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으로 가는 길은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카이쿠바드의 부대를 이끌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에 소개한적이 있던 마르탱 블루아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도고 별다른 예의없이 말없이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나는 별다른 말을 못하고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점차 우리 진지가 멀어지자 여기저기 배치되었던 샐러맨더 군단의 분대들이 철수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뒷편에 백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내몰듯이 쫓아오는 마르탱의 부대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사막과 광야의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는 쓸모없어질 새로운 노래의 작상이나, 내 타이틀곡의 어레인지 버전부터 시작해서, 내가 걸어온 길에 만난 인연들과 사람들의 추억들, 그리고 어린시절의 기억까지도 떠올랐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걷는 길이 다소 힘든 길이었기 때문일것이다.
뜨거운 열사를 피해 밤길을 걸었던 이전 행군과는 달리, 그들은 나에게 말을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멀리서 거리를 두고 느긋하게 나를 한쪽 방향으로 몰아갔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나의 보폭에 맞춰서 말을 몰아갔다. 간간히 주어지는 휴식이나 수면은 금방 끝나기 일수였다. 그래서 나는 사막의 열사와 절망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늘 지속되는 갈증과 지친 몸에 힘겨워 하며 고통을 덜기 위해 여러가지 생각을 해야 했다.
덕분에 뭔가 성과랄만한것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모호함으로 남아 있던 한 기억의 실마리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곱살 정도 무렵의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나신 옥스포드의 기억이었다. 내가 괴물같다고 생각하고 어두운 숲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아마도 문둥병 환자들인듯 했다. 그들의 문드러진 피부가 어린 내 눈에는 그들이 마치 숲속의 괴물들 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도 이해할수 있게 되었다. 항상 숲속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셨었다. 하지만 그날밤 나는 그 주의를 어기고 호기심에 못이겨 하프만 들고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문둥병 환자들을 만났다. 그러니, 아버지가 화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치료할 방법이 없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가서 그것을 옮겨 오기라도 했으면 그건 보통 큰일이 아닐 것이다.
행여나 아직 어렸던 동생들에게 옮기기라도 했다가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의 그런 부주의한 행동에 아버지가 분노하셔서 주님에게 무릎을 꿇고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탄식한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리고 어머니도 나를 대단히 한심하게 여기실만도 했다. 왠지 나의 흑역사지만 그런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아버지가 나를 다른 형제들과 달리 탐탁치 않아 여기신 입장을 이제야 이해할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은 개운했다.
그렇게 3일간의 밤낮이 지나고… 어느새 다시 동이 틀무렵 나는 한참동안의 걸음으로 다다른 목적지를 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멀리서, 분지 지형에 주둔지를 만들고 대기하고 있는 카이쿠바드의 군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서 나에게 다가오는 일대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 기병들은 곧 거리가 가까워지자 걸음을 멈추고 내 뒤에서 이제 가까이 다가온 나를 호송해온 기병들을 보며 반갑게 인사하며 물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군. 수고가 많았네."
유감스럽게도, 나중나온 상대는 카이쿠바드의 부하들 중에서 나를 제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조지 노르망디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당황해하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나를 내려다 보더니, 예상치도 못하게 발길질을 날렸다.
'퍼억!'
"크윽, 쿨럭쿨럭…"
"엄살부리지 마! 이 개자식아. 아직 시작도 안했어.'
그렇게 말한 그는 쓰러진 나를 말을 몰아 걷어차며 숨도 못쉬게 몰아붙였다. 그것을 보다 못했는지 마르탱이 그에게 말했다.
"적당히 하라고. 주군께서는 그자를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셨어."
"괜찮아. 이 정도는… 마녀의 자식들은 튼튼해서 이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고. 살려서만 데려다 주면 되는거 아니냐? 그 정도야 우습지. 일어나 이 자식아!"
그는 부하들을 시켜 말에서 내려 거칠게 나를 일으켰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그리고 입가에 피가 잔뜩 고였다. 나는 정신이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에서 내려 내 머리를 쥐고 나를 노려보는 조지를 보았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침을 뱉었다.
"아주 미치도록 반갑다. 네놈은 내가 전담해 주마. 노르망디 가문의 모든 원한을 담아 네놈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해주겠다. 각오해 두는게 좋을꺼야."
"이봐, 그 정도로 해둬. 일단 주군에게 보여드리고 튀겨먹든 구워먹든 하라고. 그리고… 슬슬 모래 폭풍이 몰려오려 하고 있다. 여기서 흙투성이가 되는건 사양하고 싶군."
"쳇, 알았다. 서둘러라. 주군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는 나를 모욕하는 것을 멈추고 먼저 데려온 부하들과 함께 앞장서서 거대한 진지를 향해 갔다. 그리고 나를 데려온 마르탱은 말에 오르며 나에게 앞장서서 가라는 듯 몰아붙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응? 저… 저기 누군가가 달려온다."
한 병사가 우리 뒷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일순간 병사들은 경계와 긴장의 태세로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멀리서 흙먼지를 요란하게 날리며 우리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몇마리의 말과 한명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조금 긴장을 늦추며 그래도 경계를 하며 태세를 갖추었다.
나도 멀리서 이곳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오는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어느새 모래폭풍이 다가오는지 흙먼지가 날려 자세히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거리가 어느정도 가까워 졌을 때, 나는 달려오는 사람이 다름아닌, 여자… 그것도 내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놀랄수 밖에 없었다.
"에스더?"
그리고 일순간, 내 머리속에서 퍼득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작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해준 흐릿한 말…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언젠가와 너무나 유사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곧 그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마르탱은 병사들에게 출격을 명했고,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어이, 저거 계집이다. 반반해 보이는데 잡는 놈이 먼저다."
어느 병사가 소리치자 다른 병사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녀를 포위하듯이 감싸며 둘러싸려하였다. 나는 그녀가 위기라는 생각보다 먼저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전부 다 썼다고 말했는데…"
그리고 나의 기대를 무너뜨리며… 이제는 근접해서 샐러맨더 군단의 기병대의 창과 칼을 곡예처럼 피하며 그대로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 그녀가, 영원히 잊지 못할 단어를 외쳤다.
"키리에!!!"
그리고 나는 동시에 그녀가 작별하며 나에게 전한 마지막 말… 대체 왜 상황에 맞지 않게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말을 떠올리며 주변에 소리쳤다.
"다들 엎드려요!!!"
나는 내 주변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도 가능하면 가능하면 허무하게 개죽음하길 바라지 않아서 일부러 크게 소리쳤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걸 할수 있는건 유일하게 말을 타고 있지 않은 나 밖에 없었다. 내가 몸을 땅바닥에 바짝 엎드리자, 그녀가 다시 채찍을 거칠에 원을 그리듯이 내질르며 크게 소리쳤다.
"일레이손!!!!!"
'콰과과과광!!!!'
그리고… 예전과 다름없이 주변에 어마어마한 불꽃의 기둥이 바람을 타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갔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그 불꽃에 범위에 있는 병사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타고 있던 말과 함께 온 몸이 숯덩이가 되서 불타오르며 나자빠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불꽃을 피해 나에게 달려와 거칠게 내 손을 잡아 끌어 말에 태웠다. 그리고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말의 박차를 걷어차 지금까지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동이 틀무렵에 그곳에서 황당하게 도망친 다음, 한참 동안을 그녀는 아무말없이 그저 말을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럴수 밖에 없었다. 이미 불기둥을 보고 저너머에 카이쿠바드의 진지에서는 엄청난 소란과 함께 곧 일사분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마도, 시야에는 안들어오고 있지만 어마어마한 추격이 따라붙고 있을 듯 하였다.
그래서 한참 동안을 달리고 어느새 반나절 정도 쉴새 없이 달릴 무렵에 겨우 정신이 조금 수습되었을 상황에서… 나는 그녀가 저지른 이 어처구니 없는 만행에 대해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짜고짜 샐러맨더 군단에 저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그건 그야말로 대놓고 한판 뜨자고 선전포고하는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거기다 그리스의 불이라니, 저번에 분명히 그거 다 썼다고 그래 놓구선 이건 대체 뭐예요?"
나의 외침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자살용."
"네?"
"자살용이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임무 실패시에 비밀 무기의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즉사하기 위해 남겨놓은 거라고. 그걸 사용한거야! 이제 만족하겠어?"
아, 오랜만이다. 화가 나면 나한테 반말로 하는 그녀의 말버릇… 오랜만에 들어보니 그리 싫진 않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따질건 따져야겠다.
"자… 자살용을? 나참, 마지스트리아노스들은 항상 이렇게 세상에서 유래가 없이 화려하게 자살하는 습관이 있나요? 그리고 자살용이라니… 왜 그걸 써가면서까지 이런 짓을?"
나의 질문에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의 박차를 가하며 소리쳤다.
"나는, 죽지 않을꺼야. 반드시 살아 남을꺼야. 죤, 너와 같이 살아서 돌아갈꺼야. 처음으로… 살아서 보고 싶은 것이 생겼어. 그러니, 난 절대 죽지 않을꺼야. 살아서!!! 반드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말겠어."
나는 그녀가 갑작스럽게 생에 집착에 대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나 안좋았다. 저멀리서 하늘로 치솟으며 나를 체포해온 부대를 불살라버린 불기둥을 목격하고, 완전히 열받았는지 저멀리서 어마어마한 말발굽 소리와 진동이 시야의 밖에 있는 우리에게 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문외한인 내가 판단해봐도… 아마, 3만대군 모두가 광분해서 달려오고 있는게 틀림없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소리쳤다.
"빌어먹을…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에서 삶의 의지를 가지게 된건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냥 혼자 살아 남을 것이지, 왜 나를 구하고 대뜸 놈들에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선전포고를 날리나요? 대책없는 걸로 이 정도면 거의 우리 엄마 수준이잖아요."
"그러면… 내가, 아니, 우리들이 널 그냥 그대로 보내고선 그대로 팔짱끼고 아무것도 안하고 손흔들어 배웅하고선, 각자 집에 얌전히 돌아갈 그런 고분고분하고 성실한 놈들로 보였냐?"
"하아… 당연히 그렇게 안봤죠. 분명 뭔가 사고를 쳐도 단단히 대형사고로 칠꺼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반쯤은 체념, 반쯤은 기대를 하고선 간겁니다. 그래도… 사고를 치려면 일단 발등의 불은 끄고 쳐야 할거 아닙니까? 내가 출발한지 3일밖에 지나지 않았고, 지금 그곳에는 아직도 난민들 백만명이 오도가도 못하고 제국의 구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일단은 그 난민들을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다음에 구하러 오든, 사고를 치던 해야 할꺼 아닙니까?"
나의 말에…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분명히… 왕은 백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했었지?"
"그래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왕을 위해서는 누가 희생해야 하지?"
그녀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뭔가 어처구니 없음을 느꼈지만…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고 조금은 생각을 하고 대답하기로 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말을 달리는 와중에 낙마하지 않기 위해 신경쓰며 애매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백성?"
그러나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았어. 왕이 백성을 위해서 희생하는 존재라면, 왕을 위해서 희생하는 건 백성이어야 맞겠지."
"그… 그런게 어딨어요? 백성을 희생시키는 왕이라니… 그건 그냥 의미없는 죽음을 강요하는 폭군에 불과하잖아요?"
"희생을 강요하면 그렇겠지. 하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희생하겠다고 나선다면? 자신들을 위해 먼저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왕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걸겠다고 일어선다면? 그래도 그 왕이 폭군인가? 그래도 그것이 의미없는 희생이라 말할것인가?"
나는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기분일 뿐입니다.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안전이 날아갈 상황에서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할수 없어요. 설령 일부 나와 친한 사람들은 조금 나를 위해 노력해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모든 백성들이 그런 말도 안되는 집단 의사를 표하는 것은 말도 안돼요."
나의 말에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닥쳐! 넌 아무것도 몰라, 죤. 백성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약하지도, 무기력하지도, 미미하지도 않아.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기 발로 세상을 걸어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자신의 왕을 선택하고 그를 일으켜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지를 가진 자들이야. 그리고, 자신의 왕을 지키기 위해 얼마든지 싸울 의지를 가지고 일어서는 존재들이고…"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진지에 가까운 곳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모래폭풍에 휘날리는 먼지가 당장 눈앞의 시야를 가려 멀리 내다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어느샌가 우리 진지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늦게 깨닭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계속 말했다.
"우리는, 네가 떠나고 그곳에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 물었어. 먼저 안전한곳으로 피신할 사람은 오론테스 강을 건너 안티오크로 가고, 너와 함께 갈 사람은 오론테스 강을 건너지 말고 이곳에 남아 달라고…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단 한 사람도 오론테스강을 건너지 않았어. 그곳에 남아 너를 기다리기로 결정했어."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리고 동시에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지금 그러면… 그 많은 백성들이 죄다 그 자리에 남아서 어디로도 가지 않고 머물러 있다고요? 미쳤어요? 최소한 안티오크 성벽안에라도 피신했어야 하잖아요. 맙소사… 지금 저 너머에서 말발굽 소리 안들려요. 틀림없이 3만명의 샐러맨더 군단이 분노해서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그 앞에 무방비 상태의 백만 군중이 남아 있다니… 맙소사. 이제 망했어."
나는 그녀의 무책임하기 그지 없는 경과 전달에 기가 막혀 절망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흙먼지뿐만 아니라, 뭔가 주변에 자욱하게 불이라도 났는지 연기까지 시야를 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절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무와 같은 공간을 질주하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들을 얏보지마.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위해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해내는 존재야. 네가 궁상맞게 난민들한테 청승이나 떨고, 광야를 3일동안 궁시렁거리며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그 천금 같은 열흘의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 냈어."
"만들다니… 대체 뭐를요? 좀 알아먹게 이야기 해봐요."
그리고 연무가 어느새 걷혀가고, 모래폭풍이 걷혀가며 어느새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가 달리는 곳의 위치도 확인히 파악되었다. 작은 언덕사이의 암벽사이의 길이다. 이 회랑 같은 길이 끝나면, 광활한 오론테스강에 평야가 눈에 들어올것이다. 그리고 에스더가 간단하게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우리들의 나라."
그녀의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네? 뭐라고요?"
"우리들의 나라, 저기를 봐. 저기가 바로…."
순간 암벽사이로 난 회랑이 끝나고 넓은 광야가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장관이었다. 정말로 백만여명의 백성들이 오론테스강이 언덕을 감아 굽이진 평야에 집결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만며명의 군중들이 한곳에 집결된 모습은… 그야말로 내 상상력을 넘어서는 엄청난 광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을 보았다. 분명, 낯익은 우리의 야영지가… 내 기억과는 다른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공사의 수준을 넘어서는… 지형의 변화가 있었다. 굽이쳐 오목하게 흐르는 오론테스 강을 배후에 두고 나즈막한 언덕을 중심으로 빽빽하게 밀집한 군중들의 앞에, 멀리서도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대지의 상처가 있었다.
거대한 해자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얼마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거대한 해자가 강을 등진 난민들의 앞에 지평선 이쪽끝에서 저쪽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일정 간격을 두고 3개의 해자가 빈틈없이 난민들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에스더가 나머지 말을 이었다.
"저기가 바로… 데네브, 우리들의 나라야. 어서와, 우리들의 왕이여."
"데네브 원! 시야에 들어왔다. 데네브 식스가 무사히 에스코트해서 이동 중."
"우측 13번째 건널다리로 유도하라. 반복한다. 우측 13번째 건널 다리로 유도하라. 데네브 원의 진입 이후 13번 다리를 접어라."
"접근 후 정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라. 2번 해자와 2번 해자의 연결 통로를 개방하여 언덕위로 올라가도록 유도하라. 데네브 원을 옵저버와 컨택시키고, 데네브 식스는 이탈하라."
에라드는 곁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듣고 별도의 지시 없이도 즉각적으로 현지 상황에 맞게 이동을 유도하는 살라딘을 보았다. 빈틈없는 지시는 별도의 지적이 필요없었다. 그는 자잘한 일은 그녀에게 맡겨두고 가만히 주변을 응시하였다. 자신의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수십개의 체스판, 그리고 그 체스판의 앞에 앉아 있는 마찬가지로 수십명의 전쟁의 상황을 기록 및 보고할 업무를 맡은 맹인 오퍼레이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얼마전의 일을 회상했다.
죤이 자기 발로 떠나기를 결정한 다음, 남은 그들의 각료들은 그가 없는 막사에 남아 회의를 벌였다. 대부분의 의견은… 죤에 대한 비난이었다.
"항상, 그런 식이죠. 우리 생각은 조금도 안하고 자기 멋대로 뛰쳐나가 버리죠. 왜 폐출되었는지 짐작하고도 남겠죠?"
멜리장드의 말을 받은 것은 아그네였다.
"돌멩이 대신이라고는 했지만… 돌멩이 이하일줄은 몰랐네요. 이 정도일줄이야…"
아그네의 의견에 에스더도 동의했다.
"저 혼자만 죽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다니, 멍청한 자식… 자신의 경솔한 치기가 앞으로 아나톨리아의 마룡이 우리 비잔틴의 피를 흘리게 할지 짐작도 못하고…"
케두스도 넌더리 난다는 표정이었다.
"제국에서도 난리가 나겠군요. 살얼음 같은 제국의 4개 기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눈에 선하군요."
안젤모는 빈정거렸다.
"그 변태들, 럼의 하렘에서 즙빼는 짓거리 하며 즐거운 시간을 들으면 앞다퉈서 열받아서 그 자식 후장이라도 따겠다고 바지 벗고 덤빌지도 몰라."
아이샤도 이번에는 화가 난듯하였다.
"이제는 저도 더는 못참겠어요. 제가 무슨 고생을 하며 혼자서 난민들을 지켰는데, 홀랑 자기 혼자 사라져 버리다니… 애초에 이럴꺼 뭐하러 여기 온거죠? 다 의미없는 일이네요."
남은 살라딘, 크리스틴, 라와드도 딱히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결론은 죤은 상종못할 개자식이라는 이야기를 그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논하고 있었다. 얘기가 길어지는 듯 하자, 에라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들고 발언했다.
"너무… 지지부진한 이야기네. 정리를 좀 하자. 결론만 말하자면…"
사람들의 시선이 에라드에게 모여졌다. 에라드는 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결국, 그 놈은 개자식이지만, 그래도 우리 개자식이니깐… 이대로 보낼수는 없다. 그러니깐… 카이쿠바드를 공격한다! 맞나?"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야말로 미친 소리라고 언급될 말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와 동의의 끄덕임이 있었다. 에라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머리로는 미친짓이라고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깽판치자고 하는 나의 동료들이여… 뭐,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그 녀석의 신하로서 바람직한 모습들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아낄 시간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겠지? 내가 보아하니 다들 아직 까지 않고 아껴둔 패들이 한두개씩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정말로 남은 방법이 없어. 그러니깐, 다들… 남은 패들 있으면 지금 오픈해."
그의 말에 멜리장드를 시작으로 각자 자신들이 숨겨놓은 비장의 수들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장의 수가 카드처럼 쌓이자 에라드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위기가 그렇게 많았는데 잘도 안까고 여기까지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패를 깐 동료들은 어처구니 없어 하는 에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에라드는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그들이 깐 패는 확실히 비장의 수가 될 요인들이긴 했지만, 상대는 그야말로 지상 최강의 명장이라 불리는 카이쿠바드다. 모여진 수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를 상대할 확고한 승리의 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하틴에서 배치만 보고도 승패를 알아맞추고, 클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프라이팬 연대를 하늘에 날려 강습한 그의 지휘, 체스 택틱스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에라드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부담스러운 요청이다. 우연히 운이 좋아 얻어 걸린 기적 같은 일들을 그들의 동료들은 통상적으로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것일까? 그는 스스로의 실력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의 동료들 중에서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는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그는 분노의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겁먹은 그녀의 모습, 그것은 지금까지 오로지 자신만 볼수 있는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두려워 하지 않고 당당한 그녀를 두렵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두려움에 찬 왠지 가학하고 싶은 모습도 자신이 독점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몹시 불쾌했다. 에라드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없겠지. 죤이 떠나기 전까지 일주일, 그리고 출발하고 나서 그곳에 다다르는 시간 3일, 우리에게는 오로지 열흘의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야. 일단, 각 데네브의 멤버들은 지금 오픈한 패들을 사용하기 위해 각지로 흩어져서 그들을 데려와. 그동안, 나는 이곳에서 우리가 가진 전력을 토대로 그들과의 싸움을 준비하겠어. 살라딘, 혹시 아버지와 헥터 바넬경이 카이쿠바드에게 패배했다는 미리오케팔른 전투의 기보를 체스로 그려줄 수 있겠어요?"
그의 질문에 살라딘은 자신에 차서 말했다.
"얼마든지요. 근래에 있었던 전투 중에 가장 흥미로운 전투여서 얼마나 많이 배치도와 포진도를 연구했는걸요. 눈을 감고서도 그려낼수 있어요."
"좋아요. 그러면, 나에게 보여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움직여 주시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데네브의 동료들이여, 서둘러 움직입시다. 죤을 위해서."
그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소리쳤다.
"죤을 위해서! 해산!!!"
그리고 사람들이 떠나가자 곧바로 살라딘은 그에게 미리오케팔른의 기보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좀더 카이쿠바드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위해 하나의 체스판이 아닌 여러 개의 체스판과 말로 기보를 그려 되도록 상세하게 그 전투의 전개를 설명하였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비잔틴의 마누엘 1세가 그곳에서 패배한 이후 불길하다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만, 당대 자웅을 가리기 힘들고 서로의 인격도 상대를 존중하는 성품을 가진 분들이셔서 만회하리라 여겼던 두번째 전투의 승리를 이번에도 럼에게 넘겨준 사건이었죠. 솔직히 소식을 전해들었을때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신 아버님께서 졌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을 정도였었죠."
에라드는 왠지 자신의 부친을 살라딘이 좀 이상하게 부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전쟁의 기보를 집중하느라 별말을 하지 않은채 그대로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각각의 말이 가리키는 포진과 이동 방향을 보면서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참동안 배치를 바라보던 그가 살라딘에게 물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이렇게 배치했나요? 그리고 카이쿠바드는 이렇게 대응했고요?"
"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 소식들을 통해 종합한 가장 근접한 전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자 에라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과연, 이래서야 아버지가 이길수가 없었던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그의 말에 살라딘이 놀라 물었다.
"카이쿠바드가 이길수 밖에 없는 배치라고요? 정말인가요?"
그녀의 놀라는 모습에 에라드는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앙주공방전과 퀸스가드의 명성이 너무 대단해서 세간에 일반적으로 정예 기병대를 몰아 화려하게 공격하는 기동전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상황은 피치 못할 상황이어서 그런 전투를 한 것 뿐입니다. 아버지는 의외로 전략적 범위의 보급과 포위를 통해 적의 전의를 잃게 만드는 전투가 아닌 전쟁 자체에 대한 식견이 훌룡한 분입니다.
그리고, 최고 사령관임에도 실제 최전선에 나가서 현장을 목격하고 지휘를 능동적으로 하시며 가장 취약한 부분에 투입되어 전세를 만회하려는 행동을 통해 전의를 고양시키고 결정적인 패배를 감소시키는 것을 선호하시는 스타일입니다. 카이쿠바드는 지금의 기보를 보면 정반대의 스타일이군요. 그는 가장 잘 훈련된 정예병력을 집중시켜 그것을 통해 좁은 전장에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해 그것을 곧 전략적 우위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타입이죠.
서로 완전히 정반대의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아버지의 방식은 카이쿠바드의 방식에 비해 상성이 좋질 않습니다. 필패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 전투에서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성관계죠. 체스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전쟁이 15개의 체스판으로 나뉘어진 각각의 전투들의 집합이라면… 아버지는 자신이 담당한 체스판에서 모든 체스피스를 폰으로 바꾸고 퀸, 록, 비숏, 나이트를 폰을 빌려온 다른 체스판에 빌려줘서 체스를 하는 타입이죠.
폰만 가지고 두는 체스이니 상당히 불리하지만 어떻게든 완패를 막는 것만으로도, 다른 14개의 체스판에 폰대신 빌려준 퀸이나 나이트 등의 상위직 체스피스가 그 체스판의 승률을 올려 모든 체스판이 전반적으로 우세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스타일이죠. 카이쿠바드는 반대로, 자신이 담당한 체스판에 모든 체스피스를 퀸으로 채우고 게임을 하는 타입이죠. 킹 하나를 제외하고 15개의 퀸으로 채우고 전투에 임하니, 하나의 전투에서는 강력할 수밖에 없고, 아버지처럼 폰만 가지고 두는 기사에게 우위를 보일수 밖에 없는거죠.
이제야 아버지가 패배한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투의 패배일 뿐이군요. 결국, 아버지와 헥터 바넬이 다소 약한 병력으로 샐러맨더 군단을 붙잡아 두는 사이에 다른 체스판들에서는 우세한 전개를 보였군요. 흑해를 건너 트레비존드에 상륙한 해군들이 오랜 제국의 거점을 탈환하였더군요. 그리고 시노프의 고립된 성채도 포위가 풀렸구요. 양동으로서 나쁘지 않은 결과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살라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럴듯하기는 하군요. 퀸으로만 체스피스를 채우고 하는 체스라… 적절한 비유라 생각됩니다. 샐러맨더 군단 하나하나가 다 퀸으로 밖에 묘사하기 힘든 강력한 중기병대들이죠. 하지만, 그것이 두려운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수 없을 듯 합니다. 전투에 지고, 전쟁에 이겼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투의 승리를 전쟁의 패전을 막을 만큼 강력한 효과를 가져오니깐요.
물론,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그의 행보에 과한 언론 플레이가 있다는 의견도 지적하고 있어요. 실제로 굳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미리오케팔른을 전장으로 삼아, 5대 명장의 계보를 무너뜨린 것도 승리를 위한 포석이 아닌 대외적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 위한 술책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두렵지 않은건 절대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어필하고 그것으로 상대를 두렵게 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힘과 공포, 그 둘을 동시에 가진 그 자를 상대한다는 것은 그렇기에 쉽지 않은 일이 될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15개의 퀸으로 체스피스를 채우고 체스를 두는 상대하는 것 조차 두려운 체스 플레이어라는 말은 이 시점에서 가장 적정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그녀는 정말로 두려운지 떨리는 팔을 다른 손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에라드는 그런 그녀에게 의이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두렵죠?"
"두렵지 않으세요? 그 카이쿠바드가?"
"아뇨, 제가 물은건 카이쿠바드가 아니라, 체스피스입니다. 퀸 15개를 다루는 체스 플레이어가 두려우세요?"
"그럼 두렵지 않나요? 한 개로도 무시무시한 퀸을 15개로 킹외에 전부 채우고 대전을 벌여야 하는데요?"
그녀는 의아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에라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언젠가, 어렸을때… 처음 체스를 배우던 시절에 어머니에게 그런 제안을 한적이 있었죠. 15개의 말을 퀸으로 두고 어머니는 그냥 일반 세팅으로 두자고. 어머니는 흔쾌히 동의하셨고, 그날 저는 악몽에 가까운 참패를 맛보았습니다. 대국이 끝나고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세상에 한가지 체스피스만 가지고 두는 봉만큼 털기 쉬운게 어딨냐고요.
체스보드 위에서 의미없는 말은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각각의 말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그것을 잘 끌어내는 것이 훌룡한 체스 플레이어의 능력이죠. 단순히 강력하다고 해서 퀸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유감스럽지만 체스의 세계에서는 하수중에서 하수입니다. 그의 포진을 보니, 이제야 조금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군요."
그의 예상치 못한 자신감 넘치는 말에 살라딘은 눈이 휘둥그레 지며 그를 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던 절름발이 체스꾼이 아니었다. 그는 당대 최강의 명장을 하수라 논하며 조금 심심한 표정으로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 뭔가 묘사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존재로 서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이길… 자신이 있으신건가요?"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뭐, 유감스럽게도 체스 대국에서 함부로 승패를 미리 예상하는 건 아무리 고수라도 금기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몇가지 요인들이 갖추어진 상태로 기보를 펼치고 대국을 운영할수만 있다면, 우리의 운명이 그리 비극적이지만은 않을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냥 여기서 이렇게 두손을 들면 제 별명이 울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말하려다 못하신 당신의 별명… 그게 뭐였죠? 라두 체페쉬를 물리치고 얻은 별명이라면… 설마 뱀파이어 헌터인가요?"
그녀의 말에 에라드는 웃으며 반색했다.
"설마요… 라두경은 그런 오해를 많이 사기도 하지만, 절대 흡혈귀가 아닙니다. 그분의 일족은 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서 근무해 왔는데, 그 집안에서 특히 명성을 떨친곳이 드래곤 기사단이죠. 그래서 그곳에 봉직한 이력을 이름에 새겨 그들 일족은 용의 왈라키아 방언인 드라큘이나 드라큘의 아들이라는 듯으로 드라큘라라는 칭호를 많이 사용하죠.
서신 대국으로 그를 꺽은 이후 그는 저에게 드라큘을 쓰러뜨린 자로 자신을 칭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깨끗한 패배의 승복을 보여주었죠. 그래서 그를 꺽은 이후 사람들은 저를 드래곤베인 (Dragonbane : 용을 죽이는자) 에라드라고 불렀죠. 사실, 어린 소년에게 예의바른 서신 대국으로 대해준 그분을 꺽은 것을 명예로 삼고 싶지는 않아 드러내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명이 아나톨리아의 마룡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기에는 제 별명이 울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와의 대국을 두겠습니다. 건방지게 내 앞에서 블랙피스를 집은 (주 : 체스는 고수가 검은말을 사용하고 나중에 둠) 저자에게 보여주겠습니다. 여기 드래곤베인 에라드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를 상대하고, 사냥할 것임을 말입니다."
거기서 에라드의 회상은 끝났다. 그리고 다시 현실을 돌아보았다. 우선 눈앞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해자였다. 깊이가 3m 정도에 길이는 10km 정도로 오론테스강을 따라 비스듬한 반원모양으로 대지위에 새겨진 거대한 짐승의 발톱자국 같았다. 콘스탄티노플의 3중성벽 처럼 3개로 나뉘어져 파여진 해자를 보며 에라드는 조금 감동을 느꼈다.
전쟁을 결심한 상황에서 그가 첫번째로 준비해야 할 것은 바로 방어준비였다. 안티오크의 성벽도 막아내지 못한 적의 공세에 백만의 군중을 안전하게 보호할 방어막이 필요했다. 의외로 아이디어는 라와드에게서 나왔다.
"해자를 파도록 합시다. 메디나 전투에서 무함마드께서 아부 수피안의 병사들을 막아내었던 방식입니다. 3개의 깊은 해자를 파고 그 중간중간에 목책을 설치하면 적들의 돌격을 저지할 수단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제안이었지만 만만치 않은 난이도의 일이었다. 그 공사는 샐러맨더 군단의 의심을 사서는 안되었기에 죤이 출발하는 3일전까지 제대로 된 공사를 할 수가 없이 눈치만 볼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죤이 떠나가 마침내 주변의 잔류 부대가 모두 철수하자, 그들은 모두 죤의 희생에 슬퍼하는 군중들에게 가서 소리쳤다.
"그가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대로 죤을 보내지 않을겁니다. 백성들이여, 데네브의 백성들이여… 선택하십시오. 싸우길 원하지 않는 자는 이대로 오론테스강을 건너 안티오크를 지나 아르메니아로 이동하십시오.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죤을 기억하는 사람과,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그를 다시 만나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삽을 드십시오. 우리에게는 겨우 3일반의 시간밖에 없습니다. 그안에… 우리를 지킬 강력한 보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누가! 여기 그 누가 그를 위해 삽을 들겠습니까?"
그의 외침이 끝나자 수백만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우리가 할것이오! 우리가 그를 지킬 보루를 쌓고 해자를 팔것이오!"
그리고 엄청난 역사가 벌어졌다. 백만여명의 군중들은 저마다 정해진 구역에서 아이샤와 그녀의 프리메이슨 연대가 인솔하는 대로 미친듯이 땅을 파헤치고 흙으로 토담을 만들어 오론테스강에 거대한 방어막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워낙에 촉박하여 그 모양새는 조잡하고, 군데군데 부실해보이는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단 3일만에 백만의 군중들이 모여들어 만들어 낸 것은 거의 모세의 기적에 가까운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그럭저럭 시간을 맞출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해자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건너편에는 토담과 목책이 있고, 해자 바닥에는 뾰족하게 만든 나무 말뚝들이 곳곳에 박혀 있어서 깊이도 깊이지만 곱게 해자를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어져 있었다. 제일 외곽의 해자와 2해자와의 사이에는 적과 대치할 부대들을 배치하고, 2해자와 3해자의 사이에는 그 부대를 지원할 보조 병력과 지휘 본부가 배치되었으며, 대부분의 난민들은 3해자와 후방의 오론테스강 사이에 언덕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는 난민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얼마전까지 성지에서 살던 평범한 백성들이다. 일부 예전에 군경력을 잊지 않은 굴람 같은 이들이 섞여 있는건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그런 행운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적병과 상대할수 없는 민간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작전을 짜야 했다. 하지만, 에라드의 눈에는 그들 백만명이 짐이 아닌 수단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들의 그룹의 지도하에 일사분란하게 이곳까지 도달한 그들에게서 문득, 한가지 시험해보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그는 곁에서 여기저기서 오고 있는 보고들을 집계하여 상황판에 표시하고 있는 살라딘을 보고 말했다.
"통신 테스트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살라딘은 일어서서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파란 터번을 쓴 사람은 전원 오른팔을 들어!!!"
그것은 무슬림의 기도 소리인 아잔을 흉내낸 함성이었다. 크고 맑은 목소리로 주변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얼마 안가 흐려지기 마련이지만, 소리는 일정 간격을 두고 계속 이어졌다.
"파란 터번을 쓴 사람은 전원 오른팔을 들어!!!"
"파란 터번을 쓴 사람은 전원 오른팔을 들어!!!"
그리고 잠시후 수천명의 사람들이 오른팔을 들었다. 모두다 파란 터번을 쓴 사람들이었다. 살라딘이 웃으며 말했다.
"연습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요?"
그도 미소지었다. 그는 군중들에게서 공감이라는 것을 보았다. 힘겨운 도망길에서 서로의 소리에 의지해 움직이는 그들은 예상외로 넓은 범위에서도 정보를 순식간에 공유했고, 서로 전달하여 그들의 소리가 곳곳에 넓게 퍼져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생각했다. 만약에… 이것을 군단의 지휘에 활용할수만 있다면? 병력으로서는 무의미하지만 군령을 전달하는 통신체계로 사용한다면? 수백만명의 전령이 전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곳에서 그것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군대를 가지고 두는 체스처럼 실시간으로 체스플레이어의 의지를 정확하고 실시간으로 전쟁터의 병사들에게 전달할수 있다. 릴레이로 이어지는 명령 전달이 마지막에 이르러 수천명의 함성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을 못들을 귀머거리는 없으니깐. 그것은 이 거대한 광야가 하나의 체스판처럼 그의 손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조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백만의 군중들과 그들을 지킬 병사들이 자신의 손아귀에 놓여져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고양감을 느꼈다. 그는 가만히 지팡이를 고쳐쥐고 눈을 감았다. 늘 어려운 상대와 체스를 두기 전에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보드를 떠올렸다. 오론테스강을 배후에 둔 거대한 광야가 그의 심상에 펼쳐졌다. 그리고 체스의 배치를 떠올렸다. 그의 심상의 공간에서 일반적인 체스피스 16개가 아닌 수백만개의 체스피스가 생성되어 각 위치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멀리서 느껴졌다. 장기전으로 끌고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 피워놓은 연무와 폭풍이 걷히고 인접한 거리에서 샐러맨더 군단 3만 기병대가 당황한 모습으로 도착하는 것이 심상에 들어왔다. 그는 그들 역시 상대편 체스피스로 배치를 시작하였다. 그의 심상에는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수 조차 없는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개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이미 최우선으로 확보해야 할 데네브 원, 죤도 두번째 해자에 백성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이 각지에서 데려온 숨겨둔 카드들이 배치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적도 조금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곧 태세를 갖추고 결전을 하려는 듯 서서히 전진을 시작하였다. 그는 눈을 떴다.
첫댓글 1등!
쿠 내일이 기다려집니다
여황님을 쏙빼닮으신 존 왕자님 참사회도 여황님 참사회를 닮아버렸네요.
에라드가 플레이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