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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⑧]세종대왕(上) 육식 좋아하고 운동 싫어하다 당뇨병 걸려 장수에 실패 <조선일보> 2014년 5월 16일
정지천 ~ 1985년에 동국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부속한방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쳐 한방내과 전문의가 되었다. 1991년 동 대학원에서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부터 동국대 한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과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동국대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대한한방내과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으로 진료하고 있다. 연구 논문으로 ‘二精丸이 노화과정에 미치는 영향’, ‘고지방 식이 흰쥐의 비만에 미치는 三精丸의 영향’, ‘二至丸의 고혈당 조절 작용 및 기전에 관한 연구’ 등 당뇨병, 노인병, 남성병, 항노화 등에 관한 150여편을 국내 외에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명의가 가르쳐주는 약이 되는 생명의 음식(2013, 중앙생활사)’, ‘명문가의 장수비결(2011, 토트)’, ‘식의들이 알려주는 생명의 음식 120 (2008, 중앙생활사), ‘마늘 하루 다섯 톨의 자신감 (2007, 웅진윙스)’, ‘조선시대 왕들은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 (2007, 중앙생활사)’, ‘어혈과 사혈요법 (2002, 가림출판사)’, ‘우리집 음식 동의보감 (2001, 중앙생활사)’, ‘신장이 강해야 성인병을 예방한다 (2000, 도서출판 청송)’ 등이 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추앙받는 분으로는 세종대왕을 첫손 꼽지 않나 생각됩니다. 정치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라하고 싶어 하겠죠. 그렇지만 아무리 세종대왕이라도 따라 해선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건강하게 장수하셨다면 더욱 많은 업적을 남겨서 조선이 대단히 부강한 나라가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54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그것도 여러 가지 질병을 앓아 마치 종합병동 같은 경우가 되어 고생고생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세종대왕의 건강관리는 따라 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세종대왕께서 건강장수하지 못하였던 이유를 알아볼까요.
세종대왕은 타고난 몸이 허약했을까? 세종대왕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당시로서는 대단하게 74세까지 장수하였고, 무인 집안 출신입니다. 당연히 세종대왕도 튼튼한 골격을 물려받아 체격도 좋고 힘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22세에 임금이 된 다음 해에 큰아버지인 정종 임금, 어머니 민씨 그리고 아버지 태종이 잇달아 사망하여 7년 동안 국상을 치르느라 술과 고기를 비롯한 기름진 음식을 멀리 하면서 제사에 일일이 참여하다 보니 심신이 지쳤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세종대왕은 젊은 시절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눈병에다 각기병, 임증, 종기, 설사, 이질, 두통, 부종, 그리고 소갈(消渴), 즉 당뇨병 등입니다. 그 중에서 주된 병은 당뇨병이었고, 나머지는 대개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이 당뇨병을 앓게 된 원인은? 흔히 당뇨병을 ‘부자병’이라고 하는데, 육류 등의 지방질 음식, 술, 단 음식 등을 많이 먹는 것이 첫째 원인이죠. 왕실에서는 과도한 영양섭취를 하면서 운동이 부족했기에 당뇨병 환자가 많았는데, 세종대왕도 식성이 좋은 대식가였고 고기가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을 만큼 육류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상왕인 태종이 수렴청정하다가 자리에 눕게 되자 신하들에게 “주상은 고기가 없으면 밥상을 받지 않으니 내가 죽은 뒤 상중에도 고기를 들게 하라”는 유지를 내렸다고 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몸도 비만형이었고, 늘 앉아서 정사를 돌보고 책을 읽느라 과로한데다 운동이 되는 사냥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뇨병이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당뇨병의 유발 원인과 악화 요인으로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화를 내거나 근심 걱정을 많이 해도 금방 혈당치가 치솟게 되고 합병증이 나타나기 쉽지요. 세종대왕도 그토록 많은 업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엄청 많았고, 며느리 즉 세자빈 2명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으며 왕비와 아들들의 연이은 사망으로 병이 심해져 결국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당뇨병은 얼마나 심했을까? 30세 무렵에 이미 당뇨병이 생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 의하면 43세 때의 6월에 “소갈증이 있어 열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나았다”고 하였죠. 그 해 7월에는 “소갈병을 앓아서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 동이만 되었겠는가”라고 하여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면서 고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46세에는 소갈에 눈병이 심해져 도저히 정사를 볼 수 없어 중국과의 외교관계와 군정 이외의 모든 사무를 세자(뒷날의 문종)에게 맡기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미루었고, 결국 다음 해에 세자에게 섭정을 맡겼던 것입니다.
소갈과 당뇨병 당뇨병을 한의학에서는 ‘소갈(消渴)’이라 합니다. 소(消)는 태운다, 소모한다는 뜻이고 갈(渴)은 마른다는 의미로서, 음식을 먹으면 금방 눈 녹듯이 녹여버려 돌아서면 배고프고 입이 말라 물을 많이 마시기 때문이죠. 음식을 자꾸만 많이 먹으면서도 기운이 없고 몸이 야위게 되니, 연비가 낮아서 기름을 많이 먹는 자동차처럼 비경제적인 만성 소모성 질환입니다. 소갈은 뱃속, 즉 위장과 대장에 열이 많으므로 음식물을 빨리 소화시키고 열이 올라와 답답하면서 입이 마르는 상태입니다.
세종대왕이 앓았던 질병들은 대개 당뇨병으로 인해 생겨나거나 악화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혈당 조절이 잘되지 않는 환자는 방어 능력이 감소되어 각종 감염증에 쉽게 걸리고 또한 쉽사리 낫지 않지요. 특히 피부 감염, 결핵, 폐렴, 요도염, 방광염을 비롯하여 담낭염, 치은염, 비염, 악성 외이도염 등이 잘 합병됩니다. 왜냐하면 고혈당에 의한 삼투압 증가 등에 의해 백혈구의 기능이 감소되어 있고, 모세혈관의 벽이 두터워지기 때문에 백혈구의 이동이 방해를 받고, 인슐린과 영양소 등이 혈관 밖으로 확산되는 것도 감소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상처를 입어도 치유가 느리기 때문에 병원성 균종의 피부내 침입이 용이합니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백성들의 삶을 괴롭혔던 ‘종기’도 당뇨병이 있으면 잘 생기고 잘 낫지 않습니다. 또한 당뇨병이 없는 사람에 비해 중풍이 오는 비율이 2배가 넘고, 신장병, 당뇨병성 망막증, 백내장 등을 비롯하여 성기능장애도 옵니다. 특히 당뇨병의 진행 과정은 노화과정과 유사하기 때문에 당뇨병이 있으면 장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100세 넘게 장수한 사람들은 거의 당뇨병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당뇨병 방지를 위한 대책은? 조선시대 왕들이 당뇨병 방지를 위해 먹던 팥.왕이 받는 수랏상에는 흰쌀밥 외에 팥물밥도 있었습니다. 흰쌀밥과 팥물밥 중에서 그 때 그 때 골라 먹었죠. 팥물을 쓴 이유는 붉은 팥이 액운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는데다 맛도 좋고 어혈(瘀血)을 풀어주며 곪은 것을 배출시키고 해독작용이 있어 염증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소갈’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소갈은 열로 인해 몸에 물기가 빠지고 건조해지게 되는데, 팥은 약간 차가운 성질이며 기운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성질이므로 갈증을 풀어주며 열을 가라앉혀 줍니다. 또한 팥은 숙취에서 잘 깨어나게 해 주고, 술을 많이 마셔서 생긴 당뇨병, 즉 ‘주갈(酒渴)’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 술을 자주 마시고 기름진 음식을 즐겨 먹으며 운동이 부족한 왕들에게 팥이 소갈 예방약이 되었던 것이죠.
당뇨병 환자들이 주의해야 할 사항 동의보감을 비롯한 한의서에 가장 금하라고 한 것은 술, 짠 음식, 밀가루 음식으로서 이것만 잘 지키면 약을 먹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술을 절제하고 있다가 한 번 왕창 마셔도 혈당치의 변동이 매우 커지고, 담배를 피우는 당뇨병 환자들이 합병증에 훨씬 잘 걸리고 사망률도 높지요. 그밖에도 피해야 할 음식은 굽거나 볶은 음식, 단 음식, 열이 많은 음식으로서 고추, 마늘, 꿀, 설탕, 사탕, 초콜릿, 케잌, 아이스크림, 과일 통조림 등입니다.
좋은 음식으로는 보리, 콩, 팥, 율무, 녹두, 참깨 등의 곡류, 배추, 양배추, 무, 상추, 미나리, 시금치, 마, 오이, 당근 등의 채소입니다. 미역, 김, 다시마 같은 해조류도 괜찮고, 과일로는 비교적 당이 적은 딸기, 토마토 등이 무난하고 생선이나 살코기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음식이든 포식이나 과식해서는 안 됩니다.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⑨]세종대왕(中) 한글창제 위해 오래 앉아 연구하고 스트레스 받아 전립선염에 걸려 <조선일보> 2014년 5월 21일
세종대왕께서 성병의 일종인 ‘임질’에 걸려 고생했다고 써 놓은 책이 있습니다. 과연 세종대왕이 임질에 걸렸던 것일까요? 임금이 성병에 걸렸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더욱이 세종대왕께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든 믿기지 않을 겁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을 보면 세종이 43세 때인 1439년에 세종 스스로 자신의 질병을 고백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지난 해 여름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去年夏 又患淋疾 久不視事 至秋冬小愈)”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온 ‘임질’을 성병으로 해석한 것인데요, 그것은 큰 오류입니다. 한의학에 ‘임증(淋證)’이라는 병증이 있는데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이 임질로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임증과 성병인 임질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세균이 발견되지도 않았죠.
▲세종대왕
임증과 임질은 어떤 차이가 있나? 임질은 정식 명칭이 임균성 요도염(gonococcal urethritis)으로서 임균(gonococcus)에 감염되어 걸리는 ‘성교 전파성 질병’입니다. 성 관계를 하고 3일에서 10일쯤 지나 성기 끝에 누런 색의 농이 나옵니다. 또 요도 주위가 가렵고 소변을 자주 보고 싶으며 참기 힘들고 시원하게 나오지 않으며 소변이 나올 때 화끈거리고 따끔거리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급성 임균성 요도염에 걸린 겁니다. 임균에 감염된 것이죠.
임증(淋證)은 소변이 시원스럽게 나오지 않으면서 통증이 있는 경우를 통틀은 병증입니다. 임(淋)은 삼 수 변에 수풀 림이니 소변이 나오는 상태가 숲에 비가 내릴 때 빗물이 나무에 걸려 똑똑 떨어지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임증은 8가지가 있는데, 열림(熱淋)은 열이 방광에 많이 쌓여 생기는 것으로 소변 볼 때 화끈거리고 따가운 증상이 위주이고, 고림(膏淋)은 마치 고름같은 소변이 나오는 것입니다. 혈림(血淋)은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면서 통증이 있는 것이고, 사림(沙淋)과 석림(石淋)은 소변에 모래나 돌이 섞여 나오는 것이죠. 노림(勞淋)은 과로해서 생기는 것이고, 기림(氣淋)은 기가 맺히거나 기가 허약하여 생기는 것으로 둘 다 소변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으면서 보고 나도 항상 덜 본 것 같습니다. 냉림(冷淋)은 찬 기운을 많이 받아 소변이 잘 나오지 않으면서 아랫배가 아픕니다.
임증은 수많은 비뇨기 질환을 통틀은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임증 가운데 열림과 고림은 신우신염, 방광염을 비롯하여 임질 즉 임균성요도염이나 비임균성 요도염에 해당되고, 사림과 석림은 요로결석, 그리고 노림과 기림은 급만성 전립선염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 임질에 걸려 고생했다는 것은 ‘임증’을 잘못 해석한 것이죠. 세종대왕의 임증은 열림과 고림 즉 임균성 요도염으로 볼 것이 아니라 노림과 기림, 즉 전립선염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전립선염에 걸린 까닭은? 전립선은 방광 바로 아래 요도를 둘러싸고 있는 밤알 같은 모양과 크기의 기관으로 남성에게만 있습니다. 밤꽃 냄새가 나는 전립선액을 분비하는데, 정액에 포함되어 정자를 활발히 운동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전립선염은 불결한 성교로 세균성 요도염에 걸린 뒤 치료를 잘 하지 못해 전립선에 세균이 침범한 것도 원인인데, 이 경우는 10%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비세균성입니다.
전립선염은 청장년 남성에서 흔히 발생하는데 특히 오랫동안 앉아 지내서 전립선 부위에 압박을 많이 받는 회사원이나 학생, 운전기사 등에 잘 생깁니다. 오래 차를 타고 다니거나 과음, 과로는 물론이고 자위행위나 성교가 과도하거나 성교 시 사정을 억지로 참거나 너무 장시간 성교를 하여 전립선이 오랫동안 충혈된 것이 요인이 됩니다. 노림(勞淋)의 노(勞)는 육체적, 정신적, 성적인 과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일을 많이 하거나 신경을 많이 쓰거나 혹은 성생활이 과도한 것이 원인입니다.
세종대왕은 항상 오래 앉아 책을 보니 방광 아래 위치한 전립선이 눌려서 자극을 받았죠. 그리고 한글 창제, 영토 확장, 과학기구 개발을 비롯하여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엄청났지요. 또한 세종께서는 왕비를 비롯한 6명의 부인으로부터 무려 22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당연히 성생활도 왕성했을 것이므로 전립선에 무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록에 대왕 스스로 가을, 겨울이 되어 조금 나았다고 하였는데,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려 소변의 양이 줄므로 전립선염이 악화되기 쉽지만, 가을과 겨울에는 땀이 적으므로 소변 양이 많아지면서 소변을 통한 염증 물질의 배출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죠.
전립선염 때문에 정사를 오래 돌보지 못할 정도가 될까? 전립선의 만성염증은 우유 같은 묽은 배설물이 나오고 소변이 자주 나오면서 참기 어렵고 불쾌감도 많습니다. 허리, 사타구니, 성기 주위에 통증이 있고, 쉽게 피로해지며 권태감을 느끼는 등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증상이 생겨나 매우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면서 오래도록 잘 낫지 않습니다. 물론 쉬면 저절로 좋아질 수 있지만 세종께서는 계속 일을 많이 하시고 오래 앉아 책을 보셨기에 그토록 악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열심히 왕의 업무를 본 것이 문제였죠. ▲전립선비대증(오른쪽) 개념도. 정상전립선(왼쪽)보다 커진 전립선이 요도를 막고 있다.
밤톨만한 전립선 때문에 남성이 당하는 고통은 적지 않습니다. 전립선염, 전립선비대증 그리고 전립선암도 있지요. 젊었을 때는 염증으로, 중년 이후에는 비대증이 생겨 요도가 좁아져 소변 배출에 상당한 지장을 일으키며 성생활에도 큰 장애가 됩니다. 더욱이 전립선암은 미국에서 남성의 암 중에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육류 위주의 고지방식 서구형 식단이 늘어나면서 2020년에는 1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지요.
전립선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과로와 전립선에 압박을 줄 수 있는 운동, 술, 커피, 맵고 건조한 자극성 음식, 굽거나 볶은 음식 등을 피해야 합니다. 물을 많이 마셔서 소변 양을 늘리고, 대변을 매일 시원하게 보는 것이 좋으며, 회음부를 따뜻하게 해야 하고 자주 따뜻한 물에 좌욕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전립선은 성생활과 관계된 기관이기에 적절한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에 문제가 생기기 쉬우므로, 금욕하기보다는 적당한 간격으로 성생활을 하여 전립선 액이 적절하게 분비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60세가 되기 전에 전립선비대증이 나타난 환자들의 상당수가 평소 성생활 빈도가 낮거나 40대 초반부터 성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물론 성생활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악화 요인이 되지요.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⑩] 세종대왕(下) 시각장애인 수준의 눈병과 당뇨병 속에서 분투하며 한글창제 <조선일보> 2014년 5월 23일
세종대왕은 눈병으로 큰 고생을 하셨고 심지어 시각장애인이라고 할 정도로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뭘까요? 우선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당시 매양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을 채우고, 사서(史書)를 읽을 때도 다시 백 번을 더 읽었던 탓이 큽니다. 게다가 오랜 독서 때문에 수시로 눈병을 앓았는데도 글 읽기를 멈춘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눈병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 태종은 내시를 시켜 불시에 동궁전으로 들어가 책을 모조리 거두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요행히 책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그 책을 천 번이나 더 읽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의 눈병은 어느 정도였나? 세종대왕은 34세경부터 안질에 걸려 44세경에는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 없이는 걷기가 힘들 정도였으니 심각한 시각장애 상태로까지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 보면 세종 23년 2월에는 “내가 안질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되었으므로 마음을 편히 하여 조섭(調攝)하고자 하니 매월의 대조회와 아일(衙日)의 조참(朝參)과 야인들의 숙배(肅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게 할 것이며, 향과 축문도 친히 전하지 말게 하라”, 4월에는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서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서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더니,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한방 약물학 책의 주석(註釋), 작은 글자를 보았는데도 볼 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의 눈병이 심해진 원인은? 세종대왕께서 젊은 나이에 눈이 그렇게 나빠진 것은 지나친 독서로 눈을 혹사시킨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한의학에서는 무슨 일이든 오래 하면 어느 곳을 상하게 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구시상혈(久視傷血)’이라 하여 오래 눈으로 쳐다보면 혈을 상하게 되는데, 혈은 간이 주관하므로 혈이 상하면 간이 상하게 되고 간의 기가 눈으로 통하므로 간이 상하면 간에 연계된 풍기와 열이 올라 눈이 흐리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눈병은 기본적으로 거의 대부분 열이 생겨난 것이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세종대왕께서 의욕적으로 국정을 펼치느라 과로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 것도 열을 올려서 눈병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또한 과식하거나 술을 비롯한 열성 음식을 즐겨 먹는 것도 마찬가지요.
그리고 눈은 신장의 정기가 공급되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데, 신장의 정기는 우리 몸의 원기(元氣)로서 과로하거나 성생활을 과다하게 하거나, 오래도록 만성 질환을 앓는 경우에 허약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눈이 피로하고 침침해지게 되는데, 신장의 정기는 중년 이후에 감소되기 시작하므로 그래서 노안(老眼)이 나타나는 것이죠.
당뇨병 합병증으로 악화된 눈병 치료와 온천욕 세종대왕은 소갈, 즉 당뇨병에 걸렸기에 하루에 한 동이가 넘는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눈병이 심해져서 말년까지 고생하셨는데, 치료를 위해 온천에 자주 다녔습니다. 충남 온양에 세종대왕께서 눈병을 치료했다는 우물이 있는데, ‘어의정(御醫井)’, ‘어천(御泉)’ 혹은 ‘어정수(御井水)’라고도 합니다.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온양행궁
그리고 충북 청원의 ‘초수(椒水)’, 초정약수에도 행궁을 짓고 눈병 치료를 했습니다. 온천욕이 눈병 치료에 얼마나 직접적인 효과를 주는지는 확실치 않는데, 복잡한 정사를 잊고 요양하는 것이기에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단기간이기에 효과는 일시적이었으므로 신하들이 장기간 치료를 건의했으나 민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보통 한 달 정도였고, 길어야 두 달을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각한 눈병에도 한글 창제하고 말년 건강 악화되다 세종대왕은 건강 문제로 인해 별세할 때까지 8년간은 세자인 문종에게 섭정을 맡겨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결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추구하던 주요 과제는 하나도 멈추지 않았고 실명 위기까지 가면서도 매일 새로 편찬한 책들을 하루에 수십권씩 직접 검토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세종 25년, 반포한 것이 28년으로 승하하기 4년 전이었으니 우리의 한글은 눈병과 당뇨병 등을 앓고 있는 투병 상황에서 탄생한 위대한 업적이었죠. 눈병에 제일 나쁜 것이 술, 과도한 성생활 그리고 신경과로인데, 세종대왕께서는 눈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무리했던 것이죠.
게다가 그 무렵에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 그리고 왕비인 소헌왕후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기에 상심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더욱이 마지막 2년은 세자였던 문종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한때 중태에 빠지기도 했으므로 세종이 거꾸로 세자의 업무를 대신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니 명을 재촉했던 일이었죠.
☞ 눈 건강에 도움이 되는 방법 눈을 감고 눈동자를 회전시키거나 아침 일찍 양손을 비벼서 열이 나게 한 뒤에 눈 위에 대는 것이 좋습니다. 지압을 하는 것도 좋은데, 눈의 안쪽 즉 코쪽으로 끝부분에 있는 정명 경혈, 눈썹의 안쪽 끝부분에 있는 찬죽 경혈, 눈썹의 바깥쪽 끝부분에 있는 사죽공 경혈 등이 좋습니다.
눈을 밝게 하려면 어떤 약을 먹어야 할까요? 눈은 간장과 함께 목화토금수의 오행(五行) 중에 ‘목’에 속하여 간장계통에 속하므로, 소, 돼지, 토끼의 간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목’은 ‘수’의 도움을 받는 ‘수생목(水生木)’이 되어야 하므로, ‘수’에 해당하는 신장의 음기가 부족하면 간장도 허약해져서 눈이 나쁘게 되지요. 이럴 때는 신장의 음기를 보충해 줘야 하는데, 산수유, 거북의 등껍질과 국화꽃 등이 좋습니다. 눈의 충혈과 피로를 풀어주는 약으로 결명자를 비롯하여 전복의 껍질인 석결명, 구기자 등이 좋습니다.
▲손상된 간기능을 살리고 시력을 보호해주는 구기자. 조선일보DB ☞
세종대왕의 운동 세종대왕께서는 늘 앉아서 책을 읽고 연구하며 집무를 보았기에 운동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격구’를 꽤나 즐겼습니다. 격구를 자주 하고 싶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그러지 못하기에 경신일(庚申日)만 되면 종친과 신하들과 함께 밤새도록 격구를 했다고 합니다. 날밤을 새워도 되는 경신수야(庚申守夜)를 핑계 삼았던 것이죠. 당시의 풍속에 60일에 한 번씩 1년이면 6번 돌아오는 경신일에는 왕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먹고 마시며 밤새워 놀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몸속에 ‘삼시충(三尸蟲)’이라는 벌레가 있는데 그것이 평소 인간의 과실을 기록해두고 있다가 경신일에 사람이 잠든 때를 틈타 하늘에 올라가 죄과를 상주해서 목숨을 감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 왕들이 그토록 격구를 즐겼던 까닭은 스트레스도 풀고 충분한 운동이 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왕들은 거의 궁궐 내에서 지내며 그나마 이동할 때는 ‘연’이라는 가마를 타고 다녔기에 운동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이 걸어야 하는 격구는 하체의 혈액 순환에 좋은 운동이 되었던 겁니다. 또한 손과 팔을 써서 봉을 쳐야 하니 상체의 근력과 유연성 강화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죠. 게다가 공을 치는 순간에 느끼는 쾌감이나 점수를 얻었을 때의 기분은 업무상 스트레스를 푸는데 안성맞춤이 되었던 것이죠.
▲수원 화성 연무대의 연무정에서 국궁을 체험하고 있는 모습. 조선일보DB
그런데 왕의 운동이 또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활쏘기’입니다. 왕들은 궁궐이나 근교에서 자주 활을 쏘았고 세자의 교육 과정에도 활쏘기가 들어 있었는데, 세종대왕께서도 활쏘기를 장려하여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왕들이 활쏘기를 즐겼던 까닭은 지나치게 학문 연마에 치중하는 것에서 균형을 잡고자했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