바다제비, 슴새, 쇠오리.,철새 낙원.
동경 125°07′, 북위 34°04′.
목포에서 남서쪽으로.,145㎞,
대흑산도에서 남서쪽으로.,70㎞.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있는 섬.
면적 9.09㎢, 해안선 길이 22㎞.
1896년부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가거도(可居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제때 소흑산도, 그후로 다시 가거도.
본래 지도군 흑산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대리·대풍리·항리를 합하여
무안군 흑산면 가거도리가 되었다.
1969년 신안군이 무안군에서 분군
신안군 흑산면으로 개편된.,가거도.
가거도리 앞 해빈은 규사(硅砂)가 풍부.
백사장을 이루고 있어 유리 원료로 채취.
1월 평균기온 2.0℃,
8월 평균기온은 25.5℃,
연강수량은 1,112㎜이다.
2009년 기준 인구 494명
남 280, 여 214, 290 세대.
밭 0.13㎢, 임야 8.75㎢이다.
주민 대부분 어업에 종사,
소량의 채소류를 재배한다.
인근해역은.,'난류' 제주해류 통과
각종 어족이 풍부하여 황금어장이며
주요 어획물은 멸치·전복·농어·장어 등.
목포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교육기관으로는 가거도초등학교와
신안흑산중학교 가거도분교장이 있다.
선사시대 유물
돌도끼· 돌바늘·패총
등이 출토된 바 있으며,
섬 북쪽에 소흑산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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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제 380호
가거도(소흑산도)
가거도(소흑산도)
'흑산도의 관문' 예리항 풍경.
흑산도 예리항.,새벽
흑산도 예리항 일출.
흑산도 예리항.,오징어배
안개낀 흑산도 예리항.
흑산도 옥섬
2017.05.01 흑산도 고래공원
일제.,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를 약 8천 마리 학살
'고래'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 만을 떠올지만
홍어로 유명한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다.
대체,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관련된 일이 있었던걸까?
.
20세기 초, 대한제국과 한반도 근해의
고래들에게는 참혹한 세기의 시작이었다.
1904년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충돌을 일삼던
일본과 러시아는.,끝내 전쟁을 시작하고 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9월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조선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
이때부터 한반도 근해 '포경 독점권'은 일제가 행사.
1910년, 일제가
강제로 병합한 것은
대한제국 만 아니었다.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의 포경회사가
포획한 귀신고래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조선인들
1911년 6월 3일
어업령(제령 제6호)과
어업령시행규칙 및 어업취체규칙
(조선총독부령 제67, 68호)을 공포한다.
이때부터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은
조선총독 허가를 받아야 하는 '허가어업'
물론, 조선총독 허가는 일본 포경회사들 뿐.
조선총독 허가를 받은 일본 포경회사들의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을 넘어선 '학살(虐殺)'.
1903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회사는 고래 8259마리를 잡은 것.
무려 1만여 마리의 대형 고래가 학살 당한 것.
1908년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 편찬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러일 전쟁 전후
'1903~1907' 5년간 고래잡이는 약 1612마리.
모두 다 일본
포경회사들에 의해
포획을 넘어선 학살 수준.
1900년대 초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3대 포경회사
동양어업주식회사,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
일한포경합자회사였다.
세 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포획고를
올린.,동양어업주식회사.
이들은 5년 동안 1200마리 고래를 포획했다.
1904년부터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를 포획한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는 4년간 377마리 포획.
1906년 세 회사 중 늦게
한반도 근해 포경에 뛰어든
일한포경합자회사 2년간 35마리.
일본포경협회가 '1911~1944'년까지
자체 집계해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 근해 포획 고래는 무려 6647마리.
특히 대형 고래에 대한 포획이 심각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포경회사는
참고래 5166마리,
귀신고래 1313마리,
대왕고래 29마리,
보리고래 5마리,
향유고래 3마리,
북방긴수염고래 1마리.
돌고래 역시 130마리가
일본 포경선에 의해 포획됐다.
당시 혹등고래를 돌고래로 불렀다.
물론 이 수치는 기록으로 확인된 것이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1908~1910'년
이 기간에도 일본 포경회사들은 고래 포획.
또한 일본 포경회사들의
고래 불법포획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실제 일제의
고래 학살은 더 극악했을 것.
일제 강점기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 포획을
주도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
러일전쟁 직후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은
고래 포획고를 올렸던 동양어업주식회사가
1909년 5월 일제의 '전국 포경회사 합동운동'
으로.,'동양포경주식회사'로 거듭난 것이다.
오사카에 본점을 둔 동양포경주식회사는
1910년 1월 거제도에 포경지 허가를 받아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을 시작했던 것이다
1913년에는 울산, 거제도, 통천 근해,
1914년에는 울산, 거제, 강원도 통천군, 함경도 북청군,
1916년 전라도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포경 조업 영역 확대.
1934년 7월 1일 동양포경주식회사는 일본수산주식회사에 합병.
일본수산주식회사의 자회사인 일본포경주식회사에 승계되었다.
1936년 9월 일본수산주식회사는
자회사 일본포경주식회사 등과 합병
1937년 3월 일본식료공업주식회사를 합병.
4월 1일 회사 이름을 일본수산주식회사로 변경.
일제강점기 장생포
일본 포경회사들의
대표적 포경 근거지.
동해에서 포경 쇠퇴하자
서해 남해로 사업장 확대
1939년 일본수산주식회사 포경 근거지는 33곳이었고,
이 가운데 한반도에 설치된 포경근거지는 울산 장생포,
제주도 서귀포, 전남 대흑산도, 황해도 대청도 등 네 곳.
일제 강점기
한반도 근해 포경사에서
마침내 흑산도(대흑산도) 등장.
일본 포경회사인 동양포경주식회사가
1916년 포경조업 영역 전라도 대흑산도까지
넓혔다는 기록과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승계한
일본수산주식회사가 1939년 대흑산도에
포경근거지를 운영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은 동해 중심이었다.
그런데, 대흑산도
'포경 근거지' 설치
일제의 포경 영역이 그 무게 중심을
동해에서 대흑산도 근해 등으로 이동.
또는 포경의 영역을 확대했음을 뜻한다.
한반도 포경기지 변천사를 연구한 김백영 박사는
일제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를 설치했던 까닭을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전반기까지 동해에서의
포경이 쇠퇴하는 추세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
일제는 1900년 초부터 한반도 근해 포경을 독점,
그 주 사업장은 동해였다. 하지만 10년 넘게 지속된
동해에서의 고래 남획은 동해 포경의 쇠퇴로 이어졌고,
그 활로는 포경 영역을 남해와 서해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즉 동해에서의 포경 실적 쇠퇴는
1914년부터 일제가 포경사업장을
서해와 남해로 확장하게 만들었다.
특히 1916년부터는 포경 대상지를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확장하게 만들었고,
고래 해체 작업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체계적인 기반 시설인 '포경근거지'를
대흑산도에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구병 교수가 정리한 '1917년부터 1934년까지
각 도별 포경선 수와 포획 두수'는 이를 입증한다.
동해에서만 활동하던 포경선들이
서해 (황해도 52척, 전라남도 95척)와
남해(경상남도 150척)로 이 시기에 진출.
동해(경북 36척, 강원도 54척, 함북 50척)에서
활동하는 포경선의 수를 크게 앞지른 것이다.
고래 포획고 역시 이 시기에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일본 포경회사가 1917∼1934년까지 경상북도, 황해도,
함경북도 등 동해에서 올린 전체 포획 두수는 151두다.
하지만, 이 기간 황해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서해와 남해에서 포획 두수는 무려 2854두였다.
동해의 포획고 보다, 약 18배나 많은 포획고다.
따뜻하고 먹잇감 풍부한
'고래들의 고향' 흑산바다.
대상지를 더 좁혀보면
이 기간 경북 근해에서
활동한 포경선은 36척.
47두의 고래를 잡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전라남도 근해에서는
95척이, 1095 마리 포획.
전라남도 근해에는 이 시기 '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
일본 포경선에 의해
흑산도 근해에서 포획당한
고래 수는 흑산바다에 동해 못지않게
많은 고래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빙한다.
조선수산회가 집계한
'1930년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한국 근해 포경 실적' 역시 이를 증빙.
1930년 한 해 동안
울산 사업장에선
긴수염고래 55두와
귀신고래 10두 등
모두 65두를 포획했다.
남해와 서해에 걸쳐진
제주도 사업장(31두)과
대흑산도 사업장(46두),
대청도 사업장(85두)에선
대왕고래, 긴수염고래(참고래),
혹등고래 등 모두 162두를 포획했다.
동해보다 서해와 남해에서
약 2.5배 이상 더 포획한 것.
이 시기 한반도 동해에서의 포경이 쇠퇴하고
서해와 남해에서 고래 포획이 비약적으로 증가.
일본 포경회사들이 포경근거지를
동해에서 흑산도로까지 확장할 만큼
대형고래가 많이 살고 있었던 흑산바다.
흑산바다에 큰 고래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까닭은
흑산바다가 고래들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흑산도 근해는 수심 100m 안팎으로,
겨울철에도 평균수온이 섭씨 7도∼8도 유지.
흑산도 근해 해수면 온도는
귀신고래의 회유 동선에 있는
사할린해나 오오츠크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매우 따뜻한 온도이다.
봄이 되면, 수온은 더욱 올라가니
고래들에겐 새끼를 낳거나 어린 새끼를
키우기에는 더 없이 아늑한 바다였던 셈이다.
또한 흑산바다에는 고래의 먹이가 풍부했다.
흑산도는 조기들의 산란장과 월동장으로
이동하는 길목 한가운데 있다.
조기는 서해에서 산란해
가을에 월동장인 제주도 남방
동중국해로 회귀하는 회유성 어종.
조기가 이동하는 곳엔
멸치와 새우, 청어, 꽁치 풍부.
이들은 고래가 매우 좋아하는 먹잇감.
일제가 포경근거지를
동해에서 서해와 남해로 확장했던 곳이
흑산도와 제주도 서귀포, 황해도 대청도였다.
이곳들은 모두 조기 회유 동선과 일치한다.
이런 까닭에 더글라스 칼튼 아브람스
(Douglas Carlton Abrams)는
<고래의 눈 Eye of the Whale>에서
"북서태평양 귀신고래 등은
동중국해 하이난의 얕은 바다에서
새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한국 포경사를 탐구해온 일부 연구자들은
더글라스의 주장을 이어받아 "흑산바다 역시
하이난 바다와 마찬가지로 조기 회유 길목에 있는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았던
곳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랜 기간 동안 생태 추적 조사가
꼼꼼하게 진행되지 못한 상태에서
"흑산바다가 귀신고래의 고향"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흑산바다는, 참고래·대왕고래·혹등고래·귀신고래 등
대형 고래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생명의 고향, 유랑의 거처'.
가거도(소흑산도)
가거도~홍도
홍도
흑산도 예리항
1960년대 흑산도
1960년대 흑산도 예리항.
2016.05.17
2011.08.24
'풍랑이 심해 한평생 육지 나들이가 힘든 섬.
흑산도에 시집 와 자식을 키우며, 힘들 때마다
고향을 떠나온 한과 삶의 애환을 떨쳐준.,노래.'
.
1967년 '흑산도 아가씨'
이미자 노래., 배경무대.
1965년 흑산도 고교생이 서울을 가려고 했지만
풍랑 때문에 가지 못했던 사연을 전해들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이들을 청와대로 초대해 만들어진 노래.
작사 정두수, 작곡 박춘석.
이 노래는 흑산도 여성들을
정신적으로 버티게 한 힘이었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 2000곡 이상을 발표
1941년생 임에도 목소리 청아함을 아직도 그대로 유지.
가수 이미자 노래는 50년간 들어 봤어도 질리지 않는다.
1967년에 발표된 ‘흑산도 아가씨’를 부른.,가수 이미자.
45년만에 처음 흑산도를 찾아 주민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2012년 9월 15일 오후 7시에 흑산도 항구 옆 특별무대 공연.
정작, 그녀의
흑산도 방문은
처음이었던 것.
‘흑산도 아가씨'를 시작으로
2시간 동안에 총 22곡을 불러
2천여 관객 주민들은 감동의 물결.
1.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2.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향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촛대바위.
석주대문, 촛대바위, 학바위 등 기암이 늘어선 예리항 해안가.
흑산도 바위들은 하나같이 남성적이고 우람한 것이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촛대바위는 밑둥만 남은 촛불 형태라 눈길을 끈다.
푸른 바다 위로 우뚝솟은 높이 50m 촛대바위.
흑산도 칠성동굴.
입구(높이 20m)는 하나지만, 약 100m쯤 안으로는 7개 동굴.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에서 흑산도를 거쳐 당나라와 교역할 때
뱃길의 무사함을 빌며 칠성탑을 쌓고 용왕제를 지냈다는 곳이다.
멀리 봉우리에 두손을 합장하고
부처님께 빌고 있는 듯한.,스님바위.
유인도 11, 무인도 89,
총 100개의 섬.,흑산도.
바다낚시의 천국.,흑산도.
5월 아카시아 꽃이 피기 시작하면
수온이 14-15도 이때부터 농어 시즌.
짜릿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우럭 낚시 등.
선착장 근처 지리 마을 당산에 있는 성황당.,처녀당.
'흑산도에 옹기 팔러온 청년에게 연정을 품은 처녀귀신.
배가 출항할 때마다 풍랑을 일으켜 총각을 섬에 가두었다.
'이곳에 남은 총각은 당산나무에 올라
고향을 그리며 피리를 불다가 죽었단다.'
1978년 7월 26일 KBS '전설의 고향'.,방영.
...........피리 부는 소년.,전설...................
옛날 어느 해에 옹기장수 배가 흑산도에 입항
배에는 네 선원과 얼굴 고운 소년이 타고 있었다.
옹기 배는 진리 처녀당 아래 부둣가에 정박하였다.
선원들이 옹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가자
소년은 당 앞 소나무에 올라 피리를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피리소리에 홀린듯 넋을 잃었다.
진리 처녀당에 거처하는 처녀 당신도
소년의 피리 소리에 매혹 당하고 말았다.
여러날이 지나 옹기를 다 판 선원들이 출항하기 위하여
돛을 올리자 바다에 파도가 거세져 배가 떠날 수 없었다.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자 역풍이 멈추고 바다는 잠잠해졌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하자 선원들은 마을의 무녀를 찾았다.
처녀당 당신이 소년에게 반해 배를 못 뜨게 한다고 알려주었다.
선원들은 거짓 심부름으로 소년을 배에서 내리게 한 후에 떠났다.
그곳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처녀당 앞 소나무에 올라가 피리만 불었다.
그러다가 결국 소년은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후 한동안 주민들은 두렵고 무서워
처녀당 인근을 얼씬거리지조차 못했다.
그곳에 가면 처녀귀신이 나타나기 때문.
'진리 처녀당에 나타난다.'는 처녀귀신은
그곳 주민들이 20번째 제물로 바쳤던 처녀.
그래서, 주민들은 소년을 그 자리에 묻히고
진리 처녀당 곁에 피리부는 소년의 화상이 봉안.
그후, 섣달 그믐날 밤에 돼지를 잡고 떡을 하여 당굿.
......................................................................
처녀당에 20번째 '인신공희 제물' 처녀화상을 봉안.
그곳 처녀당 앞에는 '피리 부는 소년'의 무덤이 있다.
20번째 인신공희 제물 처녀당 당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
이곳 진리의 '예리항~상라봉' 12 구비도로'는
'피리 부는 소년의 전설'이 있어.,흑산도의 명물.
이곳은 진리 처녀당(일명 진리당)이며
흑산면 22 개 성황당 중에서 본당으로서
상당과 용신당(龍神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제는 음력 정초부터 3일간 상당에서 제관에 의해 주관.
하당 갯제에서는 무당을 물러 용왕굿을 성대하게 지내면서
뱃길의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풍습이 전해지곤 하였다.
섬마을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삶의 터전이.,망망대해.
바다는 사람의 힘이나 과학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곳.
각 가정이나 주민들이 모시는 신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는 곳.
그래서, 자신을 비롯한 가정의 안녕과 건강,
그리고 축복을 위해 모시는 신들이 많은 섬마을.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소저아기씨 (당각시),상궁부인,
제석님, 산중처사님, 도령(총각화상)의
종이 위패가 있었고 '상궁부인과 제석님'
중간에 위패가 없었으나 “당할머니”가 좌정.
신안군청에서 “관광휴양지 흑산도로
더욱 개발하고자 역사학자, 민속학자
등에 의해 연구하고 조사하여 조명한 결과.
이곳은 여러 신들이 좌정되어 있다는 학설과
논문이 밝혀지면서 신성한 지역으로 섬마을
주민들과 여행객들에게 행복과 건강, 사랑,
그리고 흑산도 어부들에게는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장소로 자리하고 있다.
.
근래에는 옛 풍습 대신에 사월초파일에
마을 어르신들과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곳에서 매년 '진리마을 축제마당'이 열린다.
성황당 아래 50m쯤 천연기념물 제361호.,초령목.
수령 320년쯤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초령목(招靈木)은
'가지를 꺽어 불전에 놓으면, 신령을 부른다.'는.,신령나무.
1994년 고사한 천연기념물의 후계나무.
흑산도 초령목은 모두 43 그루 남아있다.
초령목은 중국 남부, 아시아 아열대지역에서 분포,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흑산도에 드물게 자생한다.
흑산도 초령목은 고사하여 2001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
해신을 모시는.,'진리' 당집
당산(堂山) 숲은.,'신들의 정원'.
'신안 흑산 초령목 자생지'이자
<흑산도 자연 관찰로>로 자리매김.
활엽 상록수 중에서
초령목은 가장 먼저
봄꽃을 피워낸다.
흑산도는 활엽상록수가 95%.
그래서, 산이 검게 보여 흑산도.
하여, 봄꽃 귀하고 꿀벌도 귀하다.
그런데,
꽃샘추위 속에서
천연기념물 초령목이
3cm크기 꽃을 피운 것.
흑산도의 특산물은 홍어가 손꼽힌다.
다른 지역보다 맛이 좋고 찰지기로 유명.
성어기는 추위심한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적은 양만 잡히기 때문에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이 흠.
상라봉(227m) 정상에 오르면
'흑산도 아가씨'노래비와 전망대
1967년 이미자 노래가 흘러 나온다.
흑산도.,칠락산 & 상라산성(반월성).
장보고가 쌓았다는 상라산성은 지정 문화재.
'고대~고려시대' 한중일을 연결하는 중요 거점.
...................흑산도 상라산성...................
읍동마을 뒤편의 계곡에는 옛 흑산현 치소 및
고려시대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관사터가 위치.
관사터 맞은편 골짜기에는 무심사지(无心寺址).
그 위쪽 상라산 6부 능선 상에 상라산성
정상부에는 제사터 및 봉화대가 자리한다.
상라봉 제사터와 무심사지는 안전항해 기원소.
관사터는 상선 선원들이 머물던 곳.
산성은 전체 길이 280m의 소형산성,
'반월성'이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형태.
성 내부에는 동문지와 건물지 1개소
유적 모두 상라산성 중심 500m 내 분포.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유물 등이 출토된 곳.
해적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읍동마을에 쌓았다는 상라산성.
..........................................
삼라산성
무심사지
무심사지.
무심사지
2009.07.04 무심사지 발굴조사
무심사지에서 바라본 흑산도 전경.
흑산도가 과거 국제 해양교역에서
중요한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입증.
국제적인 해양 거점의 면모를 갖추었던 요지.
신안 흑산도 삼라산성(新安 黑山島 上羅山城)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 통일신라의 산성.
2008년 4월 11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239호로 지정.
고대~고려시대 국제 해양도시 기능을 수행.
읍동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관방시설.
계곡 초입부에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관사터.
관사 맞은편 골짜기에는 무심사지(无心寺址).
바로 위쪽 봉우리에 상라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상라산성 서쪽 상라산 정상 봉수대와 제사유적.
이들 유적들이 모두 상라산성 중심 반경 500m 이내.
같은 시기 유물이 출토되어
상호 관련성을 살필 수 있다.
상라산성은 신안군 흑산면 진리 2구 읍동마을의
바다와 만나는 상라산 북쪽 능선 상에 위치한다.
전체길이 280m 소형산성으로 남사면 만., 반월형.
반월성은 신라시대 산성의 특징.
순수 석축부 만의 길이는 220m다.
해안 북쪽능선는 별도 성을 쌓지 않고
100m 높이 해안 절벽은., 천연요새 산성.
바위 사이에만 돌로 쌓는 간단한 축성 정도.
자연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한
우리나라 산성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벽 대체로 남사면 6부 능선.,반월형(半月形).
일반적으로 산 정상 부근이나 중복부를
동일 레벨로 둘러싼 전형적 테뫼식과 달리
산복식(山腹式)에 가까운 테뫼식 산성이다.
성 안팎 높낮이 심한 지형에 적합한.,축성법.
성돌은 기저부에만 부분적으로 장대석을 사용.
상·하단 구별 없이 같은 크기의 성돌로 수직 축성.
상라산성 부속시설로는.,'동문지'와 '건물지 1개소'
관사터는 상라산 전망대 동쪽 읍동마을을 향해 뻗은
능선의 끝자락에 형성된 ‘해내지골’에 위치하고 있다.
읍동마을 뒤편의 길이 100m, 너비 50m 정도 골짜기.
능선 끝자락에 동서로 긴 30m 정도 평탄 대지가 형성.
건물지의 방향은 남향으로., 축대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읍동마을 학술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절터와
건물터, 그리고 상라산성 주변에서는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의 유물이 수습.
관사터에서는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유물인
주름무늬병과 줄무늬병, 해무리굽 청자 & 기와편.
무심사지(无心寺址)에서는
고려시대 삼층석탑과 석등 외에도
통일신라-고려시대 기와편이 많이 수습.
제사유적에서는
철마와 주름무늬병,
주름병편 등이 수습.
이처럼 흑산도 상라산성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한국과 중국 간 활발한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당시 남방항로상에서
흑산도의 위치를 가늠할 중요한 유적.
흑산도 동쪽 영산리.,석주대문.
석주대문이라는 코끼리 모양의 바위는
바다 위에 돌로 세운 대문과 같은 형상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특산물로는 홍어.
이미자 노래 -〈흑산도 아가씨〉
대흑산도 정상에 세워진.,노래비.
옛부터 조기, 홍어 산지로 유명한 흑산도.
흑산도는 목포에서 출발하는 관광지 홍도와
우이도(牛耳島)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섬이다.
흑산도를 빙 둘러 싼.,영산도, 대둔도, 다물도, 장도.
더 멀리는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만재도, 홍도, 가거도.
또한 이들 11개 섬의 해상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는.,흑산도.
근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이
이곳에 와서 배와 그물을 수리
기름, 얼음, 생필품, 물을 실으면서,
항해선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흑산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 유물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역이다.
'1966~1967년' 서울대학교 연구소
지표조사 결과,흑산도와 우이도, 태도,
가거도 등에서 돌도끼와 토기가 파묻혀 있는
조개무지,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물을 발굴한 것.
선사시대 흑산도, 우이도,
태도, 가거도 만재도 등.
신안군 1004 섬 대부분
뭍과 이어진 저지대였다.
제 4 빙하기 말일까?
지구온난화 때 잠긴걸까?
대홍수때 바다에 잠긴걸까?
약 1만 2천년 전 또는
약 1만 3천년전 전후에
육지가 바다 속에 잠긴듯.
그전까지는
한반도와 이어진
육지였던 흑산군도.
육지였던 흑산군도는
제주도까지 이어졌을까?
'이어도'까지 이어졌을까?
'남해바다~ 추자도'
바다에 떠있는 섬들은
마치 육지의 산맥 처럼
바다 위를 점점이 달린다.
바다 수평선 위에
아스라하게 떠 있는
남해바다 무수한 섬들.
흑산도는 목포와 홍도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해상교통 중심지로, 근해 조업 선박들의 대피소.
처녀당, 초령목, 정약전 유적지, 반월성,석주대문 등.
흑산도는 조선 후기에
최익현, 정약전.,유배지.
'흑산도(黑山島)는 중국에서
수로로 900리이고 둘레가 35리.
송사(宋史) 기록에는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째에 대양에 들어서고, 5일째에
흑산도에 이른다.'러고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나주목 산천. 흑산도는 한반도와
중국 절강(浙江)을 잇는 뱃길 기착지점.
중국에서 점(點)으로 보이는 흑산도.
흑산군도는 크게 대흑산도와 소흑산도.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68개 섬으로 형성.
대흑산도 칠락산(七落山 : 272m).
.........................대흑산도............................
대흑산도를 주도로 하여 홍도(紅島)·대둔도(大芚島)·
영산도(永山島)·다물도(多物島) 등이 흑산군도를 이룬다.
동경 125°26′, 북위 34°41′, 면적 17.75㎢, 해안선 길이 41.8㎞.
흑산면 인구는 4,714명(2008. 12. 31 현재).
18세기 조선시대에도 주민들은 상선을 타고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생계 유지.
흑산도는 828년(흥덕왕 2)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당나라와 교역할 때부터 사람이 정착하였던.,월산군(月山郡).
1678년(숙종 4)흑산진(黑山鎭) 설치되고, 나주목(羅州牧)에 소속.
1888년 흑산진 승격후, 만호(萬戶)를 두고 서해진(西海鎭)을 감시.
또한, 1895년지도군(智島郡)에 속하였다가 1914년지도군이 없어지자
무안군(務安郡)에 속하여 오다 1969년 신안군(新安郡)에 속하게 되었다.
2004년 1월 30일에 흑산도 일부 지역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
목포·흑산도·홍도와의 사이에 페리호가 다니고 관광객이 많이 오고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은 1981년 12월 23일 14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문바위, 칠성동굴, 촛대바위, 학바위 등
온갖 특이한 형태의 기암괴석이 많은 절경지.
그 면적이 2,321.512㎢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국립공원
공원은 신안군, 진도군, 완도군, 여수시에 걸쳐 1,596개 섬들.
그 중 신안군 내의 140개의 유·무인도서 및 여(與)가 포함된다.
..................................................................................
산과 바다가 검푸르게 보여.,흑산도.
인근에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黑山群島 : 50㎢)
제주도와 거의 유사한
난대성 활엽 상록 천연림은
사철 푸르러 밤엔, 검게 보인다.
머지 않은 미래에
무한 잠재가치가 빛을 발할
해상 관광자원의 보고.,흑산(군)도.
흑산군도 인구는 2001년 현재 3,133명.
우이도는 서남해 상에서 먼 바다에 위치.
중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바닷길의 요충지.
흑산도 진리 2구에 있는 반월성(半月城).
길이 2,300m, 높이 0.5∼2m, 반월의 형태.
신라시대 장보고가 왜구 방어 목적으로 축성.
고려시대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온다.
성의 뒤쪽은 바다에 면하여 방어벽으로 안성맞춤.
성문의 받침은 남아 있어 성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
조선 숙종 때 흑산진을 설치한 서남해안 국방기지.
.
옛부터 망망대해에 있는 섬이라 유배지로 사용.
천주교 신자인 정약전이 신유박해로 이 곳에 유배되어
오랫동안 머물며 자산어보를 쓴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조선 말, 유학자 최익현도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른 재정 파탄 등
흥선대원군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 전개를 촉구하고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으나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에 유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은 면암집 48권.
여(與)는 밀물때 물에 잠기고
썰물때 뭍으로 드러나는.,암초.
홍도- 남문바위.
이곳 남문 바위를 지나가면
일년 내내 더위 먹지 않으며
재앙을 없애며 바라는 소원이
성취되고 행운을 얻는다는 곳.
고깃배가 이곳을 지나게 되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전설.
그리하여, '행운의 문' 또는 만복을
내리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해탈의 문.'
홍도는 약 250만년전에 생성된.,화산도(火山島)이고
제주도는 약 200만년전 신생대 3~4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차례 화산 활동에 의해 생성된 화산도(火山島이다.
다른 섬들은 대부분 중생대 백악기 화산활동의 소산물.
그와 달리 홍도는 붉은색 규암과 규질사암으로 되어있다.
규암은 95% 이상 석영성분 사암이 변성되어 만들어진 암석.
다른 암석에 비하여 풍화작용 및 해식작용에 잘 견디는 암석.
홍도를 구성하는 사암류는 얕은 바다에서 형성된 후 융기.
수억 년 동안 지표에 노출된 채 풍화와 침식을 받아 오다가
약 1만 3천년 전, 황해로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섬이 되었다.
이후 또한 파도와 싸워서 풍화에 강한
규암만이 남아 기암절경을 이루게 된 것.
.........
홍도
..........
'해질녘에 석양 노을에 바닷가가 붉게 보이면서
반사되어 섬 전체가 붉게 물든다.'고 하여.,'홍도'.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107km 지점에 있다.
주위에는 단옷섬·방구여·아랫제비여·진섬·앞여·
높은섬· 띠섬· 탑섬 등 20여 개의 부속섬이 있다.
최고봉은 깃대봉(368m)이며, 남서쪽으로 양산봉(陽山峰:231m)
해안선은 드나듦이 비교적 심한 편으로 남쪽과 북쪽이 깊게 만입.
암석해안, 해식애, 해식동(海蝕洞) 등의 해안지형 경관이 뛰어나다.
흰동백·풍란 등의 자생지로 274종 식물이 분포하며,
새 54종 대부분 텃새, 남방계이고 북방계는 11종에 불과.
그밖에 무척추동물 117종과 어류 233종, 흑비둘기·염주비둘기 등.
연근해에서는 우럭·장어·농어 등이 잡히며, 전복·김 등
취락은 남쪽 죽항마을과 북쪽 석촌마을에 밀집하여 있고
두 마을간 능선 소로에 당산림(堂山林)은 주민의 신앙 중심.
매년 음력 섣달 그믐이면 풍어제를 지내기도 한다.
섬 전체가 아름다워 남해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명승지
홍도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70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특히 홍도남문·시루떡바위·
물개굴·석화굴·기둥바위·탑바위·원숭이바위·주전자바위·독립문바위·
홍어굴·병풍바위 등으로 이름 붙여진 기이한 암석들이 주요 관광 코스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한다.
면적 6.42㎢, 해안선 36.8km, 인구 466(2003).
옛날 중국과 교역할 때 중간 기항지
이 섬에 정박하여., 북서풍을 피하고
동남풍을 기다렸다하여 대풍도(待風島).
홍도(대풍도).,슬픈여바위.
...................홍도 제6경 - 슬픈여바위...............,
옛날 마음씨고운 부부가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갔다가
돌풍이 불어 많은 짐을 싣고 풍랑에 파선 되고 말았다.
이를 본 일곱 남매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 바위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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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서는
홍의도(紅衣島)로, 숙종실록에는 홍어도(紅魚島)로 표기.
일제 시대 바다에 뜬 매화꽃처럼 아름다워.,매가도(梅嘉島).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착된 명칭., 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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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흑산도(가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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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흑산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45㎞.
북동쪽 약 70㎞ 지점에 대흑산도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가 있다.
1800년 경 나주 임씨가 최초 거주했으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가거도.
등대 아래 선창에 배를 정박하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계단과 잡목 사이 절개지에 하얗게 반짝거리는.,조개무지.
신석기시대 토기와 뼈로 만든 도구들이 함께 발견되었던 곳.
장보고 선단이 한·중·일 중계무역 중간 거점.
오늘날, 쾌속 여객선으로 달려도 머나먼 뱃길.
이곳이 장보고 해상무역 기점인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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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서남단(最西南斷).,가거도.
세월호 사고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맹골수도는 물살이 빨라 난파사고 다발지역.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 격전지였던.,맹골수도.
진도 울둘목과 맹골수도 급류를 이용하여.,대승.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달리면 흑산도항
흑산항이 중간기점으로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거쳐
쾌속선으로 4시간 이상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가거도.
.
중국에서 "가거도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가거도(소흑산도) 독실산(639m) 시인(視認)거리.,107.5km.
비바람 부는 날씨 속에서의 시인거리는 최대 100 여 km 이내.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가거도.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45㎞ 지점에 있다.
목포~흑산도~가거도 ~ 만재도.,여객선 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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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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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125°28′, 북위 34°12′에 위치한.,만재도
흑산도 남서쪽 45㎞,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104㎞,
진도에서 북쪽으로 59.7㎞ 지점에 있다. 면적은 0.59㎢.
'구름처럼 자유롭고 싶다면 만재도로 떠나라.
번잡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떠나라.
아름다운 서해의 보석과 같은 섬을 찾아 떠나라. '
지금 당장 그곳으로 떠나라.
만재도 해안선 길이는 5.5㎞.
동쪽 국도(菊島), 남쪽 녹도(鹿島),
북동쪽 흑도, 제서, 간서(間嶼)·백서(白嶼)
등과 함께 소중간군도(小中間群島)를 형성한다.
요즘 '삼시세끼'촬영지로 각광받는., 만재도.
육지에서 가거도 보다 가깝지만 뱃길은 멀다.
<목포 ~ 4시간 ~ 가거도 ~1시간 반~ 만재도>
만재도.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먼데섬’ 또는 ‘만대도
재물 가득 실은 섬 또는 해가 지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
하여 ‘만재도’라 하였다고도 한다.(신안군 흑산면 소속).
만재도는 주소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그러나, 거리 상 제주도 추자군도에 가깝다.
흑산군도와 추자군도 사이 징검다리.,만재도.
만재도.
삼시세끼 여배우.,이은우
흑산도 예리(曳里)항.
목포에서 흑산도까지는 여객선으로 2시간 뱃길.
쾌속선이 나오기 이전에는 7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뱃길은 비금도를 벗어나면서부터 파도가 더 드세진다.
그곳부터 흑산도 해역에 가까워질수록
바다 한가운데 악마의 입처럼 넘실대는 너울.
무려, 68개 섬으로 구성된 흑산도 해역., 바다어장.
풍랑이 일거나
일기가 나쁠 때
대피처가 예리항.
조선시대 유배지로 악명 높았던.,흑산도.
이곳 유배는 사형 다음으로 중죄에 해당하였다.
세상과 단절된 절해고도에서 살아야 하는 유배생활.
하루 하루 살기 위해 먹을 것 마련부터가 급선무.
김정희는 자신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부평초에 비유.
김춘택은 자기 자신을 땅속에 사는 지렁이의 삶에 비유.
"아따!~징하게 멀다잉~.오메 나 죽네."
'멀미 때문에 죽을 뻔한 사람은 있어도
멀미로 죽은 사람은 여태까지 없다는데.,'
'뱃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플까?'
해마다 3월이 오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예리항.
'고깃배 몰려오면 60여 선술집 불빛이 환해진다.'는.,선창가.
뱃사람들은 술과 노래로 바다에서의 외로움을 떨쳐내는걸까?
풍랑을 만나게 되면
언제 물고기 밥이 될지
모르는 곳이.,흑산도 어장.
........흑산도 용바우 청년 & 복술 처녀'의 전설......
복술 처녀와 용바우 청년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
겨울에 홍어잡이 나간 용바우는 그후 돌아오지 않는다.
한편, 복술은 일반 어선과는 다른 데구리배를 타는
곱슬머리 청년의 구애를 받아 뭍으로 떠나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한편,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
풍랑을 만나 파선된 경우에도
천우신조 살아오기도 하였던 어부들.
복술이 은연 중에도 기다려지는 기대감.
- (중략)_.
...............
쾌속선 선착장에서 왼쪽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유람선 선착장이 나오고 흑산파출소 곁 사이길.
그곳 골목길 안으로 늘어선 선술집, 여관, 당구장.
1960년대 파시가 설때마다
흥청거렸다던.,좁은 골목길.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살아온 아가씨든,
빚을 안고 흑산도까지 팔려온 아가씨이든
뭍을 갈망하며 불렀던 노래가 동백아가씨.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
.
선창가 불빛마다 긴 항로의 사연을 간직한채 깜빡거린다.
예리항에는 많을 때 2천여척 정박 어선이 장관을 이루는 곳
그 배들이 밤에 일제히 불을 밝히면 거대한 해상도시.,예리항.
안강망 어선, 연승망 어선, 저인망 어선, 잠수선,
닻배, 드러매기배, 주낙배, 행망어 업, 통발, 게통발,
데구리배, 투망배, 유자망, 고대구리, 쌍대구리, 치미,
유신가다, 쌈판, 무동력선, 말쪽배, 오구리배, 복어배 등.
예나 지금이나
예리항은 흑산도와
나주 영산포를 오가던
뱃사람 애환이 가득한 곳.
늦가을부터 겨울철까지가.,홍어 철.
홍어장사들이 들락거리는.,추자군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는 군도
'본섬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홍도, 영산도, 장도, 가거도.만재도.
태도, 우이도 등' 68개 섬이 곧.,흑산도.
흑산도 홍어가 곧, 영산포., 삭힌 홍어회.
'흑산도~영산포' 먼 뱃길에서 삭혀진 홍어회.
흑산도 홍어 맛보다 영산포 삭힌 홍어회가 유명.
옛부터 전라도 지방에서는
날씨가 추울때면., 홍어 생각
날씨가 따듯해지면., 굴비 생각.
'나주인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먹는데
탁주 안주로 겻들여 먹는다.' - 자산어보 -
조선 후기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한귀절.
흑산도는 홍어의 산지로 유명하지만
예리항 제외한 대부분 홍어잡이와 무관.
"배가 30톤 이상 되어야
홍어잡이를 할 수 있어요.
그럴러면 돈이 몇 억 들어요."
옛날 흑산도 앞바다에서 "목선으로 잡을 때는
홍어가 지금보다 몇 곱절은 컸다."고들 말한다.
"홍어는 잡으면 배에서 바로 숙성을 시켰어요.
육지로 나가면 구더기가 날 정도로 썩었었지."
뭍에서는 톡 쏘는 삭힌 홍어회 맛을 떠올리지만
실상 흑산도 주민들은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는다.
홍차처럼 삭힌 홍어는 먼 바다 뱃길이 만들어낸 문화.
흑산도 홍어배들의 종착점.,나주 영산포.
삭힌 홍어의 본고장인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삭혀서는 잘 안 먹어요.
싱싱한 놈을 먹어야 더 맛 있고."
흑산도 사리(모래미)마을.,돌담.
1801년 조선 후기 흑산도 우이도로 귀양온 정약전
이곳에서 인연이 된 처와 자식들의 생계가 어려워
1807년 흑산도 모래미(사리 : ·沙里) 마을로 옮겼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1000 여명
약 300 년이 지난 현재 4600 여명.
정약전은 그후, 우이도가 뭍에서 가까워
1815년에는 다시 우이도로 거주를 이전한다.
1816년 6월 6일에 병으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
'정약전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17년간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유배가 풀리길 학수고대한 것일까?'
조선시대 흑산도 유배지는
남자든 여자든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나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우이도
전남 목포 남서쪽 90㎞ 해상에 있는 흑산군도(黑山群島).
대흑산도 중심으로 68개 섬으로 형성되었으며 면적 50 ㎢.
가거도에 639m, 대흑산도 378m, 홍도 368m 산이 솟아있다.
평야는 거의 없고, 농산물 생산량은 2개월 분의 자급량.
포경의 중심지이고 전갱이 고등어 조기 상어 갈치 홍어 등
어민은 총가구의 80% 가까이 차지하고 있어 진도와는 대조적.
흑산도 중심 예리항은 천연적 양항으로서 어업기지.
동시에 인근 항해선박의 보급과 휴식처이고 대피항.
또 통신 연락의 중심지이며, 3~10월까지.,파시(波市).
부근 홍도(매가도)는 제2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암과 괴석, 그리고 노송이 우거져 경승을 이루고 있다.
제주 추자군도와 서쪽으로 이웃한.,전남 신안군 흑산군도.
대흑산도, 소흑산도, 하태도 우이도 등지는 패총 유적지.
패총은 과거 주민들이 까먹고 버린 패각이 쌓인 조개더미.
주로 해안 도서(島嶼)지방에 분포한 신석기 시대 이래 유적지.
1990년대에는 지도읍 어의리패총에서 즐문토기 편이 발견.
이곳 패총들은 그 규모가 작고 출토유물의 양도 적은 편이나
토기 중에서 이중구연편, 갑인문토기 단청마연토기 등이 있어
신석기 중기 이전으로 올라가고 있어 그 시기적인 중요성이 크다.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이 주 생업이라 패총에 남긴 예가 드물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패총이 형성되기 시작한.,흔적들.
임자면 학산리, 압해면 대천리, 흑산면 하태도 b지구 등지에서 패총.
철기시대에 이르러 그 분포 범위가 휠씬 넓어졌다.
임자도 대기리, 삼두리, 하의면 어은리, 승도면 갈마도.
신석기시대 것이 5개소, 철기시대 6개소, 기타 1개소이다.
이들 패총은 대부분 훼손이 심하여
보존대책의 수립이 시급한 현실이다.
선사시대 황해평야 선진 문명의 흔적들.
'지금은 서남해 속으로 가라앉은.,황해평야.'
'황하문명의 발상지가 흑산군도 일대 아닐까?'
대흑산도 패총은 진리만 만호부에 퇴적된 사구에 있다.
이곳 건물과 시멘트 포장도로 때문에 흔적이 파괴되었다.
이곳 유적은 1954년 국립박물관 고고학조사반이 조사 보고.
그뒤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가 1966년부터 벌여온
남해도서지방 고고학적 조사사업 일환으로 1967년 9월 발굴.
1987년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가 예리 조개무지를 재조사.
대흑산도 진리만 만호부 패총 유물로는 석기류, 골기류, 토기류.
골각기는 2점(사슴뼈, 짐승뼈)이고 대부분 토기와 석기류 등이다.
토기는 남해안 신석기 만기의 겹입술 토기이나
그밖에 굵은 심선문(心線文), 붉은 간토기(紅陶),
기타 만기 신석기 보다 이른 시기를 나타내는 무늬.
특히, 주목되는 것은 "...
평행선을 갈지(之)자로 눌러
무늬를 넣은 신석기시대 토기이다.
중국 동북지방의 신석기시대에 유행한 "之"자 무늬 토기
남해안 상노대노 조개무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기 때문에
흑산도의 것도 이들과 동일한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1967년 발굴에서도 신석기 만기 겹입술 토기가 대량으로 출토.
위로부터 1층(갈색 사질)-2층(모래 섞인 자갈)-3층(갈색 모래).
신석기시대 유물은 2,3층에서 출토되고 있다.(겹입술 토기가 주종)
이들은 남해안 지방에서 자주 보이는
구주(九州)지방 죠몽토기로서 교역품.
다량 출토된 석기 중 타제 도끼류가 가장 많고
반마반타(半磨半打)또는 완전히 간 것도 나온다.
찌르개, 숫돌, 찍개, 유백색의 흑요석 격지고 있다.
그물추와 원형의 긁개도 출토되었다.
자연유물로는 대합, 우렁, 고동, 소라, 전복,
바지락 등 조개류와 물개과 바다짐승뼈가 나온다.
............패총의 의미와 중요성............
대흑산도 유적의 중요성을 남해도서지방
신석기 발굴 및 연구성과에 비추어 보자면
신석기시대 전 기간에 걸친 유물 출토가 많다.
특히 이웃한 소흑산도에서도 융기문토기가 나오고 있어
대흑산도는 신석기시대 전시기에 걸쳐 사람이 활동한 곳.
남해도서지방에서 발굴된 흑요석편도 이곳에서 자주 출토.
또한 많은 조개류와 바다짐승에 대한 포획도 보여준다.
그리고 '之'자 무늬 토기 등은 도서와 육지와의 교류 증거.
그 관계에 대해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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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흑산도 무심사지 일대를 시굴 조사한 목포대박물관.
허황옥(33~189)이 인도에서 들어올 때 경유하였다는.,무심사지.
가락국 초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는 인도에서 들어온 해상세력.
흑산도는 한반도에 남방불교를 처음 들여온
허황후가 이끈 해상세력 영역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전하여 오는 전설에 불과한걸까?
무심사지에서 발굴된 기와편.
막새류, 명문와, 전돌, 도.자기류 등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유물들.
무심사지는 한.중교역의 중요 기착지
흑산도에 세워진 선종 계통의 사찰인듯.
"흑산면 읍동 일대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13세기 유물이 빈번히 발굴된 곳" -신안군 관계자-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흑산도
연차적으로 발굴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반월성' 상라산성과 삼층석탑, 관사터 등
'신라~고려'시대 유적들과 조선시대 흑산진,
유배 관련 유적지 등이 산재한 해양문화의 산실.
조선시대 정조때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흥미롭다.
흑산도에 살던 김이수라는 백성이 한양에 올라와서
임금이 지나는 길목에서 꽹과리를 쳐 행차를 멈춘 사건.
정조가 사연을 묻자 그는 “세금이 어찌나 많은지
고등어 잡으면 고등어세, 콩을 거두면 콩세를 내는데,
관리들은 자라지도 않는 닥나무세까지 내라하니 죽을 지경.”
정조는 부당한 닥나무세를 없애라 명하고
그에게 벼슬까지 내렸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흑산도에서는 조선시대 김이수 일화를
소년장군 강바우로 등장시켜 실화를 복원.
강바우가 ‘흑산도 소년 장군’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불의에 맞선 용기 때문.
이는 정조 재위 당시 흑산도에 만호부 제도가 존속한 증거.
만호부 가문이 대대로
만호부 벼슬을 이어 받는
관행이.,'소년 장군' 강바우.
소년장군 강바우가
만호(萬戶)를 다스리는
흑산도 주민 통치자.,만호부.
만호부는 고려 후기,
원나라 제도를 본떠서
설치한 '민간인' 군사조직.
임진왜란 7년 전쟁 당시에
나라를 구한 전라좌수영 수군.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흑산군도.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조정 관아의 통치권이
이곳까지 미치지 못한 것.
조선 후기 부터는
만호 & 별장.,겸임.
1681년(숙종7년)~1889년(고종21년) 까지
흑산도에 파견되었던.,흑산도진 만호 & 별장.
당시 흑산도 백성들을 착취한 '흑산도진 별장'과
그의 아들 '함수동'이 별장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횡포를 부린 사실을 민요 '둥당애타령'으로 전한다.
친구 목숨 내어주면
바닷물이 원수 되어
오는 고기 아니 오고
보낸 친구 아니 오네.
둥당애당 둥당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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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유배의 섬.,흑산(군)도.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서 세 번째로
유배 중죄인을 많이 보냈던 곳.,흑산도.
흑산도 부근은 수심 80m 바다에 뻘이 많아
홍어 산란장으로 안성맞춤인 곳으로 알려졌다.
홍어잡이 어선 6척이 매년 100톤(40억원) 어획고.
"홍어는 곧바로 잡아 만든 쫀득쫀득한 회맛,
삭혀 코 끝을 톡쏘게 하는 요리 등 모두 일품."
관절염이나 기관지 천식을 완화시켜주는 음식.
'2015년 5월 8~9일'., 흑산도 홍어축제 기간.
어선들이 오색기, 만선기를 달고 해상퍼레이드.
홍어회 비빔밥 만들기, 풍어제, 흑산 홍어 가요제,
수산물 깜짝 경매, 객석 참여 한마당 등 체험 행사.
흑산홍어 전시회, 홍어 시식회, 길거리 사진전시회.
.................홍어(洪魚)...............
몸은 마름모꼴이고 너비가 넓다.
머리는 작고 주둥이는 돌출, 몸길이 150㎝.
눈은 작고, 등의 중앙선에는 작은 가시가 있다.
몸빛은 등쪽은 갈색이고 배쪽은 백색이거나 회색.
가슴지느러미 기저에는 검은 테를 두른 큰 얼룩무늬.
우리나라 남서해안 및 일본 연해, 동중국해에 분포한다.
부산·목포·영광·인천 등지 수심 20∼80m연해에 많다.
봄에 산란하며 ,'경상도지리지'에는 울산군의 토산공물.
'세종실록.' 지리지 토산조에는 ‘洪魚’ 또는 ‘紅魚’로 기재.
이것은 우리 민족이 홍어를 어획한 역사가 깊음을 증명.
흑산도 홍어회 맛이 일품인데, 특히 전라도에서 잘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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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골수도"라는 이름은
맹골도(孟骨島)에서 유래.
"맹골도", "거차도" 지명은
맹수처럼 거칠고 빠른 물살"
'맹수처럼
아주 사나운
바다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에서
'매응골도(每鷹骨島)'.
1789년 조선시대 인구조사 때
섬 해역에 암초가 많아.,맹골도.
거차도는 '거친 바다'라는 뜻 지명.
.
2013.3.7 진도.,'신비의 바닷길' 축제.
덧 말
만재도 - 신안군 흑산면 만재도리 4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