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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전주지역 유적답사-전묘(前廟) 후학(後學)의 전주향교(全州鄕校)
2013. 7. 6 전주 향교는 고려 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위치는 경기전(慶基殿) 근처였다고 한다. 그 후 향교 근처에 조선(朝鮮)시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기 위한 경기전이 세워지자 향교에서 경기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여 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 지금의 화산동으로 이전하였다.
전주시 행정구역도(네이버 제공)
전주향교의 위치도
어느 향교와 관아(官衙) 건물이 그렇듯이 임진왜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불에 타버리고 후에 재건하는 과정에서 화산동은 읍치(邑治-官衙가 있던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많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1603년(선조 36) 순찰사(巡察使) 장만(張晩)에 의하여 지금의 전주향교(全州鄕校)는 오목대(梧木臺) 아래 전주천(全州川) 부근 전주한옥보존지구 풍남동에 위치하게 되었고 현재의 모습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전주향교 건축물의 배치도
조선 후기까지 전주 향교는 경내에 3칸의 대성전(大成殿), 10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신문(神門), 외문(外門), 만화루(萬化樓), 5칸의 명륜당(明倫堂), 6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계성사(啓聖祠), 신문(神門), 입덕문(入德門), 4칸의 사마재(司馬齋), 양사재(養士齋), 책판고(冊版庫), 수복실 등 총 99칸 건물로 구성된 규모가 큰 향교로 서울의 성균관을 모방하였다고 하여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향교 경내로 향하는 첫 관문의 누각(樓閣)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팔작지붕 만화루(萬化樓)가 위치하고 있다. 만화루의 명칭은 ‘공자지도(公子之道) 만물화생(萬物化生)’에서 따온 것으로 여러 향교나 서원의 누각 이름에 많이 쓰이기도 한다.
공자지도(公子之道) 만물화생(萬物化生)에서 따온 만화루(萬化樓)
전주향교는 만화루를 거쳐 홍살문과 하마비를 지나면 향교의 영역이 전개된다. 이 향교는 만화루, 일월문(日月門), 대성전, 명륜당,이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계성사가 서북쪽 뒤에 위치하고 있다. 만화루와 그 사이에 놓인 일월문을 지나면 향교 마당으로 진입 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향교 경내 정면에 강당인 명륜당이 아니라 사당인 대성전이 먼저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전묘후학의 향교건물 배치가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의 향교 건물 배치 형식은 강당이 앞에 오고 사당이 뒤에 가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이 이러한 형태를 보편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주향교는 평지에 ‘전묘후학’의 배치를 취하다 보니 대성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축대를 쌓아올려 권위를 나타내려한 노력이 엿보인다.
일월문(日月門)
전주향교의 건물배치 형식은 중국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특수한 경우이다. 이러한 전묘후학의 건물배치는 나주향교(羅州鄕校)나 경주향교(慶州鄕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는 대성전은 일반적으로 향교의 제일 북쪽의 산 사면을 깎은 고지대위에 배치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대성전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향교 배치의 보편적인 형식이다.
대성전(大成殿)
전주향교 대성전의 특이한 점은 보통 여느 향교와 서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제향공간의 개방이다. 일반적으로 제향장소를 신성시 여겨서 개방을 금하고 있는데, 이곳 전주향교의 대성전은 완전히 일반에게 개방되어 누구나 제향공간을 볼 수 있었다. 대성전 제향공간을 이렇게 살펴 볼 수 있는 경우는 우리나라 향교 중에서 아마도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전주향교의 관리 및 운영자들의 개방된 마인드가 자라나는 후대에게 산 교육장을 제공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향교나 서원들도 이러한 좋은 시책을 도입해서 유교문화 홍보에 힘써야 하겠다.
대성전앞에 있는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
대성전안의 제향 공간을 살펴보면 공자(孔子) 초상(肖像)과 신주(神主)가 정면에 놓여있다. 그리고 좌우에 안자(顔子) ,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중국의 4성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공자(孔子) 초상(肖像)과 신주(神主)
배향하는 신주와 위패 1
배향하는 신주와 위패 2
동무(東廡)
서무(西廡)
대성전 뒤에 조성된 강학공간은 대성전 서북쪽 뒤에 낸 일각문(一角門)을 통해 들어가면 명륜당이 보인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씩 서있고 그 뒤에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의 건물로 가운데 3칸 마루를 깐 대청이고, 좌우 협칸은 실(室)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은 죄우 1칸씩에 도리를 뺄목으로 길게 뽑아내어 맞배지붕의 양끝 칸 쪽에 날개를 펼친 듯 지붕을 덧단 가적지붕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지붕형식은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이 아니고 중국식 가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경북 영천의 신녕향교(新寧鄕校)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독특한 건축 형태를 보이고 있는 전주향교 명륜당에서 볼 수 있다니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곳의 명륜당은 전체적으로 묵직하고 어두운 느낌이 든다. 내가 보아온 명륜당은 건물이 높고 팔작지붕에 대청이 개방형이라서 밝은 느낌을 주는데 말이다.
명륜당(明倫堂)
대성전에서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일각문
서재의 북쪽 뒤로는 장판각이 있고, 내부에는 9600여장의 목판(木版)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강학 공간 서쪽에는 계성사(啓聖祠-중국의 五聖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가 있는데 주위를 담으로 둘러 별도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계성사는 원래 명륜당 동쪽에 있었으나 1929년 철도부설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계성사 앞쪽에는 신삼문(神三門)이 자리하고 있다.
계성사(啓聖祠)-중국의 五聖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
전주향교는 조선시대 때에는 국가로부터 토지(土地)와 전적(典籍)·노비(奴婢) 등을 지급받아 교관(敎官) 1명이 정원 9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신학제(新學制 )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焚香)을 하고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전주유적답사 기념 스냅핑 - 동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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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으로 보는듯이 감상 잘 하였네 향교규모가 상당히 큰 것 같네
자네가 말한 것과 같이 전주향교는 전라도 지방의 수도향교라서 그런지 규모가
크더군! 답사 당일 시간 촉박으로 넓은 향교안의 부속 전각들을
모두 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았다네.
우리 하나회에서도 대표 삼총사 유적답사에서도 모범팀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