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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주일설교 고린도전서5:1-13
본문:고린도전서5:1-13
제목: 추문을 들었을 때
오늘은 고린도전서5:1-13의 말씀을 가지고
“추문을 들었을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추문을 들었을 때”
우리는 타락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추문과 여러 소식들을 듣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 안에서도
추문이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문에서 벗어난
세상에 있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에는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도망치려는 마음이 있지만
또한 세상에 빠져드는
이중적인 마음에 긴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아예 그런 긴장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예 세상 빠져 버리는
극단으로 가는 신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야 할 순결한 삶을 버리고
도덕적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바로 그렇게 된
한 교인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배를
험준한 바위가 있는 쪽으로 몰고 갔습니다.
바울이 죄인의 가증스러운 행위뿐 아니라
죄에 대한 교회의 관대한 태도를
질책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기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활방식에 대해서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들처럼 고린도 교인들은 남의 죄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자기만족의 심각성을 보여주면서
교회가 교회의 징계로 어떻게 비리를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독성물질이 지하수에 스며들어 그 동네 사람들이
다수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타락이 고린도 교회에 슬며시 퍼져
회중 전체를 독살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칠 충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하는
고린도 교회 상황을 주목해야 합니다.
1.추문
1절을 읽겠습니다.
첫째 그 죄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던 바울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혐오감을 느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교인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퍼진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가장 골치 아픈 면은
그 소문이 널리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죄였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던 바울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서
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추문의 내용이 너무나 가증스러운 일이어서
맹렬한 산불이 휩쓸 듯이 교회에서 교회로 번져
여러 출처를 통해 바울의 귀에까지 들렸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것은 역겨운 죄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죄는 아름답거나
용인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경우에 대해 바울은 이런 류의 죄는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1절) 이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세상에서도 패륜이라고 인정한 것을
그리스도인이 용납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젊은 남자였을 고린도 교회의 한 신자가
자기 계모와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모자 사이에 벌어진 근친상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그 죄는 계속 진행중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젊은 청년이 자기 아버지의 젊은 새 신부에게 홀딱 빠져 교회 안에서 다소 당혹스러운 소란을
일으킨 데 대한 놀라움을 표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 죄를 교회 안에
늘 있는 고질적인 형태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그들 안에서
바로 그들의 면전에서 일어난 패륜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는 그 관계를 전부 알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가장 크게 질책한 것이 이 세 번째 문제입니다.
교회의 누군가가 사랑으로 진리를 바로 세우고,
의를 실현하며 화해를 이루기 위해
추문의 당사자에게 가기로 결단하지 않으면
그 상황을 알고 있는 모든 교인은
매 순간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어떤 식으로든
확인된 죄인의 죄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교회는 그들이 범하는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도 그것을 대면할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은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고린도 교인은 교회 안에서 벌어진 추악한
근친상간의 죄를 대면하기는커녕 정반대로 갔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의무를 면제받은 양 그 일에 대해 오만해졌습니다.
막말로 그들은 은혜가 풍성하게 하려고
죄를 지은 것이었다.(롬6:1-2)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교만의 고인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죄를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추문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의 태도를 대면하고
죄에 대한 태도를 바로잡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올바른 접근법을 가르칩니다.
첫째, 바울은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고린도 교인을 꾸짖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미 교만하여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은혜에 대한 파괴적인 생각으로 우쭐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구원받은 신자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이런 오만한 태도 대신
장례식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오히려 슬퍼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이었습니다.
슬프게도 고린도 교회는 우리 시대에 빠르게 번지고 있는
은혜에 대한 거짓 가르침에 넘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고
선행과 무관하게 구원을 받으면
구원의 은혜가 모든 것을 덮기 때문에
그 사람은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로마서6장2절에서 강한 부정하며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받은 구원은 논리적으로
무슨 일이든 허용되는 생활방식으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구원에 담긴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한다면 성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영구히 인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속속히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말은 내 주하시는 성령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선한 일을 바라고 행할 수 있도록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으로서
우리 안에 계속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은 은혜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러도 된다는
허가를 주었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으로 교만해져서
역겨운 죄까지 용인했습니다.
2절의 말씀처럼 그들은 교회에서
범죄자를 쫓아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죄악을 혐오할 뿐 아니라
교회의 순결을 걱정하며 그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로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계속 부정한 상태로 있었고
그 사람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다수의 의견에
담대하게 맞섰습니다.(3절)
바울은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와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회중과 지도자들이 그럴 능력이 없다면
바울이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직접 심판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멀리서 상황을 판단하고 교회에 구속력을
갖는 사도의 권위로 그 죄인을 심판했습니다.
3.죄인을 판결하는 구체적 지침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바울이 사도로서 내린 판결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지침이 나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도와 마찬가지로 이런 심판을
할 수 있는 권위를 교회에 주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이미 그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해 적절한 행동을 취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적절한 교회의 징치를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사도의 권위로 개입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징치에 대한 성경적 원칙을 따르는
모든 교회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회복시킬 목적으로
그들을 견책해야 할 의무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징치의 결과를 4-5절에서 간략이 언급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판결을 실행하는
지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목사, 장로
또는 교회 헌법이나 내규-가 아닌 우리 주 예수의
도덕적 권위에 근거해서 판결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주예수 이름으로 모였음으므로
그분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권위를 행사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마태복음18장에 나오는 교회 징치에 관한 지침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고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단호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합당한 원칙에 의거 해
징계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께 승인을 받았고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모여서 징치해야 했습니다. 모여서 하라는 말은 회중의 공식 모임을 나타냅니다. 따라 이 판결은 은밀히 또는 비공개로 하면 안되었습니다.
이때쯤이면 그 근친상간에 대한 소문은 이미 널리 퍼졌고, 어느 모로 보나 고린도 회중이 이 부도덕한 관계을 알 뿐 아니라 그 관계를 승인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인식을 뒤집고 교회 전체에 그 죄의 심각성을 알리려면 교회 징치는 공개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죄를 공개적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사로운 죄는 대개 내밀히 다루어져야 하지만, 원칙은 공공에 관련되고, 중대하며, 회개하지 않은 죄일수록 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 주어야 했습니다.
(5절)
달리 말해서, 고린도 교회는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을
교회 모임에서 파문해야 했습니다.
1세기 교회에서 파문은 교인 자격을
공식적으로 박탈하는 것으로 더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여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성만찬의 축복, 교회의 구제, 회중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영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파문당한 신자는 사탄의 영지인 세상으로 쫓겨날 것이고, 교회의 영적 보호를 벗어난 그곳에서 그는 사탄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하지 않은 신자를 공식적으로 파문할 때
두 가지 결과 중 하나가 따릅니다.
회개와 회복이 없이 계속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은 파괴적으로 죄로 가득찬 생활 방식에 내장되어 있는 응보,
또는 회개하지 않은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의 결과로 육신의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5절의 육신은 멸하고라는 말은
죄를 짓고 있는 신자의 육욕을 사탄이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결국 그것이 꺾이면서 마침내 제정신이
돌아올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징계의 목적은 단순한 징벌도 아니고
죄를 지은 신자를 영원히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엄중한 징계의 목적은 회복이었습니다.
바울은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교인을 보복하듯이
벌주지 말고 사랑을 가지고 교정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생각과 마음을 돌이켜 회복되고 나면 회중은 두 팔벌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죄인은 결국 주님의 징계하시는 손길로 말미암아 또한 교회 앞에서 뉘우침으로 죄악된
생활방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4, 교회의 정화(6-8절)
바울은 죄인의 회개와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징계에서
교회의 정화로 화재를 옮깁니다.
범죄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도덕적 순결을 위해서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회복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누룩이 반죽 덩어리 전체에 퍼지듯이 한 그리스도인의
회개하지 않는 죄가 전 회중을 오염 시킵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은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전신을 감염시키고 불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다루는 죄는 작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단호하게 권고합니다.
바울은 음란과 악행으로 점철된 옛 생활 방식을
묵은 누룩에 비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신분에 걸 맞는 삶,
즉 순결하고 거룩한 삶-누룩이 없는 떡으로 비유된 –을
날마다 실천해야 합니다.
이 한 구절에 칭의와 성화에 대한 바울의 교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죄를 짓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성화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점차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점점 더 의로워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묵은 누룩을 버리라고 한 것은 점진적으로 누룩 없는 떡
곧 영적 실체로는 실제적인 변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나 점진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모두 그들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공로 덕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7절)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월절 희생 제물로 받아들이면
그들은 용서와 죄 씻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축제를 준비하면서
집안의 누룩을 모조리 없애는 유월절 관습에 비추어
유월절 비유를 더 전개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유월절 시작 전날에 모든 유대인 가정은
촛불을 밝히고 누룩이 있는지 샅샅이 살펴야 했습니다.
유월절을 순결하게 지키려면 티끌만 한
누룩도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대인처럼 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오염시킬 수 있는
모든 죄를 색출해서 진실하게 회개함으로써
공동체에서 그것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은 증오와 악행의 묵은 누룩-회개하지 않은 이교도의 관행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누룩을 넣지 않은 순전함과 진실함의 순수한 떡으로 채워야 했습니다.
5.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9-13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9절)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을 부도덕한 세상 사람들,
즉 비그리스도인인 이교도들에게서
자신들을 고립시키라는 권고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자신이 말한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어떤 형제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말은 매우 냉철하게 들리겠지만
바울의 요지는 고린도교인에게 그랬듯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운 적도 없고 제자의 삶에 헌신하지도 않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기준을 강요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서로 책임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고 상습적으로 죄에 물든
세속적인 생활에 빠져 있는 반항적인 신자들은
교제에서 배제해야 했습니다.
가장 친밀한 형태의 교제였던
함께 식사를 즐기는 것도 금지됩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성만찬을 의미할 수도 있는데,
당시의 성만찬에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선 식사가 따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징치를 받은 자들은
신자들이 운영하는 단체가 제공하는 영적, 물리적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회중 가운데서 악한 사람은 —내쫓는 교회의 권위와
책임은 관용이라는 말에 예민한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징치는 필요하며 죄인들의 세상은 하나님이 판단하도록 맡기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판단하여 훈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셔서 아무것에 대해서도
심판할 생각을 하지 않는 온화한 아버지로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무조건 죄를
관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네 가지를 적용해야 합니다.
1.심각한 죄를 간과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위험합니다.
종종 우리는 “글세, 우리는 우리와 교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상관하지 않아. 그건 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지. 중요한 건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거야”라는 말을 듣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어린 아이나 손자가 독이 든 음료에 손을 뻗친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그건 위험하지만 나는 사랑하니까 내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게 할 거야. 그건 그 아이와 창조주 사이의 문제니까.”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의 감정을 상하고 울더라도
독약을 빼앗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을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오늘 날의 교회에서 이 구절을 적용한다면 율법 주의자라고 불려 모함과 박해와 고소를 당할 수 있습니다.
연루되어 있는 죄인 뿐 아니라 옳은 일을 할 배짱이 없는 방관자들도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심각한 죄에 대해 누군가가 강경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그 사람에게 율법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설교하는 수많은 교회 안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째, 심각한 죄를 대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지
분명한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마태복음18:15-17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
이 구절을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신중하게 그것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대면을 포기하거나 중도에
철회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교회의 건강한 회복을 우리는 지혜가 이끄는 대로
모두 그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셋째. 심각한 죄를 다루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교정을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5:20)
교회에서 죄인들을 낚아채 문까지 데려간 다음
그들이 절대 다시는 그 성전에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거칠게 다루는 것을 사명인 양 느끼는
자칭 기독교 경비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방황하는 성도들을 모욕하거나 격양시키거나
괴롭히는 것이 교회가 징치하는 취지가 아닙니다.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도록 권면하고 회개와 교제로 다시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게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경비원입니까? 목자입니까?
마지막으로, 심각한 죄를 바로잡는 것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다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징계와 치리는 신자들이 신자들을 위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사생활을 자기 자신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유지한다면
교회가 교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을 살펴서 공공연한 추문으로 번지거나 터질 가능성이 있는 은밀한 죄가 있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겪었던 그런 일이 없는 교회가 되도록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