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김윤식의 논문입니다.)
<차례>
Ⅰ 緖論1
들어가며...1
Ⅱ 本論1
1. 아도르노의 역사관1
2. 동일성의 철학비판4
3. 아도르노의 미학이론6
① 칸트 비판6
② 헤겔 비판8
③ 예술과 사회8
4. 몇 가지 테마9
① 지배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9
② 생산력/생산관계10
③ 물화10
Ⅲ 結論11
<參考文獻>12
Ⅰ緖論
이 글은 아도르노의 사상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와 그의 미학 사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아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글의 구성을 잠깐 소개하면 우선 아도르노에 낯선 사람들을 위해 생애를 간략하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는 계몽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역사관과 비판의 방법으로서의 부정의 변증법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그의 미학사상과, 마지막으로 아도르노 사상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테마들을 간략하게 다루었다.
이 글은 아도르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전달해주기에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단지 그의 사상에 대한 주테마를 정리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들어가며...
그는 1903년 9월 11일 포도주 상인인 유태인 아버지와 이탈리아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악가인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피아니스트인 이모로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배웠다. 아도르노는 음악적으로나 지적으로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두 방면에 대한 공부를 병행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주전공을 철학, 부전공을 사회학. 음악학. 심리학을 공부했다. 193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의 미적인 것의 구성]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교수자격을 취득한다. 나찌가 득세하자 호르크하이머 등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갔으나 아도르노는 계속 유럽에 남아 있다가 1938년 뉴욕으로 건너가 194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라디오 조사계획 음악분과의 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 후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공동작업을 수행하게 되고 문명사에 대한 철저한 비판인 {계몽의 변증법}(호르크하이머와 공저, 1944)과 망명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에세이 형식의 글인 {한줌의 도덕Minima Moralia}(1951) 등을 썼다. 호르크하이머가 2차대전후 파시즘이 걷히면서 암울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걷어 제치는 반면에,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신이 취했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리하여 1966년에 가장 이론적 저작인 {부정의 변증법}을 쓰게 된다. 1968년에 5월 혁명 당시 실천적인 학생운동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69년 사임하게 되고 같은 해 8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Ⅱ 本論
1. 아도르노의 역사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최초의 문제제기는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들어섰는가"라는 것이다. 이때 아도르노가 문제삼는 야만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낳은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낳은 전체주의인 스탈린주의를 두고 한 말이다. 아도르노가 볼 때 특히 파시즘은 단순한 이탈현상이 역사상 장기간에 걸친 발전과정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때 역사는 진보의 과정으로 파악될 수 없다. 역사는 더 나은 것으로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자연과 인간의 폭력적인 지배가 진보해 가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인식 하에 아도르노는 작업의 첫 번째 대상으로 계몽의 자기파괴과정을 선택하게 된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계몽에 대한 자신의 이중적인 견해를 드러낸다.
"역사에서의 자유가 계몽적인 사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을 분명히 인식했다고 믿는다. 이 사유의 개념 자체에-이 사유가 얽혀 들어간 구체적인 역사형태나 사외제도에 못지 않게-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잇는 저 퇴보의 싹이 숨어 있다는 것을.“
"계몽이 신화로 퇴보하게 된 원인은 이러한 퇴보를 위해 고안된 민족주의적. 이교적 또는 다른 현대적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직된 계몽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아도르노 역사인식의 특징은 역사인식의 부정성이라는 기본 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의 필연을 받아들이면서 과거로 향하는 퇴행적이고 도피적인 사고를 용인하지 않는데 있다. 이것이 아도르노 사상을 낭만주의적인 도피심리와 구별시켜준다. 역사의 진행은 필연적인데, 불행의 씨앗은 인간이 자연종속성을 망각한 채 자연을 단순히 지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의 대립은 또한 자연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모든 생명체의 진정한 법칙인 자기보존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존재자체, 주체성자체가 원죄가 된다. 인간에게는 자연에 굴복 하든가 아니면 자연을 굴복 시켜야 한다는 두 가지 가능성만이 주어지게 된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쫓겨 위협적인 자연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투쟁하면서 정신없이 자연지배의 길은 걷게 된다. 이제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은 깨어지고 만다. 이러한 자기보존을 위한 추구는 도구적 이성을 강화시키게 되고 인간의 자연지배, 나아가 인간의 인간지배를 낳는다.
자기보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결핍된 재화의 획득을 위한 노동이라는 무거운 짐과 노동의 결과 획득된 재화의 소비와 분배를 강제를 가지고라도 관철할 수 있는 사회적 지배구조의 성립이 없이는 자연지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적 지배는 자연지배의 필연성으로부터 파생해 나오는 이차적 형식이다. 이로 인해 자연지배의 강화는 사회적 지배의 강화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최초에 위협적 자연에서 비롯하던 인간의 부자유는 점차 자연지배, 사회적 지배에서 비롯하는 부자유로 대체된다. 계몽의 변증법은 근대의 합리성,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근대의 계몽이 신화에 대한 비판, 탈마법화의 이름으로 자연성을 파괴하여 힘과 동의어인 지식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됨을 비판한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은 신화에 대한 비판을 또한 포함하고 있다. 이미 신화는 고대적 계몽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계몽의 제물이 되어버린 '신화'자체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일어난 사건을 과학적으로 계산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 신화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제반 정황에 대한 고려가 제거된다......비극작가들의 눈에 포착된 신화에는 이미 베이컨이 열렬히 목표로 삼는 '훈육과 힘'이 들어있다. 지방 신들과 데몬들 대신에 하늘과 하늘의 위계질서가, 씨족사람들과 주술사의 초혼제 대신에 정교하게 등급이 매겨진 제물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들의 노동이 등장했다."
신화가 학문과 다른 점은 학문이 개념어를 사용하지만 신화는 상징 형식 속에서 형상을 통해 보고한다는 데 있다. 신화의 단계를 거쳐 개념적 언어를 사용하는 본래적 의미의 계몽의 단계가 성립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미메시스와 신화는 추방되며 마침내 무정형한 마나는 고정된 것으로 파악된다. 미메시스는 인식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적인 목표로서 객체를 주체의 실용적인 목적에 종속되는 대상으로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형상을 사용하는 미메시스는 대상에의 동화를 통해 실제대상을 만나지만 추상적인 개념 속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해진다. 신화는 모든 현상들을 의인화하는 표상세계를 구현하고 이 때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분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학문적 사고가 신화를 대체함에 따라 이러한 주객관계는 파괴되고 인식주체와 인식되는 객체사이의 균열은 영구화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힘이 행사되는 대상으로부터의 소외이다.
개념적 인식에서는 특수자가 추상적인 보편성 속에 종속되어 내용적으로 규정될 것을 놓치게 된다. 외부세계의 대상을 파악하는데 기여하는 개념은 그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동일화하는 현상과 거리가 생긴다.
보편개념은 그때 그때의 개별적인 특수한 범례들을 무차별하게 상위에 있는 類에 포섭해버린다. 언어적인 동일화시도는 항상 불충분하다. 모든 것을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평준화, 획일화시키는 추상화, 그리고 이 추상화가 봉사하는 산업의 지배아래 대중은 놓이게 된다. 사유의 보편성, 즉 개념영역에 있어서의 지배는 실제적인 지배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계몽은 모든 것을 물화 시킨다. 계몽은 예전의 부당한 불평등, 즉 매개를 모르는 주인의 의식을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보편적 매개, 즉 개개의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영구화한다. 인간은 실제적인 획일화를 강요당하며, 인간에게 자아란 좀 더 확실하게 획일화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강압을 분쇄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지 더욱 깊이 자연의 강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계몽은 자연을 탈신화화 했지만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물질생산은 본래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부터 그 자체 목적이 된다.
이제 계몽은 신화와 뒤엉키게 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을 전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계몽은 지배를 더욱 강화하지만 지배와는 상이한 계기인 합리성을 자신의 내부에 허용하게 된다고 본다. 수단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게 한다는 것, 즉 수단의 객관성 속에 이미 지배에 대한 비판의 수단으로서 사유가 성장한다고 본다. 자신의 강압메커니즘 속에 자연을 반영하고 되풀이하는 사유는 자신의 철두철미함 덕분으로 스스로가 또한 잊혀진 자연임을 드러낸다. 스스로 지배임을 고백하고 자연속으로 퇴각하는 결단을 통해 지배에의 요구를 분쇄할 수 있다. 주체 속에 있는 자연의 기억을 통해 계몽은 지배일반과 대립한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적 실천은 사회가 사유를 경직시키는 수단인 의식부재 앞에서 쉽게 굴복하지 않는 이론에 달려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이처럼 계몽의 긍정성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잊혀진 자연의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음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계몽의 부정성과 현실의 참혹함은 그러한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계몽의 계몽을 꿈꾸지만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아도르노는 계몽에서 사회에서 이론에서 실천에서 혁명적 에네르기를 기대하지 못하고 예술로 도피하게 된다.
2. 동일성의 철학비판
부정의 부정이냐 무한한 부정이냐
아도르노는 헤겔, 칸트와의 대결을 통해 부정변증법( 또는 비동일성의 철학)을 내세운다. 아도르노의 비동일성의 철학은 주체의 인식을 통해 객체의 진리를 포착하려는 시도 또는 개념으로써 특수자를 파악하려는 전통철학의 시도를 무너뜨리려는 작업이다. 아도르노의 인식론은 개념으로써 진리를 인식하려는 노력의 좌절로 미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에 따라 철학의 중심과제도 개념에 의한 진리파악이 아닌 예술의 해석이 된다. 아도르노의 인식론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화해(통일)은 불가능하고 오직 주체와 객체의 분열에 대한 의식만이 가능하다.
헤겔에게 있어 전체는 진리이다. 이는 정신과 실재는 실현된 통일체로서만 진리일 수 있고, 또한 폐쇄적인 체계로서의 철학, 즉 전체로서의 철학만이 이러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세계정신이나 이성의 간지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서 보편을 편듦으로써 긍정적인 역사구성을 할 수 있었다. 헤겔은 시민사회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이성의 간지가 출현하여 무제한적인 투쟁으로부터 이성적인 전체가 도출된다. 화해가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유대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휴전상태의 결과이기 때문에 헤겔은 자유의 전제로서 개별의지의 원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에 헤겔은 윤리의 카테고리를 국가와 결합시켜 국가가 진정한 삶이 된다. 인간의 주관적 의지는 법에 스스로를 종속시킴으로써 자유와 필연의 대립이 사라진다.
그런데 아도르노가 볼 때 헤겔 철학은 아우슈비츠를 비판할 수 없다.
즉 아우슈비츠는 동일자에 의해 비동일자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즉 헤겔이 기대했던 총체성을 실현시켰지만 총체성은 극단적인 악이 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이 비동일성을 체계적인 전개과정의 필수적인 요소로 허용하면서도 주체의 동일성 원리를 지나치게 높여 특수성을 절대자 속으로 용해시킴으로써 사회적 총체성은 실제로 비동일적인 특수자를 억압하게 되었다.
이에 아도르노는 헤겔에 대항하여 "전체는 비진리이다"는 대항명제를 내세운다. 보편자의 우위가 실현된 현대사회에 대한 전율 속에서 아도르노는 비동일적인 것, 비언어적인 것, 비개념적인 것을 구제하려 한다. 이제 변증법은 긍정적인 체계를 다시 세워서는 안되고 오직 부정적으로만 가능하다. 부정변증법은 개념 없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인정하는 철학이다. 모든 목적론적인 역사구성은 잘못된 현실을 이상적인 조화의 가상 밑에 숨기는 이데올로기라 비판받는다. 부정변증법은 변증법을 긍정적인 본질로부터 구해내고 어떠한 확정성도 남겨놓지 않으려고 한다. 모순에서 종합으로 가는 길은 긍정의 의혹을 받기 때문에 거부된다. 부정변증법은 부정과 안티테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사고의 보편적 동일성의 기본전제는 지나간 것을 현재 속에서 확정할 수 있는 개별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나 통일적인 확고한 자아동일성은 역사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자기자신과 개인적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결코 동일하지 않은 비동일성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자아동일성을 확립한 주체는 동일화시키는 개념을 통해 무정형한 현상의 흐름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사물의 동태적인 속성이 정적인 동일성의 개념장치 속에 맞추어지게 된다. 동일성의 원리는 자연을 정신에 환원시킨다. 이는 그 지식을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개념적 지식, 주관적 지식이 이미 전체이고 객관적이라 생각하며 물자체가 개념과 일치한다는 가상을 만들어낸다.
이에 반해 변증법적인 사유는 객체를 주관성이라는 집 속에 밀어 넣지 않으며 객체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있은 그대로의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철학의 과제는 개념과 사물의 비동일성을 지각하면서 사물을 주체에 동일화함이 없이 사물의 자기동일성을 생각하고 사물을 시간의 대해 속에 묻힌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고 그 변화 가능성을 함께 반성하는 것이다. 이제 아도르노에게 전체는 비진리로서, 특수자의 권리를 찾아줄 유일한 가능성은 총체성의 카테고리 대신 현존하는 것에 대한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이다. 특정한 부정을 통해 나온 결과는 긍정적이거나 궁극적일 수 없다. 궁극적인 것은 다만 비판으로서의 특정한 부정 그 자체이다. 모순에 대한 지적에서는 특정적(bestimmt)이지만 결과로서는 불특정적(unbestimmt)이다. 즉 부정변증법의 목표는 철학적인 관점들을 내재적으로 비판함을 통해 폐쇄적인 사유의 강압메커니즘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번의 도약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동일화하는 사고를 내부에서부터 끊임없이 붕괴시켜나가는 계속되는 부정으로 통해서만 가능하다.
칸트가 물자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를 주관성의 분석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칸트철학은 아도르노에게 타자, 비동일성, 비주관적인 것을 구제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객관성을 주관성 속으로 해소시켜버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주체과 객체의 비동일성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한계를 갖는데 주체와 객체사이의 균열이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객체는 주체에 의해 사고될 수 있으나 주체에 대해 항상 다른 무엇이다. 주체는 그 고유한 속성에 있어 이미 또한 객체이다. 주체로부터 객체는 이념으로서 결코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객체로부터 주체는 떼어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주관성이 객관성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고 주체는 처음부터 객체 밑에 있는 것이다. 즉 인식주체 없이는 자연에 대한 인식이 없지만 이로부터 의식의 우선적 권리가 구성될 수는 없고 인식대상이 의식내용 속에서 해소될 수도 없다. 객체 없는 주체란 육체 없는 혼에 불과하고 그러한 주체는 현실의 인간이 될 수 없다. 아도르노는 모든 인식이 개념에 결부되며 인식주체는 물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칸트주의자이지만 아도르노가 모든 인식에 선행하는 개념들은 주체를 초월하는 것 그래서 더 이상 뒤를 캘 수 없는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점에서 비칸트주의자이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인식론은 관념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주체가 설정한 관념보다 객체를 우위에 둔다는 점에서 유물론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이것이 객체의 진리이다라는 주장을 부정하며 사유의 부단한 자아비판 속에서 유물론을 지향하는 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3.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① 칸트 비판
칸트이래 미학은 분열된 것의 통일이나 정신과 자연의 화해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이런 분열에 대항한다. 이런 과제에 적합한 것은 시랑, 자연, 예술이다. 자연은 차디찬 객체 지배적인 과학적 시선에서 벗어나 부분과 전체가 조화로운 상호관계 속에 위치하게 되는 유기적인 전체로서 체험된다. 예술은 상상적이고 마술적인 성격 때문에 사회현실을 가능한 화해의 전망 속에서 형상화할 수 있다. 칸트의 반성은 인간의 사유나 행동이 신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이성에 호소해야 하는 역사적․사회적 상황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이성은 삶의 원리로서 의심스러운 것이다. 사유와 행동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원리인 이성은 그 자체 고도의 정당화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성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설정의 기능을 더 맡을 처지에 있지 못한 채 단순히 인간에 의해 설정된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칸트는 보편 타당한 이성의 가능성을 묻는다.
인간의 제3의 이성능력인 판단력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에서 해결되지 못한 개별성과 보편성의 매개를 구체적인 감각성의 차원에서 부여한다. 이런 매개가 가능한 것으로 증명될 경우 이성은 통일적이고 보편 타당한 삶의 원리로서 정당화될 것이다. 판단력비판에서의 심미적 판단력은 주어진 특수자를 오성이 무관한 규칙인 보편자 밑에 포괄하는 능력인, 순수이성비판의 판단력이 아니다. 그것은 ‘규정하는’ 판단력으로 어떤 입법기능을 가지지 않는다 할 때, 그것은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규정하는 판단력은 개인의 취향과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이런저런 것들을 매개시키는 것이지, 수학적 진리처럼 모든 사람이 곡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입법기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심미적 판단력에서는 ‘내 생각에는 자치...인 것 같다’ 라는 문장만이 나올 수 있다.
심미적인 판단력의 분석은 분명 자연법칙의 객관적 인식불능에 대한 대용물이다. 이성과 자연의 통일은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는 없지만 주관적으로, 즉 심미적으로 체험될 수는 있다.
칸트에게서 심미적 체험은 ‘취향판단’ 속에서 표현된다. 취향 판단의 네 가지 계기는 시민사회와 개인의 구체적인 감각이나 충동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부정적으로 규정된다. 취향판단의 첫 번째 규정, ‘이해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것’은 모든 것이 소유욕의 지배를 받는 시민사회에 대한 반대이다. 주체가 욕망의 대상으로서 객체에 관계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왜냐하면 객체는 지배하려는 주체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어 독자성을 잃기 때문이다.
취향판단의 두 번째 규정 ‘미는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 은 시민사회의 특정인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분열에 대한 의식이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 도는 ‘다른 무엇을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 합목적적인 대상의 형식은 아름답다’ 라는 세 번째 규정은 모든 것이 타자를 위해 존재하고 사물의 가치는 이런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목적 연관으로서의 시민 사회에 관계된다. 미의 영역에서 주체는 미리 주어진 목적 연관에 매이지 않으므로 진정으로 자율적이다.
‘개념 없이도 어절 수 없이 마음데 드는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것은 아름답다’ 는 넷째 규정은 미적 체험의 진리는 학문적인 인식이나 정언명령의 뒤 서열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칸트의 주관주의 미학을 비판한다. 아도르노는 ‘무관심성’ 의 개념이 칸트에게서 현실 도피적인 계기를 이루고 있음을 비난하면서 이 개념이 가지는 적극적인 현실 비판적 기능을 부각시킨다.
또 다른 비판점은 칸트 미학이 전형적인 ‘위로부터’ 의 철학적인 미학이라는 점이다. 아도르노는 미학이론에 관한 통상적인 구 개의 관념을 비판한다. 하나의 관념은 체계 절학적인 단초로, 이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진리내용은 철학적으로만 체험될 수 있다고 한다.l 둘째는 철학에 대한 유명론적인 비판으로 미학은 더 이상 일반화하는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내적이고 경험적인 미적 체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은 전통적인 ‘위로부터’ 의 철학적 미학과 ‘밑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미학적이 경험주의나 현상학주의에 반대하며 제3의 미학을 제시한다.
아도르노에게서 미학의 과제는 내재적인 체험을 개념적인 성찰과 매개시키는 것이다. 즉 철학적 미학의 의도들을 예술 작품의 내재적인 해석에서 나오는 미적 체험들과 매개시키는 것이다.
② 헤겔 비판
헤겔은 예술과 미학에 대해 모순되고 상반된 이중적 태도를 드러낸다. 헤겔에게서 예술은 정의 자체도 지극히 모순된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 이라는 것이다. 이 두 상반된 예술이 ‘곤궁의 의식’ 이라는 것이다. 이 두 상반된 예술 개념에서 억지로 결합시킨 헤겔 체계의 땜질 자국이 가장 잘 드러나는데, 아도르노는 첫 번째 정의에 대해서는 열렬히 비판하는 데 반해 두 번째 정의는 수정 없이 받아들인다.
헤겔이 정신에 의해 모든 대상영역을 식민지화한다면 아도르노 사상의 요체는 그러한 정신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헤겔에게서 정신은 즉자대자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예술에서 정신은 희미하게 추상적으로 예술의 위를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술의 실체로 인식된다.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는 미의 정의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정신의 그러한 지배행위가 미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큰 문제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아도르노에게서 미의 본질은 주체에 의한 개념적 파악 너머에 있기 때문에, 예술은 객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의 감각적인 것, 즉 감각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진리만을 표현한다는 것, 그로 말미암아 철학에서처럼 정신의 최고 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거부한다. 즉 ‘예술은 더 이상 진리가 존립하는 최상의 방식으로는 인정될 수 없다’ 는 헤겔의 견해를 거부하는 것이다. 오히려 아도르노에게서 예술은 진리가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개념 없는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 비동일적인 것에 대한-헤겔이 무관심을 표현한 -관심이 아도르노로 하여금 헤겔로부터 등을 돌리게 한다. 그 당연한 귀결로 미학은 아도르노 철학의 중심이 된다.
③ 예술과 사회
아도르노가 예술이라고 말할 때는 진정한 예술을 일컫는다. ‘현혹연관’ 으로서의 사회의 비진리가 완전해진 상황에서 진정한 예술만이 총체적인 사회에서 빠져나가 진리의 마지막 도피처나 화해의 장소가 돌 수 있다고 아도르노는 생각한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은 전통적인 예술관이 그리는 예술 이상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도 전통적 예술관의 형상화 개념에 흡사하게 ‘철저한 내적 형상화’ 가 되어야 하면 또한 ‘가장 진보된 의식의 예술’ 이어야 한다. 철저한 내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은 ‘명료한 표현’을 얻어야 한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또한 최고의 선진성을 지녀야 한다. 그때 그때 가장 진보된 작품만이 아류에 떨어져 시간 속에서 몰락하지 않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비진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예술 작품의 진리내용을 이룬다. 보통 어떤 것이 보편적인 인식의 수준에 부합되고 다른 인식이나 진리에 반하지 않을 때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인 영역에서 어떤 것을 진리로 선언하는 것은 매우 미묘하다. 왜냐하면 현실사회에서는 선동이나 거짓이 횡행하며, 진리도 이데올로기로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총체성에서 출발하지만 이 전체를 비진리로 간주하는 아도르노에게는 예술만이 유일하게 거짓 체계를 세움이 없이 사회상태에 대한 진리는 인식시킬 수 있는 매체이다.
아도르노는 예술의 자유성과 사회비판이 서로 경합됨을 안다. 자율적인 작품은 사회적으로 아무래도 좋은 것, 그래서 결국에는 염치없는 반동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예술이 자율성에 굴복할 때 기존 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철저히 자신을 위해서만 남아 있는 한 무해한 다른 여러 분과 중의 하나로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사회에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재적인 비판은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냉혹한 자율성은 무의도적으로 사회를 공격한다. 예술의 내재적인 비판은 ‘가상의 분쇄’ 로 가상을 내부로부터 폭파시켜서 수용자로 하여금 조화된 형상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도록 만든다. 예술의 세계는 현실 세계처럼 뒤흔들린 세계이다.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비판은 수용자로 하여금 현실세계의 뒤흔들림을 체험하고 예감케 한다.
예술의 내재적인 비판은 예술이 자율적 존재이면서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술이 자유적이면서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은 사회의 각 부문이 자율성을 얻게 된 것이 사회분화의 결과라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예술도 종교의 부속물이기를 그치면서 자율성을 획득했던 것이며 예술의 역사는 그 자율성이 진보해온 역사이다.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술이 사회를 자기 내부에 끌어들여야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반대의 경우, 예술은 거대한 사회의 기능연관 속에 항복하고 들어감으로 인해, 비진리가 된 사회의 안티테제로서 진리의 마지막 도피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도르노는 모든 비자율적인 예술을 공격한다. 비자율적인 예술에는 사회의 악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데 참여하려는 참여예술과 사회에 대한 무비판적인 동조 속에서 위안과 향락을 제공하는 통속예술이 있을 것이다. 또한 진정한 예술도 향유로서 체험될 때에는 자율성을 상실한다. 향유에서는 상품에 대해서 사람들이 취하는, 소유하려는 태도가 나타난다. 이런 수용의 태도를 고려해야 하는 예술가는 수용자로 하여금 자신을 잊고 완전히 작품에 몰두할 수 있게끔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다른 모든 실천을 회의하면서 예술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가 음악가라는 면도 강하게 작용하였지만 그의 이론전개의 필연적 귀결이기도 하다. 그는 계몽의 비판을 통해 역사의 진보성을 부정하게 되었고 동일화 이데올로기와 문화산업을 통해 집합적 주체의 설정자체를 회의하게 되었으며 인식론을 통해 긍정이 아닌 특정한 부정만이 대안이라는 것을 도출하였다. 이러한 모든 회의 속에서도 예술작품은 존재와 의식사이에 위치하는 열쇠로서 지배없는 존재이며 개념없는 의식으로 파악된다. 즉 예술은 진리가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수수께끼적이고 즉자적인 존재이며 미메시스의 기관인 예술작품은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밑에 두려는 관리되는 사회에 대해 눈에 가시같은 존재인 비동일자이다.
4. 몇 가지 테마
① 지배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아도르노의 계몽비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계급의 지배가 아니라 지배 그 자체이다. 그에게 계급은 주요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문제는 개념의 지배, 사유의 지배, 주체에 의한 객체의 지배, 인간의 자연지배, 인간의 인간지배가 주요한 테마로 떠오른다. 그에게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산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보존을 위해 자연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을 지배하고 이를 강화한다는데 있다.
아도르노는 프롤레타리아의 향상된 생활수준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지적하며 프롤레타리아가 무조건적인 연대와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아니 오히려 연대와 대중혁명의 가능성 자체가 의문시된다고 주장한다. 독점의 완전한 관철로 계급법칙은 제거되지는 않지만 투시할 수 없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된다. 고도산업사회에서 통일된 계급으로 무장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무너졌으며 거대한 자본집중은 폐쇄된 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를 해체시켰다.
지배자들은 익명적 독점이라는 거대한 방패 속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를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급대립이 사회적 표면에서 사라지고 계급개념은 정치적 실천을 위한 의미를 상실한다. 그에게 있어 "바리케이트를 세울 수 있었던 시대는 행복했다......억압의 전능화와 그 불투시성은 같은 것이다."
② 생산력/생산관계
마르크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에서 아도르노는 생산력의 파괴성을 강조한다. 즉 마르크스가 생산력의 해방적 잠재력이 생산관계를 변화시켜 지배관계를 전복시킨다고 말했지만 생산력발전이라는 목적은 자연을 지배하는 정신의 업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고삐 풀린 생산력은 폭력적인 자연지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잠재력은 지배관심에 의해 완전히 묶여있다는 것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서로를 보호하며 생산력의 진보성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또한 생산관계가 변화된다고 해서 생산력의 본성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즉 마르크스는 생산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아도르노는 생산력 신화 속에 내재하는 지배의 요소자체를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경제를 우위에 놓음으로써 행복한 결과가 역사에 내재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아도르노에게는 자연지배의 프로그램자체가 문제를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③ 물화
교환은 동일성원리의 사회적인 모델이 된다. 동일하지 않은 개별존재나 행위는 교환을 통해 측정할 수 있는 것, 동일한 것이 되고 개인은 대체 가능한 물품이 된다. 교환이라는 보편화에 의해 사물이나 인간의 고유한 질적 가치가 박탈당하는 물화현상이 일어난다. 교환이라는 추상화과정의 결과 상품이 인간노동의 사물이라는 성격은 은폐되어 상품은 독자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상품사회에 연결된 사회적. 관료적 제도들도 객관화되고 물화 된다. 아도르노는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물화의 낙관적인 극복가능성을 보지는 않지만 물화로서 인간의식을 설명하는 방식은 루카치와 비슷하다. 루카치는 노동자의 상품화과정이 노동자를 무력화시키며, 그의 영혼을 불구화시키고 위축시키지만 그의 인간적 영혼적 본질은 상품화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계급의식의 획득가능성을 열어두지만 아도르노는 오염되지 않은 욕구 속에서 사용가치가 온전할 수 있는 파괴되지 않은 잔여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사회가 개인의 마지막 잠재력까지 파괴한다고 본다. 이로써 집합적 주체설정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
Ⅲ 結論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비판은 계몽에 대한 비판, 문명에 대한 비판, 합리화에 대한 비판,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에게서 자본주의 비판은 계몽에 대한 비판, 동일성에 대한 비판에 비한다면 부차적이다.
그에게는 자본주의는 특정한 생산양식으로 파악되는 의미를 거의 지니지 않는다. 그에게서 역사는 주체의 지배냐 객체의 지배냐 라는 대립구도를 가지고 설명된다. 역사는 주체의 지배의 확대로 설명되고 자연에의 복귀, 개인에의 복귀라는 제시되지 않는 목적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는 역사는 진보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미메시스적 계기가 살아있는 곳에서 그는 마지막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자연지배-->인간지배-->자연으로의 복귀: 결국에는 부정의 부정이 된 것이 아닌가. 결국 그에게는 계몽비판이 아니라 현재비판, 즉 자본주의 비판이 설정되어야 했으며 이 속에서 계몽의 계몽이 추구되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參考文獻>
1.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외 옮김, 문예출판사, 1995
2. 아도르노, 미학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3
3. 김유동, 아도르노 사상, 문예출판사, 1993
4. 문병호 지음, 아도르노의 사회이론과 예술 이론, 문학과 지성사, 1993
5. 차봉희 저, 비판미학, 문학과 지성사, 1992
6. Th.W. 아도르노, 미적이론Ⅰ, 이론과 실천, 1991
7. 존 A. 워커 정전국 역,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 열화당,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