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장 1절 – 17절) 23: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 변론으로(22-31장),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23-24장) 내용입니다. 지금까지는 욥이나 친구들이나 서로의 변론에 대한 반박이 변론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본문에서는 욥이 반박이나 자기 무죄 주장을 멈추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으로 전환합니다. 이로써, 친구들을 의지하거나 그 비판과 정죄를 의식하고 반론을 펼치기보다, 하나님만이 자기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자가 되심을 믿고 모든 일의 근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직접 자신의 문제를 호소하는 비 논쟁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친구들이 편협하고도 도식적인 인과응보적인 신앙 논리에만 몰입해서,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을 정죄하며 몰아치는 것에 더 이상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욥은 현실에서 악인이 번영하고 형통하는 것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류하시는 것으로써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베드로 사도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전3:9)며,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보류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지체되지 않을 것을,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전3:10)라고 경고합니다. 왜곡된 신앙지식에 사로잡혀서 제한된 자기 판단력만을 절대화하여 고집하는 친구들과 변론을 계속한다는 것이 논쟁만 키울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욥은, 더는 그들에게 자기 고통을 호소하거나 반박하는 변론을 내려놓게 됩니다. 이러한 변론 과정을 통해서, 친구들의 신앙적 시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오히려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는 감정적인 대처로 좁혀지는 상황에서, 욥은 친구들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자기 마음과 신앙적 시야를 넓히는 계기로 삼아서, 보다 성숙된 신앙의 모습으로 자라가게 되었다는 것을 지켜봅니다. 1. 엘리바스의 말에 욥은 어떻게 답변합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 직면한 욥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친구인 “엘리바스”는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22:3,5)고 정죄하며, 욥이 짓지도 않은 온갖 악행들을 나열했습니다(22:6-9). 따라서 욥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도 친구들의 조롱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며(22:10-20), 욥에게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22:21-30). 이에 대해 욥은, 친구들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보다는 허탈감을 느꼈는지 반박을 멈추고,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23:2) 곧 “오늘 또 이 억울한 마음 털어놓지 않을 수 없고, 그의 육중한 손에 눌려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겠구나.”(공동번역)라며, 지금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극심한 고통의 상태만을 털어놓습니다. “오늘도”는, 욥에게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은, 친구들의 비난과 책망에 굴하지 않겠다는 욥의 의지와 다짐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마음 상태의 고백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믿었기에, “내가 받는 재앙” 자체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욥은 하나님을 향해 “탄식”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갑작스럽게 재산을 다 잃게 되고(1:13-17), 자녀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을 겪어야 했고(1:18-19), 몸에 생긴 악창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신체적 고통과 아내의 저주를 당해야 했으며(2:7-9), 위문하러 온 친구들에 의해 죄인으로 내몰리는 정죄를 당하다보니(4-22장),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중되는 재앙의 고통이 너무 커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물질적 육체적 고통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더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은 친구들로 말미암은 정신적 영적 고통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의 간절한 소망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23:3) 곧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새번역)이라며, 의로운 판단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간절한 갈망으로 바뀝니다. 욥은 하나님만이 자신이 겪는 고난과 역경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이유를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23:4) 곧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새번역)이라고 밝힙니다. 친구들에게 호소해보았자 끝없는 오해와 갈등만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본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고백에는 나타나지 않으시는 침묵의 하나님, 뵐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안타까운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23:5-6) 곧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새번역)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시리라는 기대감의 염원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호소에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대답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이로써 욥은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23:7) 곧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새번역)라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의 확신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용서해 주실 것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그런 범죄를 저지른 “악인”과 “경건하지 못한 자”(20:4)가 아니라, “정직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34:15,17)라고 했던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는 무엇입니까?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과 질고의 고난까지도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자녀들의 몰살과 전 재산이 날아가는 몰락의 재앙까지 받아들이는 욥의 신앙을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1-22)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악창으로 고통 받는 상황에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고 했던 아내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2:10)며, 하나님을 향한 욥의 신앙이 무엇이었는지를 증언합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 안에 있음을 믿었기에, 고난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욥이 힘들어 한 것은, 비록 그러한 믿음을 가졌다할지라도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며 저주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의 행태였습니다. 욥은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있음을 믿었기에, 욥이 최종적으로 힘들어한 것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답답함이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이 저지른 구체적인 죄악이 없는데도 죄를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정죄와 조롱이 힘들었고, 이처럼 자신이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탄식하는 자신의 호소에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찾고자 하여도 만날 수 없다는 답답함을,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23:8-9)라고 탄식합니다. 아무리 갈망해도 만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때로 우리가 절망에 직면했을 때 겪는 동일한 상황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때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 내뱉는 절망감의 토로는, 믿음이 없거나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겪어본 사람은 알지 않습니까? 욥 역시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지만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을 토로하면서도,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신앙고백입니다. 욥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는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모든 여정을 지켜보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때로 우리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이 단지 우리를 파멸에 몰아넣고자 하는 징벌과 심판이 아니라, 우리를 “단련”하시는 곧 시험하시고 연단하셔서 더 강하고 순결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은 자신이 겪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40여 년간의 광야 유랑 생활을 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단지 징벌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라 보다 성숙한 신앙을 위한 연단의 시간이었음을,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고 일깨우지 않습니까? 따라서 다윗은 자신이 매순간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기 위해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26:2)라고 기도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 역시도 자신이 매순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 위해서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23:11-12)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욥이 친구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9:2,새번역)라며, 자신의 무죄 주장이 자신은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처럼, 자기 삶의 중심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일상에 있었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3. 욥의 좌절과 낙심이 어떻게 고백됩니까?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고 한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23:13)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로 자신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그분이 한번 뜻을 정하시면,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으랴?”(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 그를 거역하고 온전할 사람이 있겠느냐?”(9:4,새번역)라고 했고,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9:12)라고 고백했었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의 경건을 조롱하며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22:3)고 했던 것처럼, 자신이 아무리 무죄하다고 하여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여전히 고난을 당해야하는 가운데 친구들의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에 있어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좌절과 낙심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욥은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23:13-14)며, 하나님의 전능성과 절대적 주권의 섭리를 고백합니다. “이런 일”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앞부분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고 했던 소망의 확신을 가리켜서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직한 자”(23:7)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고난에 처하게 하시면 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섭리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부정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로 무죄한 이들로 겪게 하시는 고난의 상황이 인간으로서는 그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이 계속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고통입니다. 따라서 욥은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23:15) 곧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계획 가운데, 나를 두고 세우신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겠기에, 나는 그분 앞에서 떨리는구나.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이 두렵구나.”(23:14-15,새번역)라며, 지금 자신이 겪는 상황이 아무런 변화의 진전 없이 계속될 것을 두려워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각을 얻어”는 “생각만 해도”(공동번역)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던가요? 언제 끝날 것만 알아도 한결 수월하게 고난과 고통을 감당할 수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제일 힘들고 어렵습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계속된다는 “생각만 해도” 두렵다고 토로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이었기에,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한 고통의 두려움 그 자체도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23:16) 곧 “하나님이 내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떨게 하셨기 때문이지”(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고통이 가중될 수 있다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 같습니다. “내게 작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는 것이 욥을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이에 대한 두려움을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23:17) 곧 “내가 무서워 떤 것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니다.”(새번역)라고 토로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어둠”과 “흑암”의 재앙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셨고, 또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23:16)라고 하는 자기 마음의 갈등을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이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고 한 고백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중에 욥처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개역)는 고백을 하면서도, 욥이 혼란스러워했던 또 다른 갈등처럼 우리 마음의 내면에 일어나는 갈등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지식적으로는 직면한 고난 앞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할지를 다들 잘 압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직면한 고난에 대해서는, 욥의 친구들처럼 정답만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이야기하면서 왜 그렇게 대처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움까지 표출하며 핀잔을 줍니다. 그러나 막상 그 고난이 내게 닥쳤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지 않던가요? 과거 암 환자를 돌보던 의사가 환자들에게 야단까지 쳐가며 정답만을 이야기하다가, 막상 자신이 암에 걸려 투병을 해보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환자들을 잔인하게 대했는가를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예기치 못한 재앙으로 인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공의롭고 선하신 주권적 섭리에 대한 신뢰의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욥은 고난 중에서 현실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뇌와 번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현실적 고난 사이의 갈등과 고뇌를 토로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진정한 믿음으로 세상의 현실을 껴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욥은 악한 자들이라면 혹 모르겠는데 선한 자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장차 더 크게 닥칠지 모르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의 호소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판단으로 세상의 현실 문제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욥의 고백처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는 신앙고백과 믿음의 소망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거룩한 백성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