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의 旌閭(孝行)이야기
27. 禮山 효자 이성만李成萬 형제
예산은 충절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그런 연유는 대흥 이성만 형제의 효행과 우애이야기는 초등학교교과서에 실려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심청전 근원설화와 원홍장 이야기는 아직 학계에서 정확하게 검증이 되지 않았다. 심청전의 심청이의 근원설화의 배경은 백제시대 『원홍장이야기』의 배경이 예산군 대흥고올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역사 기록이 『관음사사적기觀音寺事蹟記』에 기록되어 있다. 전남 곡성 등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역문화발전의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2017년 대흥면사무소에 발행한 대흥면지 “1. 원홍장 청아이야기”711〜 730페이지에 관련 예산지역 지명과 사찰 등 역사적인 이야기를 자세하게 게재하였다.
현재 조선 연산군 1497년(연산군3) 에 이성만李成萬, 이순李順 형제의 효심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효제비석은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에 있다. 우리나라 지리지에 예산군의 효행 인물인 이성만과 동생 순에 대한 효행내용이 등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기록을 소개한다.
“대흥 – 효자 – 고려 – 이성만 : 성만이 그 아우 순과 더불어 모두 지극한 효성이어 부모가 죽으매, 성만은 아버지의 분묘를 지키고, 순은 어머니의 분묘를 지키면서 각각 애통과 경근을 다하였으며, 3년의 복제를 마치고는 아침에는 아우가 형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형이 아위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의 음식이 생겨도 서로 모여 만나지 않으면 서로 먹지 않았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되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1418년(태종 18) 지신사知申事 1)하연河演이 왕에게 충청도 대흥호장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알렸다. 두 형제의 효제비 비문에 자세하게 효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예산군 대흥면행정복지센터 앞 도로 남쪽에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두 형제 효제비는 원래 2)가방교佳芳橋옆에 있던 것을 1978년 예당저수지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대흥면사무소 앞으로 옮겼다. 비석은 정면,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을 한 효제각 안에 보호되고 있다.
1983년 9월 29일 두 형제의 효제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전국적으로 잘 알려 있는 이성만·이순 형제의 우애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대흥 윗들거리에 사는 형과 오리골에 사는 동생이 서로에게 더 많은 벼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에 밤마다 몰래 가져다주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밤 개뱅이다리(가방교)에서 마주쳐 밤마다 자기 집 가마니가 늘어나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산군에서 정려가 세워 현존하고 있는 정려 중 대흥면 이성만과 예산읍 방맹의 정려는 호장(향리) 신분이다. 하층민의 정려는 예산군에 남아 있지 않고 양인인 전금금 효자비만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예산군의 자랑인 이성만 두 형제의 의좋은 형제의 효행과 행실이 후대에 모범 되도록 국가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그런 사실이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년간 실렸다는 사실에 필자는 예산사람으로 자긍심과 자랑스럽다. 행복하다.
1)하연河演(1376 ~ 1453) : 조선 초의 인물. 자字는 연량淵亮. 관향貫鄕은 진주晋州.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승정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고 이후 사헌부 대사헌, 병조참판, 형조판서, 이조판서, 의정부 참찬 겸 판이조사參贊兼判吏曹事,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의정부 좌의정 등을 역임하고 1449년 79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2)가방교佳芳橋: 가방역에서 광시면 장전리로 내천을 건너는 석교
※참고 문헌(자료)
1. 대흥면지 2017
2. 디지털예산문화대전
3. 문화유적 분포지도(예산군)-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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