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갑작스러운 이모의 죽음에 죽음없는 세상을 소망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집회에서 병 나은 사람이 일어나고, 은혜가 내리는 것을 체험하며 분명한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돼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 안 짓는 자유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고
죽은 사람이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깊이 감사드리게 돼
소사신앙촌 건설이 완공된 뒤에는 나이가 어려서 종업원으로는 일할 수 없다고 하여 제과부에서 일을 도우며 카스텔라를 만들었습니다. 카스텔라를 만드는 과정 중에 빵 부스러기를 정리하고 틀을 닦아야 다음 빵을 구울 수 있는데, 그때 마음속에 갈등이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눈과 마음,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작은 것 하나라도 예민하게 생각하며 자유율법을 지키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탐내는 마음조차 자유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인데, 어느 날 빵 부스러기를 정리하다 보니 먹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순간 ‘이것을 먹으면 죄다.’ 싶다가도
‘버려지는 건데 먹으면 좀 어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며칠 동안이나 갈등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몇 번 더 참고 나니 나중에는 냄새를 맡아도 먹고 싶은 생각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죄의 유혹을 이기고 참아 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작게나마 배우게 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사는 동안 무엇을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마음에 항상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그 중 또 하나의 즐거움은 저녁때마다 공장을 순회 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 이외에도 10명 정도가 한 번이라도 더 안수받으려고 하나님을 따라 다녔는데, 한번은 제 앞에서 문이 딱 닫히는 것이었습니다. 신 대장이라는 분이 소리도 없이 문을 닫았던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안에서 “문 열어 주라.” 하셔서 들어갔던 일도 있었습니다.
또 소사에서는 장례가 나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대부도에 있을 때 생명물의 권능을 확실하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도 전도관 권사님들을 따라 3살 아이의 장례예배에 참석했을 때, 권사님이 생명물로 아이를 닦아주자 뽀얗게 피어 잠을 자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아이의 고모가 와서 아이의 손목을 잡자 검게 변하는 것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굳고, 색이 변해 흉하게 되지만, 생명물로 돌아가신 분을 닦아드리면 나이에 상관없이 굳었던 몸이 부드러워지고 환해지며, 어떤 분은 투명하게 보일 정도까지 피어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생명물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 은혜가 내리는 참 진리의 길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오만제단이 지어진 뒤에는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도 전도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말씀대로 나가서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청남도 홍성이 고향인 권사님과 함께 홍성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홍성제단은 허허벌판에 있어 제단을 짓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다행히 벽돌 찍는 법을 알았던 저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제단을 지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제단이 다 지어진 후에는 전도사님과 집사님들을 따라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를 드리고 나면 아프던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등 은혜를 체험하며 전도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셔도 은혜로 함께 해 주신다는 것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전도도 그 무엇도 가능케 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62년에는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소사신앙촌 건설대원들이 먼저 덕소로 가고, 이후에 저도 덕소에 입주했습니다. 처음에는 양재 공장과 식당에서 일을 도우며 지냈는데, 키가 작았던 탓에 힘든 일보다는 조금 더 쉬워 보이는 곳에 가서 일 해 볼 것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러나 쉽고 편한 일보다는 제강공장에 가서 일해보고 싶다고 지원해 제강 벽돌 찍는 연하공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연하공장은 용광로를 만드는 데 사용될 벽돌을 찍어내는 공장으로, 뜨거운 가마에 들어가 빨간 벽돌을 꺼내와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힘든 줄 모르고 아무 탈 없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1972년 기장신앙촌으로 내려 왔을 때는 지금의 1동 건물 하나만 지어져 있었고 주위에 건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봉제 수출공장에서 근무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며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1동 건물 아래쪽에 있던 직조공장, 섬유공장, 화장품공장 등을 둘러보러 다니셨는데, 그때마다 교인들을 부르셔서 축복도 해 주셨습니다. 그때 평소 은혜를 간직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시간이 많으면 하나님 손이 머리에 닿을 때 솜뭉치처럼 느껴지지만, 자유율법을 어기고 살았을 때는 ‘탁’ 소리가 나면서 죄에 대해 실제로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새벽예배를 마치면 하나님께서 어느새 오셨는지 교인들 숙소 앞에 오셔서 항상 축복해 주셨고, 생명물도 축복해 주시면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촌에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생활하던 저는 모직공장, 수예공장에서 근무하다가 2001년 은퇴하고 지금은 신앙촌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신앙촌에 들어오던 첫날, 귀에 은은히 들리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복 된 땅 신앙촌에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사는 날까지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 찬송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죽음이 없는 세계를 소망하던 저에게 병을 낫게 하시는 권능을 직접 보여주시고, 은혜로 함께 해 주시면 무엇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하나님. 하나님을 만나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 은혜는 세상의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이라도 더 죄에서 떠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그 뜻을 따라 죄 안 짓는 맑은 생활이 되기 위해 끝까지 힘쓰고 애쓰는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천 동산중학교 집회 모습
https://theweekly.co.kr/?p=75677
#김금화 #신앙체험기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잘 봤습니다~
인상이 좋으세요
잘보고가요
신기해요~ 잘보고 갑니다
은혜체험이야기는 늘 은혜로워용 ㅎㅎ
잘 봤습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