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불교가 진정한 의미의 대승불교일까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교를 연기, 무아, 공의 세계를 잘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전 이에 대한 반성으로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이 제기됐고 대승불교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보디사트바를 지향하던 대승불교의 노력들은 어디에 가고, 지금 21세기에 연기론만 강조하는 불교만 남게 되었는가 돌이켜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월 18일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의 16번째 논자로 나선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지금의 한국불교는 대승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논단을 열었다.
현응 스님은 최근 재출간된 『깨달음과 역사』를 통해 대승불교의 현재성을 다시 한번 제기한 바 있다. 이날 ‘열린논단’의 논자로 초대된 이유 또한 불교계 대표 논객으로서, 또한 조계종 교육원장으로서 승가교육의 일대 혁신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현응 스님이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의미를 여러 학자들과 함께 경청하고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현응 스님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선불교는 엄밀히 말해 대승불교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대승불교의 지향점은 깨달음의 추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들이 정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천에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불교는 사회적 실천은 생략된 채 깨달음에 대한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한국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불교, 남방불교 등 대다수 불교국가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반야의 세계를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이 선불교입니다. 선불교가 연기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이상 이 또한 대승불교의 정신을 구현한 불교는 아니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현응 스님은 왜 지금의 시점의 시점에서 대승불교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일까.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역사적인 실천론을 되찾을 때 21세기를 주도하는 사상으로서의 불교가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현응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 즉 불교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을 모색한 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발발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있는 다른 종교와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즉,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내놓은 것이 바로 대승불교였다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대승불교의 입장은 보살을 실천적 삶의 주체로 내세우는데 있다”며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가 결합된다는 보살사상이야 말로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근대 이후에 역사철학, 사회철학과 같은 학문적 영역에서는 대승불교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천론을 담고 있는데 비해 불교는 여전히 기원전 500년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응 스님의 이야기는 현재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스님은 “최근 불교 포교의 방향과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며 “불교는 개인의 몸과 마음에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이때 비로소 불교가 21세기를 주도하는 사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 위빠사나 열풍, 간화선 대중화 등 불교계 안팎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에 한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 대승불교의 정신을 포기하고 불교의 바운더리를 마음수양으로 한정하는 행위들입니다. 인류사회가 고도로 발달된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돼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 스스로 퇴보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현응 스님의 비판은 한국불교의 간화선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노장사상과 도가의 신선술에 물들어 있습니다. 선불교는 무상·무아·연기·공을 통찰하는 것으로, 이는 보리의 영역입니다. 마음을 고도로 집중하면 선정력을 키울수 있을지 모르지만, 선정력은 연기를 통찰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그 어떤 경지나 신비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삶의 영역이 공(空)임을, 비실재(無我)임을, 가설적이요, 환상적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스님은 “깨달음을 경지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교가 노장사상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며 “이는 중국의 격의불교의 단계에서 이미 발생한 문제로, 도가의 신선술, 연단술로 깨달음을 설명한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그 한 예로 지리산 개운조사를 들었다. 개운조사는 선방 스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인물로 지리산 부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봉암사 환적대에도 공부한 적이 있는 신선 같은 인물로, 몸을 잘 수련해서 불로장생의 몸을 이루었고, 아마 살아있다면 200살이 넘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가끔 공부 잘 하는 스님들 앞에 한번씩 나타난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현응 스님은 “개운조사파들은 참선 수행자가 자신의 몸 하나 맘대로 못하면 평생 참선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냐고들 하는데,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며 “개운조사의 수행법들이라는 것들이 지금까지 선방에 전승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스님은 “한국 선방 공부의 내용 잘 들여다보면 화두뿐만 아니라 묵조선, 위빠사나 등 나름의 수행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화두수행을 권장하고 있는데, 간화선 내용 잘 들여다보면 어떤 경지에 도달해 그 경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는 깨달음에 대한 커다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방의 구참들 또한 이 문제를 줄곧 지적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어떤 신통력이나 다른 차원의 경지는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이어 “불교가 2500년 내려오는 과정에서 잘못 전승된 것들이 많아 용어 하나하나에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 너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불교가 한반도에 1700년전 유입된 이래 가장 전성기 시대를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십년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복을 비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했고, 스님들조차 소수의 엘리트들만 절에서 일부 스님들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찰도 대형화되고 스님들도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일반인들도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대승불교의 취지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고 이를 현대문명과 접합한다면, 불교야말로 인류사회에 도움이 되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현응 스님은 “불교의 역사적 실천, 사회적 실천을 '승단'이라는 틀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며 “앞으로 승단의 필요성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은, 이 세계가 허망한 것임을 알고 무연자비(無緣慈悲)의 역사적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라며 “연기의 체득을 통해 개개인이 각각의 분야에서 남에게 덜 상처주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구현해나가는 것,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이 사회와 부합하는 내용들을 고찰하고 이 시대에 맞는 보살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사회적 실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현응 스님은 “불교가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에 머무르면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대승의 취지를 받아들이고 현실화되기에 1700∼8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시대야말로 대승불교를 구현할 좋은 시절이 왔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로 이날 발표를 마쳤다.
첫댓글 초심은 스님의 주장. .대승불교가 일어나냐 한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면서 그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의 불교를 왜곡하고 있는 것 같아 염려가 됩니다.
예를 들면 보살행과 수행 가운데 하나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면 무엇을 택해야 할까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상황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니 불교가 숨쉬는 곳이라면 둘은 함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자라면 수행자나 보살을 모두 존경하고 함께 일을 도모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동안 보살행이 너무 등한시 되어왔고, 아직도 수행을 전부로 아는 풍토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노장사상과 도가의 신선술에 물들어 있습니다. ] 에 대해..
선수행을 시작하는 이나 수행을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신선술과 같은 것을 기대하면서 수행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누구나 존경하는 수행자의 대표격인 성철스님을 보면 그와 같은 도인으로 여기면서 존경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요?
다시 말해 우리나라 간화선의 정통은 신선술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선술에 빠진 수행자가 있다해도 별 비판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많은 수행자들이 개운조사파가 아닌 성철스님을 모범으로 수행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철스님을 모범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슨 근거인가요. 현재 한국불교계의 진지한 수행자들, 학자들은 성철스님의 잘못된 의견, 잘못 알려진 허상에 대해 심히 걱정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성철스님 책 정확하게 읽어보셨나요.
^^()..
파란연꽃님은 성철스님의 글을 정확하게 보셨습니까?..
그리고 스님을 비판하는 이들의 글이 올바른 비판이다라고 정확히 보십니까?..
세속에서는 지남침이나 모자람 모두 문제가 됩니다.
초심의 바램은 출가 수행자들은 수행을 으뜸으로 삼고 수행하기 바라며,
재가자들은 보살행을 으뜸으로 삼는 불자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곳 토론방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교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교학은 출가이든 재가이든 기본적인 것과 깊은 것으로 나뉘어 기본은 누구나 알도록 가르치고, 깊은 내용은 전문가들이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상/고/무아에 대한 이해가 초등, 중등, 고등 수준하듯 나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님의 주장은 그 가운데 보살 경계에 해당하는 게 되겠지요.
대승불교란 <법화경>에 나오듯 모든 불교를 포용하는 불교입니다.
그러니 상좌불교, 선불교는 물론 소위 기복불교라 불리는 신앙불교까지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는 불교라고 봅니다.
보살행을 강조하게 위해 현재 간화선을 비판했다고 보지만, 간화선을 포용하면서 보다 세심하게 보살행을 강조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
초심님 의견 정말 좋습니다.()()()
수행이 꼭 간화선만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교학뿐 아니라 현대과학 특히 원자의 구조 물질의 기본 구조에 대한 학문들을 공부하는 것도 훌륭한 수행이라 생각합니다.
선정은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력을 높이는 훈련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수는 없다고 봅니다.
불교에서 수행이라 함은 해탈 또는 열반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 봅니다.
선정은 심해탈을 이루는 수행입니다.
선정은 불교의 구경 목표는 아니지만, 목표를 이루려면 반듯이 필요한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보살행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교학이나 과학을 통해 중생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본인은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보살행이라 하겠지요.
맞읍니다
보살과 나한과 부처의 차이점은
보살은 중생의 일에 관여하나 나한과 부처는 관여 안합니다,
왜야하면 나한과 부처는 해탈을 얻은 자이기에 중생을 관(본다) 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중 자등명 법등명 하란 말씀이 계신겁니다..
그리고 간화선을 해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간화선 수행자는 간화선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알고 닦에아 하는 게 아닙니까?..
위빠사나 수행자도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알고 해야겠지요.
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며 중재를 하는 것이 교학자의 역활이 아닌가 합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매진하게되고 그러다보면, 시간이 없게도 되지요..()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고 한다. 이해는 분별의 영역. 분별은 판단이며. 마음은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심을 닦는 것에 의해서, 변화하나 봐...왜 변화할까,, 닦으면서 증하니까..깨달으니까..수행은 무심을 닦는 것...()
깨닫는 말은 아주 잘 깊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은 곧 이해라 해야겠지요.
깨침은 깨지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깨진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박살이나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깨침은 이해를 넘어서 있다고 하지요. 기독교인에게는 깨달음이면 충분하다 할 수 있으나, 수행자에게는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깨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