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2장에서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전개하고 있다.
논의의 단초는 '반복(repetition)'에 있다.
이 대목은 들뢰즈의 "시간론"과 "주체론"을 동시에 보여준다.
즉 시간에서의 차이와 반복을 논함으로써 주체론을 전개한다.
반복(repetition)은 요소의 반복과 경우의 반복으로 나뉘어 논의된다.
요소의 반복: A, A, A, ...식의 반복.
경우의 반복: AB, AB, AB, ... 식의 반복.
(전자는 베르그송에 의해, 후자는 흄에 의해 논의된 바 있음)
물질적인 반복은 그저 사라지는 반복이다. 하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 다음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라이프니츠의 말처럼 물질이란 "순간적 정신(mens momentanea)"이다.
반복이 사라지기보다 수축(contraction)을 통해 이어지려면,
어떤 형태로든 "정신적인" 작용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신은 반복을 응시함으로써(contemplate) 그것을 "종합"한다.
("응시"는 플로티노스의 용어이다. 사르트르의 "regarder"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대자적(pour-soi) 의식은 반복하는 것들을 응시해 수축함으로써 "주체"로 화한다.
(이 점에서 이 논의는 "시간과 종합"이라는 칸트적 주제를 잇고 있다)
들뢰즈에게 주체성(subjectivite)은 시간의 종합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다.
주체성은 (그것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저 무미건조한 것에 불과할) 반복들에
어떤 차이들을 개입시켜 시간의 종합을 꾀한다.
(흄이 논했던 "이미지작용=imagination"은 그 한 예를 제공한다)
시간의 종합이 없다면 현재는 흐르지 않는다. 그저 단속적인 계기(succession)만이
가능하다.
시간의 종합(synthese du temps)을 통해서, 수축을 통해서 "살아 있는 현재(le present vivant)"가 가능하다.
들뢰즈는 구성적인 주체의 작동 이전에, "반성(reflexion)" 이전에 이루어지는
시간의 종합을 수동적 종합(le synthese passive)이라고 부른다.
이 수동적 종합은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비대칭적이다.
(수동적 종합은 후설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2. 살아 있는 현재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전체 주제 하에 시간론을 매개해서 주체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살아 있는 현재(le present vivant)"란 어떤 것인가?
종합의 수동적 층위와 능동적 층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수동적 층위에서 과거는 (후설/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retention"이고
미래는 "protention"이다.
능동적 층위에서는 반성된 과거나 예견된 미래가 된다.
(흄에서는 기억과 오성의 능동적 종합이 "imagination"의 수동적
종합에 중첩되고 또 그것에 의존한다)
결국 반복의 구성에는 세 가지 층위가 함축되어 있다.
1) 즉자적 층위. 물질적 반복. 나타났다가 그저 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반복을
확인할 수 없다.
2) 수동적인 대자적 층위. 여기에서 수동적 종합이 이루어진다. "대자"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능동성의 뉘앙스가 유보되고 수동적 차원을 가리키고 있음에 유의.
3) 반성적 표상의 층위. 구성적인/능동적인 오성의 층위.
능동적 주체 아래에서 수동적 주체를 찾아낸 것은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등에
공통된 사항이다. 프로이트는 다른 방향에서 이런 수동성을 찾아내었다.
("무의식"을 다루는 베르그송적 전통과 프로이트적 전통)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연장선 상에서 무의식을 다르고 있다.
주체를 여러 층위가 중첩되어 성립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
3. 주체 형성의 층위들
시간의 종합은 이미 유기체(organism)의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들뢰즈는 (엠페도클레스 식으로) "우리는 수축된 물, 흙, 빛, 공기"라고 말한다.
현대 식으로 말해 인간의 신체는 "CHNOPS계"로 구성된 존재이다.
종합(화학적으로 말해 합성)은 유기체 단계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이 단계에서는 "기대(attente)" 이전에 "욕구(besoin)"가,
"회상(souvenir)" 대신에 "유전(heredite)"이 작동한다.
(들뢰즈는 "retention"을 말하고 있으나 회상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1) 유기체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원초적 종합
2) 무의식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수동적 종합
3) 의식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능동적 종합을 구분해야 한다.
이 세 수준에서의 종합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주체성"이 성립한다.
앞에서 즉자, 대자, 능동성의 수준을 나눈 것을 다시 참조한다면,
결국 1) 종합이 없는 물질적 반복의 차원, 2) 유기적 종합의 차원, 3) 수동적,
무의식적 종합의 차원, 4) 능동적, 의식적 종합의 차원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 역시 화학적 합성을 함축한다. 종합이 없는 물질이란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이미지들의 "flux"라는 극한의 차원일 것이다)
이러한 종합이 반복을 가능케 한다. 반복에 있어
그 현재의 형식은 "습관(habitude)"으로서 나타난다.
현재로서의 시간의 일정한 수축 형식은 곧 습관으로서의 반복이다.
들뢰즈는 이런 수축이 그 어떤 형태로든 단순한 물질성 이상의 원리를
요청한다면, 유기적인 단계에서조차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영혼"은 헬라스적 의미 즉 "생명"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기체 단계에서 우리는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세한 영혼들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들에 의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동적 종합을 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쾌락(le plaisir)"의 개념을 언급한다.
들뢰즈는 수측/응시 자체가 일종의 만족을 함축한다고 본다.
수축은 그 안에 다시 작은 수축들과 이완들을 포함한다.
A와 B가 이완할 수 있지만, 더 넓은 수축이 그것들을 다시 수축한다.
즉 수축은 단순히 일회적인 수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한히 중층적인 수축을 뜻한다.
수영은 수축과 이완의 리듬들로 구성되지만, 한 차례의 수영 전체는
하나의 수축인 것이다.
들뢰즈의 이런 쾌락 개념은 프로이트의 그것과 대조적이다. 프로이트에게
쾌락이란 불쾌한 긴강을 해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쾌락이란 수축(무한히 주름 잡힌 수축들)과 그것의
리듬으로부터 온다. 프로이트에게 쾌락이란 흥분량의 감소이다.
이런 차이는 4절에서 전개되는 프로이트론을 이해하기 위해
복선으로 깔아놓아야 한다.
4. 시간의 첫 번째 종합: 습관
"여러 행위들을 훨씬 복잡한 하나의 행위 안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처음의 행위들이
다시 어떤 '경우' 안에서 반복 요소들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역할은 언제나 합성된 행위 주체의 기저에 놓인 어떤 응시하는
영혼과 관련해서 주어진다.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다. 행위와 능동적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이다."
이 작은 자아들을 들뢰즈는 "애벌레-자아들"이라고 부른다.
이 애벌레-자아들의 존재가 풍요로운 반복의 근거이다.
빈약한 반복은 단지 즉자 상태에서 계속 와해되는 반복일 뿐이다.
대자적 반복은 종합을 통해 수축이 일어나는 반복이고,
그 과정에서 늘 차이가 창출되는 반복이다.
이 반복은 물질적 반복과 대비되는 정신적 반복이다.
이 정신적 반복은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내적 차이(difference interne)"를
낳는다. 이 내적 차이는 반복을 통해서 생성한다. 그래서
"반복은 차이의 분화소(le differenciant)"이다.
수축은 영혼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에 기계적이지 않다.
그것은 생명체의 질서에 따른다.
애벌레-자아들의 응시/수축이 있는 만큼 그것의 와해도 존재한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피곤"이라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결여와 만족 사이를, 충만한 힘과 피곤 사이를 오간다.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결론적으로 습관(habitude)이다.
시간의 매순간 현재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종합을 행한다.
달리 말해 현재의 매순간 우리는 수동적으로 시간을 종합한다.
이 현재의 종합은 결국 무엇일까? 그것은 곧 습관이다.
만일 습관이라는 종합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매순간 계속 능동적인
종합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삶일 것이다.
능동적 종합 이전에 수동적 종합이, 즉 습관이라는 종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어느 정도 "습관적으로" 살 수 있으며,
그 바탕 위에서 비로소 습관적이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해
주는 습관이라는 고마운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시간의 첫 번째 종합, 곧 현재의 수동적 종합이다.
시간의 세 가지 종합 II
1. 근거(fondement)로서의 과거/기억
시간은 현재에서 시작된다. 시간의 체험은 일차적으로는 현재의 체험이다.
그래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시원"을 형성하는 종합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종합만으로서는 시간이 전체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현재는 한 순간도 멈춤 없는 절대적인 흐름이며, 역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기도 하다. 현재의 외연(外延)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현재는 시간의 시원이지만 지나가버리는 역설적인 시원이다.
(지나가버리는 것들의 기준이 되는 시원 자체가 지나가버리기에)
현재가 "지나간다(passer)"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현재는 현재인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럴 때에만 현재는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는 그것이 그 위에서 흘러갈 수 있는 어떤 지평을 필요로 한다.
현재는 시간의 시원이다. 달리 말해 "정초(定礎)"이다. 그러나
정초와는 또 다른 지평, 현재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지평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초(fondation)와 구분되는 "근거(fondement)"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근거는 무엇일까? 현재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과거이다. 현재는 매순간 과거가 됨으로써만 "흐를" 수 있고,
따라서 과거는 현재의 현재-됨의 선험적 지평인 것이다.
1절에서 현재의 수동적 종합이 습관임을 말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수동적 종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억이다.
매순간 삶의 현재들에서 수동적으로 종합되는 것이 습관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있어 늘 수동적으로 종합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다름 아닌 기억 --- 기억의 조각들이 아니라 기억 전체(베르그송의
용어법으로는 "souvenirs"가 아니라 "Memoire") --- 이다.
"습관은 시간의 시원적[정초하는] 종합이며, 이 종합은 흘러가는 현재의 삶을
구성한다. 기억은 시간을 근거짓는 종합이며, 이는 과거의 존재
(현재는 지나가게 하는 것)를 구성한다."
2. 순수 과거
"지나간 현재" 즉 과거가 된 현재는 기억-조각들(souvenirs)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기억-조각들의 마름질을 가능케 하는 지평, 선험적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기억-전체(Memoire)이다. 물론 기억-조각들이
없는 기억-전체를 별 의미가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 그치겠지만.
기억-조각들이 특수성들을 형성한다면, 기억-전체는 일반성을 형성한다.
우리는 능동적 기억을 지나간 현재를 되살리고 또 기억-조각들을
종합한다.("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현재라는 조건 아래 순간들의 수축을 통해서
시간을 구성했다. 그러나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현재들[지나간 현재들]
자체를 서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시간을 구성한다", DR, 110/192)
그러나 이런 능동적 기억 이전에 현재의 흐름 자체가, 즉
현재이자마자 동시에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의 흐름 전체가 형성하는
과거 자체가 있다. 이것은 수동적 종합을 통해 형성되는 기억 자체이다.
기억-조각들을 불러내는 것은 현재 상황과 그것들의 유사성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연상(association)"이라 부른다.
나는 한 마리의 개를 보고서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개를 떠올린다.
이 떠올림은 재현의 논리를 따른다. 지나간 현재의 재생(reproduction),
지금 현재의 반조(反照=reflection), 이 둘 사이의 재현 관계 등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현재는 흘러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동일성을 확보하려면 반조되어야 한다) 결국 연상이 요구하는
재현의 논리는 동일성의 확보를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이런 능동적 종합 아래에는 수동적인 종합, 무의식적인 종합의
차원이 존재한다. 이 과거의 수동적 종합은 현재가 흐른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현재가 끝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성립한다. 우리의 능동적 기억의 아래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잔잔히 쌓여 가는 심층적인 과거가 있다.
이 과거의 떠올림은 현재의 상황이 요구하는 연상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묘사했던 것과 같은
심층적인 회상을 통해서 다시 퍼올릴 수 있다.
(이 점에서 프로이트적인 무의식과 구분된다. 프로이트의 경우
이 심층적인 무의식은 "트라우마"에 의해 생겨나며 기억을 통해서
퍼올릴 수가 없다. 그것은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억압된 것들은 기억되는 대신에 반복된다. 이런 반복이
바로 "강박=Zwang"이며 "반복강박=Wiederholungszwang"이다.
두 경우 기억이 안 되는 것은 정확히 반대의 의미에서이다.
베르그송-프루스트에서는 기억이 너무 잔잔해서, 수동적 종합이기에
기억되지 않는다면, 프로이트의 경우는 기억이 너무 크고 충격적이어서,
너무 힘겨워서이다)
이 과거가 바로 "순수 과거"이다. 이 순수 과거가 기억-조각들이 그 위에서
떠오를 수 있는 선험적 지평을 이룬다. 이 점에서 그것은
"아프리오리한[경험 독립적인] 기억", "과거 일반"이다.
보론
"순수 기억"론에서 현재의 상황은 기억-조각들을 불러내는 "연상"의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다른 곳에서 현재의 또 다른
면모를 논하고 있다. 그것은 곧 "마주침(rencontre)"의 맥락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중요한 한 가지 점을 읽어낸다.
어떤 기호들(좁은 의미의 언어적 기호가 아니라 우리가 지각하는
것들,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지 않을 수
없도로 강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주침으로부터 사유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논의를 연결시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럴 경우 "순수 기억"의 떠올림은 단지 현재와 단절됨으로써가 아니라
현재와 연결되어 이루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필요에 의한
조각-기억의 떠올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런 필요와 단절된 심층적
회상에 의한 순수 기억의 떠올림도 아닌, 현재에서의 "마주침"에 의한
순수 기억의 떠올림이라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중요한 의미로서, 가치 있는 순간으로서 다가오는
기억은 종종, 아니 대부분 바로 이런 기억인 듯싶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한 장면을 생각해 보자.
십자가를 진 예수가 계속 고꾸라지면서 힘겹게 언덕을 올라간다.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어머니 마리아는 그를 따라간다.
한 순간 예수의 눈길과 마리아의 눈길이 마주친다. 그 때 마리아는
어느날 어린아이 예수가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을 깨고 왔던
때를 회상한다. 그 장면은 마리아로서는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아련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어머니 보소서,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나이다!" 믿기지 않는 아픈 현실과의 마주침과
이 마주침이 순수 기억으로부터 퍼올린 기억-조각의 만남이
인상 깊게 그려져 있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이런
식의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오는데, 보도 블록이라든가 과자, 나무들,
음악 등이 그런 예들이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삶에서 이런 순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때의 기억은 분명 유사성에 입각한,
재현과 동일성의 논리에 입각한 기억이지만, 이런 상황은
이런 식의 설명으로는 충분치 않은 의미를 함축한다. 이 의미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3. 과거의 네 가지 역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토대로
과거의 네 가지 역설을 이끌어낸다.
1. 동시간성(contemporaneite)의 역설
과거와 현재는 단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과거와 현재가 단적으로 구분된다면,
지금-현재가 과거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과거로 건너뛰어야 한다는 것이
되고 과거 편에서 보면 앞으로-올-현재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재는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됨으로써만 흐를 수 있다. 현재가 현재"였다가"
과거가 된다면 그것은 흐를 수 없을 것이다. 현재는 반드시 "현재"라고
말하는 그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야만, 즉 과거와 동시적이어야만 흐를 수
있다. 상식적으로 과거와 현재는 구분되며, 현재가 먼저 오고 그 현재가
과거가 된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와 동시적일 때에만 흐른다. 이것이
"동시간성의 역설"이다.
2. 공존(coexistence)의 역설
만일 각각의 과거가 늘 현재와 동시적이었다면, 사실상 모든 과거가 현재와
동시간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과거와 현재의 공존의 역설이다.
10년 전의 과거나 1년 전이 과거나 사실상 지금-현재와 공존한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유명한 원뿔 도식으로 설명했다. 이 도식에서 현재(S)는
결국 극한적으로 수축된 과거 전체일 뿐이다. "지금"은 과거 전체가
수축되어 있는 첨점인 것이다. 따라서 지각(perception)은 현재와의
관계 하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기억을 동반하며, 사실상
기억 전체(원뿔 전체)를 동반하는 것이다. 현재는 존재하는 동시에 과거가
됨으로써 흐른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를 흐르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다.
이 점에서 과거는 시간 전체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고 언제나 현재와
공존한다.
과거는 실존하지(exist)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내속하고(insist)
공속한다(consist). 이순신은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순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순신은 실존하지는 않지만 존속한다(subsist),
또는 내속한다. 존속/내속이라는 말은 서구 철학사에서 실존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존재들을 가리킬 때 써 온 말이다.
예컨대 중세 철학에서 개체들은 실존하지만 보편자들(universals)은
내속/존속한다. 과거는 현재와 늘 동시적이고 그래서 현재에 내속하며,
과거 전체는 사라지지 않고 늘 존속한다. 들뢰즈는 "공속한다"라는
표현도 쓰고 있다. 왜인가? 바로 과거 전체가, 즉 모든 지나간-현재들이
현재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공속(共續)한다".
과거가 시간 전체의 종합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3. 선재(先在=preexistence)의 역설
베르그송의 원뿔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알 수 있듯이, 현재(S)가 움직일 때
늘 과거 전체가 그 뒤에서 작동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거가 현재에 선재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과거-조각들은 모두 한때 현재였던 과거이지만,
결코 현재였던 적이 없는 본연의 과거 또한 존재한다. 물론 이것은
이론적 상정(想定)이지만, 현재의 흐름을 가능케 하는 과거 자체 즉 본연의
과거는 앞의 논리들을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상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본연의 과거가 바로 "fondement"(근거)로서의 과거이다.
과거의 수동적 종합은 이렇게 동시간성과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세 역설을
통해서 성립한다. 과거의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4. 무한한 공존의 역설
현재의 수동적 종합은 결국 습관의 종합이고, 과거의 수동적 종합은 기억의 수동적
종합이다. 현재가 수동적으로 수축되어 형성되는 것이 습관이고, 과거가
수동적으로 수축되어 형성되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의 수동적 종합에서 현재는 무엇인가? 현재는 과거 전체(공존의 전체)가
가장 극한적으로 수축되고 있는 곳을 가리킨다(원뿔의 S를 상기).
과거는 현재에 보존되기보다 과거 자체에 보존되며, 지금-현재는 곧
스스로와 공존하는 과거 전체의 최대 수축이다. 과거는 매-현재와
공존한다. 그리고 매-현재는 계속 과거에 축적된다. 그래서 과거란
결국 스스로와 공존하는 매-현재들로서의 과거"들"과 이 과거들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앞에서 이야기한) 본연의 과거, 이 전체의 공존을
통해 존립한다.
따라서 과거는 등질적인 하나가 아니라 사실상 다양한 형태의 수축과
이완을 통해 스스로와 공존하는 전체이다. 현재가 과거 전체의 극한적인
수축 상태라면, 과거는 그 자체 무한하게 상이한 이완과 수축의 정도에 따라
무한한 층위들에서 스스로와 공존하는 전체이다.
이것이 과거의 네 번째 역설, 아마 우리가 무한한 공존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역설이다.
인생에서의 반복
우리는 매순간 시간을 종합하면서 살아가지만, 자주 그러한 종합에는
반복이 함축된다. 나는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은행나무 앞에서 서게 되고,
지난 가을 보았던 그 빛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매번 가을마다
우리는 가을햇살을 받으면서 삶을 반추하게 된다. 지금-현재와 이미-
과거가-된-현재들이 어떤 상황에서 새롭게 이어지면서 계열화된다
(serialises). 대선 주자들의 추태,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서 시위하는
노동자들, 코리언 시리즈의 함성, 학원 문을 나서는 입시생들,
연예인들의 스캔들, ...이 모든 것이 "어디선가 본 듯한(deja vu)"
시간-고리들을 형성하면서 반복되고 계열화된다.
때로 이런 반복은 어떤 불가해(不可解)한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운명"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10년 전에 만났던 그 여자/남자와
너무나도 흡사한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진다. 10년 전에 만났던
독사(毒蛇) 같은 인간들을 또 다시 만나 다시 한번 상처를 받는다.
이럴 때 우리는 "이게 내 운명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운명은 (과학적 의미에서의) 필연과 다르다. 그것은 우발성
(contingence)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에서 도래하는 불가해한 필연,
"necessity"가 아니라 (스토아적 의미에서의) "fatum", 말하자면
"운명적 필연"이라고 할 만한 필연이다. "운명은 어떤 표상된 시간 순서에
따라 이어지는 현재들 사이에서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는 결정론적
관계들이 결코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 사이에서 운명이 함축하는
것은 시간대를 고정시킬 수 없는 연관들[과학에서의 예측과는 성격이 다른
연관들], 멀리 떨어진 시간대들 사이의 공명, 다시 나타나고 서로 공명하고
서로 메아리가 되는 상황들, 어찌할 수 없는 우연들, 신호와 기호들,
공간적 상황과 시간적 연쇄를 초월하는 어떤 역할들 등이다."
그런데 과거는 사실상 무한히 수축되어 있는 전체이고, 앞에서 말했듯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종합 전체라고도 할 수 있다.("현실적으로"라는
말은 미래가 있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게다가 과거가-된 현재들이 아니라
과거 자체, 선험적 과거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취한다면,
우리가 현재들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사실상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직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 복잡해지지만)
원뿔 그림에서 원뿔은 무한히 수축되어 있는 과거이며, A'-B', A'-B',
A'-B', ...는 수축과 이완에서의 서로 다른 정도를 뜻할 뿐이다. 결국
모든 현재는 "잠재적 공존(virtual coexistence)"로서의 과거의 어느 층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輪回)"라는 것이다.
우리가 능동적 종합의 수준에서 여러 현재들을 종합해서 구성할 때, 사실상
그 하나하나의 현재들이 또한 무한한 과거에서의 또 다른 현재들의
반복이기도 하다. 나의 은행나무-빛들의 반복적 계열화는 그 자체 먼
옛날의 또 다른 계열화들의 반복이다. 그리고 이 반복은 늘 증대해 간다.
생각을 더 넓혀서 한 사람의 인생(人生)이 어떤 하나의 계열이라면,
그 계열은 또한 숱한 다른 계열들을 반복한다.("하나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의 삶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이것은 마치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윤회라 불리는 것이다." 인생은
리토르넬로이다. 음정, 가사, 음색, ...은 달라져도 늘 리토르넬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누구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 몸에 불을 질러야
하고 왜 누구는 전세 비행기를 타고 유목적 삶을 즐기는가?
이것은 철저한 우발성인가? 아니면 심층적 이법의 산물인가?
인생의 우발성과 운명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사회와 윤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4. 두 가지 반복: 빈약한 반복과 풍요로운 반복
들뢰즈는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을
구분한다. 이것은 베르그송적 이분법의 재정식화이며, "정신적 반복"은
"생명적 반복'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물질적 반복은 2장의 처음에 등장했었던 "mens momentanea"
즉 순간적 정신(정신이 한없이 이완한 경우)의 반복이다.
반면 정신적 반복은 원뿔 전체의 반복이다.
정신적 반복의 특징은 생성하는 차이들을 흩뜨려 보내지 않고,
원뿔 속에 간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 반복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들이 도래한다.
1) 물질적 반복이 헐벗은 반복이라면, 정신적 반복은 옷 입은 반복이다.
물질적 반복에는 차이들이 쌓이지 않지만, 정신적 반복에서는
자주 옷을 갈아입는 경우처럼 차이들이 쌓이고 교체해 간다.
2) 전자는 부분들의 반복이고, 후자는 전체의 반복이다.
전자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그래서 연속적 축적이 없는 반복이고,
후자는 점점 커져 가는 원뿔 전체의 반복이다.
3) 전자는 계기(succession)의 반복이고 후자는 공존의
반복이다. 물질적 반복은 하나가 나타나면 다른 하나는 사라지는
계기(繼起)의 반복이지만, 정신적 반복은 생성한 모든 것들이 원뿔
속에서 함께 공존하는("잠재적 공존=coexietence virtuelle")
반복이다. 그래서 항상 전체가 스스로 계속 반복된다.
4) 전자는 현실적(actual)이고 후자는 잠재적(virtual)이다. 물질적
반복은 두께를 가지지 않으면 그래서 늘 현재적일 뿐이지만, 정신적
반복은 두께를 가지며 그 두께가 잠재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5) 전자는 수평적 반복이고 후자는 수직적 반복이다. 두께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III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미래의 종합이다. 첫 번째 종합이 현재의 종합으로서
현재의 수동적 종합인 습관을 논했다면, 두 번째 종합은 과거의 종합으로서
과거의 수동적 종합으로서 기억을 논했다.
이제 들뢰즈는 시간의 세 번째 종합으로서 미래의 종합을 논하며, 이
대목은 니체가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영원회귀론"을 한 차원 정교하게
다듬어낸 대목이기도 하다.
1.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
우선 논의되는 것은 "선험적/초월론적(transcendental) 지평"으로서의
시간이다.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정식화한 것은
칸트이다. 그리고 칸트의 이런 정식화는 데카르트를 겨냥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들뢰즈는 여기에서 데카르트와 칸트를 비교해
가면서 논의의 땅고르기를 시도한다.
"cogito ergo sum"
[1]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je pense, donc je suis)"라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근세 철학의 서막을 열었다.
###프랑스어의 "penser"는 영어의 "think"보다 훨씬 넓은 외연을 가진다. 심지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성찰> III) "정신활동"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이 명제는 그 후 숱한 주석의 대상이 되었다. 철학사에 있어 가장 많은
주석의 대상이 된 명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나"를 결정적으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이 사유주체와
칸트가 제시한 "선험적 주체/자아"는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2] "규정(determination)"이라는 개념은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뿌리들
중 하나이다. 무엇인가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인식주체에게
구체적으로 분별(分別)된 어떤 것으로서 다가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언어적으로는 "술어(predicate)"로서 나타난다.
"저 사과는 빨갛다", "철수는 영수의 친구이다", "영희는 인사동에 산다"
등등에서 "빨갛다", "의 친구이다", "인사동에 산다" 등이 곧
규정(성)들이며, 언어적으로는 술어들이다. 무엇인가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이 규정(성)들을 종류별로 분류해서 정리해 놓은 것이 범주들(categories)
이다. 위의 예에서 "빨갛다"는 "성질(quality)" 범주에, "의 친구이다"는
"관계(relation)" 범주에, "인사동에 산다"는 "장소(place)" 범주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규정"되는" 것이 바로 존재/실재이며, 언어상으로는 주어에
해당한다. 즉 위의 예에서 "저 사과", "철수", "영희"는 곧 존재들/
실재들, 그리고 언어상으로는 주어들이다. 어떤 실재/존재가 "규정된다"는
것은 그것이 일정한 분별적 차이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며,
언어상으로는 일정한 술어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3] "나는 사유한다"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곧 규정(성) 즉 술어이고,
"나"는 존재/실존(existence) 즉 주어이다.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전적으로 두 논리치, 곧 규정과 규정되지 않은 실존이라는
두 가치에 따라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DR, 116/202)
달리 말해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사유한다)"는 는 미규정자
(규정되지 않은 실존/존재)로서의 "나"와 규정성으로서의 "사유한다"는
두 항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미규정자는 어떤 규정을 부여받을 것이고, 규정성은 그 미규정자에 부여되는
무엇이다. 어떤 규정의 존재는 당연히 그 규정이 붙어 있는 그 피규정항을
전제한다. 어떤 색깔이 있는데, 그 색깔을 "띠는" 표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듯이.
"나는 사유한다"에서 "사유한다"라는 규정성은 당연히 그 규정성을 받는/띠는
존재 즉 "나"를 전제한다. 그래서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1) "사유한다"는 규정성이 있다.
2) 따라서 당연이 무엇인가가 사유한다, 즉 사유하는 무엇이 존재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사유한다, 따라서 당연히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있다." 어떤 면에서 이 명제는 일종의 잉여 명제이다.
"나는 사유한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카트르는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강조함으로써 "사유하는 나"를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
[1] 칸트는 "선험적 변증론"에서 데카르트를 논박한다. "선험적 분석론"이
"진리의 논리학"이라면 선험적 변증론은 "가상의 논리학"이다.
전자가 진리의 가능조건(condition of possibility)을 다룬다면, 후자는
오류의 가능조건을 다룬다.
전자가 개념(Begriff=Kategorie)과 올바른 추론을 다룬다면, 후자는
이념(Idee)과 그릇된 추리를 다룬다.
[2] 이 그릇된 추리는 세 가지를 겨냥해서, 즉 영혼, 우주, 신을 겨냥해서
이루어진다. 중세존재론은 일반 존재론(ontologie generalis)과
특수 존재론(ontologia specialis)으로 나뉘며, 특수 존재론은
"영혼론(psychologia)", "우주론(cosmologia)", "신학(theologia)"으로
나뉜다.데카르트에서 두 유한 실체가 "res cogitans"로서의 영혼과
"res extensa"로서의 우주이며, 하나의 무한 실체가 신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때문에 칸트의 비판도 이 세 개념을 겨냥한다.
(영혼을 비판하는 "순수이성의 오류추리",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들을 비판하는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신이라는 이념을 비판하는
"순수이성의 이상"이 그것이다)
들뢰즈는 여기에서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 즉 "순수이성의 오류추리"를
논하면서,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을 이끌어낸다.
###들뢰즈의 논리를 하이데거의 분석과 비교해 보라.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옮김, 한길사.
[3] 칸트는 규정(성)과 미규정자 사이에는 제3의 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칸트 자신의 인식론에서 감성과 오성 사이에 제3의 항으로서
구상력이 요청되는 상황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미규정자가 어떤 규정성을 띠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어떤
선험적 조건(transcendental condition)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사유한다"고 할 때 "나"가 "사유한다"는 규정을 띠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선험적 조건/형식,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규정성들은 인식주체에게 분별적으로 드러나는 차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 사과는 빨갛지만, 이 사과는 파랗다"고 말하고 두 색깔의 차이를
말한다.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차이는 두 규정성 사이의 경험적 차이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적 차이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차이들을 가능케
하는, 더 정확히 말해 그런 차이들이 실재/존재에 붙도록 만들어 주는
선험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간이다.
[4] 어떤 존재가 규정성들을 띨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이 시간이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모든 존재들은 반드시 시간 속에서만 일정한 규정성들로
구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존재들은 늘 "현상적인
(phenomenal)" 존재들이다. 시간 속에서 일정한 규정성들로 출현(出現)하는
존재들이기에. 이 현상적 존재들은 근본적으로 수동적 존재들이다.
어떤 존재도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의 동일성으로서, 본질로서, 영원한
존재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은 시간 속에서 어떤 구체적인
규정성들로 출현한다. "이 수동적 자아는 자신의 사유, 자신의 지성,
자신이 '나(JE)'라고 말하기 위해 의지하는 것이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힘을 미친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님을
느낀다."(DR, 116/203)
"JE est un autre"(I is an other)
[1] 랭보는 "나는 타자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시간 속에서 현상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나"라는 것이 시간을 초월한 본질로서가 아니라 시간적 존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시간 속에서 계속 변해가는, 즉 "나"란 나 자신에게도
온전하게 추수되어 동일화할(identify) 수 없는, 열린 존재, 생성하는 존재
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가 나에게 타자로서, 낯선 존재로서 생성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2] 달리 말해, "나" 안에서는 어떤 차이들이 계속 생성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1) 내가 경험적 차이들을 겪어 간다는 것(배가 아프다가 낫고, 기분이
나빴다가 좋아지기도 하고,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을 뜻하기도 하지만,
2)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시간을 나의 존립의 선험적 조건으로 가지며
따라서 "나" 안에는 근본적으로 시간이 즉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선험적 조건으로서 내적으로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동일성(identity) 또는 동일자(the same)로
존재하기보다 차이생성을 겪어가는, 즉 "differentiation"을 겪어가는
존재이며, 때문에 늘 "균열(felure)"을 겪어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곧 "균열된 나(je fele)"이다.
[3] 나는 시간 속에서 생성하며, 미래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비결정성으로서
내 앞에 놓여 있다. 즉 나는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 속에서 생성해 가며
때문에 균열을 겪어 나간다. 능동적인 나(Je) 아래에는 이 수동적인 나(자아=
moi)가 흐르고 있다. 이것이 무의식의 층위이다. 수동적 자아 위에서 나는
균열된다. 수동적 자아는 나의 선험적 조건, 무의식으로서 존재하며,
그 위에서 균열되는 나가 생성해 간다.
2. 균열된 나, 수동적 자아, 시간의 텅 빈 형식
서구 철학사에서 시간은 공간에 비해 늘 조연 역할을 해 왔다. 계몽사상가들의
형이상학 비판을 딛고서 현대 형이상학이 새롭게 피어나기 시작했을 때,
시간의 존재론(니체의 "Werden", 베르그송의 "duree")이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흐름의 실마리는 이미 데카르트와 칸트의 차이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영혼의 동일성과 신의 동일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예외도 있지만, 서구 전통 형이상학에서 시간은 대개
외면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특히 천문학적 시간)
데카르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cogito가 진정 cogito이려면 현실적인 시간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후대의 용어를 쓴다면, "경험적
주체"와 "선험적 주체"의 문제이다.
데카르트에게 코기토는 시간을 벗어난다. 그럼에도 내가 시간 속에서
지속한다면, 그것은 신이 매순간 이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근대 서구 철학자들에게 신이라는 존재에게 얼마만큼의 설명원리의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는 늘 논쟁거리였다. 데카르트는 신에게
극히 큰 역할을 부여한 경우이다.
데카르트에게 자아/영혼의 동일성은 그 자체로서 성립하기보다
신에 의해 근거를 부여받는다. "나에 대해 가정된 동일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신 자신의 단일성 외에는 없다."(DR, 117/204)
"res cogitans"는 신을 재현함으로써만 그 동일성을 보장 받는다.
코기토는 신에 의해 그 동일성을 보장 받으며, 시간은 "연속적 창조"를
통해 이해된다.
###과학철학적 맥락에서 이것은 근대 과학이 왜 결정론적이고 비시간적인지를 말해
준다. 근대 과학에는 "엔트로피" 개념이 없다. 세계는 영원히 그대로 존속하며,
완벽한 시계처럼 움직인다. 이것은 곧 신이 세계 바깥에서 그 시계를 완벽하게
관리해 주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과 균열된 나
따라서 신의 죽음은 곧 자아의 동일성의 해체를 함축한다. 신이 죽을 경우
신이 내 영혼에 새겨 놓았던 인장(signature)이 뭉개어져버린다.
"marque"에서 "demarque"로. 그래서 신과 영혼은 동시에 죽는다.
이 빈 자리에는 "균열된 나(je fele )"가 남겨지며, 시간을 넘어 동일성을
보장 받던 내 안에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이 들어서게 된다. 즉
시간이 주체 안에 내면화되는 것이다. 이로써 주체는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을 헤쳐 나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은 온전하게 정복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아는 수동적 자아의 측면을 함축하게 된다.
이렇게 신이 죽고, 영혼이 죽고(시간이 내면화되기 때문에 나는 "경험적
자아일 수 있을 뿐, "영혼"일 수가 없다), 균열된 나는 수동적 자아의 측면을
띤 채 시간의 순수하게 텅 빈 형식을 주체적으로 채워 나가게 된다.
###신에게는 시간이 없다. 특히 미지(未知)의 미래란 없다. 이것이 신을 "전지"전능하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신에게 가까이 가는 사람들(오라클, 유대교/이슬람교의 예언자들,
무당, <스타워스>의 요다 등등)의 특징이 "예언"에 있다. 예언이란 바로 미래의 정복을
뜻하기 때문이다.
수동적 자아와 수동적 종합
칸트는 주체로 하여금 시간을 내면화하게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능동적 종합의 주체를 세움으로써 사태를 다시 봉합해버린다.(실천이성으로
가서는 스스로가 비판했던 가치들을 도덕을 위해 "요청하게" 된다)
칸트의 주체는 "구성하는" 주체이며, 우발적인 잡다(雜多)를 구성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세계/신의 동일성은 사변적 가설로서
밀어내지만, 그 대신 주체의 동일성을 확보한다.
물론 주체는 수동적 주체와 능동적 주체로 나뉘지만, 수동적 주체
(감성으로서의 주체)의 역할은 단지 잡다를 "수용하는" 것밖에는
없다. "종합"은 전적으로 능동적 주체(오성으로서의 주체)의 소관에
속하게 된다. 말하자면 수동적 자아는 능동적 자아의 입구 역할을 할
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들뢰즈에게서 수동적 자아는 이미 "수축"을 통해서
많은 것을 종합한다. 자아는 여러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능동적
자아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상당 수준의 종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동적 자아는 단지 입구가 아니라 그 자체 어떤 두께를 가지고 있으며,
능동적 자아의 동일성도 이 두께에서 일어나는 일의 영향을 받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해는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메를로-퐁티 등으로 이어져 왔으며,
다른 한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도 등장한다. 이런 사상들에서 "수동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칸트, 횔덜린, 하이데거
칸트의 수동적 자아를 칸트와는 달리 사유할 때, 죽은 신과 균열된 나는
시간의 형식 안에서 존재한다. 칸트 사유의 이런 측면을 좀더 밀고 나간
인물은 피히테나 헤겔이 아니라 횔덜린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시간의
우발성을 "주체"를 내세워 오히려 메워버리려 했다. 헤겔의 "Geist"는
그 극치이다.
횔덜린은 피히테나 헤겔처럼 균열을 메우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균열과
통일 사이의 긴장을 응시하고자 했다. 이것은 곧 시간을 주체에 추수해서
다스리려 하기보다는 "시간의 순수한 공허"를 응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칸트 이후 많은 인물들이 칸트에서의 의식/주체/자아를 좀더 강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사유에 놓인 균열을 메우려고 했지만, 횔덜린은
통일성(Einheit)과 자유(Freiheit) 사이의 긴장을 사유했다고 할 수 있다.
판단은 주체와 대상을 가른다. 그리고 주체는 대상과 맞물려 있기에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주체는 "이심원(異心圓)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심원의 삶은 통일성과 자유 사이에서 찢긴다.(횔덜린에게 자유란
단지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지(未知)의 밤 속으로, 타계(他界)의 차가움 속으로 우리 자신을
던지면서 기뻐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는 태양의 제국을
떠나서 혜성의 궤적을 넘어 곤두박질하듯이 돌진할 것이다."
"Wir haben unsre Lust daran, uns in die Nacht des Unbekannten,
in die kalte Fremde irgend einer andern Welt zu sturzen, und
war'es moglich, wir verliessen der Sonne Gebiet und sturmten
uber des Irrsterns Grenzen hinaus."
그러나 횔덜린은 이런 간극들을 넘어서 "hen kai pan"으로 나아가는
길 또한 계속 모색하며, 이것은 실향성(Heimatlosigkeit)을 넘어
가려는 시적(詩的) 시도들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시가 이름-붙일-수-없는-것을 이룸 붙일 수는 없지만
그런 가능성으로의 공간을 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게 시의
역할은 항상 存在에의 다가올 비추임으로 이해된다.(Dieter
Henrich 같은 사람은 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헨리히에 따르면
횔덜린은 근본적으로 과거의 시인이다)
나의 균열과 죽음본능(으로서의 시간형식)
졸라의 <수인>, 피츠제럴드의 <균열>, 라우리의 <화산 밑에서>는
죽음본능의 형태를 띤 시간형식과 자아의 균열을 묘사한 뛰어난
작품들이다. <의미의 논리>를 참조.
3. 시간의 세 번째 종합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서 "정초(fondation)"를 논했고, 두 번째 종합에서
"근거(fondement)"를 논했다. 그러나 이 두 종합만으로는 부족하고 나머지
하나의 종합이 더 요청된다. 그래서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이 등장한다.
플라톤의 상기설
흥미롭게도 들뢰즈는 사유 안에 시간을 내장시킨 것은 이미 플라톤이었다고
말한다. 즉 데카르트 이후 칸트가 한 작업은 플라톤에게서 이미 등장한다는
것이다.(플라톤의 상기설에 대한 호의적인 해설은 <차이와 반복> 전반에
등장한다) "본유성은 앎의 추상적 이미지만을 재현하지만, 배움의 실질적
운동은 영혼 안에서 '이전'과 '이후'의 구분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배움(apprendre)"이란 프루스트론에서도 나왔던 배움, 즉
기호들에 대한 배움이다.(나무가 뿜어내는 기호들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목수가 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의 "習"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감각(aisthesis)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감각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운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때의 감각을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signe"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 점을 통해서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식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 태어나면서 이전에("영혼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들을 망각해버린다는 점을,
그러나 어떤 계기들을 통해서 그것들을 다시 상기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공히 초월적 차원을 가정하고 있으나, 데카르트의
경우 그 차원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데 비해 플라톤의 경우
그 차원은 망각되었다가 감각/기호, 배움을 통해서 다시 되찾아진다.
전자가 "본유성(inneite)"의 인식론이라면 후자는 "상기(anamnesis)"의
인식론이다.
들뢰즈는 두 경우의 차이를 특히 시간 문제에서 찾고 있다.데카르트의
본유성은 순간(또는 영원)에 주어지지만, 플라톤의 상기(적 진리)는
반드시 "apprendre"의 시간을 거쳐서 도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레테의 시간(망각의 시간)과 상기의 시간 사이의 차이가 존재한다.
###상기설에 대한 들뢰즈의 해설은 다소 일면적이다. 플라톤의
상기설에는 수학과 관련되는, 직관적인 지식으로서의 진리와 관련되는
측면 또한 중요하다. 즉 감각지로부터 불연속으로 도약해서 형상계로
나아가는 구도이다. 이런 구도는 바슐라르에 의해 다듬어졌다.
###번역본에서 "즉자존재"라고 한 것은 "그 자체의 세계"라든가
"자체적 존재"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헤겔의 "an-sich"와 혼동되기
때문이다. 헤겔적 즉자와 여기에서의 즉자(이데아)는 오히려 반대되는
의미이다.
기억의 불충분성
플라톤의 상기설을 이렇게 이해할 때 2절에서 논했던 "기억"의 존재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라는 존재가 서로 연결된다. 만일 상기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진리의 세계(이데아들의 세계)라면, 이 세계는
곧 기억의 세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플라톤을 베르그송,
프루스트에 잇는 들뢰즈의 독창적인 해석이다.(<베르그송주의>에서는
역으로 플라톤의 상기설을 통해 베르그송의 기억론을 해설하고 있다)
들뢰즈 식으로 볼 때 플라톤의 형상계는 다름 아닌 순수 기억의 차원이다.
이 차원이 현실세계(퓌지스의 세계)의 "근거(fondement)"이다.
현실세계는 순수 기억으로서의 형상계를 모방한다.(그래서 유사성이 중요)
영혼은 이 현실세계와 형상계의 가교이다. 다시 말해 영혼은 순수 기억의
세계로 다가설 수 있는 대자적 존재이다. "영혼은 즉자존재의 영역['그 자체'의
영역]을 대자적으로 보존하거나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들은 선험적 차원으로서의 근거(순수 과거)의 지평 위에서
종합된다. 역으로 말한다면, 순수 과거는 결국 현재와의 관계 하에서,
현재와의 공존을 통해서 표현된다. 바로 이것이 형상계/순수기억의 세계가
"신화(mythos)"를 통해서 드러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런 구도를 놓고 볼 때, 므네모쉬네는 양면성을 띠게 된다.
그것은 표상(지각)의 세계(다시 말해 현재)의 근거인 동시에("동일성
[이데아의 차원]은 아득한 태고의 원형이 지닌 특성이 되고,
유사성[현실세계의 모방]은 현재의 이미지가 띠는 특성이 된다"),
다른 한편 현재를 통해서만 비로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형상계는 현실계를 통해서만 표현된다. "parousia")
###번역서에서 "재현"으로 된 부분은 표상/지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은 이 부분만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 거의 전체에 걸쳐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 "representation"은 재현이 아니라 표상/지각이다.
"근거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상대적이고,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서
특성들을 빌려오며, 그 빌려온 특성들을 통해 자기 인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근거는 현재를 스스로에 종속시키면서도 그 자체는 현재에 종속되는
원환적 성격을 띤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현재를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으로 열어 놓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에게 끌어당겨 "근거짓고자"
한다. "근거는 사유 안으로 시간을 끌어들인다기보다 영혼 안으로 운동을
끌어들인다." 이것이 플라톤의 철학이 "초월철학"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반복"은 어떤 원형/동일성으로의 회귀에 그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근거를 하나의 "효과"로 만들어버리는, 즉 근거와는
또 다른, 그것보다 오히려 더 심오한 또 하나의 차원을 끌어들여야 한다.
기억을 "광학적 효과"로 만들어버리는 거대한 차원을
4. "The time is out of joint."
플라톤에게 시간은 "영원의 움직이는 그림자"(<티마이오스>)이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운동의 수"이다. 천체들이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안정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그것이 이데아계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시간은 동그라미처럼 시작과 끝이 일치하는(
그래서 시작을 말하기 힘든) 원환을 형성한다.
그러나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 속을, 즉 우발성(contingence)의
시간을 걸어가는 세계에서는 시간이 "이빨 빠진 동그라미"를 그리게 된다.
"The time is out of joint." 이것은 아이스퀼로스의 시간이 아니라
소포클레스의 시간이고, 카프카(/티토렐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간은 원환적 형태, 사건들(이미 정해진 사건들), 운동들(아리스토텔레스적
맥락에서의 운동들)로부터 벗어난 시간, 즉 텅 빈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시간이다. 이로써 시간의 형식이 도래했다.
이 시간은 기수적 시간이 아니라 서수적 시간이다. 즉 일정한 외연으로
정해져 있는 시간이 아니라 이빨-빠짐을 통해서 매듭을 그리면서 일정한
순서들만을 매기는 시간이다. 이 시간의 순서가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인
시간을 특징짓는다.원환적인 시간에서 시간의 동그라미는 "="(등호)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빨이 빠질 경우(횔덜린에서의 "cesure"), 즉 시간이
"out of joint"의 상태로 갈 경우 시간은 서수적인 것이 된다. 이 시간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결과로서의 소리는 나지만) 시간은 운동의 수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아이온의 시간이다.
"나의 균열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각운의 중단, 그리고 그 중단이
단번에(une fois pour toutes) 순서를 부여하는 이전과 이후이다(
각운의 중단은 정확히 균열의 탄생점이다)."
("une fois pour toutes"라는 숙어는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들을 전제로 해서
어떤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시간은 이렇게 형식적이며 텅 빈 순서에 의해 정의된다. 그런데 시간의
지도리들(각운의 중단들) --- "지도리"는 "joint"가 아니라 이것이 풀림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시간의 매듭이다 --- 은 반복의 형식을 띤다. 한 왕조의
몰락과 새로운 왕조의 들어섬은 시간의 지도리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런
지도리들은 반복된다(宋에서 元으로, 元에서 明으로, ...). 그래서 이런
반복되는 시간들은 어떤 시간의 집합을 형성한다. 이 각각의 집합은
어떤 "행위의 이미지", "사건의 이미지"로서, 어떤 특이성(singularite)으로서
성립한다.(특이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된 큰 특이성) 그러나 이 반복되는
각각의 이미지 --- 예컨대 "왕조 교체"라는 이미지 --- 는 "="(이퀄)로서만
회집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시 이빨-빠짐이 깃든다. 그래서 이 이미지는
하나의 상징이다. "시간의 집합에 부합하는 그런 상징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시간의 빗장을 풀기, 태양을 폭파하기, 화산 속으로 뛰어들기,
신이나 아버지를 죽이기 등이 그것이다. 각운의 중단, 이전과 이후를 모두
회집하는 한에서 이런 상징적 이미지는 시간의 집합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 시간의 집합은 단순히 모여 있는 집합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행위/사건의 이미지는 여러 시간의 계열들에 의해 구성된다. 핵심적인
것은 과거와 연결되는 계열, 현재와 연결되는 계열, 미래와 연결되는 계열이다.
1) 사건은 과거와 미래를 가르고 일정한 날짜가 붙는 시간의 지도리를 도래시킨다.
여기에서 사건은 반복으로서 등장하고, 그래서 주인공들은 과거를 다시 살아야
한다. 이것이 과거-계열을 형성한다. 2) 그러나 다른 한편 주인공들은 변신의 현재, 행위와의 합일, 자아의 분할, (행위의 이미지에의) 이상적 자아의 투사를 살게
된다. 이것이 현재-계열을 형성한다. 3) 마지막으로 미래-계열에서 자아의
일관성은 사건/행위의 일관성에 지배당하며, 자아는 분열되어버린다.
물론 이것은 위대한 분열이다. "새로운 세계를 잉태한 자는 자신이 낳고 있는
파열하는 다양체에 의해 압도되고 소진된다." 이 때 자아는 비등가성/비동등성
자체와 등가의/동등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균열된 나와 시간의 계열에 따라 분할된 자아는
서로 일치하고 어떤 공통의 출구에 이른다. 이 나/자아는 초인이다.
5. 세 번째 종합에서의 반복
첫 번째 종합에서의 반복은 "습관"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두 번째 종합에서의
반복은 "기억"으로 나타났다. 이제 세 번째 종합에서의 반복을 논할 때이다.
세 번째 종합에서의 반복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현재에서의 반복과
과거에서의 반복은 직관적으로 쉽게 다가오지만, 미래에서의 반복은
도대체 무엇일까? "반복"이라는 말이 어딘지 과거의 뉘앙스를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래에서의 반복, 세 번째 종합에서의 반복, 그것은 바로 "영원회귀"이다.
과거는 결핍에 의해 반복된다. 여기에서는 자아에게 너무 벅찬 이미지로서
다가오는 시간이 반복된다. 반면 현재에서의 반복은 변신에 의해 구성된다.
변신의 시간은 주인공이 행위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며, 사건의 이미지
속에서 (차이를 동반하면서) 반복하는 시간이다. 니체의 "정오의 시간".
과거와 현재가 서로에게서 반복된다는 것은(과거와 현재의 동시간성의 역설을
상기) 역사적 사실 이전에 존재론적 구조이다. 다시 말해 "어떤 반복적 사실들이
역사 안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반복이 새로운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산출되기 위한
역사적 조건이다." 예컨대 역사가들은 술라,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등에게서
어떤 반복을 찾아낸다. 그러나 사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술라를
반복함으로써 "독재관(dictator)"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변신의 시간, 사건의 시간이 시간의 지도리를 만들어낼 정도로 위대한
시간일 때, 목숨을 건 투쟁의 시간일 때가 이런 시간이다. "혁명가들은 어떤
반복을 통해서 행동을 시작한다. 그들의 행위를 개시하게끔 하는 이 반복은
어떤 고유한 과거의 양태에 따라 이루어지고,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을 필연적으로
어떤 과거의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조건들 위에서 성립한다."
요컨대 이미 이루어진 사건들 속에서 반복을 발견하지만, 그 이전에 그 사건들
자체가 반복을 통해서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즉 차이를 생산해낸다는 것은 곧 과거를 반복하고 다시 현재를 변신의 시간으로
반복함으로써 가능하다.
역사가 일종의 연극/드라마, 즉 반복하는 연극이라는 것은 맑스의
<브뤼메르 18일>에 잘 나타나 있다. 과거의 반복이 변신이나 새로움의 창조로
나아가지 못한 채 퇴화에 빠질 때, 이 경우는 장엄한 비극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코메디/소극(笑劇)이 된다. 맑스에 따르면 역사에서는 늘
비극 뒤에 소극이 다시 반복된다. 소극의 주인공은 행위가 자신에게 너무 벅찬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면서 반복에 마주친다. 이런 소극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에라야 비로소 비극의 시간, 변신의 시간이 가능해진다. 소극을 넘어서야만
비극이 되고 비극 다음에는 또 소극이 반복된다면, 결국 역사란 비극과
소극의 길항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결핍의 과거를 반복하고 변신의 현재를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것,
(베르그송적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생산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것 또한 반복이다.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과 함께 등장하는 반복이다.
###앤드류 벤자민(Andrew Benjamin)이나 모리스 메를로-퐁티 등은 베르그송의
사유를 과거에 사로잡혀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사유하지 못하는 사유로 비판한다.
들뢰즈가 두 번째 종합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세 번째 종합으로 나아갈 때에도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라는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 베르그송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은 없다. 사실상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의 탄생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베르그송의 사유이다. 그가 제시한 가장 독창적인 생각에 속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사유와 운동>에 들어 있는 "le reel et le possible"이라는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번째 반복은 충일(充溢=exces)에 의한 반복 즉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에
의한 存在의 넘쳐-흐름에 있어 나타나는 반복이다. 이것은 곧 차이의 생성,
(존재로서의 생성에 동반되는) 차이생성에서의 반복이다. 끝없는 차이생성과
그 가운데에서의 반복, 이것이 곧 "영원회귀"이다.
영원회귀가 충일과 더불어 성립하는 한, 즉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의 생성과
더불어 성립하는 한, 그것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종합에 관련된다.
영원회귀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과 더불어 성립하며, 때문에 주체를 삼켜버린다.
새로움의 시간 속에서 기존의 동일성들은 바뀌기 때문이다. 원환은 탈중심화되
시간의 지도리가 빠져버린다.
이 시간에서는 정초나 근거도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에서는 근거가 무-바탕
(sans-fond)을 향해 나가가며, 근거와해(effondement)으로 떨어진다.
6. 사건과 역사: 조건, 주인공, 작품
희극적 반복은 결핍을 통해서, 즉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서 성립한다.
비극적 반복은 시간의 지도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비장한 변신의 반복이다.
그러나 세 번째 반복, 영원회귀의 반복은 희극과 비극 모두를 넘어선
반복이다. 여기에서는 반복의 주인공마저 초극된다.
세 번째의 반복, 더 우월한 반복에서는 "반성적 유비들"이 아니라 "행위의
조건들"이 표현된다.(행위함으로서 반복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함으로써
행위가 성립한다는 앞의 논의를 상기) 그리고 이 세 번째 종합에서 이전의
두 종합은 사라진다.(단순히 되풀이되지 않는다)
세 번째 종합에서 현재는 제거될 운명에 처한 배우, 저자, 행위자가 되어버리며,
과거는 결핍에 의해 작용하는 어떤 조건이 되어버린다. 즉 세 번째 종합은
과거를 초극하면서 현재까지도 극복한다. 그래서 미래의 종합은 다음 두 조건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어선다.
1) [과거의] 조건에 대한 생산물의 무제약적 특성.
2) 저자/배우에 대한 작품의 독립성.
현재는 반복을 일으키는 자(le repetiteur), 과거는 반복 자체(repetition
meme), 미래는 반복되는 것(le repete)이다. 즉 현재는 저자/배우로서 반복을
행하는 자이며, 과거는 반복의 가능조건 즉 반복 자체이고, 미래는 반복되는
것 즉 작품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것(미래의 반복)은 두 번에 걸쳐(과거의 반복과 현재의
반복) 전조(前兆)되고 지시된다.
첫 번째 종합이 시간의 "내용"과 "정초"에 관련되고 두 번째 종합이 시간의
"근거"에 관련될 뿐이라면, 세 번째 종합은 시간의 순서, 집합, 계열,
그리고 최종적인 목표에 관련된다. 반복의 철학은 이 모든 시간을 반복하면서
지향을 만들어낸다.
1) 반복을 미래의 범주로 만들기.
2) 습관의 반복과 기억의 반복을 이용하되, 단계들로만 이용하기. 그 단계들을
길 위에 내버려두고 떠나기.
3) 한편으로 하비투스에 대항하여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므네모쉬네에
대항하여 싸우기.
4) 더나 덜한 차이를 "훔쳐내는" 데 그치는 반복의 내용(하비투스)을 거부하기.
5) 차이를 포괄하되 여전히 동일성과 유사성에 종속시킬 뿐인 반복의 형식
(므네모쉬네)을 거부하기.
6) 지나치게 단순한 순환 주기들, 곧 순수 과거가 조직하는 순환 주기(아득한
태고의 순환 주기)뿐 아니라 습관의 현재가 겪는 순환 주기(관습적 순환
주기)를 거부하기.
7) 기억의 근거를 결핍에 의한 단순 조건으로 바꾸어 놓기, 나아가 습관의
정초를 "habitus"의 파산으로, 행위자의 변신으로 바꾸어 놓기.
8) 작품이나 생산물의 이름으로 행위자와 조건을 몰아내기.
9) 반복을 어떤 차이를 "훔쳐낼" 대상으로 삼거나 가변적 차이를 포괄하는
것으로 만드는 대신, "절대적으로 차이나는 것"의 사유와 생산으로 만들기.
10) 반복의 대자존재가 차이의 즉자존재가 되도록 하기.
결국 과거는 반복의 조건이다. 현재(의 행위자)는 반복의 주인공이다. 미래는 반복의
작품이다.
첫댓글읽기는 읽었으나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도모지 몰으겠습니다 --부드러운 성경구절이나 댓글로 올려야 겠습니다 (전도서 1장 3절 -8절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떳떤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모든 강물은 다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ㅎ며 강물은 언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아니하도다
결국 이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반복이라는 연장선상안에 놓여있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일침인가요? 들뢰즈와 카타리는 반복의 연속에 대한 불만을 '기계'라는 표현으로 분자혁명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데리다의 주장을 넘어서 해체이후에 우리가 구성해야할 새로운 재구축이라는 시각을 전개합니다. 또한 들뢰즈와 카티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주장하듯이 시간의 연속성속안에서 발견할수있는 또다른 진보의 의미를 강력하게 강조를 합니다. 이글은 단지 이론 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제시할뿐이고 그것을 넘어서 반북의 새로운 진보의 새로운 대안의 제시가 없는 점이 아쉽군요.
살찐미소님의 현대철학에 대한 사유는 예향에서는 볼수 없는 뜻밖의 것이지만 이러한 사유를 근거로한 새로운 자신의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를 밝혀주셨으면 예향에서 처음으로 흥미있는 이야기의 전개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미국식의 근본주의적인 사고에 찌들은 위인들에 대해서 식상한 상태에서 한국의 교인라는 사람이 이런 사고를 소유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흥미롭군요. 제말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군요.
첫댓글 읽기는 읽었으나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도모지 몰으겠습니다 --부드러운 성경구절이나 댓글로 올려야 겠습니다 (전도서 1장 3절 -8절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떳떤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모든 강물은 다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ㅎ며 강물은 언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아니하도다
결국 이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반복이라는 연장선상안에 놓여있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일침인가요? 들뢰즈와 카타리는 반복의 연속에 대한 불만을 '기계'라는 표현으로 분자혁명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데리다의 주장을 넘어서 해체이후에 우리가 구성해야할 새로운 재구축이라는 시각을 전개합니다. 또한 들뢰즈와 카티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주장하듯이 시간의 연속성속안에서 발견할수있는 또다른 진보의 의미를 강력하게 강조를 합니다. 이글은 단지 이론 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제시할뿐이고 그것을 넘어서 반북의 새로운 진보의 새로운 대안의 제시가 없는 점이 아쉽군요.
살찐미소님의 현대철학에 대한 사유는 예향에서는 볼수 없는 뜻밖의 것이지만 이러한 사유를 근거로한 새로운 자신의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를 밝혀주셨으면 예향에서 처음으로 흥미있는 이야기의 전개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미국식의 근본주의적인 사고에 찌들은 위인들에 대해서 식상한 상태에서 한국의 교인라는 사람이 이런 사고를 소유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흥미롭군요. 제말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