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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김주영 작가의 고향, 진보장터를 찾다(한경희/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이장희 추천 0 조회 84 15.02.09 19: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주영 작가의 고향, 진보장터를 찾다(글/한경희-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1.
안동에서 진보는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길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안동에서 동해바다를 가자면 늘 진보읍내는 스쳐가는 동네이다. 말 그대로 스쳐가는 길이지 들리지는 않는다는 거다. 더구나 외곽도로 4차선이 널찍하게 닦인 이후 일부러 그곳엘 들린 적은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여행길이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신촌 약수터에 들러 닭백숙을 시키는 일이나 약수를 마시는 일이 여행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진보풍경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곳 진보는 <객주>로 유명한 작가 김주영의 고향이다. 그의 소설에 유독 장터풍경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진보 자체가 영덕, 강구의 수산물과 안동 등지의 농산물이 어우러지는 중요 장터였기 때문일까. 왜 하필 작가는 보부상과 저자거리를 작품의 중요한 내용을 삼았을까를 생각하며 겨울 짧은 해를 두고 반짝 길나서기를 서두른다.


진보장날이 3, 8일이란 걸 알고 일부러 일요일이기도 한 3일에 맞춰 진보장터를 찾았다. 설 대목을 앞둔 장터골목은 오후 3시에 육박하고 있었으나 많은 사람이 오갔다. 설 명절 앞에는 뭐니뭐니해도 튀밥을 튀기고, 강정을 만드는 일이 단연 손꼽힌다. 도시의 마트에는 산뜻한 조명과 함께 말끔하게 정돈된 물건이 진열되어 있다면 재래시장에는 포장이 되지 않은 물건들이 제 모습을 별로 감추지 않고 쌓여있다고 해야 할까. 마치 화장을 하지 않은 여인 같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미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재래시장의 풍물이 주는 여유로움과 볼거리는 바로 이런 맛에 있지 싶다.


진보장터는 경북 북부내륙 지방에서는 강구와 영덕이 제일 가까운 시장이다. 그래서인지 문어를 비롯한 어물이 엄청 많이 보인다. 이름도 잘 모를 녀석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데 어떤 것은 꽁꽁 얼어 있고 어떤 것은 바다를 벗어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농산물보다 해산물이 훨씬 눈에 많이 띈다. 그 지역 땅이 어디에 위치하는가는 참 다양한 물산을 만들고 관습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좁은 장터를 한바퀴 도니 식당 자체가 거의 없어도 횟집 서너 집은 그 규모나 외양이 절대 빠지지 않을 듯하다. 앉아서 한가하게 밥술이나 뜨고 있을 시간이 장꾼들에게 있을 턱이 없어서일까.


햇살이 제법 따뜻하고 하늘도 맑은 날이었지만 그래도 겨울날씨답다. 정오를 넘긴 햇살에는 시름시름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고 있고 바람은 차츰 찬기운을 실어오고 있다. 모락모락 김 오르는 찐빵 트럭도 몇 대 보였으나 진보 읍내를 한바퀴 도는 일을 먼저 끝내기로 하였다. 시장의 입구나 끝이 어디인지를 모르고 돌아다니다보니 대충 그 길목이 눈에 들어선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시장이 보이다가 세 갈래로 나뉜 중앙통에 들어서니 세 갈래의 중심지점에 많은 장꾼이 보따리를 풀어놓고 물건을 진열해 두고 있다. 차보다는 사람이 많은 시장통이라 중앙으로 물건이 나와 있어도 별 문제가 될 게 없는 모양이다. 가까이 경찰서도 보이고 경찰 두어 명이 장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




.

 

 



2.
김주영은 외가인 진보면의 월전리에서 태어났으니 그곳이 생가인 셈이다. 동네 월전은 영양과 영덕방면으로 나뉘는 세 갈래 길, 검문소가 있는 동네라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찾아내지를 못했다. 진보장터에서 영덕방면으로 4Km 이내 허름하고 지붕도 더러 스러진 집을 찾아야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미 오래된 정보라서 그 스러져가던 집은 말끔하게 수리했거나 완전히 새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장 가장자리, 거의 장거리가 끝나고 주차장이 있는 주변에 있는 식당 주인에게 물어보니 작가의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그 외 정보를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월전리에서 태어나서 진보 읍내에서 유년을 보낸 것 같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만난 김주영 작가의 초등학교 동창생 임남호 선생은 친절하게도 그 시절 작가의 삶의 터전을 알려주는 수고를 해주셨다. 한창 5일장이 열리는 장거리에서는 좀 떨어져 있는 주택가 골목으로 안내해주신다. 시골이라 해도 도로정비를 했던 것일까. 골목이 얼마나 넓은지 의아스럽게 길을 걸어가자니, 임 선생은 옛날 구시장(구장터)이라며 알려준다. 그러고보니 넓은 골목길이 달리 만들어졌던 게 아니라 이미 있던 도로여서 가능했구나 싶었다. 또 오늘날 2차선 국도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이 넓은 길이 그 옛날 시골장터였다니, 그 규모가 요새보다 훨씬 컸을 거란 것이 쉽게 짐작이 간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경사가 급한 골목이 눈앞으로 펼쳐지고 동-서로 뻗은 넓은 골목길이 눈  앞에 나타난다. 언덕배기로 오르는 길에는 진보면사무소가 정면으로 있고 동쪽으로는 새마을금고가, 서쪽으로는 옛 운치가 있을법한 이름의 가게가 나란하다. 혹시, 지금의 이 가게가 1950년대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 진보 저자거리의 전통과 역사를 한 몸에 받을 거 같았다. 그런데 그 가게를 밖에서만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안으로 인기척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기만 하고 말았다. 어쨌든 그 옛날 가게 자리일 거란 추측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가게 바로 옆집이 김주영 작가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아마도 유년의 시간을 이 구시장 장터에서 보낸 모양이다. 정말 대문만 열고 나오면 바로 장터였을 거란 추측이 쉽게 간다. 현재 장터는 당시에 논밭이었다고 한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에서 보여주는 시장풍경과 어린 소년의 모습이 이 시절 삶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에 이 집은 함석지붕이 멋있었던 집이었다고 한다. 당시 함석집은 잘 지은 집 축에 들었던 것이다. 전쟁 이후의 우리 삶살이란 것이 거덜 나 있었고, 시골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현재 이 집은 기와를 올린 지붕이 나름의 규모가 있었다. 담장과 굳게 닫힌 대문으로 집안 마당이며 자세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집 크기는 대충 헤아릴 수 있었다.


김주영 작가를 두고 아스팔트 킨트라고 할 수야 없다. 진보면을 두고 도시풍경을 읽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읍내 앞에는 주왕산이 가까운 탓인지 키가 훌쩍 큰 산이 하나 앉아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보낸 유년의 공간은 단순히 농촌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낯설고 신기한 물건이 가득하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 한복판에서 유년을 보낸 작가에게 고향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시장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익혔을 작가에게 고향은 그야말로 시장이었을라나. 그래서 유독 그의 많은 작품에는 시장의 풍경이 강하게 드리우고 있는 것일까.


작가의 대표작 <객주>만 하더라도 그렇다. 소설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임이 분명하다. 엿가락 늘어지듯 이어지는 이야기의 생명성은 구수한 입담처럼 진술된 글발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아주 독특한 개성들을 등장인물에다 맡겨두고서 걸판진 장꾼들의 생환을 그려내고 있다. 전국을 걸쳐 마치 도보여행이라도 한 듯 그려내는 지리하며, 그 지방의 풍물과 장사꾼들의 들고 남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글은 얼마나 많은 독서와 생각에서 가능했을까. 또 전국 오일장이란 장은 훤하게 꿸 정도로 두루 돌아다닌 발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이기도 하다.


한국보부상을 다룬 그 장편소설에는 전국 보부상의 계보와 흐름이 통째로 등장한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초간을 낸 소설 가운데 안동 지형과 이야기가 담긴 것을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안동의 계추리나 예안의 왕골은 소문이 자자하여 전라도에서도 쓰임새가 많다”는 이야기이며, 문경새재부터 상주, 점촌, 용문 등을 거쳐오는 과정에서 안동을 담아낸 표현도 재미있다. 보부상들에게 안동은 양반의 도시로 이해되고 있었던 측면이 강하고 그것을 부각시킨 내용이라고 본다. “풍산역말을 나서고부터는 안동부도로 들어가는 행인들이 심심찮게 많았고, 견마잡이가 딸린 세마를 타고 거드럭거리는 양반 행차도 가끔 눈에 띄었다.” 양반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그대로 느껴지는 표현이 아닌가. 신분의 귀천이 있던 사회에서 보부상들이 바라본 안동양반의 이미지는 어땠을지 자못 궁금하다.


여전히 귀한 특산품으로 인기 있는 안동삼베는 그때도 보부상들에게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그 물목을 구하러 안동으로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상인들이 안동에 들러 어김없이 삼베를 구입해갔을 것은 정한 이치이다. 안동 삼베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면 “삼베라는 것이 그렇게 물꼬 터진 듯 몰려나오는 품종이 아니다. 겨울 삼동에 무릎이 벗겨지도록 삼을 비벼삼아 여름철 농사 틈을 봐서 실을 날고 베틀에 올리면 온종일 매달려야 네댓 자를 짠다. 사십 자짜리 한 필을 짜는데 여섯 근의 삼이 들고 십여일이 걸려야 하니……”


그런데 작가는 정작 진보 시장 이야기를 <객주>에 담고 있질 않다. 말 그대로 향시(鄕市)라서 별로 쓸 거리가 없었을까. 아니면 가까운 고향사람들 이야기를 아예 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소설이 담고 있듯 신분이 높은 귀족도 아니고, 어디 정착해서 뿌리를 내린 평범한 사람들도 아닌, 장날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인생의 역정은 그 만큼 애환이 남다른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인간관계가 맺어지고 돈을 따라 쉽게 배신이 오가고 술수가 난무하고 남, 녀의 만남도 상당히 자유로웠을 이들의 삶이 <객주>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

 




3.
몇 해 전, 김주영 소설 가운데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텔레비전 독서프로그램에 선정되면서 많은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유년의 추억과 상처를 형제의 눈으로 잘 담아낸 이 소설에도 배경은 역시 장터풍경이다. 시장에서 자란 소년이 소설가가 되어 쓴 글에 자신의 유년체험이 시장풍경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이다. 작가와 장터는 어떤 인연으로 깊이 이어져온 것일까. 그것은 당연하지 않을까도 싶다. 태어난 외가 역시 장터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초등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장터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어머니가 식당을 경영하셨던 것으로 알려진 진보의 집은 대문만 열면 시장으로 연결되었던 모양이다.
특히, <객주>처럼 장편소설을 통해 한국보부상의 면면을 보여주는 사례는 문학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많은 예술행위가 기층민의 삶을 다루기보다 기득권 계층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할 때, 김주영의 소설적 근원에서 저자거리, 장꾼, 장돌뱅이, 전통장날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작가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장날마다 모여든 사람과 물건들을 보고 자란 작가에게 사람의 어울림,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으로서의 장터, 다양한 시장사람들의 소음과 갈등이 어떻게 비췄을까. 인격이 모자라고 되먹지 못해 돈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을까. 먹고 사는 일의 팍팍한 현실을 그대로 피부 깊숙이 배우는 교과서가 되었을까. 그래서 사람들의 복잡한 세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고민하기 시작해서 사람,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었을까. 여러 생각이 들고 나아가질 않는다.


이 작품에는 너무나 가난해서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년 형제가 등장한다. “면사무소 오르막길 올라가는 길에 있었던 궁핍의 시절”, 이 궁핍은 유년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가 살던 집과 언덕배기 면사무소는 지척에 있었다. 장날이면 집 가까이 떠들썩한 풍경을 고향으로 태어난 주인공 형제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집 밖을 나오면 놀이를 할 수 있는 곳도 시장이고, 먹을 것이 뭐가 있을까를 돌아보는 공간도 바로 시장이다. 언제나 배가 고픈 상태인 소년에게 시장은 그런대로 큰 위안이 되기도 했을 일이다.
유년의 형제에게는 가난한 홀어머니와 집을 나간 후 소식 없는 아버지가 배경이 되는 가계가 있었다. 이들 형제 중 주인공인 나는 형으로 삼학년에 지나지 않는 어린 아이이고, 여기서 세살 아래 아우는 이제 일곱 살 정도로 어렸던 시절, 그 시절의 가난과 체험을 추억하는 이야기이다. 가장 눈에 드러나게 가난이 묘사된 사건은 두 가지로 모아진다. 모두가 배가 고파서 장거리에 아이들은 술도가(양조장) 고두밥을 삼손 같은 지킴이의 눈을 피해 훔쳐 먹었다. 그러다 이마에 혹이 나도록 부딪혀서 복숭아만한 상처에 된장을 발라 처매기도 한다. 또, 밥 대신 술비지로 아침을 먹은 날, 학교 청결검사에서 선생님께 술 마신 것으로 오해를 사서, 의자를 하루 종일 드는 벌을 서던 일 등이 그러하다.


어린 소년의 눈으로 세계를 이해한 물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거울로 대표되는 신기하고 낯선 물건을 보면서 생각이 자라는 경우다. 또 하나는 교실마루 바닥체험에서 얻은 은밀한 세계, 아무도 알 수 없이 혼자만 즐기는 신비한 세계체험이 그것이다. 먼저, 시장을 통해 세계를 배우던 소년에게 가장 놀라운 물건 거울을 살펴보자. “굶주림이 내 뒷덜미를 뒤틀어 잡고 간단없이 윽박질러 대는 중에서도 어린 날의 나를 매혹적으로 끌어당겼던 것은 거울의 발견이었다.” 이발소에서 걸린 거울을 통해 소설 속 ‘나’는 세상을 비추는 이미지를 드디어 알아차리게 된다. 모자라는 키를 까치발하면서 이발관 창틀을 잡고 거울과의 유희를 즐길 정도로 낯설고 이색적인 물건에 깊이 매료되어 유년을 보낸 소년이 등장한다. 또한 거울은 집에 거울이란 것이 없다는 것까지 생각하는 데로 나아간다.


두 번째로 혼자만의 특별하고 비밀스런 체험이다. 교실마루바닥 옹이 밑으로 난 세계는 먼지를 뒤집어쓴 거미줄이 대추나무 가지처럼 엉켜있고, 칼칼한 목구멍에서 재채기가 맹렬하게 터져 나오는 곳이다. 그 마루 밑 세계를 포복하면서 소년은 “결정적인 장소”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연필, 삼각자, 각도기, 크레용, 비행기로 접힌 종이, 지폐일 것 같은 종이, 분필, 노트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 문방구 어떤 것도 없거나 부족했을 소년에게 이 지하세계는 단순히 먼지투성이 허접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물의 발견으로 봐도 좋을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다양한 물건과 낯선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한 시장이 주는 놀라운 것들이 소년을 들뜨게도 한다. 김형석으로 불리는 소년에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 기호는 정류장이 된다. 자라면서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동네를 세상으로 알고 사는 아이들에게도 미래 어느 새로운 공간과 꿈을 향한 그리움이 있는 법이다. 그 낯설고 아련한 미래를 정류장의 버스는 실어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두 번씩 동네를 지나가는 완행버스, 게딱지만한 매표소 등, 버스에 탄 승객을 보고 “멀고 먼 타관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유년시절이 그것이다. 언젠가 홀어미 품을 벗어나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고 싶은 막연한 동경이자 인생의 충동이 정류장을 통해 꿈틀대기 시작한다.


시대가 혹은 누구나 가난하던 시절의 소년에게 장난감은 따로 있었던 게 아니다. 그야말로 장난감 없이 장난이 되던 시절이었다. 놀이터가 없어도 온통 놀이가 되던 시절, 풀, 돌멩이, 삭막한 바위, 불 꺼진 깜깜한 방, 등 “아이들이란 그들 자신이 바로 놀이 기구이기 때문”이라고 작가가 설명한 것처럼 그대로 즐거운 일이 가득한 유년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장난감 하나 가진 적 없어도 누구보다 즐거웠고 충동적인 유년을 보냈을 소년을 보여준다.


유년의 추억을 담은 작품에는 한국현대사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아마도 미군정기라 추측되는 내용에는 미군 흑인병사 앞에 아우나 동네 아이들이 “할로, 츄잉껌 기브미”를 쏟아내 껌을 얻는 일이 생기고, 이발소 주인이 빨갱이로잡혀가고, 소년의 학교 여선생도 사라진다. 심보가 사나운 시계포 최씨의 거짓말에 애꿎은 석도가 경찰서에 끌려가고, 소년의 홀어미도 잡혀가 곤욕을 당한다. 남순애는 학교에 낼 기성회비가 없어서 거짓으로 돈을 잃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양조장 일꾼 석도도 세경 한 푼 못 받고 고향을 떠나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옥화는 오래지 않아 죽는다.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본 시장(혹은 시장이웃)에는 다툼이 끊이질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또 살아지는 것을 배운다.



 


4.
작가 김주영에게 고향은 무엇인가를 물어볼 기회는 앞으로 많아지지 않을까. 청송군이 ‘객주테마타운’을 건설할 계획이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에게 고향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무엇이어야 하나. 고향은 인간을 향한 의무규정을 지니기나 하는가. 마치 무슨 규칙처럼 정해진 어떤 것도 없는 고향을 두고 사람들만이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산천은 유구한 것이지만 사람들만 들고 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사람들이 그 유구함에 매이고, 오래된 기억에 매이고, 시대를 기억하고 한 때를 부여잡는 것이 아닐까. 그 고향이란 무대에서의 한 때는 또 얼마나 중요한 자기를 만들어 주는가. 특별히 어린시절, 그 시절의 이웃과 동무, 풍경, 일상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소중하지 않던가. 굳이 그 까닭은 아마도 철들면서 맨 처음 만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그 처음 하는 일은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도 않지 않는가.


마무리하면서 김주영 소설을 이야기 할 때 절대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지역 언어가 살아있다는 거다. 아우가 형을 부르는 “희야”, 아줌마라 부르는 “아지마씨” 등, 진보 말이 가득 들어 있다. 소설 대화에 등장하는 이곳 방언들이 정겨울 정도로 아름답다. 1970년대부터 소설을 본격적으로 쓴 작가에게는 우리 지역의 문화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이 남달랐음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작가는 안동에서 문인협회 안동지부에서 문학활동을 함께 했던 흔적이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현재 안동에 거주하는 몇몇 작가들도 김주영 소설가를 술을 좋아하고, 후배들을 잘 다독이며 이끌었던 선배작가로 기억하고 있다. <안동>

통권114호 -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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