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자가 되라
마태복음 18 : 21 – 35
용서(容恕)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쉬운 것 같지만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자는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용서’의 반대는 ‘미움과 복수’입니다. 미움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용서입니다. 미움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사단이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마음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십니다.
요셉은 자신을 판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형들을 언제 용서했는가는 성경에 말씀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었을 때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말씀을 보면, 이미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39:3)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종 되었을 때 형들을 미워하며 복수하겠다는 마음이었다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을 판 형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 가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했습니다.(창50:20)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종으로 있을 때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을 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3)라는 말씀은 용서가 구속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용서’가 곧 천국임을 의미합니다. 죄인이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용서 없는 천국은 불가능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자신의 몸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해도 갚을 수 없는 ‘죄’로 비유하셨습니다.(25) 그가 죽어서 지옥 불 가운데서 영벌을 받아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가르쳐 줍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빚을 갚으라는 주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26) 그가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다 갚겠다고 말한 것은 그 순간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는 말은 그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는 지옥 불 속에서 영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들 예수를 대속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그가 주인에게 감사했다는 말씀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와 감사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감사가 없다는 것은 용서받은 은혜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면 부모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을 감사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 악해집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감사하지 않으니까 그는 곧 나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료가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동료가 엎드려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주인에게 그가 엎드려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간구했던 말과 똑 같습니다.(26,28)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의 주인 앞에 엎드려 간구하고 탕감받게 된 것을 생각하게 한 말입니다.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빚을 다 탕감받았으니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당연히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기 때문에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그는 그 동료를 옥에 가두었습니다.(30)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면 형제의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 용서할 줄 모르는 완악함을 잘 보여 줍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 형제의 작은 허물도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드면 형제의 잘못을 보고 용서할 줄 모르고 정죄하는 자가 됩니다.
다른 동료들이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렸습니다. 동료들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당하는 것을 보고 마치 자신들이 당하는 것처럼 매우 슬퍼하며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그 사실을 주인에게 탄원하듯 알렸습니다.(31)
주인은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종을 소환하고 그를 ‘악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무섭게 책망했습니다.(32,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는 형제를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인이 그 종을 책망한 것은 그가 갚지 않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에게 무자비하게 처리한 사실에 있습니다.
그를 책망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34) ‘옥졸’은 죄수를 결박하고 매로 쳐서 옥에 가두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주인의 명령대로 그는 옥졸에게 넘겨져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는 말씀은 그가 갚을 수 없는 빚이기 때문에 지옥에 갇혀 영원히 받게 되는 지옥 형벌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용서’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받았음에도 용서할 줄 모르는 자는 앞서 받은 용서도 빼앗기고 영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들의 용서와 구원이 기독교의 구원관 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의 용서를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용서’를 빼면 흰 종이에 검은 글자일 뿐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으로 옷을 입혀주신 것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줄 모르면 천국 백성이 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를 탕감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들 입니다. 그런데 죄를 탕감받은 자가 형제의 작은 실수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가 됩니다.
‘만 달란트’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장 큰 화폐로서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하는 화폐입니다. 오늘의 달라로 환산하면 10억 달라 이상이 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갚을 수 없는 ‘만 달란트 빚진 자’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동료가 그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으로, 서너 달 노력하고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백 달란트 빚’과 비교할 수 없는 ‘백 데나리온 빚’은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성도들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너는 용서하라”(눅17:4)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너’는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오늘의 성도인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을 괴롭히고 해를 끼치는 성도를 용서하기보다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잘되는가 보자고 하며 이를 갑니다.
남아프리카 남아공화국에 만델라는 흑인으로서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자신을 잡아 27년을 옥에 가두고 괴롭혔던 사람들을 귀빈으로 초청했다고 합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그에게 ‘당신을 괴롭힌 자를 어떻게 대통령 취임식에 귀빈으로 초청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만델라는 ‘내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저들을 용서하므로 나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만큼 내 마음은 악한 마음의 종이 되어 불행하지만, 용서하면 악한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19)
그러나 감사하지 않은 아홉은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안타까워 물으셨습니다. 나병은 고침을 받았지만 감사하지 않은 아홉은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자신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오히려 그가 유대인들에게 찾아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고발하므로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요5:16)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살인자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면 마땅히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할 줄 모르면 감사도 할 줄 모릅니다. 은혜를 받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받은 은혜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그는 다시 잡혀 옥졸에게 넘겨 옥에 가두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저)는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자 답게 형제를 용서합시다. 천국에 들어가서 속죄해 주신 예수님을 섬기며 영생합니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