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타히티/수평선까지 별들이 빛나는 슬픈 열대
글·사진 이해선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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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히티의 바다. 투명한 바다 위로 빛이 투과되면서 여러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
산호초에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은 섬의 푸른 치맛단을 장식한 레이스 같다.
바다 건너편에는 도깨비 뿔처럼 기괴한 봉우리들이 솟아있는 섬 하나 떠 있다.
모레아(Moorea) 섬이다.
화산 폭발로 생겨난 봉우리들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다.
모레아 섬 일몰 풍경이 고성(固城)같다던 고갱의 표현에 공감한다.
오래된 흑백 영화 한 편을 보았다.
1958년도에 만들어진, 제목은 <남태평양>이다.
영화 속 무대는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이다.
타히티는 화가 고갱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섬이다.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가 있는 풍경, 티아레(치자꽃의 일종)를 머리에 꽂은 타히티 여인을 담은 그림 한 점, 영화 속 남국의 영상과 고갱의 그림들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속 풍경과 언제부턴가 내 마음 속에 강한 인상을 남긴 화가의 생애를 쫓아 먼 길을 떠난다.
내가 타히티를 찾았을 때 섬은 온통 축제 열기로 가득했다.
부둣가 가설무대에서는 타히티 민속춤 타무레(Tamure) 공연이 한창이었고 바다에서는 카누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항구 도시였다.
부두에서는 여러 섬으로 떠나는 여객선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었고 섬 해안도로는 교통 체증으로 멀미를 앓고 있었다.
공항 부근에 위치한 민박집에 여장을 푼다.
이곳은 섬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조망이 뛰어나다.
해저산맥 같은 산호초 띠들이 방파제처럼 섬을 삥 둘러싸고 있다.
산호초에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은 섬의 푸른 치맛단을 장식한 레이스 같다.
바다 건너편에는 도깨비 뿔처럼 기괴한 봉우리들이 솟아있는 섬 하나 떠 있다.
모레아(Moorea) 섬이다.
화산 폭발로 생겨난 봉우리들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다.
모레아 섬 일몰 풍경이 고성(固城)같다던 고갱의 표현에 공감한다.
부두 뒤편으로 높은 산 하나가 하얀 구름을 목에 두르고 알은 체를 한다.
산은 높아 보였다.
나는 산봉우리의 유혹에 섬 내부를 둘러보는 사파리 투어 예약을 하고 만다.
사파리 투어 프로그램은 지프를 타고 섬을 가로지르는 산악도로를 따라 섬 내부를 하루 종일 둘러보는 것이다.
바다를 보러왔다가 산의 유혹에 먼저 넘어 간 것이다.
타히티 본섬은 화산섬으로 해발 2241m의 오로헤나(Orohena) 산과 깊은 계곡이 있다.
열대우림으로 뒤덮인 골짜기에는 강과 폭포 등이 있어 많은 트레커들이 이곳을 찾는다.
사파리 투어 지프는 파페에테 시내 곳곳에서 일곱 명의 사람들을 태웠다.
대부분이 프랑스 사람이고 동양인은 나 혼자이다.
차는 섬 북쪽으로 난 해안도로를 달린다.
섬 북쪽 해안은 산호초 띠들이 없어 파도들이 해변에서 부셔지고 있다.
이 섬에서 처음으로 파도소리를 듣는다.
비 내리는 해안에서 사람들이 파도타기를 하고 있다.
시내를 벗어나 30여 분 달렸을까? 드디어 해안도로를 버리고 차가 섬 내부로 들어서고 있다.
왼쪽으로 강이 흐르고 앞쪽으로 깊은 골짜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간간이 뿌리던 비는 그쳤지만 산봉우리들은 구름에 숨어서 그 높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높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의 신비감은 더한 것 같다.
강을 따라 길은 계속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물이 흐르는 샛강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열대 우림 사이로 대나무 숲을 만날 때면 우리네 남도의 어느 산길에 온 듯하다.
그 흔한 야자수는 보이지 않고 열매가 고구마 맛이 나는 타피오카 나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깎아지른 벼랑으로는 폭포들이 흘러내린다.
규모는 작지만 네팔에서 티베트로 오르는 길 장무 부근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 한 폭포 아래에 차를 세운다.
우리를 안내하는 타히티 청년은 비 때문에 맑은 계곡 물에 수영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계곡 중간쯤 산언덕에 한계령 휴게소를 연상시키는 작은 호텔이 하나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다.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호텔 지하에 있는 와인 저장소를 둘러본다.
이 섬을 지배한 프랑스 사람들이 좋은 와인을 마시기 위해 섬 계곡에 만든 것이다.
구름 사이로 봉우리들이 언뜻언뜻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도를 살펴보지만 어떤 봉우리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곳 지형이 하나의 거대한 분화구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섬 깊숙한 곳에 있는 산정호수까지 왔던 차가 길을 돌린다.
산을 가로지르는 길이 임시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일행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새어 나온다.
섬 남쪽 산정에서 산호섬들이 만들어내는 비경을 보려했는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인근 계곡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타히티 원주민들이 섬기던 티키(Tiki) 신전 터가 있다.
오늘밤 이곳에서 티키 신을 기리는 제의가 있다며 몇몇 원주민들이 북을 치고 있었다.
우리의 굿거리장단 같은 북소리가 잠들어 있는 지신을 깨워보려 하지만 쇠잔해 가는 땅의 기운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돌하르방 같은 티키 석상 위로 눈물같은 비만 무심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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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에 나온 섬사람들이 창던지기를 하고 있다. 이들은 여러 섬에서 대표로 참가한 사람들인데 대부분 장년층이다. 여든이 다 된 할아버지도 창을 던진다. |
화가 고갱이 살았던 모레아 섬
타히티 본 섬에서 건너다보이는 모레아 섬은 화산의 흔적이 뚜렷하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토히에아(Tohiea·1207m)이고 가장 유명한 봉우리는 현지 화폐인 100PF(폴리네시안프랑)에 나오는 모아로아(Mouaroa·880m)이다.
모아푸타(Mouaputa·830m) 봉은 산꼭대기에 바늘귀처럼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해가 무서워 밤에만 활동하는 도둑의 신 히로가 이 산을 훔쳐가려 할 때 타히티 신 파이가 창을 던져 구멍을 뚫자 놀란 닭들이 울어 히로가 도망갔다는 전설이 있다.
파페에테 부두에서 페리를 탄다.
페리는 검푸른 바다를 채 가슴에 담기도 전에 모레아 섬 선착장에 도착한다.
선착장에는 섬을 도는 로컬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의 화물칸을 일자형 좌석으로 개조한 버스인데 섬의 주요 교통수단이다.
‘트럭버스’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본다.
해안을 따라 60㎞의 일주도로가 놓여있다.
쿡 만(灣)과 오푸노후 만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섬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박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섬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많은 영화들의 촬영지가 되기도 하였다.
흑백영화 <남태평양>과 기내에서 보았던 <러브 어페어>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적한 바닷가에 오두막 한 채를 빌린다.
야자나무 몇 그루 해변에 서 있고 인적도 뜸해서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기에는 안성맞춤인 숙소다.
외딴 섬에 작은 집 하나 생기자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산호초 띠들이 만리장성처럼 섬을 삥 둘러싸고 있다.
대양을 지나온 지친 파도들이 섬 모래톱에 몸을 누이려 해 보지만, 산호초들은 어김없이 파도를 붙잡고 늘어진다.
성난 파도들은 허연 포말을 입에 물고 아우성치며 스러지고 있다.
산호초의 안쪽 바다는 덕분에 호수처럼 잔잔하다.
수백 만 년 동안 산호가 부셔지며 만들어 낸 라군(Lagoon) 위로 반사된 햇살 그림자들이 퍼덕거리는 물고기들처럼 수면 위를 유영하고 있다.
숙소 옆 바닷가에 민속촌인 티키 빌리지가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청년이 고갱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티아레 꽃을 내 머리에 꽂아준다.
나도 고갱의 그림 속 타히티 여인이 된다.
청년은 이곳에서 무용수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테로, 고향이 마르퀴즈 섬이란다.
그곳은 고갱이 생을 마감한 섬이다.
빌리지 마당에서는 타히티 민속춤 타무레 연습이 한창이다.
남자들은 양 무릎을 폈다 오므렸다 반복되는 가위춤을 추고, 여자들은 엉덩이를 빠르게 회전시키는 춤을 춘다.
남녀 모두 주된 동작이 허리 아래 부위에서 행해지는 아주 섹슈얼한 춤이다.
격렬하게 춤추는 저들의 얼굴에서 고갱의 그림 속 타히티 사람들을 만난다.
원시의 파라다이스를 동경했던 화가 고갱은 1891년 타히티에 도착했다.
그가 이 섬을 찾은 것은 은둔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고갱은 이곳에서 열세 살 난 테후라라는 원시의 이브를 만나 생활하며 그의 걸작들을 남기게 된다.
외딴 섬에서의 이브와의 동거, 한 세기 전 고갱이 꿈꾸었던 꿈을 실현해 보려함인가? 이후 많은 사람들이 파라다이스를 찾아 이 섬으로 들어오고 있다.
얼마 전 타계한 할리우드 스타 말론 브란도는 타히티의 여인에게 반해 타히티의 테티아로아 섬을 통째로 사서 말년을 그곳에서 보내기도 하였다.
춤 연습이 끝나자 티키 빌리지는 열대지방 특유의 나른한 오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야자 잎으로 만든 오두막에서 반나의 모습으로 문신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드러누운 청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슬픈 열대, 고갱의 그림에서 느꼈던 원시적 아름다움이다.
죽기 전에 꼭 가고 싶은 섬, 보라보라
타히티의 섬들은 해저 화산 분출로 이뤄졌다.
3백만 년 전 보라보라(Borabora)가 생겼고 그 뒤 다른 섬들이 생겨났다.
보라보라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랜 섬이다.
보라보라는 원래 ‘바우아바우’라는 원주민 말로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는 뜻이다.
또 ‘마이 테 포라’라고도 하는데 신께서 만들었다는 의미다.
타히티의 신화는 이 섬에서 시작되었다.
남태평양의 진주라 불리는 보라보라 섬은 타히티 본 섬에서 북서쪽으로 240㎞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보라보라를 꼽을 정도로 세계적인 고급 휴양지이다.
파페에테 공항에서 소형 비행기로 45분 정도, 기내에서 내려다 본 섬은 산호초 띠 안에 섬이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타히티의 대부분 섬들과 마찬가지로 이 섬도 산호초와 ‘모투’라 불리는 작은 섬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다.
비행기는 작은 산호초 섬인 모투무테에 사람들을 내려준다.
공항에서 보라보라 섬까지는 에어 타히티 항공 고속 셔틀보트가 운행되고 있었다.
화산 봉우리인 오테마누(722m)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폴린빌리지에 여장을 푼다.
빌리지 주인은 한국 사람이 처음이라며 아주 반가워한다.
해안을 따라 걸어본다.
영화 제목처럼 그야말로 그랑 블루이다.
가슴 속까지 푸른 물빛이 드는 것 같다.
영혼까지 푸르게 물들도록 이 섬에서는 저 바다만 보고 또 보리라. 타히티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색깔의 바다를 가진 섬이다.
산호와 바다의 깊이, 하늘의 빛깔과 구름, 햇빛의 각도에 따라 바다색이 달라진다.
타히티 일대의 공기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쉬엄쉬엄 바닷가를 걷다보니 마티라 곶까지 걸어왔다.
어느새 블루의 바다는 황금빛으로 변해간다.
수상 방갈로 앞 모래톱에는 저녁 식탁이 차려지고 있다.
석양을 배경으로 방갈로 베란다에서 두 남녀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름다운 풍경에 가슴이 아리다.
타히티 섬은 사랑의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연인이나 부부들이다.
“행여 혼자 갈 기회가 있으면 아예 포기하라”던 친구의 말이 절절히 가슴에 닿는다.
어차피 여행이란 이런 외로움을 자청한 것이리라. 어둠이 내리자 섬은 별들의 세상이다.
은하수가 길게 하늘을 가로지르고 모든 별들은 수평선 부근까지 반짝거린다.
유성 하나가 투파파우(고갱의 타히티 그림에 나오는 저승사자)처럼 밤하늘에 얼굴을 내민다.
원시의 섬 타히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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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히티 섬 협곡 안에 있는 바히라이아(Vaihiria) 호수. |
INFORMATION
화가 고갱의 그림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진 남태평양의 타히티 군도는 낙원의 섬, 비너스의 섬 등으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섬들로 대표적인 섬들은 ‘타히티’ ‘모레아’ ‘보라보라’ 등이 있다.
이중 가장 큰 섬이 타히티다.
타히티의 공식 이름은 프렌치 폴리네시아로 수도는 파페에테(Papeete)다.
폴리네시아란 태평양 섬 가운데 하와이 제도, 뉴질랜드, 이스터 섬을 잇는 삼각형 해역 안에 분포하는 섬들의 총칭이다.
이 중에서도 타히티를 중심으로 프랑스령인 118개의 섬나라를 프렌치 폴리네시아라고 부른다.
폴리네시아 인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고대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해양민족으로 추정한다.
타히티까지 국내에서 직항 편은 없다.
일본의 오사카나 도쿄에서 에어 타히티누이(서울지점 02-775-4697)로 갈아타야 한다.
일본에서 타히티 섬 파페에테 공항까지는 약 12시간 걸린다.
파페에테에서 보라보라 섬까지는 항공기로 45분. 남회귀선을 지나는 타히티는 4월부터 10월은 건기, 12월부터 3월까지가 우기다.
건기에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무역풍의 영향으로 시원하다.
시차는 한국보다 19시간 늦다.
물가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이다.
생수는 우리 돈 5천원 정도, 식사는 3만원이 기본이다.
섬의 대중교통은 트럭을 개조한 버스이다.
한 번 타는 데 300타히티 프랑(4천원 정도), 택시는 기본이 6천원 정도이다.
물가 비싼 타히티에서는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섬에서는 온갖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지프로 섬 산악지역을 둘러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