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는 생활 (롬 12:14-21)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시간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빼놓고는 무엇이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도 사랑 예수님도 사랑 성령님도 사랑 제자들도 사랑 성도들도 사랑, 우리 성도의 그 표시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직분과 능력과 사역을 했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원수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1.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마5:43-44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3-44). 그럴 때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대상인 원수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대부분의 주석을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원수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인정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 말씀의 이면에는 원수를 사랑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어 신분상으로는 이미 아들이지만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원수를 생각하며 미움과 분노와 증오로 가득하다면 그 모습은 악마의 모습일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믿음이 없으면 나는 어느 순간이고 악마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원수사랑 여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냐 마귀의 자녀의 모습이냐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2. 선대하며 축복하라.
14-18절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원수 사랑은 듣기는 좋지만 당사자가 되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금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자기 수하의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너그럽게 봐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건 최소한의 양심입니다.
마 18장에 탕감 받은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주기도문에도 이 말씀을 끝으로 강조하셨는데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억만 죄악에서 용서받았는데 원수를 불쌍히 봐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3.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율법에는 원수를 갚았습니다. 동해보상법이라 하여 눈은 눈, 이는 이, 피해를 입힌 만큼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훈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원수를 갚고자 하면 우리 마음도 위로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매를 맞아야 사람입니다.’ 하면서 자기를 낮추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의 아픈 상처도 다 치료가 됩니다. 혹은 '하늘의 상이 부족하여 상 주시려고 핍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할 때 원수를 축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
잠24:17-18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원수 혹은 적대국이 잘못될 때 고소하다면 그 채찍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던 에돔이 멸망을 당합니다. 자기가 책임지고 돌봐야 할 형제국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미워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원수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삼하 1장을 보면 사울을 죽인 아멜렉 소년을 처형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위해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면 사울을 추종했던 사람들이 다윗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 사랑은 곧 자기 사랑입니다. 원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는 그보다 열배 백배의 심적 고통을 받게 됩니다. 원수를 죽이기 전에 내가 죽어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 거북한 섶에 자고 쓰디 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원수를 갚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게 됩니다. 속 끓다가 병으로 죽는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다윗은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시35:12-13에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다윗은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범죄하지 않았고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습니다. 밖에서는 사울의 군대가 추적하고 안으로는 마음의 고통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음성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도 대답이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이방 블레셋으로 피신하고 미친체하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원수를 위해 금식하며 축복했더니 기도가 품으로 돌아오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더라는 말씀입니다. 회복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리고 하나님을 부르면 응답하시는 깊은 영적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범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도우시기 바랍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길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원수 사랑입니다. 원수 사랑의 단계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이 만나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사랑의 은사를 구하여 더 깊은 은혜의 깊은 데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4. 원수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말씀합니다.
롬12:20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했습니다. 잠25:21~22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원수는 악하기 때문에 반성도 동정도 없습니다. 그런 악인에게 악으로 대해주면 그 악인이 그 악을 이용해서 자기를 정당화하고 더 악을 행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러나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으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란 말입니다.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은혜로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고 그러면 원수가 처음에는 비웃지만 나중에는 나의 천사로 변하여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롬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했습니다.
당시 동방에서는 숯불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냥이 발달되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불씨를 아주 귀하게 여겼는데 불을 꺼뜨리면 이웃에 가서 불을 담아서 머리에 이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너무 많아 활활 타오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려놓자니 손이 데겠고 이고 가자니 너무 뜨거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를 사랑하되 많이 사랑하면 원수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견딜 수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악하면서도 무식한 사람이 있습니다. 용서로도 사랑으로도 안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리어 용서를 당연한 권리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대접해 주면 고마운 줄 모르고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압니다. 그러나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듯 조금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면 달라집니다.
머리에 숯불을 더 많이 쌓으면 인간이 아니라면 몰라도 인간라면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 정도가 아니라 자녀의 등록금을 대주면서라도 사랑하고 병원비를 대주면서라도 사랑하면 달라집니다. 피를 뽑고 눈을 뽑고 장기를 이식해서라도 사랑하면 견뎌낼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면 하늘의 상은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자기를 모함하고 욕하고 찌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보든지 하나님의 참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생각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받는 참 믿음의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