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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우리 아버지 -
권다품(영철)
새벽 두 시가 조금 지났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자식들 때문에 고생만 하다 가신 아버지....
그 시골 면, 군, 아니, 부산 서울 전국, 우리 집을 아는 친척들, 우리 시골마을을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다 나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만큼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런 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으니....
이미 후회스런 지난 날이지만, 잠시라도 그분의 고마움을 다시 생각해 보고, 내가 얼마나 못난 놈인 지를 깊이 되새겨보고, 따사롭던 내 아버지의 눈길을 회상하는 순간만이라도 잘못 산 내 삶을 부끄럽게 여겨보고 싶다.
2010년 5월 24일 새벽,
못나고 부끄러운 자식 영철이가 얼굴을 붉힙니다.
내가 자던 시골의 작은방 뒤란은 우리 아버지께서 장작을 패는 곳이었다.
가족들이 다 잠든 시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잠든 어둑한 새벽에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첫짐은 소까지(솔가지)를 한짐 지고 오셔서는, 혼자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가셔서는 그 높은 나무짝에다 재어놓고는 가족들이 잠을 깰까봐 조심조심 움직이신다.
그러고도 그 좋아하시던, 그 짧은 담뱃대를 물고 맛있게 쉬지도 않으신다.
하기싫어 서로 눈치보며 미루기만 하던, 소죽을 얼른 안쳐놓고는 또다시 그 몸서리나는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 가신다.
그 맛나는 삼지속 풍년초 담배는 빈지게를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가시면서 피우시리라!
그렇게 올라 가셔선, 이번엔 장작을 패기위한 나무를 지게가 내려앉을만큼 지고 내려 오신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소까지(솔가지로 묶은 나뭇짐), 장작들을 모아 팔아서 열 식구를 먹여 살리셨고, 또 우리 공부도 시키셨다.
또 해마다 논도 몇 마지기씩 사고......
그 새벽에 산에 올라 가셔셔는 나무 두 짐을 하고 오실 때까지 나는 단잠에 빠져있었다.
아버지는 그 때야 '이 녀석들을 깨워 학교로 보내야겠다.'싶으신 지, 소죽솥에다 불을 지펴놓고는 "퉁, 퉁, 쫘악....." 장작 패는 소리로 우리를 깨우신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그 장작패는 소리보단, 언제나 우리 엄마의 잔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이 너무 손아, 온동네 아~들(애들) 다 일나서(일어나서) 첫새북(이른 새벽)부터 공부하느마는, 이 너무 손은 새북 불 한 분 씨는(한 번 켜는) 꼬라지 몬 보고... 공부하기 싫커든 밥도 쳐묵저 마라, 이 너무 손아(자식아)...."
나는 우리 엄마의 그 잔소리가 언제나 소름이 돋고 무서웠다.
그러면,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자식들에게 독이 오른 말들을 했을까?
당신은 "벽진 이 씨" 양반 가문의 딸이고, 우리 "권가"는 상놈 집안이라고 알았단다.
상놈 집안에 시집 온 게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목에서 독이 오르더란다.
나중에 나는 국문학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 성 씨와 그 성씨의 유래, 그리고 그 성씨에서 배출된 인물들, 또 그 가문에서 내려오는 생활 방식들'을 공부하는 "보학(족보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하고나서, 나는 너무 어이가 없고, 너무 화가 났다.
그 이후부터 나는 외삼촌만 오시는 날이면 일부러 "엄마, 벽진 이 씨는요, 우리 안동 권가에는 비교도 안 되는 성이더라. 내가 자랑하는 기 아이라, 우리 권가는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양반이라꼬 책에도 나와 있더라.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중요하고, 후세들에게 꼭 알려야 겠다 싶은 것들을 골라서 모아 가지고 땅에 묻는 기 있는데, 그거를 '타임캡슐'이라 카거든요. 거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양반 가문이라꼬, 우리 안동 권문의 족보만 묻어놨어요. 그렇게 보면 엄마는 진짜 양반 가문에 시집 잘 왔다고 봐야지요."라며 독하게 능글거리며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비러물 넘(빌어먹을 놈) 그라마 우리 '벽진 이 씨'는 상놈이라 카더나?"
"꼬옥 상놈은 아인데(아닌데), 우리 권가에 비하면 아예 쨉이가 안 되는 성이지요. 우리 권가가 우리나라에서 1등이라카마 엄마 성은 한 100등이나 될랑강.....
100등도 안 되지 시푸네(싶네)!"
나는 이렇게 엄마와 외삼촌이 계신 자리에서, 여태 무시당한 걸 갚기라도 하자는 듯이 일부러 필요이상으로 "벽진 이 씨"를 더 까내리면서 어떤 통쾌함마져 느꼈다.
그렇다고 엄마나 외삼촌이 한자가 훨신 많은 "보학"이란 교과서를 본다고 알지도 못할 것이다 싶어기 적당히 과장도 덧붙여가며 무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국민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상놈 집으로 시집왔다고 착각한 엄마의 무지한 짜증과 막무가내식 화를 꼭 아침 저녁 밥상머리에서 들어야만 했다.
"누구는 공부 일등하는데, 저너무 손은 밥은 소매치로 쳐묵꼬, 잠만 해가 똥구뭉에 치바칠(항문에 비칠) 때까지 자빠지 자고(누러누워 자고)... 마 공부는 때리치야뿌고(때려치워 버리고) 똥추마리나(똥장군이나) 지고, 농사나 뿌둑뿌뚝 짓고, 산에 가서 나무나 하루에 열 짐썩(열 짐씩) 해라 이너무 손아. 올 아침에는 밥도 쳐묵지 마라. 쳐묵는(쳐먹는) 밥도 아깝다."
그 소리가 싫어서, 아버지가 이미 다 끌여놓은 소죽솥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때는 시늉을 한다.
"인자(이제) 댔다(됐다). 내 소죽 퍼주께 핵교가구로(학교가게), 낯씩고(세수하고) 책보(옛날 책가방이 나오기 전에 책을 싸던 보자기)나 챙기라.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엄마 눈치를 보며 밥상머리에 앉는다.
엄마의 잔소리는 어김없이 또 쏟아진다.
"새북불(새벽불) 한 번 안 씨도(켜도) 밥은 너무가는가배, 이 너무 손아? 니겉은 너무(너같은 놈의) 손은(자식은) 밥 한 숟가락도 아깝다. 밥도 쳐묵져(쳐먹지) 마라. 이 너무 손아."
그럴 때 나는 '숱가락을 놔야 하나, 계속 먹어야 하나'를 망설이며 눈치를 본다.
그 때 내 결정을 내려주시는 분은 아버지였다.
"밥이나 무라(먹어라)."
"밥은 뭐 하라꼬 처무(처먹어)."
"아따, 학교갈 아한테(학교갈 아이한테) 아침부터 여자가 재수없구로..... 여자 딱시소리가(앙칼진 소리) 담 너무가서(넘어가서) 잘 되는 집구석(집안) 몬 봤다. 아침부터 아~들이(아이들이) 그런 소리 듣꼬, 무슨 너무(놈의) 공부가 될끼고(될 것이고)"
"아~따, 온 집안 사람 자전거 타고 면에 댕기는데, 혼자 조노무 지게나 뽀독뽀독 지면서 이럴 때야 언가이(어지간히) 똑똑거마는....."
와장창!
참고 참으시던 아버지는 밥상을 마당으로 날린다.
나를 비롯한 밥을 먹던 어린 자식들은 책보를 들고, 신도 신듯 말듯 집을 뛰어 나온다.
누가 뒤따라 오는 것도 아닌데, 뒤로 힐끗힐끗 돌아보면서 무조건 뛴다.
동네어귀에선 일찍 나온 아이들이 벌써 불을 질러놓고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다.
그제야 숨을 몰아 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천히 걷는다.
방금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자꾸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일부러 잊어버리려는 듯이 소리를 지르며 친구들과 같이 떠든다.
학교에서 공부시간에도 선생님이 뭐라시는 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집에서는 어떻게 됐을까? 엄마가 아직도 아버지한테 욕을 하는강? 그 욕을 듣고 참다가 참다가 또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부수고 싸우는 건 아닐까? 집으로 가면 집이 어떻게 변해 있을가? 나 때문에 싸웠는데, 집에 가면 오늘 얼반 죽는 거 아이가?' 등등의 생각으로, 선생님의 말씀이 들어올 리가 없다.
다른 날은 5교시가 그렇게 지겨웠는데, 그런 날은 같은 5교시를 하는데도 이상하게 시간이 빨리 간다.
또 다른 때는 그렇게 하기싫은 청소였는데, 엄나 아버지가 싸운 날은 나는 청소 당번이 아닌데도, 괜히 청소를 도와준답시고 청소당번들이랑 같이 얼쩡거린다.
선생님이 이젠 가도 좋다고 하는데도, 집으로는 가지도 않고 그 넓은 운동장을 소리를 지르며 놀고, 철봉에서 온갖 놀이를 다 하고 논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간다.
친구들을 붙들고 더 놀다 가자고 꼬시기도 해 보고, 또 억박지르기도 해 본다.
친구들은 그래도 집으로 간다면서 혼자 남은 나를 뒤로 보며 다들 가버린다.
이젠 운동장에 아이들이 없다.
텅 빈 운동장이 그렇게 쓸쓸하고 허전할 수가 없다.
그 먼 십 리 길을 혼자 불안한 걸음으로 쉬다가 가다가 하는데도, 왜 그렇게 우리 동네가 빨리 보이는 지.....
우리 동네가 보이면, 나는 그만 가슴이 뛰고 불안해 진다.
동네 어귀에는 집으로 일찍 간 친구들이 벌써 책보를 집에다 갖다놓고 나와서는, 짚이나 새끼로 둘둘 뭉친 공을 차면서 놀고 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내 세상을 만난 것 같다.
또 미친듯이 소리 지르며 논다.
그렇게 놀다 보면 또 친구들은 엄마나 동생들이 불러 들어가고, 저기 논 가운데 뒹굴다 만 공처럼 나만 덩거리니 남는다.
그 넓디 넓은 빈논에 공 하나, 나 하나.....
혼자 짚으로 묶어 만든 공을 몰고 다닌다.
공이 안 보여 허리를 구부려야 보일 때까지 몰고 다닌다.
이젠 어둡다.
도저히 공이 안 보인다.
어린 마음에 동네안으로는 들어가질 못 하고, 동네 앞 산으로 올라간다.
우리 집 마당이 보일 수 있는 산중턱까지 올라가서는 거기 앉아서 우리 집을 내려다 본다.
다른 집들은 켜놓은 불빛에 가족들이 밥상앞에 앉아서 웃으면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 집은 방마다 불이 꺼졌고, 온 집이 깜깜하다.
엄마의 안방에도, 아버지의 사랑방에도.....
내 주위를 둘러 본다.
깜깜하깜깜하다.
이 산은 여우가 나온다는 산이다.
조금 위 저 쪽은 여우가 어린아이의 시체를 파 먹는다는 애장골이다.
무섭다.
어디로 가야 하나?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쫓겨나다 보니, 도시락을 못 싸 가서 점심도 못 먹고 물만 마셨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는 들리는데, 불ㅇㅏㄴ하다보니 배도 안 고프다.
다시 마을로 내려간다.
저녁을 빨리 먹은 친구들이 벌써 나와 있다.
너무 반갑다.
집으로 못 들어가는 내게는 사람자체가 반갑다.
당산나무 아래서 웃고 떠들다 보면, 조금 후에는 또 엄마들이 하나 둘 나와서는 당신 자식들을 데리고 들어가 버린다.
이젠 자는 것이 문제다.
어디서 잔단 말인가?
이리 저리 돌아 다녀 본다.
할 수 없다.
야시(여우)가 울어서 무섭긴 하지만, 그 산비탈에는 보릿짚 덤불이 많으니, 그 보릿짚을 파고 굴을 만들어 들어가 자야 겠다.
그래도 밖에서는 입구를 보릿짚으로 막아뒀기 때문에 여우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무섭진 않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야시도 모를 것이고, 흔하다는 늑대로 모를 것이다. 돌맹이를 쥐고 있다가 짐승들이 오면 찍어뿌마 된다. 여기서 자고, 아침이면 머리에 붙은 보릿짚 티끌을 털고, 산 아래 저기 저수지로 가서 세수하고 가면, 아무도 내가 집에서 쫓겨나서 보릿짚에서 잔 줄 모를 것이다. 아침은 다른 사람의 밭에 열린 오이나 생감자를 캐 먹으면 배는 덜 고플 것이고.....'
내 어릴 때 기억은 이렇게 집에서 쫓겨난 기억들 뿐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 자식을 깨우기 위한 아버지의 그 정겹던 장작 패는 소리, 소죽을 안치기 위해 열고 닫던 소죽솥 뚜껑 소리, 그리고 따딱따닥 소죽 솥에서 발갛게 타 오르던 아버지의 불 때던 그 소리들....
내가 그렇게 공부를 안 하니까 아버지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던지, 어느날은 지게를 지고 당신을 따라 가자고 하셨다.
"공부가 수분(쉬운) 지, 지게 지는 기(게) 수분 지 한 분(번) 해 봐라."
나는 할 수 없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따라 나섰다.
나무를 할 줄을 몰랐다.
나무를 한참 하시던 아버지께서 내 지게에다 조그만 나무짐을 올려주셨다.
그리고는 산에서 칡을 캐 주셨다.
가루가 많이 나오고 맛있는 암칡이었다.
칡을 씹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께서 말씀 하셨다.
"바라. 나무 해 보이끼네 얼매나 힘드노! 나는 공부를 안 해서, 너거 믹이(먹여) 살리고 공부시킬라꼬 이래 나무를 안 하나. 니는 공부만 해 놓으마 돈이 저절로 들어 오는기라. 가마이(가만히) 앉아서 펜대마(펜만) 놀리마 돈이 안 들어오나...."
그러나, 나는 왜 그런지 이미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부산으로 고등학교를 내려왔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집에서 더디어 벗어났다.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었는데, 직장 생활이 싫었던 지, 매형이 시골로 이사를 갔고, 혼자 자취를 해야만 했다.
내 세상이었다.
공부를 안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친구들이 와서 자고 갔다.
고등학생밖에 안 된 놈들이 술도 마셨다.
모이기만 하면 여학생 이야기고, 시내로 여학생들이 많이 온다는 고고장으로 여학생들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어울려 다니며 놀다 보니, 나는 이미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학교도 가기 싫었다.
하루는 여학생들이 많이 온다는 송도로 배를 타러, 또 하루는 김해의 그 넓고 놀기좋은 왕릉으로, 또 하루는 공부 잘하고 예쁜 여학생들이 많이 온다는 서면 시립 도서관으로 친구들과 뭉쳐 다녔다.
이미 학생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 때부터 이 학교에서 전학, 저 학교에서도 전학, 이렇게 떠돌아 다녔다.
학교에서도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벌을 받는 시간이 더 많았고, 정학처분등으로 학교 청소를 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싸움하는 횟수도 점점 늘었다.
이미 내게는 인생이란 게 없고, 이미 학생이 아니었다.
무서운 돌아이 같은 놈으로 변해갔다.
이젠 그 누구도 나를 사람으로 보질 않았다.
나를 만나면 무슨 짓을 할까 싶어서 겁을 내며 피했고, 내가 없을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내 험담이었다.
나는 거의 폐인이었다.
그 많던 재산은 내가 친 사고 수습비로 다 날아가고 있었다.
동네에서는 나를 두고, "사람이 되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심지어 혈육들마져 나를 포기하고, "차라리 경찰서 잡아넣어라."고까지 하는 몇몇 혈육이 있었으니.....
그런데 딱 한 분, 그 분만은 끝내 자식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바로 내 아버지셨다.
나는 그 때, 저녁에 어디를 나갈 때는, 항상 손도끼를 품고 다닐만큼 독해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건드리기만 하면 이 도끼로 찍어버리고 나도 포기를 하리라. 내가 얼마나 무섭게 잔인하고 독한 놈인가를, 나를 포기한 가족들에게 반드시 보여 주리라!'
그렇게 생을 포기하려는 순간, 항상 나를 지켜보며 일깨운 분이 아버지, 바로 내 아버지 그 분이셨다.
"그래도 한 분(번) 두고 바라 뭐. 영철이 저 넘이 언제가는 한 분(번) 큰소리 칠 넘이라."
'내가 혹시라도 어쩌다 살인자가 된다면,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시장엘 다닐까? 동네에선 또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까? 그래도 아버지는 안동권문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시는데.... 그리고 사람 구실도 못하는 나를 아직도 얼마나 믿고 계시는데.....'
아버지는 내게 그런 분이셨는데.....
지금 온 가족들이 다 잠들었다.
큰아들은 군댈 갔고, 작은 아들은 자고 있다.
나의 이 아들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내 아들들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우리 아버지처럼 살 각오는 돼 있을까?
자식을 위해 내가 이렇게 많은 욕심이 생기는데, 우리 아버지는 내게 어떤 욕심이 있었을까?
하라는 공부는 않고 사고만 치는 자식을 보면서, 우리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과연 드시던 밥의 밥맛은 알고 드셨을까?
아버지만 생각하면, '나는 내 자식들에게 애쓰는 것도 없으면서, 바라는 게 너무 많고 큰 건 아닐까' 싶어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버지, 당신이 바라는 만큼의 아들이 돼 드리지 못해 부끄럽기만 합니다. 제가 아버지의 그 바램을 채워드리지못해, 손자들이라도 아버지의 그 큰 바램을 채워드릴 수 있을까 싶어 애를 쓰긴 해 봅니다만, 자꾸 아버지의 그 사랑이 너무 크다는 것만 느낍니다. 그래도 당신의 손자들이, 이 못난 자식처럼 빗나간 나쁜 놈들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긴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애들이 너무 순수하고 착하기만 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못난 아들은 당신께서 언제나 우리 집을 지켜주신다는 걸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아닌, 아버지 당신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