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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기동력 높여 기병대 혁신적 발전에 기여
로마도 참패 후 중무장 기병대 중심으로 변화
■무기와 무기체계
그동안 야만족이라고 무시당해 온 고트족은 어떻게 이처럼 대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적군의 실태와 전장의 지형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좁은 공간에 무모하게 병력을 집중 배치해 공격을 감행한 발렌스 황제의
우둔함이 로마군의 패배를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로마군의 작전 실패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전투에서 고트족은
무기력한 로마군과는 달리 기병대의 신속한 기동력을 근간으로 보병대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던 것이다. 아드리아노플 전투 승리의
일등 공신은 고트족 기병대였다. 당시 고트족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 살던 유목민의 후예답게 전체 병력의 3분의 2가량이 기마술에 능한
기병으로 구성돼 있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로 유럽의 전장에서 보병의 시대가 끝나고 기병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도대체 기병은 언제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까? 말의 기동성을 이용해 싸우는 병종인 기병이 처음으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원전 1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평원 지역은 물론 중동 지역에서도 기원전 525년 이집트 군이 페르시아 군과의
전투에서 대규모 기병부대를 동원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병대가 한 국가의 전투력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 반도의 북쪽에서 발흥한 마케도니아 때부터였다. 기원전 400년경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기병대를 그
무장(武裝)의 경중(輕重)에 따라 분류하고 이를 선별적으로 활용했다. 중무장 기병대는 적진 돌파용으로, 경무장 기병대는 적의 측방 공격이나 추격
시에 동원했다. 이른바 ‘동지 기병대(Companion Cavalry)’라고 불린 이들이야말로 애국심과 자긍심으로 단결한 마케도니아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초기에 로마군도 이러한 마케도니아의 기병대 운용 방식을 도입해 활용하고자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로마군은
본질적으로 중무장 밀집보병대 위주로 운용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기병은 규모도 적었고 그 역할도 정찰이나 측면 방어와 같은 다분히
보조적인 수준으로 제한됐다. 그러다가 3세기 중반~5세기 중반에 일어난 로마군의 조직 및 교리상의 변화와 더불어 기병대가 군의 중요 전투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예컨대, 전장에서 카타풀트(Catapult)나 발리스타(Ballista)와 같은 투사무기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중무장
보병대가 백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감소했다. 4세기 이래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로마제국은 이민족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자체
기병대를 육성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러한 외적인 전장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기병의 중요성을 일깨운 결정적 계기가 바로
아드리아노플 전투였다. 4만~5만 명의 로마군 정예 병력이 궤멸당한 이날 전투에서 로마군을 가장 크게 위협한 것은 고트족의 기마 부대였다.
이들은 전광석화처럼 기습공격을 감행해 로마군 전열을 순식간에 와해시켰다. 이날의 참패 이후 로마군단은 기마 궁수병과 기마 투창병을 주축으로 하는
중무장 기병대 중심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병대가 주력으로 대두하면서 무기체계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원래 유럽
세계에서 기병의 주 무기는 창이었고, 보조무기로 칼이 사용됐다. 한 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길이 2.5~3m 정도의 창을
휘두르면서 적의 보병부대를 공격했다. 그러다가 제국 말기에 이르러 주변의 이민족 출신 기마 궁수병들과 수시로 접하면서 활의 위력을 알게 된
로마군이 이를 기병의 무기로 채택했다. 접전 직전에 활을 발사, 적군의 대형을 흩트려 보병부대의 진격을 용이하게 만드는 이들의 역할에 주목했던
것이다.
4세기경부터 로마군단 내에서 위상을 정립한 기병대는 로마가 게르만족에게 멸망(476) 당한 이후에야 괄목할 발전을
이뤘다. 그 이면에는 6세기경에 현실화되는 마구 제작 기술의 진전이 있었다. 기병에게 필요한 도구들은 안장(saddle)·편자·재갈 등
다양했으나, 기병대 발전에서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등자(stirrup)’였다. 등자가 발명되기 이전 기마병들은 안장용 담요에
앉거나 또는 말 등에 그대로 올라탄 채 머리 위로 창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등자가 언제 어디서 발명됐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기원전 1세기경에 인도에서 처음 등장해 이후 서쪽으로 전래돼 6세기쯤에 서유럽 기병들도 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질상
등자는 살상용 무기가 아니다. 단지 말 위에 탄 기사가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양 다리를 고정시켜주는 보조도구다. 하지만 이를 사용한
덕분에 기병의 공격력은 혁명적으로 향상됐다. 안장과 등자로 상체를 고정시킬 수 있게 된 기사는 빠른 속도로 내달리면서도 상체의 균형을 유지한 채
양손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로써 기병대의 전투력은 크게 향상돼 보병부대 단독으로는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제 말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기마병과 결합해 전투의 승패마저 좌우할 수 있는 무기체계상 중요한 요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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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기마민족인 파르티아 왕국의 기병은 말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궁기병들이었다. |
■의미와 교훈
지중해 세계를 호령한 로마도 3세기 말쯤부터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바로 아드리아노플 전투였다.
이때 상당수의 정예병을 상실한 로마군은 그
이후에도 원래의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또한 이 전투를 계기로 로마군 내에서 기병대의 역할이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뚫린 로마의 국경은 이민족의 침입에 속수무책이 됐고, 종국에는 게르만의 족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지도자의 중요성을 꼽을 수 있다. 로마 황제 발렌스는
전장 상황과 상대방 무기체계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중무장한 로마군단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자만심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였다.
또한 전장 환경에 알맞은 무기체계를 선구적으로 구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한다.
왜냐하면
로마군은 과거에 눈부신 승리를 안겨준 보병 위주의 무기체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기병 중시라는 변화의 필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가 고트족 기병에게
결정적 일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열려 있는 자세와 사고로 현재의 무기체계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변화의 필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때 전쟁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로마군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