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엘레지
강 문 석
인간수명 백세시대가 화두가 되다보니 늘어난 수명에 따르는 삶의 질에 대해서도 얘기가 분분하다. 세상에 왔다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남은 재산이 있다면 사회에 환원하든 자식에게 물려주든 별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든 노년의 빈곤을 맞닥뜨린다면 그 황폐한 삶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생지옥이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대기업의 부장인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근무처와 가깝다는 이유로 그가 우리 집에 전세를 들면서였다.
25평짜리 단층 슬래브 주택은 내 손으로 어설프게 도면을 그려서 지어졌고 신축한지 일 년 남짓 되어 험하진 않았지만, 그가 60만원 전세로 이용 가능한 시설은 방 두 칸과 협소한 부엌까지 합쳐서 7평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옹색하게 쪼그라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양대학 화공과를 나온 그가 직장의 일에만 매달렸더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을 학교에서 전공한 이론만 가지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려고 부업으로 풍선공장을 차렸다가 풍선이 아닌 돈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삿짐도 리어카에다 싣고 나타나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는데도 사내커플로 맺어진 부부 사이에서 난 아이들은 우리 아들딸 또래였으니 결혼이 한참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그는 과묵하면서도 잘 웃는 편이었고, 아내는 부산토박이로 털털한 성격에다 있는 그대로를 다 까발리며 목소리도 다소 큰 편이었다. 그녀는 나와 연배가 같았지만 네 살이나 아래인 아내와도 스스럼없이 서로 말을 터고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 바람에 불과 열 집 정도인 신흥주택 마을의 이웃들에게 자주 웃음소리를 전파해서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삼백 미터쯤 떨어진 직장에서 점심때마다 집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늘 트랜지스터라디오의 리시버를 귀에 꽂고 에이에프케이엔 방송을 청취하고 다녔다. 생산부장인 그가 회사에서 대졸 신입사원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고향친구의 동생이 그곳에 발령을 받아 온 때문에 알게 되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가르치는 영어뿐 아니고 일본어 중국어까지도 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이 눈부시게 부상한다면서 유치원에 입학하는 어린 아들을 멀리 부산역 앞에 있는 화교학교에까지 보내기도 했다. 집의 앞마당과 양옆 빈터에 화단을 조성하여 모과 대추 석류 감나무 등 유실수를 심고 수목들 사이엔 일년초 꽃들을 가꿨다.
그는 내가 자주 화단에 정성을 쏟는 걸 보면서 도우지 못해 내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모양이다. 어느 휴일 이른 아침, 그가 아내에게 말하더란다. “자기야, 오늘 내가 밥값 좀 했어!” 며칠 후면 나의 일터인 변전소로 옮겨 심을 결명자 모종을 잡초로 알고 몽땅 뽑아버렸던 것. 뒷날까지 두고두고 그 사건은 식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를 꼬집는 화젯거리가 되어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직장에서 만드는 치약과 비누가 국내시장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수요 때문인지 그는 울산의 온산지역에 새로 들어선 공장의 책임자로 발령받아 칠십 년대 중반 우리와 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권의 안양공장장으로 다시 옮겨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고 십 년도 넘는 세월이 꿈같이 흘러 88서울올림픽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산에도 요트주경기장을 비롯하여 축구경기 예선전을 치루는 구덕운동장과 서너 군데의 연습경기장이 확정되었다. 그 올림픽경기장 전력공급 책임자로 밤낮 점검에 매달리고 있을 무렵,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의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흘러왔다. 114에 확인하니 당시 부산엔 나의 이름이 여섯이나 있어서 일일이 전화로 확인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땐 공교롭게도 난 그가 근무했던 럭키유지공장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전화통화만으로는 두 부부가 가진 반가움을 다 털어낼 수 없었던지 서둘러 만났다. 사실 나와 그보다는 아내와 그의 부인이 더 만나고 싶어 안달을 했던 것 같았다. 그동안 그는 엘지그룹 임원으로 퇴임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퇴직위로금을 받았다고 한다.그 후 태평양화학이 치약사업에 뛰어들면서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와 그쪽에도 임원으로 참여하면서 몇 년간 일한 후 적지 않은 퇴직금을 받았단다. 그러고 만날 당시는 부산의 골프용구 제조업체의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다시 우리 부부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마치 큰 행운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생활의 여유가 생겨 베풀 수 있는 입장이다 보니 그러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주말이면 두 부부는 그의 승용차를 이용하여 부산을 벗어나 충청 전라도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었다. 나도 그 무렵 중고차를 끌고는 다녔지만 빠듯한 월급에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 뒤치다꺼리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당시 그는 보유한 재산을 더 증식하기 위해 증권에 투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가진 재산만해도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큰돈이었다. 그런데도 더 큰 수익을 올리기 위해, 신용대출까지 받아가면서 주식에 투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양에 근무할 당시 알게 된 한국거래소의 분석가와 태평양화학 근무시절 대전에서 인연을 맺은 증권사 직원에게 자문을 구한 후 최종적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결정은 본인이 직접 한다고 했다. 현재의 직장에서도 미국과 일본에 수시로 업무출장을 다니면서 경비를 아껴 같이 투자한다고 했다. 당시는 주식시장도 초호황을 누렸다. 그 덕분에 부부가 여름휴가철에 동해안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오륙천만 원이란 큰돈이 불어났다면서 우리 부부를 해운대의 특급호텔 레스토랑으로 초대하곤 했었다. 그들과 우리는 한국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시기에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그들 부부가 사는 아파트는 우리의 배나 컸고 두 집 여자는 거의 매일을 붙어서 지냈다.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도 엄밀히 따지면 엘지그룹의 모태기업이었던 금성사가 있던 자리였으니 그로선 묘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정년보다 5년이나 앞서 직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 무렵 새로운 활력을 찾기 위해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옮겼다. 그때 증권시장마저도 파국으로 치달으며 신용대출금을 변제하지 못한 그는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그가 살던 고가의 아파트도 날아갔고 서울대학과 부산대학을 다니던 두 아들은 급한 대로 군에 입대시켰다. 그의 아내는 울산의 어느 노인요양병원에서 간병인을 맡아 한 달에 백만 원을 받으며 험한 일을 한다고 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회복은 어려워 그가 택시를 몰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오래 전부터 당뇨를 앓던 몸인데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도 걱정이 되었다. 보릿고개가 상존하던 시절, 풋풋한 젊음으로 그가 서울에서 고학을 했던 것은 당시 시대상황이 그러하였을 뿐 아니라 초년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고 했지 않았던가. 삼십 대의 풍선공장 실패도 어쩌면 병가지상사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쉰을 지나 황혼에 들어서면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들 위험하다고 말리는 증권에다 가진 재산 전부를 올인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탐욕으로 비치기 십상이리라.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시기의 에피소드 한 토막이 잊히질 않는다. 당시 천안에 있던 내무부 중앙민방위학교에 전국에서 민방위강사요원 2백여 명이 모였다. 아주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강단에 올라서자마자 누군가 앞좌석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주식시장의 전망’에 대해서 물었다. 그의 대답이 어떻게 나올는지에 대해 많은 교육생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그는 생뚱맞게도 인간세상이 아닌 귀신이 사는 세계를 들어 답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점쟁이를 찾아간 귀신이 지금 교육생과 똑같은 질문을 했더란다. 그런데 점쟁이는 “그래, 당신 말대로 지금이 바닥이라고 치자, 그래서 주식을 산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바닥 밑에 지하가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 지하도 어디 1층만 있다더냐? 지하2층, 지하3층…”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자 이 점쟁이가 그랬단다. “내가 그걸 알면 미쳤다고 길바닥에 앉아 이 짓을 하고 있겠느냐? 주식투자나 하고 있지….” 일전 문학모임에서 현직 한의사인 S회원은 앞으로 2040년이 되면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출처가 분명한 자료를 발표하여 참석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인간 백세 장수명시대가 영구불멸로 이어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1997년부터 시작하여 일흔 중반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신산한 삶의 터널에 갇혀 크게 절망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백세를 기준하더라도 아직 살아내야 할 세월이 사분의 일이나 남지 않았던가. 가끔씩 매스컴을 통해 노년빈곤이 불러온 처참한 최후를 목격하게 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부디 극단적인 선택만은 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력을 가져주길 바라는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생이 한창 푸르렀던 시절, 그야말로 온몸이 투지의 결정체인양 생산현장에 뛰어들어 물불 가리지 않고 열정을 보이던 그를 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비록 40여 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지만, 그가 불굴의 그 정신력만 잃지 않는다면, 백세까지 사는 동안 반드시 행복은 찾아들게 될 것이고, 그때부턴 어떠한 형태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지금 나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