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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9회>
씬 1 북원성 외경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새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깨고 있다.
씬 2 동 성안/궁예의 거소 앞
섬돌 위에는 미향의 신만 놓여져 있고 시녀가 대기해 있다. 안에서 미향의 소리가 들려온다. 약간의 에코성이 함께해 있다.
미향(E) (떨리는) 서방님....
궁예(E) 가까이 오시구려..
씬 3 동 방 안
미향이 꿈을 꾸고 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허우적거린다. 카메라, 그런 미향의 얼굴로 다가가면 그의 꿈속 이미지가 보여진다.
씬 4 그 꿈
미향과 궁예가 침상에 마주 걸터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현실의 궁예와는 달리 그의 모습은 매우 온화하고 정감 있는 모습이다. (이씬은 꿈 속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표현해 주어야 함)
미향 이제 죽어도... 소녀는 여한이 없사옵니다.
궁예 죽다니... 그런 말씀 마시구려.
미향 여인으로 살고 싶었사옵니다. 지아비를 하늘처럼 모시고, 그 분의 따사로운 눈길을 받으며.. 그렇게 살고 싶었사옵니다.
궁예 .....(측은하게 본다).......
미향 서방님은 부처님이시옵니까? 소녀의 서방님이시옵니까?
궁예 그대가 부처로 보면 부처일 것이요, 서방으로 보면 서방일 것이오.
미향 제 눈에는 서방님밖에 아니보입니다.
궁예 그렇구료. 내게도 그대는 아름다운 안해로밖에 아니 보인다오.
미향 ....! 진정이시옵니까? 진정 소녀가... 안해로 보이시옵니까?
궁예 .......(미소 지으며 끄덕인다).....
미향 (눈물) .....서방님께서 진정 소녀의 지아비가 되셨음을 인정하시는 것이옵니까?
궁예 나는 그대의 지아비요. 틀림없소이다.
미향 ......서방님..
궁예 가까이 오시오..
미향 ........오오오, 서방님.
궁예의 품에 안긴다. 궁예, 미소를 지으며 등을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드디어 깊은 포옹으로 이어지면서.... 침상에 쓰러지면...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천둥번개 소리.
씬 5 동 방(현실)
미향이 눈을 번쩍 뜨며 깨어 일어난다. 온통 땀 투성이다. 화급히 옆자리를 살피지만 궁예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금 사방으로 휘 돌아본다. 없다. 궁예는 어디에도 없다.
미향 (중얼거리며) 꿈..... 꿈이었단 말인가? (생각하다가) 아니야, 꿈일리가 없어. 서방님께선 분명 나를 받으셨다. 나를....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떨구며 시녀를 부른다.
미향 게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느냐?
시녀가 대답하고 들어온다.
시녀 불러계시옵니까요?
미향 서방님은... 궁예님은 어디에 가셨느냐?
시녀 새벽 참선을 끝내시고 밭에 가신 것으로 아옵니다.
미향 참...선....? 밭에...?
허탈하게 도리질을 치는 미향의 모습에서...
씬 6 동 성안 어느 밭
누군가가 괭이로 밭을 메고 있다. 궁예다. 그는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계속해 땀을 흘리며 밭고랑을 일궈간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씬 7 그 일각
양길이 멀리 궁예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리질을 한다. 그 옆에 사위들이 함께 해 있다.
양길 (혀를 찬다) 쯧쯧쯧... 궁예가 아닌가?
사위2 그렇사옵니다.
양길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천하를 호령하는 장수인가 하면 영락없는 스님의 모습이고, 또 스님인가하면 저렇게 시골 농부가 되어버린단 말이야.
사위2 그러니까 복지겸 부장이 계속해 저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양길 하긴.... 나도 통 모르겠으니...
사위2 신방을 치른 다음 날에 밭으로 나가 괭이를 잡는 사람은 처음 봤사옵니다.
양길 그게 무슨 소린가?
사위2 모르셨사옵니까?
양길 모르다니, 뭘?
사위2 이변이 일어났사옵니다. 궁예와 처제가 어젯밤 합방을 하였사옵니다.
양길 뭐라?.... (믿기지 않아)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합방?
사위2 예... 그 쪽 시녀 아이가 소인의 내자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양길 하하하하... 합방이라고? 저 목석같은 궁예가 미향이와 합방을 했다? 틀림없는 사실이렸다?
사위2 어찌 거짓을 아뢰겠사옵니까?
양길 (궁예를 한참 보다가 미친듯 웃는다) 하하하하.. 으하하하...
사위2 ......(그런 양길을 보면).....?
양길 드디어, 드디어 그렇게 되었구먼... 그렇게 되었어. 하하하.... 그렇다면 미향이가 내가 시킨대로 한게야.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지게 한번 붙들어 보라고 하였거든. 그리 된게야. 하하하, 그렇다면 이젠 뭘 더 염려하겠는가? 궁예는 진정으로 내 사위가 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그 때 은부가 다가온다.
은부 찾아계셨사옵니까, 대왕 폐하....?
양길 오 은부장? 어서 오게, 어서와..
은부 무슨 즐거운 일이 있으신 모양이옵니다?
양길 암 즐거운 일이 있고 말고.. 허허허..
은부 .......?
양길 잠시 여담이나 함께 하자고 불렀네. 허허허... 저기서 저 괭이질을 하고 있는 농부가 누구인지 아는가?
은부 오면서 보았사옵니다. 궁예 장군이시옵니다.
양길 허허허, 그렇지. 내 막내 사위일세.
은부 ......?
양길 우리 사위 말이야. 허허... 장수가 되어서 하지 않아도 되는 백성들의 힘든 일을 손수 하고 있네. 저런 장수 밑에서 어찌 강한 군대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안으로 가세.
그들 양길의 거소 쪽으로 향한다.
씬 8 인서트
궁예가 여전히 밭을 메고 있다.
씬 9 양길의 거소
양길과 은부 두 사람이 차를 마시고 있다.
양길 지금 명주의 사정이 어떠한가?
은부 우리 군의 사기는 매우 높사옵니다. 명주가 함락될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사옵니다.
양길 (끄덕이며) 명주성의 군사도 엄청나다고 들었네.
은부 그렇기는 하나 궁예장군에게는 군사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되옵니다. 우리 군사중에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는 단 한사람도 없사옵니다. 모든게 다 궁예장군의 지도력이지요.
양길 인정하네. 헌데.... 일부에서는 아직도 궁예를 믿지 못하고 있어.
은부 소신도 처음에는 궁장군을 반신반의했사옵니다.
양길 ......?
은부 하지만 아니었사옵니다. 궁장군은 세속의 욕심과는 아예 담을 싼 사람이옵니다. 가진 거라곤 저 허름한 승복 한벌과 폐하에 대한 충성심 뿐이옵니다.
양길 ......(끄덕인다).....
은부 (내친김에) 궁장군은 결코 폐하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옵니다.
양길 .....뭐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은부 명주를 함락시킬 장수는 궁장군 밖에 없사옵니다. 절호의 기회를 맞았사온데 이렇게 부르시어 모든 것이 늦어지게 되었사옵니다. 속히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시는 것이 폐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옵니다.
양길 ..... 그래야겠지.
은부 하루 속히 명주를 얻으시고 대왕으로서 즉위하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양길 .....음 (생각)......
은부 정 못미더우시면 복지겸과 다른 장수들을 함께 보내시오소서.
양길 복지겸?
은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복지겸의 말도 모두 틀린 것은 아니옵니다. 이 난세에 살다보면 때때로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일도 다반사이옵니다.
양길 (저도 모르게 끄덕이며) 아 그러니깐 내가....아, 아닐세... 그건 그렇고..
은부 그러니까 복지겸을 함께 보내라는 것이옵니다. 복지겸은 그동안 폐하를 위해 모든 것들을 점검하고 또 살펴왔사옵니다. 이번에 우리와 함께 보내신다면 무엇을 더 염려하겠사옵니까?
양길 복지겸... 복지겸.... ?
묘한 미소를 짓는 은부의 모습에서.
씬 10 미향의 처소 앞
궁예가 손을 씻고 있다. 미향이 기다리고 있다가 수건을 건네준다. 궁예가 받아든다.
미향 안으로 드시오소서. 아침이 늦었사옵니다.
궁예 그리 하십시다.
씬 11 미향의 처소
궁예와 미향이 안으로 들어와 앉는다. 미향이 수즙은 듯 미소를 짖는다.
미향 땀을 많이 흘리셨나 보옵니다.
궁예 (아무 표정없이) 늘 하는 일이오.
미향 잠시만 기다리시오소서.
궁예 .....?
미향이 옷장을 열고 그 안에서 새 승복을 꺼내 가지고 온다.
미향 갈아입으시오소서. 소녀가 지어놓은 것이옵니다.
궁예 나는 이옷이 편하오.
미향 지금 입고 계신 승복은 너무 낡았사옵니다.
궁예 옷이란 추위와 햇볕을 가리면 족한 것이오. 신경쓰지 마오.
미향 서방님을 위해 소녀가 손수 지은 옷이옵니다.
궁예 허.. 아직도 나를 모른단 말이오? 참으로 안타깝구려.
미향 ..........서방님?
궁예 나는 분명히 말하거니와 그대의 서방이 아니오.
미향 .......예?.
궁예 그대의 눈에는 내가 서방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의 눈에는 그대가 보살로 보이오
미향 ...... (충격)
궁예 (냉철하게) 이보시오, 보살?
미향 ..... (두려움)
궁예 우리가 하루를 함께 보낸 것은 분명하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고 미욱한 그대의 목숨을 보전해주기 위함이었소. 내가 그대와 있지 않았다면 그대는 목숨을 버렸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니오. 나는 미륵의 자리로 돌아왔소이다. 그점을 명심하구려.
미향 서... 서방님? 하지만, 우리는....
궁예 다시 일러드리리다. 나는 그대의 서방이 아니오.
미향 .........(공포)
궁예 나는 미륵이오. 세상을 구하고 그대를 구하기 위해서 내려온 미륵이오. 아시겠소, 보살?
미향은 그런 궁예를 본다. 차갑기가 마치 뱀과도 같다. 미향은 공포심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차가운 궁예의 모습에서
씬 12 양길의 거소 외경
양길 (E) 그대들은 이번 궁예의 일을 어찌 생각하는가?
씬 13 동 거소 안
복지겸과 환선길, 이흔암, 사위들 그리고 여러 양길의 장수들이 모여있다. 이른바 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은부는 보이지 않는다.
양길 명주의 일은 화급하고 우린 아직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네. 자네들의 심중을 이야기해 주게?
환선길 궁장군의 충성심은 이미 확인이 되었사옵니다. 돌려보내셔도 무방할 듯 하옵니다.
이흔암 그렇사옵니다. 명주성을 앞에 두고 있사옵니다. 이럴 때 별 이유도 없이 장수를 부르셨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 같사옵니다.
복지겸 .......(눈을 감고 말이없다)
환선길 장수를 의심하면 전투를 할 수가 없사옵니다. 지금이라도 속히 전장으로 돌려보내시오소서.
양길 ....(끄덕인다).....내 생각도 그러하네만....
복지겸 이번에 돌아가면 그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옵니다.
양길 또 그 소리... 도대체 자네는 어떻게 해야 궁예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복지겸 대장군....
양길 그만 두게. 명주를 함락시킬 사람은 궁예 그 사람 뿐이야.
복지겸 명주는 일단 접어두시오소서. 다음 기회에 대장군께서 친히 정벌하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양길 다음 기회..? 도대체 어느 때 말인가? 내 나이 벌써 환갑이 넘은 지 오래야. 자넨 내가 왕이 되는 게 그리 못마땅한가?
복지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양길 나는 자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하였어. 궁예를 부르라 하여서 나는 그리 하였고 궁예는 지체없이 달려왔어. 이제 또 잡아두라 하니...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복직며 다른 장수를 명주에 보내시고 궁장군은 더 이상 쓰지 마오소서.
양길 이사람아, 답답도하이. 나는 이번에 확인하였네. 궁예는 확실한 나의 사위가 되었단 말일세. 알겠는가? 내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야.
복지겸 속지 마시오소서.
양길 이런 답답한... 은부도 생각이 나와 같았네. 자네를 아주 답답해 하더구만...
복지겸 은부도 믿지 마시오소서. 그는 이미 궁예의 사람이옵니다.
양길 뭐라? 지금 은부장을 참소하는 겐가?
복지겸 대장군... 소인의 말을 믿으셔야 하옵니다.
양길 (벌떡 일어나며) 닥치게. 충신을 모략하다니... 그 사람은 내가 대왕이 되기만을 일심으로 바라는 충신 중의 충신이거늘!
복지겸 대장군..
양길 난 이번에 확실하게 결정하였네. 모두 명주로 가게. 이번엔 환장군과 이장군, 그리고 복부장 자네도 함께 가게.
복지겸 예?
양길 모두 다 가서 내 사위를 도와주게.
복지겸 아니되옵니다. 장군. 누가 그런 말을.....?
양길 (말을 막으며) 지금부터 하는 말은 군령일세. 자네는 늘 매사를 의심하며 사는 사람이 아닌가?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야. 나를 위해서 직접가서 보고 확인해 보라는 것일세.
복지겸 (너무도 놀라) 이름있는 장수들이 모두 이곳을 비우면....
양길 허허허, 괜찮아. 나는 양길이야. 내가 있는 이상 이곳은 안전해. 또 내 아우 명길이 이곳으로 올것이고 사위들도 있어. 그리고 나를 따르는 삼십여 읍성의 장수들이 있어. 걱정말고 모두 가봐.
복지겸 아니되옵니다. 이것은 은부의 계략이옵니다. 보내서는 아니되옵니다.
양길 군령이라고 하였어. 도대체 군령을 뭘로 알아듣는가?
환선길 이보시오, 복장군... 대장군께 너무 무례를 범하는 것 같소이다.
복지겸 .....(절망적인) 대장군, 소인만이라도 이곳에 있어야...
양길 가라고 했느니라.
복지겸 (혼자 중얼거린다) ......아아, 이런 그예 하늘이 우리를 버리는구나.
절망적으로 눈을 감는 복지겸의 표정에서..
씬 14 궁예의 거소
궁예가 참선에 들어있다. 향 연기가 은은히 피어 오른다. 가부좌를 튼 그의 모습은 한동안 명상으로 이어지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은부 (E) 장군, 소인 은부이옵니다.
궁예 ..... (눈을 뜬다)
은부 (E) 장군, 은부이옵니다.
씬 15 동 궁예의 거소 밖
은부가 허리를 숙이고 서있다. 그 옆에 미향과 그의 시녀가 있다.
궁예 (E) 들어오시구려.
은부가 미향들에게 잠시 예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미향 차를 안으로 들여 가거라.
시녀 예, 마님.
미향은 까닭모를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본다.
씬 16 동 거소 안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다. 은부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은부 주군, 곧 떠나게 되실 것 같사옵니다.
궁예 ......?
은부 양길이 우리 생각대로 마음을 정한 것 같사옵니다.
궁예 ......?
은부 아주 잘되었사옵니다. 이번에는 복지겸이도 따라가고 이흔암과 환선길 장군들도 따라가옵니다. 양길에게 있어서 최대의 명장들이지요.
궁예 잘 되었구려.
은부 소인이 뭐라고 하였사옵니까? 다 뜻대로 되었사옵니다.
궁예 은부장의 노고가 많았소이다.
은부 어인 말씀을.... 저는 주군께 목숨을 의지한 사람이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제 목숨을 내라 하시오소서. 다 드리오리다.
궁예 고맙소.
그때, 미향과 시녀가 찻상을 받들어 온다. 차를 따르는데 다시 은부가 말한다.
은부 이번에 마님도 함께 가시게 될 것이옵니다.
궁예 ....(끄덕인다)
미향 이몸도 가옵니까?
은부 그렇사옵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것 보다는 함께 계시는 것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대장군의 뜻도 그러하시옵니다.
그 때 밖에서 군졸의 소리가 들려온다.
군졸(E) 장군, 계시옵니까?
궁예 들라.
군졸이 들어와 군례를 올리고는 이른다.
군졸 속히 대장군의 처소로 듭시라는 명이시옵니다.
은부 (미소)....의외로 일이 빨리 돌아가는 것 같사옵니다, 주군.
궁예 ...그런 것 같구려. (큰 소리로) 알았으니 물러가거라.
군졸, 다시 군례를 올리고 밖으로 나간다. 은부와 궁예가 서로 보며 의미있는 미소를 짖는다. 그 얼굴에서...
씬 17 동 양길의 처소 외경
양길 (E) 모두 들으시오.
모두 (E) 예.
씬 18 동 안
궁예, 은부,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 사위들과 함께 많은 장수들이 양길의 말을 듣고 있다.
양길 나는 오늘 우리 수장들에게 간곡히 명하오. 앞으로는 특별한 일이없이 서로간에 모함하고 의심하는 일이 있을 때는 누구든 막론하고 중벌로 다스릴 생각이오.
복지겸 .....(이미 체념같은)
양길 전장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믿음과 충성이오. 이것이 깨어질때는 엄청난 손실과 붕괴가 오는 것이오. 궁장군..
궁예 예, 대장군..
양길 이번에 나는 그대의 충성심을 보고자 하였고, 그대는 보여주었다.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라.
궁예 예, 대장군.
양길 복지겸 부장도 가고 이흔암, 환선길 장군도 더불어 갈 것이야. 천하의 명장들을 모두 내어주니 기필코 명주를 함락하라.
궁예 이를 말이옵니까, 대장군.
양길 그리고 명길이는 돌아오라고 하게. 명길이 자네 위에 앉아 있으면 불편한 일이 많을 게야..
궁예 .......
은부 폐하.. 명주는 이제 폐하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옵니다. 이제 서둘러 대왕의 위에 오르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직공들에 일러 용포를 수의케 하시고, 세공들에게 면류관을 제작토록 명하시오소서.
양길 허허허.. 그거야 뭐...
은부 무진주의 견훤이 대왕을 칭한 지 오래이옵니다. 폐하께오서도 속히 대왕의 위에 오르시어 그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셔야 할 것이옵니다.
양길 ....(기분이 좋아) 제장들의 뜻이 그렇다면야. 허허허, 그리해야지.
복지겸 ..........
궁예 대장군, 떠나기전에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길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채) 그래, 어서 말해보게.
은부 .......
궁예 자고로 주군과 신하의 사이는 믿음으로 맺어져야 한다고 하였사옵니다. 주군이 신하들을 믿고, 신하들이 주군을 충심으로 섬길 때 비로소 상하간의 의가 세워지는 법이옵니다.
양길 .......?
궁예 하온데 대장군께오서 줄곧 소장의 충성심을 의심하시니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양길 (당황) 이 이보게... 그게 무슨...?
궁예 믿음 하나로 태산을 움직인다는 옛말이 있사옵니다. 또한 주인이 종을 믿지 못하는 그 불신 하나가 집안을 망치고 나아가 나라를 무너뜨리는 단초가 되옵니다. 앞으로는 크게 살피시고 헤아려 주시옵소서.
양길 이를 말인가... 내 유념하겠네. 암, 그리하고 말고... 자, 어서들 가 보게. 길이 멀지 않은가?
궁예 예, 대장군. 한동안 뵙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양길 그렇겠지. 알고있네. 좋은 소식을 보내주게.
궁예와 함께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한다. 그 모습을 훈훈하게 보는 양길의 표정에서
해설 양길. 중원의 패자로서 기록으로 살펴보면 무려 삼십여 읍성을 복종시킨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 궁예가 있었다. 그는 호걸이기는 했으나 아마도 영웅의 대열에는 끼지 못한 듯 하다. 그는 궁예에게 군사를 주었고 멀리 명주성을 도모하게 하였으나 결국은 궁예의 힘만 길러주었을 뿐 그와는 헤어지게 된다.
씬 19 길
궁예들이 가고 있다. 그 행렬에는 미향들도 있고 복지겸과 환선길, 이흔암, 은부 등이 가고 있다.
해설 그랬다. 그것은 그릇의 차이였다. 양길은 궁예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관계를 훗날 양길과 궁예의 싸움에서 일부 유추할 수가 있다. 궁예의 배신에 분개한 양길이 두 번이나 전쟁을 벌렸다가 분노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어쩃든 그랬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궁예, 그리고 보내주는 양길.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씬 20 그 한 쪽
은부와 복지겸이 한쪽에 쳐져서 가고 있다.
은부 어떤가? 아직도 자네는 내게 자네가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네.
복지겸 ........
은부 어차피 끝이 뻔히 보이는 바둑이었네. 다 죽은 대마에 미련일랑 버리게.
복지겸 .......굳이 나까지 데려가는 이유가 뭔가?
은부 자네를 어찌 그런 곳에서 썩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주군께는 자네같은 인재가 필요하네.
복지겸 .....나를 너무 믿지 말게.
은부 하하하.. 기억해 두겠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뀔 게야. 우리 주군의 진면목을 보게 되면 말일세.
복지겸 .........
은부 그 많은 성들을 어찌 얻으신 줄 아는가?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두 손을 들고 주군을 환영했네. 그 이유가 자넨 무엇이라 생각되는가?
복지겸 .........
은부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계시기 때문일세. 진정으로 백성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였기 때문이야.
복지겸 그렇다고 해두세, 지금까진 말일세.. 하지만 나라를 세우고 제왕이 된 뒤에도 계속 그러리라 보는가?
은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겐가?
복지겸 미륵의 세상이란 허황된 꿈이야.. 그런 세상은 있을 수 없네...
은부 .....미륵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중요한 건 저 분이 영웅이라는 것이야. 천하가 저 분의 것이 될 거란 말일세.
복지겸 .......(궁예를 본다)
묵묵히 가고 있는 궁예.. 그 모습에서..
씬 21 세달사 근처 폭포수 (몽타주)
폭포수가 장쾌하게 쏟아져내리고 있다. 그 아래 바위턱에 앉아 참선 중인 왕건.
도선 (E-에코) 무엇이 보이는가? 책이 보이는가? (사이) 그 책속에 무슨 글들이 들어있는가? (재촉하듯) 보이는가? 아직도 아니 보이는가? 내가 준 책이 아니 보인단 말인가?
물소리와 도선의 목소리가 어우려지며 왕건의 얼굴로 때려오고 있다. 클로즈업 되는 왕건의 표정을 보며 왕건은 심한 경련을 하고 있다. 고통과 시린 아픔들이 지나치는 것이 보인다.
도선 (E-에코) 자신을 버리고 다 던져넣게. 그 빈 속에서 글을 보라 하였어. 그렇지 않고는 그 글이 보이지 않을 것일세. 내가 준 도선비기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책이 아니야. 그대는 그 책을 보아야 하네. 나는 그대에게 그 책을 전해주어야 해.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남은 마지막 일이야. 눈을 뜨게. 심안을 뜨는 것이야.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야. 보이는가? 보이는가? 글이 보이는가?
왕건 (E-에코) 아니 보이옵니다. 대사님. 아무것도 아니보이옵니다. 책도 보이지 아니하고 세상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무엇을 버린다하고 무엇을 본다 하시옵니까? 가르쳐 주시옵소서. 대사님?
도선 (E-에코) 어리석도다. 그대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또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것을 하나로 꿰면 버리는 방법이 보인다네. 알겠는가? 자 꿰어보세. 꿰이는가 보이는가? 세상이 보이는가?
그들의 격렬한 선문답은 생생한 에코로 계속된다. 왕건은 고통 속에서 아직도 무지로만 보여오는 책장을 보고 있고, 도선은 참선에 들어 무언속에서 왕건을 호령하고 질타하고 있다.
씬 22 왕륭의 집 대문
강장자와 백씨, 연화, 유금필, 진서방이 들어서고 있다. 장수장이 그들을 맞는다.
장수장 어서들 오시오소서.
강장자 오랜만이구먼.. 성주님께서는 안에 계시겠지?
장수장 예, 후원에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가시지요.
그들 장수장을 따라 정자 쪽으로 향한다.
씬 23 동 정원
왕륭과 왕평달, 왕식렴, 변사부, 마사부 등이 정자에서 내려오고 있다.
왕륭 어서들 오세요.
강장자들이 그 쪽으로 다가온다.
강장자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 것 같사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겠지요?
왕륭 덕분에요.. 마님께서도 오셨습니다? 연화두 오랜만이구나.
그들 그렇게 인사를 주고 받는다.
왕륭 자 오르시지요.
강장자 예..
왕륭과 강장자 백씨, 왕평달 등이 정자로 향한다.
씬 24 동 정자
왕륭과 강장자, 백씨, 왕평달 등이 자리해 있다. 하녀들이 찻잔을 내려놓고 있다.
한씨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간 일이 많으셨나 보옵니다?
강장자 그럴리가요. 여기 송악의 왕성주께서 워낙 바쁘신 것 같아서 찾아뵙기를 주저한 것이지요.
왕성주 아니올시다. 한가합니다. 그저 오나가나 주변의 걱정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참견하다보니.... 쓸데없이 시간만 가고...
강장자 우리도 사정은 같습니다. 사방에 늘어놓은 장삿길이 곳곳에 타격이올시다. 이제 아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물건을 내면 낼수록 손해가 극심하니 말입니다.
왕륭 그럴거예요.
강장자 헌데.. 건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한씨 그 아인 잠시 사정이 있어서 성밖에 좀 나가 있습니다.
강장자 .....? 아 예....
백씨 ......들리는 이야기로는 왠 스님을 모시고 절에 가 있다고도 하던데요?
한씨 예, 아는 스님이... 오시기는 오셨었지요. 절에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좀 일이 있어서....
강장자 허허, 부인. 뭘 그리 꼬치꼬치 물으시오. 그만 하시구려.
그 말에 백씨는 입을 닫고 한씨와 왕륭도 어색해진다.
강장자 어이구, 이거 차가 다 식었네 그려. 드시지요. 이거 내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모르겠구먼. 허허...
씬 25 그 일각
유금필과 변사부가 정원 쪽에 서서 한담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장검을 차고 있다.
변사부 듣자하니 무예에 상당한 조예가 있으시다구요?
유금필 ...아니올시다. 과장이올시다.
변사부 허허허, 과장이라니요? 이 사람도 평생을 검을 의지해서 살아온 무부올시다. 유공은 한눈에도 장부중의 장부로 보이시옵니다.
유금필 허허, 과찬이시오. 그저 이리저리 무예 수업을 한답시고 떠돌아 다니다가 강장자 댁에 머물게 된 것이올시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던 길이었지요.
변사부 허허허, 소문 들었습니다. 호랑이도 맨손으로 잡으셨다구요?
유금필 그거야 뭐.... 어쩌다보면 그리 되는 수도 있지요.
변사부 쉽게 얘기하시지만 범을 잡기가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유금필 난 이 송악의 사람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군사들은 절도가 있고, 윗사람들은 군율과 예의가 발라요. 질서와 체계가 이처럼 잘 되어 있는 곳도 드뭅니다. 이러니까 우리 강장자 어른께서 혼사를 계속 서두시는 거겠지요.
변사부 허허, 그거야 뭐... 어른들끼리 얘기고...
씬 26 동 마당 그 일각
꽃이 만발해 있다. 연화가 꽃들 사이를 하릴없이 거닐고 있다.
왕식렴이 그 쪽으로 다가온다.
왕식렴 건이 형님이 아니계셔서 섭섭하시겠사옵니다.
연화 그렇지가 않습니다. 공자께서는 지금 도선 대사님과 함께 계시는데 어찌 내가 섭섭해 하겠습니까?
왕식렴 예? (당황)....도선... 대사님이라니요?
연화 ......?
왕식렴 형님께선 지금... 볼일이 있어서 성밖에....
연화 .....? 그래요? 성밖에 세달사에 계시지 않나요?
왕식렴 예? 아니 연화 아씨, 그게 무슨...
연화 호호호.... 그렇지 않은가 보지요? 그도 아니면, 남들이 알면 안되는 일인가요?
왕식렴 그런 것이 아니라...
연화 저한테까지 감추십니까?
왕식렴 (더욱 당황)....이것 참...
연화 (더욱 우습다) 호호호.. 나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누구입니까? 이 댁의 맏며느리가 될 사람이 아닙니까?
왕식렴 (계속 당황하며) 그야... 그렇지마는....
연화 (계속 웃으며) 공의 형님과 나는 어려서 부터 함께 자라온 정인입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교감으로 다 알수가 있답니다. 식렴공자께선 그것도 모르셨나요? 예?
씬 27 세달사/폭포수(밤)
왕건이 여전히 참선에 들어있다. 온 정적을 다 깨고 있는 물소리가 화면을 압도한다. 왕건은 겉으로는 아주 평온해 보인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물소리는 세상의 숱한 고통과 신음소리로 변하기 시작한다.
도선 (E-에코) 세상의 소리가 들리는가? (사이) 무슨 소리인가? (사이) 울음소리인가, 웃음소리인가? 무엇을 보았는가?
왕건의 얼굴 표정이 경련하고 있다. 그의 시야로 구름도 보여오고, 송악성도 보여오고, 어린 시절에 항해하던 모습들과 서라벌거리와 그 사람들과 그리고 왕륭부부와 연화의 모습이 웃음소리와 함께 다가들었다가는 소용돌이 치며 사라져간다.
도선 (E-에코) 그대는 하나씩 하나씩 다 벗어내어 가고 있네. 그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벗어내고 있어. 아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지. 자신을 버리고 송악도 버리고 그대의 부모도 버리고 그대의 여인도 버리고 하나씩 다 버리는 것이야.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이제 천하를 담게. (사이) 보이는가? 세상이 보이는가?
왕건 (E-에코) 대사님, 무언가가 보일 것 같사옵니다.
도선 (E-에코) 그럴걸세. 혼탁을 벗고 진리의 눈을 찾아가고 있음이야. 이제 세상을 보는 것일세. 삼한의 땅을 보아야 하고 삼한의 인심을 보아야 할 것이야. 그렇게 되면 공자가 할 일이 또 보이게 되지. 글을 보게. 도선비기를 펼쳐봐. 보이는가? (사이) 보이는가?
왕건의 시야로 도선비기의 책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위에 알지 못할 글들이 서서히 지나쳐 간다. 무지의 흰 여백으로 있던 책위에 글들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왕건 (E-에코) 보이옵니다. 대사님. 글이 보이옵니다. 대사님. (환희같이) 보이옵니다. 글이 보여요, 대사님.
도선 (E-에코) 그대는 그곳에서 보리라. 그대를 기다리는 백성들과 세상을 구하겠다는 나서는 저 많은 영웅들과 그리고 수없이 명멸해가는 허망한 세상의 흐름을 보리라. 그리고 그 영웅들 사이에서 그대가 갈 길을 찾을 것이니라.
왕건은 희열과 충격에 떨고 있다. 그는 여전히 참선속에 있는 것이다. 도선이 저만큼 바위곁에 마주앉아 참선에 들어있다. 왕건의 시야로 수많은 그림들과 특히나 견훤에 이어 궁예의 모습이 웅장하게 지나쳐 가고 있다. 그 모습에서 디졸브.....
씬 28 어느 황톳길 (낮)
궁예들이 오고 있다. 미향이 매우 힘겨운 모습이다. 은부가 그 모습을 보고 쪽으로 다가온다.
은부 마님.. 고단하시옵니까?
미향 ....괜찮습니다.
은부 이 고개만 넘으면 되옵니다. 힘을 내시오소서.
미향 ....예...
씬 29 그 한쪽
궁예를 중심으로 환선길과 이흔암, 복지겸이 가고 있다.
궁예 이렇게 여러 장군들과 함께 가니 참으로 든든합니다.
환선길 오랜만에 전장에 나서니 몸이 날아갈 것 같소이다. 소장에게 선봉의 소임을 맡겨주시오소서. 단숨에 명주 성문을 열겠소이다.
궁예 하하하.. 그리하십시다. 환장군이라면 능히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오이다.
환선길 고맙소이다, 장군..
그 때 저만큼에서 허월이 바위에 걸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반가운 듯 웃는 궁예.
궁예 허월 대사님이 아니시옵니까?
허월 대사는 무슨? 얼어죽을 대사? (낄낄거리며) 양길이가 순순히 놔준 모양이구만..? 아둔한 자 같으니라구... 하기사 욕심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지.
궁예 .....(미소) 어르신께서도 이 재를 넘어가는 길이십니까?
허월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그대를 기다렸네.
궁예 어찌해서요?
허월 우리 처지가 부처님 밥을 먹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궁예 허허, 그야 그렇사옵니다마는......
허월 자네 꽁무니좀 따라가려네. 가서 가짜 미륵이 어찌 사는가 그것도 좀 보고.. 곡차도 한잔 얻어먹고 말일세. 괜찮겠나?
궁예 이를 말이옵니까? 함께 가시오소서.
허월 우선 먹을거나 좀 내어놓게. 어제부터 통 먹지를 못했어.
그러나 옆에 눈치를 준다.
궁예 요기할 것을 가져오게.
수하들이 먹을 것을 대령하고 그들 중 일부는 쉬고 궁예와 허월 옆으로 은부와 복지겸이 보고 있다. 다른 장수들은 쉬고 있다.
허월 (게걸스레 먹으며) 양길이 놓아주었으니 이제 홀가분하게 명주를 치게 생겼구먼..
궁예 허허허.. 대사께서는 소승의 일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손바닥 보듯 잘 아시옵니까?
허월 양길이는 그놈의 왕관에 눈이 어두워서 정신을 놓아버렸지. 하지만 명주 성의 성주 김순식이는 그렇게 만만치가 않을게야.
궁예 그렇사옵니까?
허월 비록 김순식이가 신라 조정과는 담을 쌓고 지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네같은 땡초의 편은 아니야. 백성들에게 그런대로 인심도 얻고 있고 말일세.
궁예 일부 소문은 듣고 있사옵니다마는....
허월 명주는 큰 성이야.. 그대의 군사로는 어림도 없네..
궁예 허허허... 그야 부처님만 알 일이지요.
허월 허허, 그것참 부처님께나 어지간히 팔아먹는구먼 그래. 미륵을 내세워 백성들을 현혹시키지 말고.. 차라리 떳떳하게 제왕이 되고 싶다고 해. 그래도 무진주의 견훤은 솔직한 맛이 있어. 대왕이 되겠다고 떳떳하게 나섰단 말이야, 아니 그런가? 견훤을 아는가?
궁예 예, 잘 압니다. 이 시대의 영웅이지요. 걸출한 인물입니다.
허월 그래도 속은 여물었구먼... 남의 칭찬도 할 줄 아니 말일세. 허허허. 먹을 거 다 먹었으니 우리도 어서 가세.
궁예 대사께서 견훤이란 사람은 어찌그리 잘 아시옵니까?
허월 사람들은 그런다더군, 서남해의 견훤이와 그리고 이 동쪽을 가고 있는 궁예 자네가 머지않아 자웅을 겨룰 것이라고. 어서 가세
씬 30 무진주성 외경
견훤군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다. 병사들이 성곽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자막 : 무진주(현 광주)
견훤(E) 당나라가 곧 무너진다...?
씬 31 동 대전
견훤과 능환이 최승우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황소의 난을 진압한 번진(절도사)들의 세력이 강성해 황실은 유명무실하게 되어 있는 형편이옵니다.
견훤 허....
최승우 마치 지금의 이 신라국과도 같은 운명이지요.
견훤 말은 들었소마는...
최승우 대륙이 저렇게 수없이 찢겨지고 분열을 보이고 있을 때, 이 삼한이 다시금 정비되어야 할 것이옵니다.
능환 옳은 말일세. 지극히 옳은 말이야. 저들은 지금 저희들 내부 사정이 다급해서 우리 쪽에 간섭할 여지가 없어. 이럴 때, 삼한이 통일되어야지. 어차피 신라는 갔으니까 말이야.
최승우 (미소)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적지않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옵니다. 성급해 하실것도, 또 너무 여유를 부리실 것도 없사옵니다. 치밀하고도 꾸준한 창업의 길을 닦으셔야 하옵니다.
견훤 어찌하면 좋겠소?
최승우 한 나라를 건설하는데는 대의 명분이 분명해야 하고 창업의 원대한 이상이 서야 하옵니다. 폐하께오선 그것을 다 갔고 계시옵니다.
두사람 .......?
최승우 지금 폐하께서 계신 땅이 어디옵니까?
능환 (강한 충격) 백제.....?
견훤 .....?
최승우 그렇사옵니다. 바로 그것이옵니다. 폐하께서 지금부터 하실 일은 그저 이름없는 대왕폐하가 아니오라 백제를 다시금 건설 하시어 폐하에 오르시는 것이옵니다. 대 백제국의 건설 말이옵니다.
견훤 백제국이라, 백제국?
최승우 그렇사옵니다. 폐하께오서는 백제인의 후손이옵니다. 그리고 이곳은 백제땅이옵니다. 이미 이곳의 신라는 없사옵니다.
견훤 ......
최승우 폐하께선 지금 일어서고 있는 그 어느 영웅호걸보다도 먼저 국호를 갔고 있는 제국의 황제가 되시는
것이옵니다. 제일 먼저 말이옵니다. 씬 32 궁예의 군영
궁예들이 군막들 사이를 지나쳐 오고 있다. 백성들이 '장군님, 미륵부처님' 하고 부르며 궁예들 주위에 몰려들어 합장을 하거나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한다. 궁예가 말에서 내려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군영 쪽으로 향한다. 허월이 그 모습을 보며 묘하게 웃는다. 환선길과 이흔암이 어리둥정하여 서로를 바라보고, 복지겸은 더욱 표정이 굳어진다. 은부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미향을 바라본다. 미향은 얼이 빠진 모습이다.
씬 33 동 군영 마당 입구
종간과 신훤, 원회가 마중나와 반갑게 궁예들을 맞고 있다.
종간 어서 오시오소서.
신훤, 원회 어서 오시오소서, 장군..
궁예 그간 별고 없으셨소이까?
종간 예.. 안으로 드시지요.
궁예, 안으로 향하다가 높히 걸려 있는 잘려진 목들을 본다.
궁예 어찌된 일이오?
종간 군법을 어긴 자들이옵니다. 남의 재물을 빼앗거나 부녀자들을 희롱한 자들이옵니다.
허월 ......?
궁예 ......어리석은 자들이로고... 어찌하여 그런 악행을 저질렀는고...? (도리질을 친다)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 등이 긴장한 모습으로 목들을 바라본다. 그 때 원회와 일군의 병사들이 한 군관을 끌고 온다. 모두들 그 쪽으로 시선이 쏠린다.
궁예 무슨 일인가?
원회 형을 집행할 죄인이옵니다.
종간 (보며) 수하들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훈련 도중 백성들의 보리밭에 손을 댄 모양이옵니다.
군관 ....(하얗게 질려)...용...용서하시오소서.. 훈련은 엄하고 배가 고파.....
궁예 딱하구나... 어찌 그걸 모르랴? 허나, 백성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어떻게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단 말인가? 형을 집행하게.
원회 예!
군관 살려주시오소서.. 살려주시오소서... 장군님.. 장군님...
원회와 군사들이 그렇게 군관을 끌고 멀어진다. 모두들 궁예를 보고 있다.
허월 살벌하구먼... 그래도 여기가 부처님 동네인가?
궁예 군법을 인정아래 두면 아니되옵니다. 한 번 용서를 하면 열번의 잘못이 다시 태어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씬 34 그 군영 어느 곳
궁예를 선두로 모두 군영 마당으로 들어서 온다. 수많은 군사들이 기치창검을 휘날리며 도열해 있다. 궁예가 들어서자 군사들이 끊이지 않는 함성을 계속 지르고 있다. 궁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화답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복지겸이 한숨을 내쉰다.
씬 35 동 군영 일각
궁예들이 지나치고 있다. 궁예가 지나가다가 그 군영안 한켠에 마련된 병자들의 거처로 다가간다. 여기저기서 숱한 병자들이 신음을 하고 있다. 궁예가 안쓰럽게 바라보며 일일이 그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상처를 보살펴 준다. 병자들은 그를 참으로 부처님 대하듯 하고 있다.
병자1 (죽어가며) 미륵.... 장군님....
궁예 얼마나 괴로운가? 얼마나 아픈가? 이런.... 열이 아주 심하네 그려.
병자1 가까이 오지 마오소서. 염병이옵니다.
궁예 그게 무슨 소린가?
신훤 장군, 가까이 가지 마오소서. 전염병이 돌고 있사옵니다.
궁예 무슨 소린가? 이들은 모두가 부처님의 백성일세. 그렇다고 내가 가까이 못할게 무엇인가? 염병이라니... 어찌 된겐가?
종간 못먹고 몸이 부실하여 생긴 것이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식량이 바닥이 났사옵니다. 거기에다가 전염병이 돌고 있어 환자가 급증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토록 어려웠는가?
종간 남은 식량은 이삼일 버티기도 어렵사옵니다. 사실상 끝이옵니다.
궁예 .........?
모두들 ........
궁예 지금 군사들은 어찌하고 있소?
종간 장군께서 북원에 다녀 오시는 동안 하루에 식사량을 절반으로 줄여 왔사옵니다.
궁예 (끄덕이며) 먼저 아픈 이들을 돌보게. 이들에게 미음과 흰쌀밥을 지어주게. 이들이 먼저 일세.
병자1 아니옵니다. 장군님, 고마우신 미륵부처님.... 우리는 아니옵니다.....(울며) 싸울 병사들에게 주시오소서.
궁예 아닐세. 그대들은 죽지 않아. 나의 밑에서 아무도 굶거나 병들어 죽는 이는 없다. 미륵부처께서 약속하셨다. 우린 모두 극락으로 이를 것이야. 힘들을 내라. 우리는 부처님의 백성들이다.
궁예는 계속해 여기저기 환자들을 보살핀다. 아픈이들은 서로 다투어 손을 내민다. 그들의 열광속에서 부처의 모습은 또 한번 유감없이 보여진다. 복지겸이 보며 한숨을 내어쉰다. 은부가 그런 복지겸을 본다.
씬 36 동 그곳
명길이 사위1과 함께 느린 걸음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나오고 있다. 궁예들이 병사 군막에서 나와 그 쪽으로 다가온다. 궁예와 제장들이 예를 갖춘다.
명길 어서 오시게... 의외로 빨리 돌아왔네 그려. 미향이도 왔구먼....
미향 .....(고개 숙여 예 올리고)
명길 허, 뭔 일이 있었던 모양일세 그려. (복지겸을 보고)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복지겸 주군의 영을 받았사옵니다.
명길 형님의 영이라고....? 이장군... 환장군까지....이곳으로 다 몰려오면 거긴 어떻게 하나?
은부 주군께서 명주성을 하루라도 빨리 함락시키라고 보내주신 것이옵니다.
명길 쯧쯧쯧.....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누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아무도 말이없다. 종간과 은부만 서로 눈치를 주고 받으며 웃고 있다. 복지겸도 반쯤 눈을 내려깔고 있다. 한쪽에선 막 군사들에게 주먹밥을 배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명길 어쨋든 끼니 때가 되었으니 안으로 드세나. 돼지 한 마리 잡아서 구워 놓은 것이 있네. 술도 좀 있고. 들어들 가세.
허월 .......
궁예 소장은 병사들과 함께 하겠사옵니다.
명길 뭐라? 병사들과? 저 주먹밥 한덩어리와 멀건 풀국 하나인데? 장수가 저런걸 먹어?
궁예 군량미가 바닥이 드러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군사들이 밥 한 덩이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장수된 자가 어찌 기름진 음식을 탐할 수 있겠사옵니까? 들 가십시다.
궁예, 그렇게 가면 환선길과 이흔암이 입맛을 다신다. 명길이 궁예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부르르 떤다. 허월이 미소를 짖는다.
명길 저 저런...
씬 37 동 그 근처
군사들이 줄을 지어 밥을 타가고 있다. 궁예들이 다가오자 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다. 궁예도 스스럼없이 그들 대열에 선다. 계속해 군사들이 밥을 타 나가고 있다. 군사들은 여전히 웅성거리며 궁예에게 최대의 존경심을 내보이고 있다. 드디어 궁예는 밥한덩어리와 멀건 국을 작은 바가지에 받는다. 그리고 군사들속에 섞여 앉는다. 미향과 시녀도 그렇게 밥을 받아 궁예 곁에 앉았다. 환선길과이흔암, 복지겸들은 역시 마지못해 한덩이씩 받아들고 그저 눈치만 보고 있다. 열화와 같은 군사의 환영속에서 궁예 막 밥을 한덩이 베어 들고 있는데 어디선가 청천병력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허월 녜, 이놈 애꾸중놈아! 과연 미륵의 흉내를 잘도 내는구나!
모두들 .......(뻥해서 허월을 본다)
허월 이 사악한 중아, 흉내는 쉬워도 참 미륵은 어려운 것이니라. 이제 그만 그 가면을 벗거라.
궁예 .....
허월 그 가면을 벗으라 하였느니라. 이 교활한 중아!
< 19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