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이름 깨나 알려진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20세기의 명저, 또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을 미친 책을 꼽으라면 이광수의 ‘무정’, ‘민족개조론’을 드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가끔 언론사들이 펴내는 명저 목록에는 이 책들이 빠짐없이 끼곤 한다. 심지어 어떤 젊은 장교는 5.16 전에 민족개조론을 읽고 쿠데타를 꿈꾸었다는 얘기를 할 정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광수 문학은 그의 성향이나 작품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광수란 인물은 좋든 싫든 문학도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넘어야 할 고개일 것이다. 그의 인간적 색채, 문학적 휘광, 정치적 굴절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남겼는가.
이에 비하자면 송두율의 삶의 좀 다르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 조건, 역정,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분명히 있다고 본다. 우리가 전혀 다른 캐릭터의 두 사람을 한국사회의 내면에 깊게 드리워진 집착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에서만은 같다. 그리고 한 사람은 그러한 집착이 형성되기까지 정신사적으로 매우 큰 책임이 있지만 한 사람은 멀리 떠나 있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을 들라면 두 사람 모두 연약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마치 비바람에 떨고 있는 작은 새 같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도 극명하게 다르다.
이광수는 동경 유학시절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국권론자로서 국민의 교사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일본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그의 초상화가 일본의 최고액권인 1만 엔짜리 지폐에 실려 있는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근래의 재무장 흐름은 사실상 그의 탈아입구론을 계승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인물이 이광수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열렬한 정한론(征韓論)였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유길준,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이동인, 최남선 등 내노라는 개화기 지식인들이 모두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특히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그의 집에 묵으면서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
이광수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얼마나 흠모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나타난다.
“그가 비록 차세에 부재하시나 그의 유한 덕과 입한 언이 천추에 그의 최애하는 일본 국민의 감사하는 도사가 되고 친우가 되리니, 그의 생명은 그의 조국의 영원함과 동히 영원하고 그의 조국과 영광됨과 공히 영광되리로다....”
그가 민족개조론에서 “그러므로 조선인의 명운 개선에는 결코 민족개조를 제한 외에 아무 지름길도 없는 것이외다... 부질없이 다른 요행의 지름길을 찾다가는 한갓 세월만 더 허비하고 힘만 더 소비할 것이외다....”라고 쓴 것은 1923년이었다. 그것은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에 나선 일제 말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친일 행위는 문제 삼지 말자. 그보다 문제의 핵심은 이광수가 일본을 통해 받아들였던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은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숭배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가 동경유학 시절 받았던 서구문명에 대한 인상은 얼마나 멋진 것이었던가. 개조되어야 할 자아! 그것도 후쿠자와식 계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근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집착은 자그만치 100년 가까이 문학을 통해서, 교과서를 통해서 한국사회 내면에 깊이깊이 침잠하기에 이른다. 이광수의 집착은 곧 조선의 집착이 되었던 것이다.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국의 주류는 이광수로 대표되는 근대적 가치에 집착하면서 살아왔다.
송두율의 경우는 방향이 정반대이다. 현재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송두율 사건의 쟁점은 그가 김철수냐 아니냐는 것이었다. 김철수란 인물은 정치국 후보위윈이 틀림없으니까 그가 김철수란 것만 입증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예단이다. 그런데 송교수가 94년 김일성 주석 장례식과 95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장례식 때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초청을 받았을 당시 장의위원 명단에 후보위원급인 23번째와 22번째로 김철수라는 이름이 써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자백’함으로써 그는 졸지에 후보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부터 예단과 비약이 시작된다. 그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어버렸다. “북한으로부터 후보위원급의 대우를 받았지만 공식적으로 임명된 적은 없었다"는 그의 방어는 이제 거짓말로 들릴 뿐이다. 거의 모든 언론들이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 종전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신문조차도 왜 공항에 내리자마자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느냐고 비판한다. 그가 고국에서 37년간이나 떨어져 있으면서 이제는 모국어조차 어눌하다는 것, 국내 현실에 어두워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노력조차 매우 서툴게 보인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그가 ‘경계인’으로서 살아야 했던 고단한 삶의 궤적이나 고뇌는 한낱 잔꾀나 넋두리로 들릴 뿐이다.
예단과 불균형, 광기어린 일방통행...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가 송두율이란 한 가냘픈 인간에게 퍼붓고 있는 사회적 집착의 표현이다. 아니 폭력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광수에 집착하는 계층(또는 이데올로기)과 송교수에게 집착하는 계층(또는 이데올로기)이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은 명저의 소유자이고 한 사람은 간첩이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놀랍지 않은가. 지식인을 대하는 전혀 다른 내용의 집착이 같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다니!
그것은 이광수 이데올로기이든 송두율 이데올로기이든 주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주류이데올로기에 거스르는 자는 모두 반역일 뿐이다. 친이광수와 반송두율은 내용적으로 보자면 전혀 거리가 멀지만 반역을 진압하는 데는 놀라울 정도의 친화성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집착이 현재 이 순간에도 송두율을 짓누르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이제 와서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선악으로, 송두율의 노동당 가입을 선악으로 재단하기 시작하면 참으로 풀기 어려울 것 같다. 더구나 송교수에게 가해지고 있는 압박을 보수와 진보의 역관계로 풀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 자신, 그리고 한국사의 내면에 담긴 집착이다. 한 재미교포 정신과 의사(이중오)는 「이광수를 위한 변명」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이광수가 세운 공은 말할 수 없이 크지 않은가? 그가 쓴 소설로 상당수 한국인들이 근대화해 나갔고, 그가 쓰는 문체로 한글이 다듬어졌고, 그가 토로하는 자기 이야기로 많은 지식인들이 구습의 울타리를 박차고 일어나 스스럼없이 행동화하지 않았는가? 친일로 그가 축재라도 하였는가?... 이광수는 어찌 보면 당시의 우리 얼굴이요, 우리의 조각난 자아요, 축약된 한국근대사다. 그러니 과연 우리가 지금 이광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이광수와 같은 환경조건에서 친일을 강요받았다면 그가 걸었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이광수의 딸의 이정화씨는 아주 오래 전 어느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애국자이신 아버님이 쓰신 「나의 고백」을, 민족 위해 친일 했다는 뜻을 그대로 독자들이 들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썼다.
위의 말대로 똑같은 질문을 해보자. “송교수가 노동당에 가입해서 축재라도 하고 부귀영화라도 누렸는가? 아니면 테러라도 저질렀는가? 그는 분단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고단한 자화상일 뿐이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한국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여유 공간이 없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찰의 공간이 없다. 아, 왜 이 땅의 주류는 이광수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송두율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광수가 남긴 문학적 자산은 그의 친일 행위로 인해 상당 부분 재평가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집착이 극복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박정희에 대해서 ‘정치는 좀 문제가 있었지만 경제는 잘했다’식의 평가나 미당의 친일과 전두환 찬조연설에 대해서 ‘미당의 삶에서 정치적 삶의 비중은 매우 작다. 정치적 삶만으로 미당의 삶 전체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이남호)는 주장은 왜곡된 집착이 한국사회 내면에 어느만큼 서려있는지 실감케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직도 집착의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광수를 친일로 몰아붙이는 측도 마찬가지이다. "함부로 친일파라 비난하지 마라. 범위가 모호하면 그때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범위와 정도를 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합의가 없다."(이문열)는 논점일탈식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문제를 언제까지 ‘민족적’ 관점으로만 끌고 갈 것인가?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송두율은 집착의 희생자이다. 한국사회의 근대화 주류에게는 송두율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할 뿐이다. 그는 100년 이상 내려온 맥락을 거부했다. 그래서 만약 그가 미국유학파였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이광수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또다시 송두율을 옥죄고 있다. 송두율은 단지 레드 콤플렉스에 옥죄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광수에 대한 집착에서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가 체포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고국을 방문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그가 지식인으로서 신중하게 처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재 한국사회가 그에게 내리누르고 있는 집착은 너무 가혹한 것이다. 그가 한 일에 비하면 그에게 쏟아지고 있는 압박은 너무 균형이 맞지 않는다. 5분이면 될 말을 5시간 동안 계속 설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는 그런 점에서 아직 균형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사회이다.
그도 참 답답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사죄하라는 것인지...” 그리고 그가 혼자 되뇌인 그 말은 또다시 파렴치한의 넋두리로 확대 해석된다. 오히려 그에게 실정법 운운하기 전에 한국사회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집착(폭력)을 한번쯤은 성찰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광수가 한국사회에 남긴 집착에 비하자면 그는 오히려 경계인으로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게 집착의 칼을 들이대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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