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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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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청량산 청량사
천장암 추천 0 조회 120 13.08.03 17:2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관문
              다리를 건너면 청량산도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청량문이다. 태백산에서 발원하는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흘러가고 있다. 흐르는 물은 명호강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청량교이다. 청량산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기록에 의하면, 청량산은 고대에는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청량산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조선시대 풍기군수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하며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산에는 신라 문무왕3년(663)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청량사(淸凉寺)와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와, 통일신라시대 서예가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글씨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金生窟),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이 있다. 청량산은 1982년 8월에 경상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에 청량사(淸凉寺)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공원 일부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23호로 지정되었다.

▲ 청량교 왼쪽
              청량산은 낙동강 상류의 널찍한 물줄기가 옆구리를 스쳐 흘러가고 있어 산과 물의 조화로움이 한층 운치를 더하고 있는 곳이다. 앞으로 흐르는 명호강은 여름철에는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다.
▲ 청량교 오른쪽
            봉화 제일의 풍광은 청량산이다. 청량산은 퇴계 이황의 산으로도 유명하다. 봉화군 명호면과 안동시 도산면에 걸쳐진 청량산(870m)은 외형상 그리 높지는 않으나 선비의 기품을 지닌 산으로 이 아담하고 단정한 모양을 선비들은 사랑했었다. 일찍이 신재 주세붕도 이 청량산을 보고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기만 하여 정녕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청량산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선비 같은 산, 선비의 산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것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1501~1570)보다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량산은 옛 퇴계 가문의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李子修)가 송안군(松安君)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다. 안동 예안의 온혜에서 청량산까지는 불과 40여 리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명승지이다. 그가 어린시절부터 산에 들어와 학문을 닦던 산으로 후학들을 모아 강론도 즐겼다. 자신의 당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지을 만큼 청량산을 좋아하고 아꼈다. 훗날 그가 공부하던 자리에 제자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를 '오산당(吾山堂)'이라 부르는 것도 퇴계가 '나의 산(吾山)'이라 부르며 사랑한 탓이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13세(1513년)의 나이에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퇴계는 평생을 이 산에 올라 학문을 탐구했으며 산천을 노래했는데 꿈에서도 이 산을 잊지 못했다. 이렇듯 청량산은 퇴계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었다. 그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보여 주었다.
            청량산은 '청량산 육육봉'이라 불리는 12개의 빼어난 바위 봉우리들 때문에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의 3대 기악으로도 불린다. 특히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바위 절벽에 어우러진 단풍빛이 고와 가을철 관람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 청량사 일주문 앞 주차장옆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선학정
                청량산을 아껴 자신의 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했던 퇴계 이황은 청량산을 여섯 번이나 올라 청량산유산록을 남겼다.
▲ 모정에 세워진 '청량산 청량사' 표석 청량사(淸凉寺) 가는 길은 등산로이기도 하다. ▲ 청량사로 들어가는 산문인 '일주문'
            산문(山門)에 들어선다. 진리로 향하는 문에는 따로 문짝이 필요없다.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어야 하기에...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청정도량'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청정함과 고귀함, 신비스러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3년(663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8)에 의해 중창된 고찰이다. 청량산의 문수봉, 금탑봉, 연화봉, 반야봉으로 둘러싸인 청량사에는 공민왕이 현판을 쓴 지방 유형문화제 유리보전과 김생 선생이 공부하던 김생굴,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 최치원의 유적지 고운대와 독서당, 공민왕이 은신했던 공민왕당 등의 유적들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청량사까지는 1km 남짓한 거리이다. 가는 길은 협소하고 가파른 길이라서 일반차량은 출입을 금하고 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그냥 쉽게 가는 길이 아니라 숨이 가쁠 정도로 계속하여 오르막을 올라가야하는 길이다. 산문인 일주문은 문짝이 달려있지 않아 누구나 들어올 수는 있지만 가는 곳은 힘든 고행을 하여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새소리 물소리 들으며 가는 길.. 가노라면 길섶에 핀 들꽃도 반겨준다.
가파른 길 한쪽으로 기왓장을 포개서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나무와 흙으로 만든 멋스러운 오름길이다. 가파른 언덕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석수(石水)가 있다. 맑은 물 작은 연못에는 빨간 금붕어가 살고 있다.
                황토로 지어진 안심당(安心堂)은 산사의 포근한 쉼터인 전통 다원이다. 굴뚝이 이채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나무현판이 붙어 있는 이 찻집은 안팎 곳곳에서 은은한 전통의 멋과 향을 느낄 수 있는 개방된 절집의 포근한 쉼터이다.
            다원 안심당앞에는 산위에서 흐르는 석간수를 통나무를 파서 다단계로 흘려내려보내는 멋스러운 방식을 하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는 기왓장을 포개서 만든 도랑을 타고 흐르도록 하였다.
▲ 위에서 내려다 보는 안심당(安心堂)의 앞마당 ▲ 범종루(梵鐘樓)
            길옆 경사 좀 있는 곳에는 모두 통나무 배수방식을 취하고 있다. 옛날 통방앗간의 물받이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보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떨어지는 물소리는 청량함을 더 해준다.
▲ 반가사유상
              원래 이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 다리를 내리고 오른쪽 다리를 얹은 일종의 반가부좌 자세로 왼손은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채 손가락을 뺨에 살짝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보살상
반가사유상 왼쪽, 오른쪽으로 죽은 나무를 이용한 꾸밈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다원 안심당의 지붕
            앞 2층의 범종루, 뒤로는 5층석탑, 석탑앞 큰소나무는 삼각우총(三角牛塚)의 설화가 있는 소나무이다.
            삼각우총(三角牛塚, 뿔이 셋 달린 소의 무덤)의 설화가 있는 소나무 뒤로 보이는 바위봉우리는 연화봉이다.
▲ 범종루앞 수각의 감로수 물은 대나무속를 통하여 흘러내려온다.
                고사(古死)한 나무을 이용한 물바가지걸이는 썩어서 없어질 나무가 다시 생명을 얻어 태어남이니라.
▲ 청량사 주지 지현스님
            1986년 29세에 청량사 주지로 부임해 등짐을 나르며 겸재 정선의 청량사 그림을 바탕으로 절을 복원하고 가꾸고 계신다. 산 그림자라기 보다 산이 통째로 들어와 사는 집을 짓고 계신다. 최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도 길은 있다'라는 에세이집을 내기도 했다. 청량산은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답게 부드러운 산세와 기암괴석의 수려한 풍광이 좋은 명산으로, 청량사(淸凉寺)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공원 일부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23호로 지정되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멋스러움이 한껏 보태지는 장독 항아리들 ▲ 직선이 아닌 곡선이 주는 부드러움을 살려 주위와 어울리게 지은 건물들.
              높낮이가 서로 다르게 지은 건물들, 지붕과 담장 높이의 어울림,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며 휘감아 도는 담장높이에도 변화를 주었다.
▲ 범종루(梵鐘樓) 범종루와 마주보는 바위봉우리는 금탑봉(金塔峰)이다. ▲ 범종루(梵鐘樓)
                정면 3칸, 측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2층 건물이다. 범종루(梵鐘樓)에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의 사물(四物)을 봉안한다. 사물은 모두 부처님께 예불(禮佛)을 드릴 때 사용하는 불구(佛具)로 새벽 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 예불을 볼 때 주로 사용된다. 사물을 치는 순서는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순으로 두드리는데 이 소리들로 불음을 전파한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으로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한다. 또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구제하며,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인 날짐승을 향하여 제도하는데 쓰이고,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보내어 구제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기와지붕에는 쑥부쟁이 씨가 날라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지붕위 높은 바위봉우리는 청량산 보살봉(845m)이다. ▲ 심검당(尋劍堂)
                심검(尋劍)이란 검(劍)을 찾는다는 뜻이다. 절에서는 마음공부를 검에 비유할 때가 많은데, 지혜의 칼을 갈아서 무명(無明: 밝지 못함)을 벤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스님들이 참선(禪)수행를 하는 곳.. 용맹정진 수행하는 곳.. 번뇌와 망상을 잘라 버릴 칼을 찾는 집.. 심검당이라 한다.
▲ 심우실(尋牛室)
                '심우(尋牛)'는 자기의 본질,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을 10개의 그림과 시(詩)를 통해 나타낸 심우도(尋牛圖)의 첫번째 그림이다. "처음에 사람이 들에서 소를 찾는 모습으로,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사람 본래부터 갖춰진 원성(圓成)인 심우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는 것"이 곧 심우이다. 소는 불가(佛家)에서 "인간 본래의 자리" 를 의미하며 소만큼 불가와 친숙한 동물은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선사들이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았으랴. 고려 시대 보조 국사 지눌도 자신의 호를 목우자(牧牛子), "소를 기르는 사람" 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 했으며 만해 한용운 선생도 만년에 자신의 서울집(성북동 소재)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했으니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佛性)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곳", "불성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 심우실(尋牛室)이다. 심검당(尋劍堂)과 심우실(尋牛室)은 수행처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 약사여래를 모신 유리보전(琉璃寶殿)(경북유형문화재 제47호)
            유리보전은 동방유리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집이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지장보살, 우측에는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청량사는 원래는 매우 큰 사찰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사찰은 유리보전과 응진전만 남은채 피폐했었다. 유리보전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는 뜻으로 고려 공민왕이 친필로 쓴 "琉璃寶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종이로 녹여 만든 귀중한 '지불(紙佛)'이다. 지금은 개금불사를 다시하여 잘 보존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면 병이 치유되는 소원성취의 영험있는 약사도량이다.
              유리보전(琉璃寶殿)의 주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念普觀無量劫(일념보관무량겁) 한 생각에 한없이 긴 세월도 널리 관하니 無去無來亦無住(무거무래역무주) 오고 감은 물론이고 머무름도 또한 없도다. 如是了知三世事(여시료지삼세사) 이와 같이 삼세의 일 모두 안다면 超諸方便成十力(초제방편성십력) 모든 방편 뛰어넘어 심력 갖춘 부처님 이루리.
▲ 유리보전(琉璃寶殿) 옆면 ▲ 선불장(選佛場)
            유리보전 옆에 있는 건물로 현재 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3칸에 툇마루를 달았다. 선불장이란 '부처를 뽑는다'(選佛)라는 뜻으로 일종의 선방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든 선객들이 낱낱이 무위(無爲)를 배우는 곳이다. 즉 계율을 수계하는 도량 또는 교법을 수학하는 도량을 말한다.
▲ 설선당(說禪堂) ▲ 산신각(山神閣)
              정면과 측면 각 1칸으로 맞배기와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산신 신앙은 불전(佛殿)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고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 숭배 신앙과 관련이 깊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던 토속신이다. 산신각은 우리나라의 토속신인 산신과 호랑이를 봉안한 곳으로 신령각이라고도 한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이 되여 사찰의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산신각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서 전(殿)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높은 봉우리가 연화봉(蓮花峰)이다. 청량사는 청량산 연화봉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연꽃의 수술 자리에 앉았다는 청량사이다. 청량사에 서서히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 금탑봉과 5층석탑
              5층석탑을 마주하고 있는 바위봉우리가 금탑봉(金塔峰)이다. 금탑봉은 바위가 마치 3층으로 이뤄진 금탑 모양을 하고 있고 층마다 소나무들이 테를 두른 듯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가을이면 절벽 아래로 붉게 타오르는 단풍이 장관이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 해질녘이면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물든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량산 속에는 한때는 30개의 사암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외(外)청량사와 내(內)청량사 두곳만이 남아 있다. 내청량사는 '유리보전'이 있는 이곳이고, 외청량사는 마주보이는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곳에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응진전(應眞殿)은 이곳에서 20여분을 도는 산길을 가야 한다.
              탑앞으로 무대를 만들어 올해로 6회째를 맞는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10월8일 늦은 7시에 열렸다. 관객 295만명 동원이라는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 '워낭소리'에서 불공을 드리는 장소로 5층석탑과 금탑봉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5층 석탑 앞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에는 삼각우총(三角牛塚)의 설화가 있는 소나무이다. 이 소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옛날, 청량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남민(南敏)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기르던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뿔이 셋 달렸으며, 차차 자라남에 따라서 크기가 낙타만 하고, 힘이 세며 사나워서 부려먹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량사 주지가 남민의 집을 찾아가서 절에 시주하도록 권하여 승낙을 받았다. 크고 힘세며 고집이 많은 이 뿔이 셋 달린 소는 절에 온 후 차츰 고분고분해져 연대사(蓮臺寺)와 암자(庵子)의 석축을 쌓는 데 소요되는 돌을 운반하거나 절에서 소비하는 나무를 운반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준공을 하루 앞둔 어느 날, 뿔이 셋 달린 이 소가 죽었으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절 앞에다 묻고 묘를 만들어 주니 그 자리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삼각우총(三角牛塚, 뿔이 셋 달린 소의 무덤)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소나무는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오층석탑 사이에 있다.
              청량산을 아껴 자신의 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했던 퇴계 이황은 청량산을 여섯 번이나 올라 청량산유산록을 남겼다. 그는 청량산가에서 "청량산 육육봉을 어부(남들)가 알까 두렵다"는 최상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백구야 믿을 수 있지만 못 믿을 도화가 어부에게 알려줄 수 있으니 떠나지 말라는 멋진 표현.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나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하랴 못미들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가 하노라 - 퇴계 이황의 청량산가
청량사를 나와 응진전(應眞殿)으로 향한다. ▲ 응진전(應眞殿)
              유리보전이 있는 내(內)청량사와는 다소 떨어져 금탑봉 아래에 있는 응진전은 외(外)청량사로 별칭한다. 원효대사가 수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하는데, 68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응진전(應眞殿) 또는 나한전(羅漢殿)으로 나한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그러나, 보통은 16분의 나한을 특별히 모시면 "응진전", 오백분의 나한을 모시는 전각을 "나한전"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응진전은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와 있을 때, 노국공주가 이곳 응진전에 16나한상을 모시고 기도 정진한 곳으로 이 16나한상들은 노국 공주와 시녀들이 깎았으며 그 중에는 공민왕과 노국 공주를 형상화한 상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응진전 뒷쪽 절벽 위에 동풍석이라는 바위가 마치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롭게 서 있다. 의상이 이 암자를 지을 때 저 바위가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암자도 사람도 큰 변을 당할 것 같아서 그 바위를 아래로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보니 그 바위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어 대사가 기이하게 생각해 다시 그 바위를 내려 놓았더니 다시 다음날 아침이면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의상이 장난기가 발동해 계속 바위 내리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바위는 다음날이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의상이 해질녘에 그 바위를 내려 놓고 누가 바위를 옮기는지 보고 싶어 밤새도록 지키고 있는데, 자시(子時 밤12시경)가 되자 바위가 스스로 살금살금 절벽을 타고 올라가더란다. 그것을 본 의상은 다음날부터 바위 내리기를 포기하고 바위를 향해 합장한 뒤 그 아랫쪽에 예정대로 응진전을 지었다고 한다. 원래 이 터는 도깨비들이 살던 곳인데, 도깨비가 터를 뺏기지 않기 위해 요술을 부려 바위를 옮겨 놓았다고도 하는데 그러한 전설을 뒤로하고 응진전은 창건한 지 천년이 흘렀지만 풍상 속에서도 건물은 의연하게 변함없이 세월을 지키고 있다.
            응진전의 십육나한 중의 한분이다. 16분의 나한들은 석가여래가 열반한 이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받은 분들이다.
▲ 응진전(應眞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주심포(柱心包) 건물이다. 창호는 정자살창으로 짜여져 어칸에만 2분합의 문을 달았다. 바닥은 마루를 깔고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이다.
▲ 청량정사(淸凉精舍)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의 계곡에 자리 잡은 청량정사는 퇴계 이황이 청량산에 유산(遊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림(士林)들이 논의하여 1832년(순조32년)에 건립되었다. 이후 청량정사는 선생의 뜻을 기리는 많은 후학들에게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되었으며 구한말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투쟁(義兵鬪爭)의 근원지가 되기도 했다. 아래 사진들은 후에 다시 찾아와서 담은 사진들입니다.
    ▲ 청량정사(淸凉精舍)
              현재의 건물은 1896년 일본군(日本軍)의 방화(放火)로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되어 있으며, 본체는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왼편에 지숙료(止宿寮)를, 오른편에 운서헌(雲棲軒)을 두었다. 당호(堂號)는 오산당(吾山堂)이고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며 현판글씨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이 썼다. 유정문(幽貞門) 뒤로 멀리 보이는 건물은 청량사 유리보전이다.
    ▲ 가을의 청량사 전경
                청량사는 풍수지리학상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히는데육육봉(열두봉우리)이 연꽃잎처럼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는 연꽃의 수술자리이다. 바위 봉우리 아래 자리 잡은 청량사는 새의 둥지처럼 아늑하다. 청량산에 가을이 들어와 자리를 폈다.가을 청량산은 감출 줄을 모른다. 지난 일들을 나무와 바위 속에 숨겨 두고 있을 뿐이다. 굴절없이 울고 있는 풍경 소리에 바람은 소리로 다가와 그리움을 남겨 놓고 있다. 푸른 하늘 아래 고운 산들을 이고 목을 길게 내민 청량산 열두 봉우리엔 암벽마다 울울이 쌓인 솔바람 소리만이 깃들어 있다.
                나는 풍경이 왼종일 수선을 떠는 심검당 추녀 끝에 서서 몇 시간 동안 오도 가도 못하고, 바람 소리 들으며 와르르 쏟아지는 햇살 맞으며 살아 온 수많은 기억의 파편을 놓아준다. 부처님 뜨락에 산바람이 옹기종기 모여 흐느끼고 있는 산사.
    .. 청량사에서 다시 속세로 내려오는 길에 손에는 워낭 하나 들고 내려왔다. 관객 295만명 동원이라는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이 차기작인 '매미소리'를 준비하던 중에 뇌종양 판정을 받고 힘겨운 투병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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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 13.08.05 11:17

      첫댓글 가을 단풍든 청량산의 청량사에 꼭 가보고 싶네요.........()()()

    • 13.08.12 00:12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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