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령향교
[우리동네 이야기 속으로] 56. 김천 개령면 동부리 마을
김부신 기자 승인 2021년 11월 14일 19시 53분
삼한시대 '감문국' 도읍지…궁궐터 등 새로운 관광자원 활용
“김천에 왕이 살았을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왕조시대의 도읍지하면 삼국시대의 경주, 공주, 부여, 고려 시대의 개성, 조선 시대의 서울을 떠올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은 “왕이 살았다”이다.
삼국시대 이전인 원삼국시대, 즉 삼한시대에 김천지방을 근거로 성립되었던 변한계 소국인 감문국이 있었기 때문에 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감문국이 서기 231년 멸망하기까지 왕이 살았던 도읍지로서 궁궐이 있던 자리가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와 양천리 일대로서 조선 시대 말까지 개령현의 현청 소재지로서 고을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켜왔다.
동부리는 옛 감문국으로부터 조선 시대 개령현에 이르기까지의 고을의 중심인 읍치(邑治)로서 감문산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교동, 옥걸이, 정변동 등 크게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정원택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부곡면에 속한 교동, 옥전동, 정변동이었다. 1914년 개령현이 개령면으로 되면서 세 마을을 통합하여 면사무소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부동(東部洞)이라 했다.
교동(校洞)은 교촌, 윗마을, 윗곡, 조동 등으로도 불리며 개령향교가 있는 위쪽의 마을로 뒤로 호랑이의 머리와 등에 해당한다는 호두산(虎頭山)과 맞은편에 관학산(官鶴山)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동부리가 고을의 중신인 연유로 국립학교인 향교가 있다. 고을명을 딴 개령향교로서 1473년(성종 4년)에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서부리 사자사(獅子寺)를 헐어 그 목재로 유동산 아래 감천변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감천의 범람으로 동부리와 양천동의 경계인 관학산 자락에 1609년 옮겼고 1866년에 다시 현재의 감문산으로 이전해 전국에서도 이사를 가장 많이 다닌 향교로 이름이 났다.
그런데 마을주민들 사이에서는 향교의 감문산 이전과 관련해 서애(西厓) 류성룡의 후손인 우의정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1798-1875)가 명당에 자신의 묘소를 들이기 위해 향교를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다분히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개령향교
그것은 일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유후조가 유학의 지방 본산인 향교를 사익을 위해 함부로 이건시켰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기 어려우며 1989년 향교대성전을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에 1610년과 1866년에 걸쳐 두 번 옮겼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도 선생이 졸(卒)한 연대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청룡 혈(穴)로 이름난 관학산에 명당에 묘가 자리하다 보니 혹자들의 시기 어린 시선이 풍문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후조의 묘소가 있던 관학산 뒤편에는 내신정(來新亭)이라는 건물이 홀로 서 있다.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향약소(鄕約所)로 개령고을의 풍속을 바로잡던 향촌 자치기구로 지역 유력 선비들이 드나들며 명성을 얻었으나 지금은 많이 퇴락되어 옛 면모를 찾을 길이 없다.
동부리 뒤로는 감문산 자락에 천년고찰 계림사(鷄林寺)가 있는데 이 절은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서기 418년(신라 눌지왕 2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설에는 계림사가 위치한 감문산이 호랑이가 엎드려있는 와호형(臥虎形)으로 이 산의 한 봉우리인 호두봉(虎頭峰)이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하여 동부리 맞은편 아포읍 대신마을에 살상(殺傷) 기운이 뻗쳐 마을이 쇠락해지자 호랑이의 강한 기운을 막고자 감문산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인 닭을 천마리나 길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닭조차 수시로 폐사하는지라 궁여지책으로 절 이름을 닭이 숲을 이루어 산다는 뜻의 계림사(鷄林寺)로 고치고 닭 기르는 것을 대신하고 원래 한 골이었던 마을의 이름을 호랑이가 빠질 수 있으니 오지 말라는 의미로 빠릴 함(陷)자로 고쳐 함골(函谷)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계림사
계림사 뒤로는 감문산의 주봉인 취적봉이 있다. 감문국 시대에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이곳에 올라가 나팔을 불었다 하여 불 취(吹)자에 피리 적(笛)자를 써서 취적봉(吹笛峰)이라 했다고 하며 또 변란시에 봉화 불을 올렸다는 봉수대 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관학산 우의정 유후조 묘소
이처럼 신성한 기운이 있는 감문산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이러한 상징적 행위로서 무덤을 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감문산에 묘를 들이면 산신이 노해서 마을의 공동우물인 쌍샘물이 흙탕물로 변한다는 속설 때문인데 마을주민들은 과거 이런 경우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한다.
마을의 공동우물 쌍샘
주민들은 쌍샘물이 변하면 온산을 뒤져 암장한 묘를 찾고 후손을 수소문해 이장하도록 강제하고 규약을 어긴 벌칙을 부과했다고 한다.
옥전동 또는 옥거리는 교동 아래의 개령초등학교 옆 일대로 옛날 개령현의 옥(獄)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며 정변동은 옥동에서 동부2리 옛 교동과 접해있는 방면으로 이곳에 큰 샘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현재의 개령면 사무소와 지서, 개령초등학교 등 관공서 터는 옛 개령현의 관아 터로 당시의 연못이 면사무소 앞에 그대로 남아있다. 원래는 서부리 앞 남산 정상에 있던 개령의 명물 팔승정(八勝亭)이 한 말 현재의 개령면사무소 앞으로 이전됐다.
동부1리로 속한 교동과는 수로로 이용되고 있는 굴다리를 사이로 경계를 이루고 또 양천리와는 말고개와 경계를 이루어 유동산과 관학산 사이에 있는 구교동은 동부2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개령현 부곡면 동부동에 속해 있다가 1971년 구교동이 동부2리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부2리는 원래 단양우씨(端陽禹氏), 양천허씨(陽川許氏), 성산배씨(星山輩氏)의 집성촌이었다.
구교(舊校), 구교동(舊校洞), 교천(校遷)이라는 마을의 옛 지명들은 개령향교가 1610년부터 1866년까지 250년간 이 마을에 있었음으로써 얻게 된 지명으로 구교와 구교동은 옛 향교가 있던 마을이란 뜻이며 조천은 향교가 옮겨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마을은 관학산을 배후로 양천리와 함께 감문국시대 궁궐이 있었던 중심으로 보고 있는데 실제로 구교동과 양천리의 경계인 말고개 정상부에 1969년까지 궁궐 초석으로 전해지는 다듬은 돌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대문 앞에 일부가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마을 앞 유동산 옆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1934년에 간행된 향지(鄕誌)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志)에 이 못을 동부연당(東部蓮堂)이라 하고 감문국 시대 궁궐에 딸린 연못으로 적고 있다.
구교동의 관학산은 감문산의 취적봉 줄기가 백호와 청룡을 이루며 뻗어 내리다 그 혈맥이 맺힌 명당으로 꼽히는데 그러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름난 대부호(大富豪)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그중에 대표적인 집안이 양천허씨와 단양우씨 집안으로 특히 1954년부터 6년간 대법관을 역임한 허진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관학산 자락 5900여㎡(1800여 평)의 대지에 1790년 건립된 택호 정원집(庭園宅)은 원래 안채, 사랑채, 곳간채, 행랑채, 문간채로 이루어진 ㅁ자형의 저택이었는데 지금은 정원수 몇 그루와 주춧돌들만이 남아 옛 위용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수백 년은 족히 됨직한 멋진 소나무가 이방인을 맞는데 그 뒤로는 단정하게 다듬어진 안채의 기단석과 용도가 다한 주춧돌이 가득 쌓여있고 관학산 기슭을 따라 산 전체를 정원으로 꾸며놓은 지난날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후손이 살면서 관리를 해 저택의 면모를 유지했고 갖가지 정원수와 꽃들로 가꾸어진 개령의 명물이었다고 전한다.
또 이웃에 자리한 단양우씨 집안의 거부(巨富)이자 자선가로 이름난 우상학(禹象學·1864-1942)의 저택도 이제는 집터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정원댁 앞들에는 지난해부터 ‘감문국 이야기 나라 조성’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돼 감문국 박물관을 비롯한 대대적인 공사가 한창이다.
삼한 시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경을 견디어온 개령의 크고 작은 역사를 묵묵히 지켜봤을 마을 앞 감천은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