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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35 아비멜렉이
본문에서는 먼저 그랄왕 아비멜렉의 요청으로 이삭으로 더불어 화친 조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비멜렉이 이삭의 배경으로 하나님이 계셔서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사람은 한나라의 전체 군대보다 강한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하나가 천을 당하고 만을 당한다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그 다음은 이삭의 가정 안에 생긴 근심스런 문제입니다. 그것은 에서가 부친의 극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부모 동의 없이 헷족속의 딸들과 결혼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기록한 것은 단순히 종족 보존의 의미가 아닙니다. 아마도 종교적 혼합을 예상하고 근심했다는 사실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1. 본문 26절은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입니다.
21장 22-34절에 꼭 비슷한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전에 부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은총을 이삭에게 베푸십니다. 아비멜렉이 자발적으로 이삭에게 우정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보통 은혜와 복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렇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를 못살게 굴던 이웃들이 이제 그를 두려워하여 우정을 나누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는 적지 않은 근심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그의 종에게 뚜렷한 영예를 부여하십니다. 동시에 평온을 주십니다. 그 왕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충동으로 이삭에게 이끌렸다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가 겁이 났다면 왜 어떤 다른 방도를 강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한낱 개인에게 간청할 정도로 자기를 낮추었겠습니까? 적어도 이삭을 불러 자기가 원하는 바를 권위로 명령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너무도 강력히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는 왕의 자만심도 접습니다 또 지금 이삭은 침략적이거나 호전적이지도 않고 군사도 거느리고 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과 동맹과 평화를 맺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는 난폭하던 자들을 얌전하게 만드실 수 있으시다. 또 원하시기만 하는 때면 겁을 먹고 겸손해지게 하실 수도 있으시다’ 는 것입니다.
2. 본문 27절은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니다.
21:25절에서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이삭도 이미 받은 자기 피해를 말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을 믿을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삭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자기를 크게 적대시하는 것을 발견했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앙인도 가능하다면 그들 원수들이 침해 행위의 목적을 회상케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 그들의 강포와 협잡과 불의한 행위를 자제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평을 털어놓는 일은 합당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내심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는데도 자기 무지와 부패와 무능, 그리고 쓸모 없는 고집으로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은 참된 겸손이나 인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이 닥쳐오는 모든 침해를 묵묵히 소화시키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백성들이 복수심과 복수 행각을 삼가기를 요구하시는 것뿐입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잘 정돈되었다면 혀도 남의 결점을 헐뜯는데 독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사악한 자들이 수치심에 의해서 죄악을 범치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불평을 해서 이득이 있겠다는 가망이 없는 곳에서는 묵묵히 평화를 바라는 것이 좋습니다. 악을 즐기는 사람들을 견책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주님만 바라보고 침묵정진 하는 게 좋습니다. 실로 우리는 복수심에서 우리 혀가 비난을 내뱉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통해서 주신 말씀대로 “미움은 다툼을 일으킨다” 는 말씀은 여전히 진리입니다(잠10:12).
3. 본문 28절은
“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입니다.
1) 본문에 나타난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볼 때에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았다고 하겠습니다.
때문에 아비멜렉은 이삭과 교활한 마음으로가 아니고 선한 믿음을 가지고서 교제하기를 진실로 바랐습니다. 그들이 이전에는 부당하게 거역해오던 자에게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고백은 대단히 유용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만사가 형통해져 가는 자, 즉 하나님께 복 받은 자를 방문한 속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또 그분에게서만 모든 번영이 기원된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데도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나게 비열한 배은망덕입니다. 또한 이 속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가 되는 일은 자기들에게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이상으로 더 권장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선언하신 자들을 무시할 때에,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철판을 깔고 있는 셈입니다. 또 그들에게 간악하게 행동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완전히 눈먼 자들입니다.
2)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보호아래 있는 자들을 해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친히 복수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지극히 무서운 경고에도 감동될 줄 모르는 많은 무리들이 지금도 여전히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악하게 괴롭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입으로 말씀하실 때 우리는 거의 신임하지 않은 것을 불신자들은 본능으로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역점 상황이 속출하게 되는데 그 실예가 기독교인들은 멍청해져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영특해져서 도리어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악의 없는 사람을 무서워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 자기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까지 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내려주신 은총을 보고 이삭은 의인이요 따라서 그에게서는 아무런 위험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마음과 행실을 따라 이삭을 평가했기 때문에 그런 맹세를 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마음의 동요는 흔히 불신앙인들을 선동시키므로 저들은 자신들에게 스스로 모순되게 처신하게 됩니다. 혹은 적어도 상충하는 감정들 사이에 동요가 생기고 아무것도 안정되고 일정한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 가슴 속에서 솟아오른 의로운 판단 원리들은 타락된 감정 때문에 곧 여지없이 파괴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들이 올바로 생각했던 것도 곧 사라지고 말든지 최소한 부패되며 선한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4. 본문 29-30절은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입니다.
1) 그들은 자기 양심의 고발로 이삭으로 하여금 자기들에게 굳게 결속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이삭에게 요구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그에게 끼친 고통 때문에 능히 이삭이 자기들에게 정당한 복수를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을 모르는 척 했습니다. 자기들이 그에게 놀랄 만큼 친절히 행했다고 자랑하기까지 했습니다. 처음엔 그 왕의 인정(人情)은 사실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후대했습니다. 지독히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런 행동을 고수하지 아니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자기 잘못을 어떤 꾸며낸 구실을 붙여서 감추는 것은 지극히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잘못을 범하게 되면,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솔직한 일이요, 그것을 부인하는 일은 우리에게 해를 입은 자들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이미 저들의 양심을 충분히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를 집안 식구처럼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득을 받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그들에게 정당한 고백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들에게 어떤 적의를 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그들과 계약 맺기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 우리에게 떠났던 자들이 다시금 우리에게 온다면 그들을 박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뜻에 맞지 아니하는 듯이 보이더라도 평화를 좇아야 하는 것이 명령받은 바일진대 적이 먼저 어떤 화해를 구해 올 때, 더욱 더 그들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또 비록 아직은 진정한 회개가 보이지 않더라도 장차 개정될 어떤 기미가 보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그들과의 평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삭 자신이 모든 범과를 다그치지 않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부탁을 할 때 아첨을 떨 듯이 저들이 아첨을 떨어 이삭의 호의를 받아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로는 거기에 다른 의미를 첨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삭은 그들이 자기를 시기하여 쫓아내서 자기에게 해를 끼쳤다고 불평을 토로했습니다.그들은 이삭의 마음 속에는 일말의 분노라도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뜻에 따라 이삭을 그토록 친절히 대우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와 같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대는 뭘 원하는가? 현재의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그대에게 접대의 의무를 다 이행치 못한 것은 인정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당시의 아픈 추억을 능히 다 잊게 하기에 넉넉하도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로 자기들이 이삭에게 선대하고 있다고 다시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삭과 함께 한 자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5. 본문 31절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입니다.
이삭은 맹세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블레셋 사람들이 더 쉽게 진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상호간에 평화하기로 약정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정당한 맹세의 방법입니다. 말의 형식을 빌어서 하는 단순한 약속으로도 사실은 충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선이나 변덕스러움이 상호간에 불신을 조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이름을 맹세에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계약이 보다 신성하게 확정되게 하셨습니다.또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필요에 따라 맹세하도록 명령하시기 조차 하십니다(신6:13). 그러나 우리는 경솔하게 맹세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6. 본문 32-33절은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입니다.
지형적 조건으로나 그 당시 가족들과 함께 한 종족들의 상황 또 가축들을 기르는 일들이나 농삿일에 풍족한 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물을 찾는 작업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잠시동안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에 이삭은 가축과 집안 식구들을 위해서 공급할 물을 어떻게 얻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물을 샀든지 아니면 물을 얻을 수 있도록 계약할 어떤 사람을 찾으러 먼 곳까지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같은 날에 평화 조약을 체결한 바로 그 날에 새 우물 하나를 추가로 얻습니다. 아버지 때에 있었던 감사한 일들이 다시 재현되었으므로 그도 “브엘세바” 라는 이름을 그 우물에 붙였습니다. ‘세바’라는 이름에 관해서는 아브라함이 처음에 그 우물을 지어주었던 이름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해한 것입니다. 그 히브리 원어가 모호하지만 아브라함은 분명히 그가 그랄 왕과 맺었던 계약을 가리킵니다. 이제 이삭은 이 옛 추억을 회상합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맺었던 계약과 그것을 병합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고 긴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일로 아버지 때의 일과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진 일이 병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일로 평화의 조약을 맺은 일과 새 우물을 얻은 일이 병합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로 통합된 것입니다.
7. 본문 34-35절을
“(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입니다.
1) 이제 여기서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모세는 에서의 결혼을 이야기합니다.
“헷족속”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써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만큼 그들 족속들 중에서 데려온 자부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은 종교적인 문제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2)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에서가 그 땅의 주민들, 아브라함의 거룩한 종족들은 이들과 구별된 자들과 결합하고 친족이 되어 혼합되므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버림 당하는 서막을 연출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에 의해서 그 며느리들이 거룩한 족장 이삭과 그 아내에게 근심과 걱정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점차적으로 이 버림받은 백성들에게 호의를 갖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 그곳 사람들의 예절이 바르고 그들의 딸들도 선량하고 순종을 잘 했더라면 이삭이 그들의 동의를 얻어 그들에게서 아내를 골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원한 원수로 작정하신 자들과 결혼하는 일은 합당한 일이 못됩니다. 아브라함이 잠시 체류자로 있었던 그 땅 거민들을 파멸시키지 않고서, 어떻게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 땅의 소유권이 확보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설정하신 분리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이 같은 상서롭지 못한 결혼을 하게 될만한 일체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신 것입니다.
4) 그래서 에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 거룩한 사람 이삭이 비록 에서의 아내들에 대해 마땅히 좋지 않게 생각했고 울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알게 되다시피 아들 에서에게만은 최대의 친절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5) 이미 다른 곳에서 일부 다처제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이 타락한 일이 많은 사람들 중에 어느 곳에서나 아직까지 유행되고 있어서 이 관습이 부덕하지만 법률의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때문에 육체를 즐기는 자가 두 아내를 취하여 자기 욕망을 채운다 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그의 후손들은 불경건한 길로 나아가도록 하시고 이삭은 야곱과 그의 후손과 함께 거룩한 길을 가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예비하신 그 길을 주와 함께 교회와 함께 가고 있으십니까? 오늘 말씀도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