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는 34왕과 475년간[서기918~1392년]으로 끝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설하여 즉위한지 7년만인 무인[戊寅. 서기 1398년]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壬子亂]이
일어났다.
제1차 왕자의난이란. 즉 태조는 제1왕후인 신의왕후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방우[傍羽].
방과[芳果=定宗]. 방의[芳毅]. 방간[芳幹].방원[芳園=太宗]. 방연[芳衍]등 6형제가 있었고.
제2왕후인 신덕왕후 강씨[姜氏]의 소생으로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의 형제와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있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세자 책립에 문제가 일어났다.
이때 배극렴[裵克廉]등은 [평시라면 적자[嫡子]를 세울것이나 비상시이므로
개국에 공이있는 제5남 방원을 세움이 옳다] 그러나 이때 왕비 한씨는 이미 별세하여 없고
태조는 계비[繼妃] 강씨의 의향을 중히 여겨 제7남인 방번을 세우려 하니 배극렴 등은
그 사람됨이 적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여 [반드시 강비 소생을 세울것 이라면
제8남인 방석이 좋다]고 하여 이를 세자로 삼게 되었다. 이 처사는 마침네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평을 사게 되었고 특히 제5남인 방원은 부왕의 창업을 도와서
공로가 클뿐 아니라 야심 또한 큰지라 심중에 불평이 대단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태조 7월에 방원은 세자 방석[제8남]과 같은 어머니 소생인
방번[제7남]을 죽이니 그 소생에 오직 살아남은 사람은 딸로 태여난 경순공주 뿐이였다.
공주는 이보다 앞서 흥안군 이제[李濟]와 결혼하여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남기는 하였으나
험난한 세파에 몸둘곳을 몰라 부왕의 분부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태조 이성계도 방원[太宗] 에대한 증원(憎怨)의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상심[傷心]을 달랠길 없어 서울을 떠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2왕후 강씨
소생으로 오직 살아남아 있는 일점혈육인 경순공주를 불러 직접 눈물을 흘리면서
공주의 머리를 깍아 스님이 되게하고 동대문 밖에 청룡사에 있기를 명하였다.
경순공주는 부왕의 명령대로 동대문 밖의 청룡사를 찿았다.
이때 청룡사 에는 고려말기 임금인 공민왕의 왕비 혜비[惠妃]가 나라가 망하게 되자
이곳에 와서 스님이 되여 정진하고 있었다.
공주는 청룡사에 당도하여 자신의 전후 사정을 자세히 말하니 혜비는 공주를 반갑게
맞으며 하는말이 [비구니나 나나 같은 처지구려 왕씨의 나라를 너무도 참혹하게 없애더니
이제는 또 이렇게 형제끼리 싸우는구려. 나무이미 타불] 하고 측은해 하였다.
공주는 이말을 듣고 답하여 말하길. [혜비마마 부왕의 잘못하신 과보가 이몸에 왔나
보오이다 부왕의 어륜[業輪]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달게 받겠나이다.] 하고 일어나 합장하였다.
그 말을 듣고 혜비의 대답이 [고마운 말씀이오 나는 아버님의 지나친 고집으로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오 이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을 한탄하겠오 모두가 스스로 우리 전생에
지은 업원이오 이제부터는 서로가 도와주고 서로 힘이되여 살아갑시다] 하고 공주를
위로 하였다. 이렇게 서로의 과보를 뒤돌아 보며 지
난날을 뒤돌아 보면서 반성하고 참회하는 대화로 시작하여 일념으로 수도하는 첫발을
내어 딛게 되었다.
한편 태조는 제1차 왕자의난으로 극심한 상심끝에 서울을 떠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마저 속세와 인연을 끊게 하였으니 그 가슴아픈 일이란 이루 말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종[定宗]2년 [서기 8400년] 1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또 한번 형제가
싸우고 살육을 거듭하였다.
제4남 방간[芳幹]과 제5남 방원[芳園=太宗]의 싸움으로 마침네 방간이 사로잡혀 귀향갔다가
죽었으므로 태조는 동복형제[同腹兄弟]간의 싸운에 더욱 분통을 느끼고 태종 원년 3월에
서울인 개경을 떠나[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서울을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음]
한양에 들려 청룡사로 가서 공주를 만나보고 그 길로 금강산을 거처 동북방면으로 향하여
안변에서 머무르다가 다시 양주 소요산[逍遙山]에 별전[別殿]을 두고 소요하다가 미침네
함흥으로 가서 두문불출 하였다. 이로부터 저 유명한 함흥차사[咸興差使] 비참한 전설을
낳게하고 공주와의 상면도 멀어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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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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