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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하느님 중심의 삶.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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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 카르페 디엠-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90,10)
건강도 젊음도 찰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문병차 병원에 갔다가 코로나로 환자는 보지 못하고 전화 통화로 위로와 강복을 전했습니다. 참 많은 환자들로 병원이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병원이나 그럴 것입니다.
어제 우리 노수도형제도 눈수술을 위해 입원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이발때는 미리 강복을 받았고 오늘 미사전에 가게 된다며 특별미사를 청하여 새벽4시 집무실에서 수사님위해 함께 미사봉헌했습니다. 아무래도 많이 불안했던 듯 합니다.
참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도 참 짧은 날들이요, 대부분은 병고로 근심, 걱정으로 지내는 날들 같습니다. 요즘 들어 병고중인 분들도 많고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습니다. 새삼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살아있는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여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카톡 메시지를 받고 공감했습니다. 천국의 시민들이 가장 많이 쓰는 천국의 언어 7가지라 합니다.
1.미안해요(I am sorry)
2.괜찮아요(That’ okay)
3.좋아요(Good)
4.잘했어요(Well done)
5.훌륭해요(Great)
6.고마워요(Thank you)
7.사랑해요(I love you)
좌우간 하루하루 많이 사용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나라를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꼭 기억해야 할 세마디를 나눕니다.
첫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에서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말씀하셨습니다. 성인뿐 아니라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눈앞에 죽음을 환히 두고 살 때 언제 어디서나 환상이나 거품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 수난과 부활을 세번째로 예고하실 때 심정도 참 비장하셨을 것입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주님은 늘 죽음을 기억하며, 염두에 두고, 또 부활의 희망을 내다보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죽음을 염두에 둘수록 강화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예수님처럼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입니다. 예수님처럼 죽음의 위기중에 간절히 기도하는 예레미야요,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을 예언자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둘째, 아모로 파티(amor fati)
운명애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사상가운데 하나지만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참 적절한 삶의 자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짐을 기꺼이, 용감하게 선물로 받아들일뿐 아니라 하루하루 주님을 선택함으로 아름답고 보람차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도 포함됩니다.
바로 이런 자세는 오늘 제자공동체를 대하는 예수님 모습에서도 잘 들어납니다. 참으로 동상이몽의 철부지 공동체같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다가와 청을 드리니 말그대로 무지와 오해의 반영입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스승님의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완전히 강요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체의 동요없이 참으로 차분하게 대응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소관밖이며 아버지께서 하실 일임을 밝히십니다. 대신 두 제자들이 책임을 다할 것임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은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참으로 사랑하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에 앞선 묘사에서 얼마나 공동체 제자들을 사랑하신 주님이신지 아모로 파티의 빛나는 모범인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끝까지 내 삶을, 이웃 형제들을, 심지어 내 죽음까지, 자기의 운명을 통털어 사랑으로 감싸안는 자가 아모로 파티의 사람이요 예수님이야말로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원망은 추호도 없고 찬미와 감사,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셋째, 카르페 디엠(Carpe diem)
참으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는 메멘토 모리의 사람은, 참으로 자기 십자가의 책임을, 운명을 사랑하여 힘껏 등에 지고 품에 안고 살아가는 아모로 파티의 사람은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여 주님과 일치하여 본질적 깊이의 카르페 디엠의 삶을 삽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마치 주님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세상의 통치자들이나 고관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종의 영성에 충실한 삶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어제와 똑같은 말씀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는 섬김의 삶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 이웃을 주님처럼 섬기는 겸손한 사랑의 삶입니다. 마지막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섬김의 삶에 충실하는 카르페 디엠의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메멘토 모리의 사람’으로, ‘아모르 파티의 사람’으로, ‘카르페 디엠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참으로 자주 인용해도 늘 새로운, 이 모두를 요약한 제 좌우명 고백 기도시 마지막 연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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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꽃길만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며
그곳에서 수난과 죽임을 당하실 거라고 세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빛나는 영광의 타볼산에서 내려오시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하시는 말씀인데,
이 길이 가시밭길이요 십자가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물론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는
이 길이 꽃길이라 생각하고 미리 ‘자리 청원’을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아무리 수난을 예고하셔도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주님께서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만 하십니다.
듣고 싶은 말만 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너는 꽃길만 걸을 거야!’라고.
그리고 엄마의 자리 청원에 대해선 ‘당신 아들은 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주님은 듣기 좋은 말을 결코,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길을 가야 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어미보다 아들들을 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까?
저는 음악방송을 늘 틀어놓고 일하는데
음악을 신청하면서 취직하는 사회 초년병 자식 사연을 전하면서
자기 자녀들이 꽃길만 걷기를 바란다는 엄마의 마음을 전하지요.
이런 마음은 야고보와 요한 사도 엄마의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어미의 마음이고 의심의 여지 없이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그래서 신앙인인 우리는 이 지점에서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꽃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가라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 어미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고 믿는지 도전을 받습니다.
사실 신앙인인 우리가 주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고,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고,
특히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거나 주실 때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프란치스코처럼 백 배의 고통을 더 주십사고
청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지은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 나의 이 모든 고통에 대하여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백 배의 고통을 더해 주시기를 비나이다.
당신의 거룩한 뜻을 실행함이 나에게는 넘치는 위안이 되기에,
나를 가차 없이 고통으로 괴롭히시는 것을 진정 기쁘게 받아들이겠나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신 고통을 사랑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고,
고통을 더 주십사고 우리가 청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주시고,
우리가 그 길을 걷는 이유는 순전히 천국 여정을 위해서고,
그래서 그것이 꽃길보다 더 큰 사랑의 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고난에서 구출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큰 사랑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의 행복을 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꽃길만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과 기도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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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장면과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높은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왕이 되고 싶으며 ‘먼저’ 아내를 왕비로 대해야 하고, 왕비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남편을 왕으로 받들어야 하고,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남들에게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존경’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청하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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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명의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행동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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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회전하고 있습니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우리은하(Via lactea)’라고 합니다. 태양계에 있는 별들 중에 지구와 비슷한 별은 금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성은 태양과 너무 가까워서 생명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별은 지구보다는 작지만 화성이라고 합니다. 관측결과에 따르면 화성에는 지구처럼 ‘물’이 풍부했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물은 지구나 화성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우주에서 고체의 형태로 날아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는 아직도 생명의 터전인 물이 풍부한 반면 화성에는 그 많았던 물이 모두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장’의 크기라고 합니다. 지구에는 강력한 자기장이 있어서 태양풍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지구 밖 35,000킬로까지 밀어낸다고 합니다. 그 힘으로 지구의 물은 우주로 사라지지 않고, 지구의 품에 남게 되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화성에는 자기장이 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태양풍을 그대로 받아야 했고, 그 결과 화성을 가득 채웠던 물은 허망하게도 우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구의 자기장과 관련된 영화 중에 ‘코어(The Core)’가 있습니다. 2003년에 나왔으니 20년 전의 영화입니다. 영화는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면 첫째, 지구 대기권을 이루는 공기층이 얇아지거나 사라집니다. 지구의 자기장은 마치 비를 막는 우산처럼 태양에서 오는 태양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유전자의 심각한 파괴로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빠집니다. 태양풍이 사람이나 동식물에게 그대로 피폭되면 세포의 유전자가 파괴됩니다. 셋째, 지상의 전력 시스템과 지상의 통신 시설에 큰 피해가 발생합니다. 수시로 내려치는 어마어마한 번개의 위력 앞에 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고 바닷물은 증발하게 되고, 결국 화성과 같이 사막뿐인 행성이 되고 맙니다. 영화는 멈춰버린 지구의 자기장을 되살리면서 끝이 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이 지구를 보호하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인간들이 인공지진으로 무기를 만들면서 지구의 핵이 멈추는 일이 생겼다고 설정합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인공지진으로 지구의 핵이 멈추면서 자기장이 멈추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기장이 사라지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결국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진처럼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억누르려는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재물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은 사람들도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들의 자기장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섬김과 겸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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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린이들에게 춤을 춰 보라고 하면, 한때 ‘개다리 춤’만 췄었습니다. 다리를 흔들면서 박수치며 손을 번갈아 머리로 넘기는 춤입니다. 코미디언 배삼룡씨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춤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아이들에는 인기 있는 춤입니다. 한번은 방송에서 한 연예인이 이 춤을 따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합니다. 겨우 이런 춤을 추냐는 비웃음도 보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동창 신부가 “이 춤 진짜 어려워. 너도 한 번 춰봐.”라고 말합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의 뻣뻣한 몸으로는 도저히 출 수 없는 어려운 춤임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준 뒤, 그 중 딱 6초 동안의 안무를 보고서 춰 보라고 했습니다. 딱 6초입니다. 전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춤을 제대로 추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나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운전 실력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자기 운전 실력을 스스로 점수 매겼습니다. 사람들 모두의 평균 점수는 몇 점이었을까요? 80점? 85점?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93점이었습니다. 모두가 90점 이상의 베스트 드라이버인데 왜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을까요? 미국 코미디언 조지 칼린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똥멍청이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또라이다.”
자신은 잘한다는 착각. 이 착각으로 얼마나 남을 판단하고 단죄했을까요? 훨씬 부족함이 많은 나인데도 말이지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면서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부모님의 마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소망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의 관점에서 자기 아들이 다른 제자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고, 그 당연한 생각을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들 역시 스승님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강조하십니다. 당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시면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달리, 나를 낮출수록 높아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자기는 잘하고 남은 못한다는 교만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과 함께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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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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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얼마 전 이곳 봉안당에 어머니를 모신 한 자매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자주 제 꿈에 오십니다. 오셔서 주방에 밥을 지어 주십니다. 하늘에서도 혼자 사는 딸 밥걱정을 하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정말 딸의 밥 걱정하셔서 꿈에 나타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매님에게 다른 심리적인 요인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 두 아들을 부탁한 어머니의 마음도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요? 자기 자녀들이 잘되기를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욕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행실에 주목하지 않으시고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자리는 결코 부와 권력의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바닥까지 내려가야 하는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만약 두 아들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두 아들을 오른쪽과 왼쪽에 앉히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는 안락함과 평안함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세상의 축복을 기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화와 부와 권력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안에서 말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주문하십니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더 내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가신 길은 이러한 낮은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낮은 길로 초대하십니다.
그 길을 주님과 함께 끝까지 걷는 이에게 천상 영복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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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뽑기
얼마 전에 하도 자장면이 먹고 싶어서 자장면을 만들어 먹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고기 조금과 파와 양파, 당근, 그리고 춘장을 준비하고 주먹만 한 크기의 밀가루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은 그 음식에 따라서 물의 양을 달리해야 합니다. 쫀득한 반죽을 원한다면 가장 찰진 반죽이 될 수 있도록 물을 적게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물의 양을 조절해 줘야 하지요. 너무 많이 넣으면 생각지도 못한 머리만 한 반죽을 만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처음에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면을 만들기는커녕 부침개를 해야 할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만든 반죽을 다시 3등분을 하고 하나씩 넓게 편 후 칼로 잘라 늘리면 수제 면이 됩니다. 수제 면이 재미있는 이유는 아마도 들쭉날쭉한 굵기에 면발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렵다고요?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면을 뽑아서 국수 국물에 넣으면 손국수가 되고, 짬뽕 국물에 넣으면 수타 짬뽕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저는 자장면을 만들어 저 자신에게 수타면을 선물했습니다.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한 그릇 근사히 뽑아 자신에게 선물해보세요. 근래 가졌던 어려운 마음들이 한줄기 면을 따라 후루룩 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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