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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사무엘상24장1~22절
제목 : 하나님이 판단하소서
다윗이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요나단을 보내 위로하시고,
원수인 블레셋을 이용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다윗을 건져내십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지만 그를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사울은 다윗의 자비 앞에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며 그를 축복하고 물러갑니다.
1. 사울을 해하지 않은 다윗(1~7절)
1)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고 합니다(1절).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사울에게는 다윗에 관한 정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서 저자는 이때의 밀고자를 구체적으로 언급치 않지만,
(1)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는 데 필요한 병력 규모를 결정함에 있어 주저치 않았으며
(2) 사울이 다윗의 은신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2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밀고자는 아마도 그곳 지리에 밝은 '십'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23:19; 26:1).
엔게디(Engedi) - '염소의 샘'(Spring of the goat)이란 뜻으로,
사해(死海)의 서부 중앙에 위치해 있는 요새지요,
석회석 고원 지대이며, 또 온천수가 있는 오아시스 지역입니다.
후일 솔로몬은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아 1:14).
*아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한편 오늘날의 이곳 지명은 '아인 이디'(Ain-jidy)인데, 현재도 숨을 수 있는 많은 동굴들이 도처에 있다고 합니다. 23:29 주석 참조.
2) 사울이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갔습니다(2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 여기의 '택한 사람'(이쉬 바후르)은 문자적으로는 '남자 청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전국에서 선발된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정예병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9:2; 13:2; 신 32:25; 사 9:17; 겔 30:17).
삼천을 거느리고. - '삼천'은 사울이 일찍이 수많은 블레셋 족속들을 무찌를때 동원했던 수효와 동일한 병력 규모입니다(13:2).
사울은 이 규모의 병력으로 다윗과 그의 추종자 육백 명(23:13)을 일거에 제거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사울이 다윗의 군대에 비해 5배나 많은 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엔게디 황무지까지 다윗을 추적한 것은 다윗의 무리를 섬멸하려고 단단히 각오했던 사울의 의지(意志)를 잘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보호 아래 있었던 다윗에게는 그와 같이 많고 강한 사울의 군대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시 3:6).
들염소 바위. - 이곳은 사해(死海)로 내려가는 벼랑의 한 지점으로,
그 가파름 때문에 들 염소나 산양만이 생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므로,
이러한 명칭이 부여된 것 같습니다(Robinson).
뿐만 아니라 당시 이 지역에는 충분한 풀과, 샘에서 넘쳐 흐르는 신선한 물로 인하여 들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Danin).
오늘 날에도 여행자들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많은 산양과 산염소를 발견한다고 합니다(Thompson).
또한 이곳에는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다고 합니다(Fay).
3)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갔는데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3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길가 양의 우리. - 이것은 그 지역의 좋은 자연 조건을 이용한 양(羊)의 사육처를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도 많이 존재하는 이 '양의 우리'는 대부분 동굴 앞에 돌로 나즈막히 둥글게 쌓아서 만들어졌으며, 그 지붕은 야생 짐승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Thompson).
굴이 있는지라. - 그 당시 '굴'은 일반적으로 양을 돌보는 동안 목자들의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굴'은 날씨가 추울 때는 동물들의 거처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 사울이 바로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다윗의 일행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 엔게디 요새(23:29) 지역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일행은 그 중 은신하기에 좋고 큰 어느 동굴 속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 속으로 찾아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가 들어간 바로 그 굴에 숨어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1) 동굴의 내부는 지척을 분간 못할 만큼 매우 캄캄했으며,
(2) 다윗과 그 일행은 캄캄한 그 굴의 깊숙한 곳에 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동굴 입구는 볕이 드는 관계로 식별 가능하지만, 동굴 내부는 볕이 차단되기 때문에 캄캄했습니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4)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벱니다(4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 사울에 대한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예언하는 본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은 갓과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다윗에게 주어졌던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때 다윗의 추종자들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그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사울이 호위병도 없이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있던 그 동굴로 들어온 것은, 사울의 인생을 거기서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도록 조성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인식하고 다윗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때 다윗이 사울만 제거해 버리면, 당시의 정황상(18:7) 민심(民心)은 다윗에게로 급속도로 기울어질 것이었고, 따라서 다윗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왕권(王權)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남다른 신앙과 인품 및 우정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 다윗은 동굴에 들어온 지 오래여서 동굴의 어두움에 이미 적응이 되었으나, 사울은 그렇지 못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근접해 온 다윗의 위와 같은 행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행동을 도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26:12).
한편 다윗이 이때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을 벤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1) 원수에 대한 복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만 하실 일임을 확신했으며(12절),
(2)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를 남김으로써, 자신이 사울을 해하려고 한다는 사울의 의심과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습니다(11절).
그러나 혹자는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이 행동을
(1) 사울로부터 왕권을 빼앗으려는 강력한 욕심의 표현(Klein, Payne; 15:27, 28; 왕상 11:29-31),
(2) 또는 찢어진 옷자락으로 인하여 사울이 조롱의 대상이 되도록 하려는 의도(Payne)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들은 본 문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바 다윗의 신앙과 성품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편, 여기서 '겉옷'(메일)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도포식 통옷으로서(2:19), 사울은 아마 용변을 보기 위하여 이 겉옷을 벗어 옆에 두었을 것입니다.
혹 입고 있었더라도 그 옷은 땅에 길게 축 늘어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그 겉옷자락을 베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Fay). 더군다나 사울은 그때 긴장을 푼, 전혀 무방비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5)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다윗의 마음이 찔렸습니다(5절).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은 사울을 죽이자는 부하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단지 사울의 겉옷자락만 살짝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 자체가 혹시라도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는 자의 인격을 조롱한 행위로 비쳐지지는 않았는지 괴로워 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무튼 그 일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결례(缺禮)인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에, 다윗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도피 시절 당신의 다윗의 민감한 신앙 양심을 느끼게 해줍니다.
6)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아니한 결정적 이유를 시사합니다(6절).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본절에는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아니한 결정적 이유가 시사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 - 다윗의 이 말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하여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서 임명된 자, 즉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다윗은 사울을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엄연히 여호와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10:1), 선민 통치의 대권을 위임 받은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사울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을 결코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충성을 다해 섬겨야 할 주인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사실처럼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않은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신앙적 열심 곧 여호와 경외 사상에 근거한다는 점에서(C.J. Goslinga),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일과 관련하여 다윗을 정치 술수에 능한 인물 혹은 관대한 무사도(武士道) 정신을 가진 인물(Hertzberg)이라는 등 인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7)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갑니다(7절)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 여기서 '금하다'(솨사)란 말은 '째다', '찢다', '끊다', '자르다'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강조형으로 사용되어, 엄히 책망하면서(Davidson) 상대방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차단시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근거하여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같은 자의 앞날을 보장하십니다.
2.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는 다윗(8~15절)
1) 사울에 대한 다윗의 양심선언입니다(8~9절).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사울을 향한 다윗의 이 외침은 실로 진리와 신앙에 입각한 절규로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양심 선언입니다(F.R. Fay).
내 주 왕이여. - 사울을 향한 다윗의 이 호칭은 깊은 존경과 전적 복종의 뜻이 담겨있는 호칭으로서, 다윗은 자신이 여전히 사울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땅에 엎드려 절하고. - 당시 다윗은 그 용맹과 지략 등으로 인해 주변 이방 국가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온유했고, 충실한 종처럼 겸손했습니다.
실로 이러한 겸손과 예의는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는 외적 증거가 됩니다. 진정 겸손한 자세로 진실을 말할 때 성도는 가장 성도답습니다.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
본서의 내용을 볼 때,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은
다윗의 명망에 대해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 자신의 잘못된 성격 때문이었지, 특별히 어떤 사람의 충돌 질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마치 사울이 다른 사람의 이간질에 의하여 자신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된 양 말하고 있는 것은,
(1) 실제로 사울의 증오심을 부추긴 구시라는 베냐민 사람이 없지 않아 있었으며(시 7편),
(2) 완곡한 표현으로 사울의 완악한 마음을 유화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사울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강력히 주장합니다(10,11절).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주어졌었으며, 또한 사울을 죽이라는 적극적인 권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사울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즉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벧 때(4절) 이미 생각했던 대로, 사울을 향하여,
(1) 자신의 결백한 행위와
(2) 전혀 사울 왕을 해칠 의사가 없는 자신의 마음을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호소는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 7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F.R. Fay).
나의 아버지여. - 다윗은 비단 사울이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이자 자기의 장인(丈人)이요, 나이 상 연장자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부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 및 사랑의 표시로서
사울을 이처럼 부른 것입니다(Keil, Fay).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다윗은 이때 자신의 말을 입증하는 증거물로서,
사울의 베어진 겉옷자락(4절)을 제시합니다.
실로 다윗의 손에 들려있는 사울의 겉옷자락은 사울의 의심이나 주위의 모든 중상 모략을 일소(一掃)하는 증거물로서, 곧 다윗이 사울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생생한 시각적 증거물입니다(F.R. Fay).
3) 자기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12~13절)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원수 갚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롬 12:21; 히 10:30; 신 32:35)는 사상은 다윗의 철학이요, 신앙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을 '보수하시는 하나님'(시94:1)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에게 극악한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그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위임한다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심히 원하시는 일입니다.
판단하사(솨파트) - 공의적(公義的) 심판을 전제로 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적 재판 행위를 가리킵니다(시 7:8; 96:13; 겔 18:30).
옛 속담. - 여기서 '속담'(마솰)은 '잠언', '격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옛 속담'은 모세 오경 및 히브리인의 세계관에 근거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당시까지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던 금언(金言)이었을 것입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 이 속담은 악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잠 13:16; 마 7:16-20; 12:35; 눅 6:43; 약 3:11, 12).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자인지는 그의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는 뜻인데, 따라서 이 속담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수 있다'(마 7: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이 속담을 언급함으로써, 만일 자신에게 왕이 되고픈 야욕이나 사울을 해할 악의가 있었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사울을 죽였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다만 겉옷자락만 벤 것은 자신에게는 그러한 야욕이나 악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Stoebe).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 앞에서의 속담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악인(惡人)이 아님을 증명한 다윗은, 이제 반대로 자신은 선인(善人)이기 때문에 그 선한 성품에 따라 자신은 절대로 사울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4) 다윗는 사울을 높이고 자신을 저하시킵니다(14절)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영광스럽고 위엄있는 호칭입니다.
반면 '죽은 개나 벼룩'은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아울러 전혀 해(害)를 끼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를 상징합니다(Fay, Smith, Keil).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라는 칭호는 사울에게,
그리고 '죽은 개나 벼룩'은 자신에게 대조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사울에 대한 자신의 현저한 상대적 열등성을 강조합니다.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사울로 하여금 다윗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적의(適意)나 질투, 그리고 경계심 따위 등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삼하 9:8; 16:9; 왕하 8:13).
5)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 재판장으로 인정합니다(15절)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이 모든 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 재판장으로 인정하고 전적 의뢰하는 다윗의 신앙을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
살펴 신원하시고. -'살펴'(라아)는 세심히 관찰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23:22).
그리고 '신원하시고'(리브)는 원래 '잔소리하다', '변론하다'란 뜻이나,
이 문맥에서는 특정한 일의 깊은 내막까지를 꼼꼼이 헤아리는 행위를 가리
킵니다(사 1:17; 호 2:2).
건지시기를(솨파트) - 이말은 '공정히 판결하사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여 매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란 의미입니다(시 35:1; 43:1; 119:154).
3. 다윗을 축복하는 사울(16~22절)
1) 사울이 다윗의 말을 듣고 소리를 높여 웁니다(16절).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진실에 근거한 다윗의 간절한 호소(8-15절)에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즉 다윗은 '내 주 왕'(8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10절),
'나의 아버지'(11절) 등의 표현으로써, 최대의 충성과 존경과 사랑을 나타내면서 사울의 양심에 호소한 결과, 사울의 무디고 강퍅한 마음의 심금까지도 울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결국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르면서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그가 진실하게 회개했음을 의미치 않습니다(26:1, 2).
단지 사울은 감정에 강하게 좌우되는 자신의 균형 잡히지 못한 성격에 따라 다윗의 설득력 있는 호소에 감동되고 말았을 뿐입니다.
한편 '내 아들 다윗아'는, 11절에서 다윗이 사울을 '나의 아버지여'라고 한 것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사울의 이같은 표현은, 사울이 이전에 다윗을 '죽어야 할 자'(원문대로 한다면 '죽음의 아들'라고 한 것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호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20:31).
2)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합니다(17절).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학대하되. - 문자적인 의미는 '악으로 보답하되'(have rewarded - evil, KJV)란 뜻입니다.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 하나님께 기대되던 (15절) 판결이 사울에 의하여 먼저 이같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실로 증오심과 질투로 불타오르던 사울의 마음이 다윗의 진실하고도 겸손한 호소와 변호로 말미암아 녹아 내렸을 때, 사울은 사태를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마음은 일시적인 감동에 근거한 사과(謝過)에 불과할 뿐 진정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회개(悔改)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 후 사울이 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적한 사실로 보아 명백합니다(26장).
이처럼 한 순간의 감정이나 감동으로 행해지는 사과는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진실성이 결여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의롭도다'(차디크)는 법정적 용어로서, 법적 판단에 따른 무죄(無罪)의 선언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입니다(창 7:1; 신 4:8; 잠 18:5; 렘 1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곧 윤리.도덕적으로 선한 자에 대해서 주로 많이 사용됩니다(창18:23;삼하 4:11; 시 1:1; 겔 18:26).
3) 다윗이 사울을 선대한 내용입니다(18절).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본절은 다윗이 사울을 선대(善待)한 내용으로서(17절),
곧 사울이 다윗을 자신보다 더 의롭다고 말한 근거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 여기서 '넘기셨으나'(시그라니)는 '닫다', '가두다'란 의미가 있는 '사가르'의 강조형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에 의하여 당신의 원수를 택한 백성(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뜻하는 동사 '나탄'과는 전혀 다릅니다(23:4).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가졌던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나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4절), 사울 자신은 '사가르'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과 다윗의 갈등과 다툼을 성전(聖戰)의 차원에서 보는 반면, 사울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고 개인적 차원의 정적(政敵) 관계로 국한 시키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아무튼 사울의 이러한 깨달음과 고백은 이전에 사울이 호언한 바(23:7),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던 때와는 뚜렷이 대조됩니다(F.R. Fay).
4) 다윗의 선대에 대한 칭찬입니다(19절)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 이말은 사울 자신에 대한 다윗의 '선대'(17절)를 높이 칭찬하는 반문(反問)입니다.
즉 통례상, 사람이 평소 극히 미워하던 원수를 해할 절호의 순간을 만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하는 것이 상례인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으니 그것이 곧 자신을 선대(善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란 뜻입니다.
5) 사울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20절)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나는...알고...아노니 - 본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이같은 확신은 이미 요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정확하게 알려졌었습니다<23:17>.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신이 자신에게서 떠났던 사실(16:14),
*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2) 하나님께서 전쟁터에서 다윗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사실(18:5),
*18: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3) 다윗이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다는 사실(18:6, 7),
*18:6,7“[6]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7]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4) 심지어 다윗이 자신의 가족들로부터도 호감을 사고 있다는 사실(18:1, 20) 등으로 인하여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에 오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18:1,20 “[1]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20]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아노니(야다) - 이는 일말의 의심 없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사울의 뇌를 온통 뒤덮고 있던 시기와 증오, 의심과 적개심의 먹구름이 다윗의 진실한 호소로 인해 다 거두어진 이 순간 만큼은 사울도 모든 사실을 바로 인식할 수 있었고, 또 그 마음의 진실을 거짓 없이 다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깨달음과 진실이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했고, 또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6) 자기 가문과 후손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부탁합니다(21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사울은 자기의 후손을 끊지 말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합니다.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 이것은 왕조(王朝)가 바뀔 경우 후환(後患)을 없애기 위해 구(舊)왕조의 후손들을 멸절시켰던 고대의 풍습과 연관시켜 이해 될 수 있을 것입니다(20:14, 15 주석 참조)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 - 이것은 앞에 나오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에 연이어진 동의적(同意的) 대구법(對句法)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고대 중근동에서는
(1) '이름'을 곧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간주했으며,
(2) 또한 후손들은 조상에게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됐다는 점(히 7:5)등에서 볼 때, 사울의 '후손'이 멸절되는 것은 곧 사울이 멸절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7)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갑니다(22절).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다윗...요새로 올라가니라 -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1) 자신에 대한 사울의 일시적 호의(好意)를 근본적 변화로 볼 수 없었으며,
(2) 다윗을 경쟁 관계로 생각하는 사울이 내심 그의 입경(入京)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요새'(함메추다)는 '그 요새'(the stronghold)란 뜻으로서, 말할 나위 없이 유다 광야에 속한 '엔게디 황무지'(엔게디 요새, 23:29; 24:1)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게 주신 교훈은
다윗은 말씀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기름부음 받은 자를 자기 손으로 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기준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감정으로 행하였습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하는데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울은 전쟁이 끝나자 다시 다윗 추격에 나섭니다(1절).
다윗을 향한 사울의 집요한 추격은 그가 무엇에 집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보다,
다윗을 사로잡는 일에 더 힘을 쏟습니다.
그의 관심은 왕의 본분보다 왕의 자리에 있습니다.
신기루 같은 헛된 권력을 좇다가
그는 본분도, 신앙도, 사명도, 충신도, 하나님도 잃습니다.
2) 도망만 다니던 다윗에게 보복할 기회가 찾아옵니다(1~7절).
힘겨운 도망자의 삶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만 자른채 살려 보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사울의 방식으로 복수하지 않고, 기름부음 받은 자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으며 부하들의 설득을 거졀합니다.
어리석은 결정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선택(選擇)입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전도 미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먼저 나서지 않는 일이 때로는 내가 해야 할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3) 다윗은 땅에 엎드린 채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합니다(8~15절).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에 비유하며 왕위를 찬탈할 마음도,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왕을 죽일 기회가 있어도 왕을 존중히 여겨 죽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왕을 해할 ‘힘’이 있지만 자신의 ‘손’으로 해하지 않을 거라 약속하며,
원수에 대한 보복도, 자신의 미래도 하나님께 다 맡깁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세상의 불의 앞에 힘겹게 서 있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로 맞서십시오.
4) 사울은 결국 다윗 앞에서 목 놓아 울며 다윗이 자신보다 의롭고 선하다고 시인합니다(16~22절).
그리고 자기 가문과 후손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악을 이기는 것은 더 큰 악이 아니라 선입니다.
다윗의 선함이 사울의 악함을 보게 한 것입니다.
다윗의 자비가 사울의 자만을 꺾고,
다윗의 용서가 사울의 독기를 잠재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