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한 선승(禪僧)이 공부를 하는데 아침이면 까치소리, 낮에는 농부들의 밭 가는 소리
등으로 시끄러워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산 속으로 들어 갔으나, 그곳 역시 짐승들의 울음
소리와 바람소리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못난 놈이 환경 탓 한다고 세속과 산을 오르내리기 30여년, 공부라곤 한 것이 없고 마음에
불만만 가득, 너무도 한심하여 징검다리에 앉아 흐르는 냇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자라 한 마리가 머리를 쑥 내밀더니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물가로 올라왔습니다.
이 때 저만치서 개가 한 마리 달려와 자라를 덥썩 물었는데, 목을 쏙 집어넣은 자라를 먹을
수가 없어서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는 포기하고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그것을 재미있게 쳐다보던 선승이 내가 만약 '개'라면 어떻게 했을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알고 자라가 고개를 쏙 내밀어 좌우를 살펴보더니 물속으로 퐁당
들어가더래요.
'옳거니 그거다' 그리고는 그 길로 산 속으로 들어간 선승, 3년 용맹정진 끝에 대오각성
(大悟覺醒)했다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개라면 어떻게 해서 자라를 잡아 먹을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이 공안(公案) 즉 화두(話頭)입니다.
원래 공안은 破設하는 것이 아닌데(破設하면 破設한 자나 들은 자 다 지옥간다고 함)
이건 화두같지 않은 거니까 가르쳐 드리지요.
자라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가 자라가 목이 나올 때 얼른 나꿔채면 되지요.
그것은 '가만히 정관(靜觀)'하라는 깨달음이었지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자라목과 같은 번뇌와 습관이 슬그머니 일어날 때
그 때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은 조금 있으면 뭐하고, 그 다음엔 저것하고, 또 이것도 해야
하고 등 수 많은 계획들로 마음이 어두워져 있으므로
내 무의식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가령 여러분들이 인생의 길을 잃었을 때 스승과 선배를 찾고,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하면 더욱 어렵고 외로와집니다.
그러나 사흘이고 나흘이고 가만히 있어 보세요. 그러면 묘안이 떠오릅니다.
산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에도 큰일났다고 당황하여 이리저리 설치게 되면
설령 나중에 길을 찾는다 해도 힘이 빠져서 죽기가 쉽지만, 현명한 사람은 마음을 가라
앉히고 가만히 있어 보면 별을 본다거나 달의 기울어짐을 보고 길의 방향을 찾게 됩니다.
집안에 들어온 새가 조금만 진정하면 들어온 구멍을 찾을텐데, 당황하여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살려주려고 해도 도망을 치다가 죽어 버립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정좌하고 묵상하고 참선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나는 전혀 나쁜 생각을 품지 않았는데, 문득 내 속에 내가 모르는 나쁜 생각의 촉수가
무럭무럭 자라오름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을 느끼고 들여다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을 '무의심(無意心)'이라 합니다.
간과 이미 끝[罷]나니, 득실 또한 공이라.
초자(樵子)의 시골노래를 부르며, 아동의 야곡을 불[吹]며,
몸을 소 등에 올려놓고 하늘[雲霄]을 쳐다보며,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끌어내도 서지 않는다.
干戈已羅에 得失還空이라
唱樵子之村歌하고 吹兒童之野曲하여
身橫牛上하고 目視雲霄하니
呼喚不回하고 撈籠不住로다
자성을 탐구하고 마음을 닦는 과정을 열단계로 나누어 해설한 십우도(十牛圖)중의 이
騎午歸家(십우도중 여섯번째로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용, 십우도는 우리의
본래면목을 소에 비유하여, 소를 찾고 얻는 순서와 이미 얻은 뒤에 주의할 점을 설명한
것이다)는 無意心의 극치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구조에는 1, 2, 3차 욕망이 있습니다.
또한 일정한 리듬도 있습니다.
1차적인 욕망은 衣・食・住에 관한 것이고,
2차적인 욕망은 성적, 미학적, 예술적 충동을 말하며,
3차적인 욕망은 명예욕, 권력욕, 지식욕 등을 말합니다.
"醫學入門" 서문에
'忿을 징계하고 욕망을 다스려서...'라고 되어 있는데
내 마음에 맞다고 여기는 것이 욕망의 원인이고,
마음에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분노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욕, 권력욕, 사치욕 등
여러 욕심과 욕망으로 나를 내세웁니다.
어느 순간 내 속의 그런 욕망의 내재됨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나는 깨끗한 줄 알았는데 음담패설 책 따위를 보면
왜 마음이 이상해지고 흥분이 될까?"하고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누르려고 합니다.
욕망을 억제하거나 욕구를 갈구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욕망이 갖고 있는 긍정성과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부정성,
즉 욕망과 분노는 항상 서로 쫓아다닙니다.
예를 들어보면,
어느 날 미팅에서 굉장히 아름다운 여학생을 보았습니다. 그 여학생도 잘 생긴 나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주 순식간에 둘의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부처님! 저 여학생이 내 파트너가 되게 하소서...'
추첨 결과 그 여학생은 친구 파트너가 되어 버렸고, 나는 뚱뚱한 여학생과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와 친밀하게 얘기하면서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아! 그러자 가슴 밑바닥에서 무엇이 치받혀 올라오면서
그 친구와의 우정이고 뭐고 가슴이 덜컹거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렇지 않겠지'하고 착각마세요.
아닌 척 하는 사람일수록 더 안절부절 못합니다.
젊었을 때 강압적으로 공부에 눌려 살던 지식인이 40--60대 쯤 되어서,
'아유-- .나도 부룩 실즈 같은 여성과 교제를 해 보면 여한이 없겠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이란 이상한 것입니다.
술을 오래 두면 식초가 되듯이
지식욕이 해묵어 성욕으로 변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애착이 가면 증오가 생기고
좋아하면 싫어하는 마음도 아울러 생기게 됩니다.
한때는 퉁퉁한 스타일의 사람이 믿음직스럽고 좋았는데
이번에는 마른 스타일의 사람이 센티하고 절개가 있어 보여 좋다고 하다가,
마른 사람은 너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 다시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애착을 탓하지 않고 그 대상만을 평가합니다.
욕망의 변화란 참으로 다양합니다.
공자께서는 '20대는 색을 조심하고, 40대는 싸움을 조심하고,
늙어서는 물욕을 경계하라'했습니다.
그런데 재물욕, 성욕, 명예욕 등 이런 것들 전부가 이해되어져야 그것들의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예를 들면 돈을 떼었을 때 일어나는 초조감, 애인을 잃었을 때 오는 시기심과
질투심, 낙선되었을 때 오는 패배감 등의 다양한 형태의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그때 그때 발생하는 熱도
陽明熱, 少陽熱, 太陽熱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감정의 상태를 예민하게 주시하면
꼭 결론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공부의 실마리를 잡을지도 모릅니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 보면 앞으로는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는
개인 각자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가 벌인 운동의 내용은 지금까지 산업사회 위주, 집단 위주로서
집단 전달 체제의 발전은 이룩했지만,
너무 개인의 창조능력을 제한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제3의 물결 운동'의 핵심은 개인 창조능력의 개발에 있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을 모시고 강의하는 기회가 자주 있습니다.
약 130여명이 한 집단으로 모여 있지만 집단적 의미로서의 전체보다
각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오늘날의 대학도 단체, 그룹, 가풍 등을 중요시 여길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개개인의 특성과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자유스런 영적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교육체제가 필요합니다.
몇 백명씩 모아 놓고 적당히 시험이나 쳐서 순위를 가리는 이런 제도는
인간의 창조능력향상에는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창조적인 선각자들은 절대로 이런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중에 학교에서 열등생이었지만
졸업 후 월등한 우등생이 되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학교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외우는데 능하고 정리하고 분석하는데 능합니다.
그러나 '깨닫는'데는 늦습니다.
심리학에도 이런 테스트가 있습니다.
큰 쇠구슬을 묶은 실 끝에 못이 달려 있습니다.
"이 못을 이 벽에 좀 박아다오"하면 얼른 망치를 찾습니다.
그 쇠구슬로 바로 박으면 될 것을
'못은 망치로...'하는 틀 속에 갇혀서 눈 앞의 현장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한 가난뱅이가 사또를 찾아왔습니다.
온 가족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좀 살려달라고 간청하자
사또가 말하기를, "좋다, 따라 오너라"
사또는 가난뱅이가 늘 다니는 다리 건너편에 가난뱅이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오게 했습니다.
가난뱅이는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왔습니다.
"아니! 너는 다리를 건너오면서 다리 중간에 놓아둔 황금보따리를 못 보았는고?"
"제가 늘 건너다니면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황금보따리가
오늘이라고 있을 턱이 없지 않습니까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에, 현장에 답이 있는 줄 모르고 사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깨어 있음이란, '현장의 답'을 찾아 내는 열린 눈을 말합니다.
앨빈 토플러의 자유스런 영적 분위기란 곧 '깨어있는 현장 분위기'를 일컫는 것입니다.
강요되어진 규율에서 오는 공포나 위축감은 오히려 역효과를 연출시킵니다.
활달하고 명랑하게 깨어 있는 분위기는 의외로 폭발적인 창조효과가 있지요.
집단적 의식이나 행사에서는 미묘한 안락감과 의지성의 쾌감이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깨어있지 못하고 우둔하게 반복되는 언어는 다소의 안락함, 편안함을 줍니다.
술 먹으면 정신이 없고 깨어나면 현실로 돌아오는 것처럼
종교의 잘못된 측면은 술이나 마약처럼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깨어 있는 정신 즉 현장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식이나 예배나 몇 가지의 주문을 통해서 마음이 평안해진다면
좋은 경치를 찾아가서 마음을 편안히 함과 다를바 없지요.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미묘한 쾌락일 뿐 종교가 추구하는 경지가 아니지요.
안락감이나 의지성은 그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도피된 것일 따름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정의에 의하면, 진실한 교육은, 인간 개개인의 심리적인 속성과
그것의 진행과정을 이해하게 하여 주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통로는 예로부터 신비한 '제3의 순환체계'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고대의 명철한 성인이 개발해 놓은 이 경락의 생리 체계는
실제로 동양의학에서 모든 진단과 치료에 응용됩니다.
경락의 순환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 심리의 진행상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제3의 순환체계는 크게 몇 개의 레일과 같은 통로로 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수백 개의 주요한 역이 있습니다.
이 역을 경혈이라고 하는데
흔히 침술 치료나 진단상 병의 반응점으로 쓰이지요.
이 14개의 통로 가운데 임맥과 독맥을 뺀 12經은
아주 중요한 기혈 또는 반응의 통로여서 일반적으로 12경락이라고 부릅니다.
이 레일들은 모두 서로 상대적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데
심리적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1차, 2차, 3차 욕망으로 나뉘어지는데,
1차와 2차적인 욕망을 有愛라고 합니다.
있는 것,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고,
3차적인 욕망은 無有愛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크게 셋으로 나뉘는 이 욕망들을 충분히 이해했다가
여러분들 마음 속의 끊임없는 욕망을 잘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12경락이 우리 마음 속 에너지의 통로라면
인간이 가지게 되는 마음의 구조는
만족과 불만족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욕망이 갖는 특징으로써 우리 인체 내의 경락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포를 느끼면 등골이 오싹해진다거나 추위를 느끼는데,
이 공포라는 감정과 차다고 하는 감촉은
각기 물질과 마음이지만 결국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공포는 어디서 생기는가?
이런 것을 조사해보면 어떤 욕망의 반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추가 생소할지 몰라도,
여러분들이 심리적인 진행상황을 관찰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심리적인 속성과 진행과정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五運六氣法을 공부하러 모여서,
인간이 가진 1차, 2차, 3차 욕망을 조사하게 되고
나아가서 심리적인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면,
설령 經絡學的인 지식이 좀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기가 가지는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道人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오류는 너무도 다양하고 처참합니다.
설령 그 오류가 개인적, 주관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건이라 하더라도
물욕에 수반되는 빈곤감, 정욕에 따르는 배신감, 명예욕에 따르는 패배감과 수치심,
이런 것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 자신 스스로 패배의식에 물드는
이 지구촌은 결국 엄청난 과보를 치르고야 말 것입니다.
순진하게 자라야 할 어린이가 반장선거에서 떨어졌다고 자살을 하는 세상입니다.
"엄마는 무슨 협회장, 동창회장 하다못해 꽃꽂이 회장이라도 하는데 너는 그 모양이냐?
엄마, 아빠를 좀 보아라. 이 멍청한 놈 어쩌고 저쩌고..."
훌륭한 부모형제를 가진 아이는 불행합니다.
비교를 당하기도 하거니와
자기 스스로도 그 비교의식의 울타리 속에 갇히기 쉽습니다.
비교감이 낳는 부작용은 망상, 파괴의식의 실천 등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일은 지식인들이 비교를 더 많이 한다는 사실입니다.
불만족이나 고통과 같은 마음의 부정적인 면과
만족과 기쁨에 따르는 마음의 긍정적인 면이
인체 내에서 작용하는 현상을 바이오리듬 학설에서는
신체리듬(Physical Rhythm), 감성리듬(Emotional R.), 지성리듬(Intellectual R.)으로
분류합니다. 서양에서 100년 가량 연구된 이 바이오리듬을
오늘날은 기업에서도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경락체계는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분류할 뿐 아니라
그 에너지의 통로까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太陰・陽明경락은 신체리듬,
少陰・太陽경락은 감성리듬,
厥陰・少陽경락은 지성리듬으로 결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근래에 와서야 겨우, 그것도 그저 3가지 특성만을 다루고 있는데
5천년간 개발해 온 경락체계를 거기에 결부시킨다는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원칙은 우리의 경락체계를 서양인들이 받아들여야 되겠지요.
저는 경락의 순환체계이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바이오리듬 이론을 소개한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의 제1차적인 욕망인 의・식・주에 대한 만족과 불만은
太陰經과 陽明經의 작용이며,
제2차적인 성적, 미학적, 예술적 충동 등의 만족 불만은
少陰經・太陽經의 작용이고,
제3차적인 명예욕 지식욕 권력욕 등의 만족과 불만은
궐음경 소양경의 작용입니다.
즉 사람이 일으키는 1차, 2차, 3차 욕망의 성쇠는
그에 해당하는 경락 에너지의 성쇠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만족과 불만의 흐름에 따라 결정되는 경락의 허실은
그 정도가 지나치면 자동조절기능을 상실하여 질병이 되고 맙니다.
제 강의의 배경이 이런 이론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의 足太陰脾經을 補해야 하는 경우라고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리듬'의 어느 부분이 虛하니까 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조건으로 경락학설이 연구된 것은 어떤 문헌에도 없었고
어떤 강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다행하게도 운이 좋아서 수십명의 스승을 만날 수 있었는데,
여러분이 처음에는 듣기에 무리한 것같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잘 새겨보면 깊은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道를 열심히 닦으면 경락이 보인다고도 하고,
슬픔으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플 때는
肺經絡이 엄지손가락으로부터 쭈욱 지나감을 느끼거나,
勞宮穴이 피로한 것을 느끼는 등의 부분적인 느낌은 알 수가 있으나
전체적인 경락을 이해시켜 주는 이런 강의는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랑스럽고 보람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이런 것을 하나 찾아내고 결부시키기 위해 많은 세월을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경락 자체가 가진 흐름의 에너지는
우리가 가진 1차, 2차, 3차적 욕망의 만족과 불만족에 따르는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이 사실을 참고하여 혼자서 더욱 깊이 연구하고
관심할 수 있는 계기로 삼도록 하십시오.
넘치면 다시 모자라게 되고, 빈 것은 어느 덧 차고, 얻은 것은 잃어지고,
낮은 것은 높아지는 등 끊임없이 균형을이루는 이 자연의 순리가
곧 인간의 '제3의 순환 생리'와 같습니다.
최근 연구가 활발해진 바이오리듬 즉 '생체리듬'학설에 의하면,
각 리듬의 교차일이 위험한 날이고,
고조기에서 저조기로 전환하는 날은 극히 위험한 날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체 감성 지성리듬의 주기는 각기 23일, 28일, 33일이라고 합니다.
인간 활동의 커다란 흐름인 이 3가지 리듬활동의 복합적인 상호관계가
인생의 길 흉사를 이룬다고 합니다. 각 리듬 주기의 곱,
즉 대순환 기일이 23×28×33=21,252일, 즉 58년 67~69일간인데
이는 묘하게도 우리네의 60년 환갑기일과 거의 일치합니다.
우리 동양학은 여기에 천・지의 리듬이 추가되므로 조금 다르지요.
물론 60주년 주기를 가진 우리가 훨씬 더 정확합니다.
리듬에는 인체내의 생리적인 리듬 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리듬도 있습니다.
春夏秋冬, 계절의 월별 리듬과 매년 바뀌는 연별 리듬이 있지요.
동양에서 쓰이는 甲子年, 乙丑年, 丙寅年 등의 명칭은 바로 연별 리듬의 표시입니다.
소위 五運六氣學이라 불리우는 자연계의 리듬 학설은
동양 최고의 의학경전인 "內經"에 상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자연계의 리듬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옛 성인들이 예방의학적 차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 五運六氣입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면 앞으로 丁卯年, 戊辰年...등의
연별 리듬을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조금이나마 얻게 될 것입니다.
동양의 지혜를 미신으로만 비웃던 현대인들이
이제 흥망성쇠의 리듬 학설을 신봉하고 연구하게 된 사실로 미루어
서양학이 진리로의 행진에 조금씩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리듬 학설의 근본바탕은 '無常'에 있습니다.
'만물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탁월한 인식이
곧 항상된 진리 인식입니다.
석가세존께서 일찍 갈파하셨던 '諸行無常'의 진리는
모든 순환리듬의 실체없는 변화성을 의미합니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앓는 몸살감기와도 같은 인생의 패배감, 공포감, 절망감,
초조감 등의 심적 충격을 담담히 응시할 수 있는 힘이 곧 깨달음입니다.
세상운수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고, 우주도 변합니다.
물결치는 오탁시대의 리듬 한 가운데
리듬없는 한 물건[一心, 歸源]의 각성이 정말 시급한 세대입니다.
서양의 분리주의적, 합리적, 과학적 두뇌가 낳은 인류의 비극이
이제 동양적, 통일적 조화의 가슴으로 승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문란한 성생활로 인한 에이즈라는 괴질, 매년 6백만명의 희생자를 내는 암이라는 괴질,
최근 국내의 괴저병 등은 단순한 전염성이나 물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예측을 불허하는 괴질이라도 아무 조짐없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슬기의 부족, 평등성과 사랑의 결핍, 경쟁, 분리, 폭력풍토의 조장은
탐욕과 분노의 변형된 독소이자 모든 괴질의 원천이며,
자연계 리듬의 영향을 쉽게 받는 면역불능 체질의 원인이 됩니다.
아주 미세한 리듬의 징조라도 즉시 파악할 수 있는 민감성이
특히 요구되는 세대가 오늘날입니다.
눈과 눈썹이 너무 가까와서 서로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 품속의 진주를 찾으려고
너무 멀리 여행하고 있지는 않는가 살펴볼 시간인 것입니다.
즐거워하되 음탕하지 말며, 슬퍼하되 상하지 말라.
樂而不淫 哀而不傷
이 공자의 교훈은 영적인 제3의 순환에 표적을 맞춘 적절한 충고인 것같습니다.
여러분들이 藥石으로 경락을 조절한다고 하나
마음을 조정치 않고 어떻게 경락을 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 다스리는 법이 첫째입니다.
또한 욕망의 만족과 불만족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약이나 침이 없어도 되는,
이미 至人, 眞人, 聖人의 경지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 '동양의학혁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