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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명의 파워 북 연구 시리즈 1
창간호[創刊號]를 내며…[현재 32권까지 발행]
<마지막 사명>은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신앙과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사명>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오직 성경 말씀에 의지해서 글을 쓰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속으로 내보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지 지켜보려고 합니다.
<마지막 사명>은 그리스도를 전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이곳저곳에서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사명>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사명>을 이 시대를 위한 광야의 소리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창간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너무나 힘들어서 고통과 씨름하다가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회복하기 어려운 재난을 당한 가족과 친구를 보면서,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의심이 마음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번 <마지막 사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가르쳐 주는 귀한 하늘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사명>이 찾아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사명> 편집장[編輯長]
서론[序論], “하나님”,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몇 해 전에, 미국[美國] ‘애틀랜타’에서 중년 부부가 교통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마 전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이 32살의 젊은 여의사가, 폐암에 걸려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日本] ‘후쿠오카’ 원자력 발전소에서 흘러나오는 방사능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그늘 아래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신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번 호[号]에서는 성경[聖經]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편집실>
몇 해 전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 대규모의 허리케인[颱風]이 불어 닥쳤습니다. 큰 재산 피해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허리케인에 가족을 잃고 전 재산을 잃은, 어떤 사람이 너무나 원통해서, 플로리다 주 지방 법원에 “하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 사람은 고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번 허리케인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모든 피해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플로리다’ 주 지방 법원에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법정에 피고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재판날짜가 되자, 법원 앞에는 여러 언론들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법원 앞에 모여서, “과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피고석에 앉으실까? 누가 어떻게 변론할까? 검사는 하나님을 상대로 어떤 논고를 내릴까?”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판 시간이 되자, 법정 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공고가 붙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셨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재난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재난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태초”[太初]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재난이 전혀 없는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재난도 없었고, 불행과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귀’[魔鬼:죄의 창시자]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땅에서는 가시나무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독초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생겼고, 질병과 고통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재난과 고통은 ‘마귀’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고통과 재난의 책임은, ‘마귀’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재난과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그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상[거짓 思想]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재난이 생기고, 사고가 나고, 병에 걸리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암[癌]에 걸려야 하나요?”라고 말하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재난과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재난과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말씀]“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연히 ‘실로암’을 지나가고 있는데, 망대가 무너져서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죽은 사람들이,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숙덕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숙덕거림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눅13:4,5).
“예수님”의 답변은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교회‘의 본부와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유대교회‘의 지도자들보다 더 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망대에 깔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악하고 죄가 많아서, 교통사고가 나고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악하고 죄가 많아서,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사탄’이, 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없는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재림”[再臨]하셔서 지구를 ‘사탄’의 손으로부터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때까지, 재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재난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시118:5).
우리가 고통 중에 “여호와”를 찾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정말 내 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두려움, 억울함, 좌절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통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내 편이 아니라, 남편이 내 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어떤 역경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우리의 마음에, 가장 분명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것이, 협력[協力=合力]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서 위로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고난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전체 숲을 보지 못하고, 몇 그루의 나무를 보고서 쉽게 실망하고 원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再臨]하시고 하늘[天國]간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가 받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시종일관[始終一貫],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고대 ‘로마’의 신학, 철학자]는 고통의 문제를, 한 장의 자수[刺繡]로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자수의 뒷면을 볼 때, 거기에는 여러 색깔의 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수의 그림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수의 앞면을 보면, 거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고통의 문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信仰 :믿음]의 눈으로 고통을 볼 때, 비로소 그곳에 아름다운 질서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번 <마지막 사명>에서,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는 이유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許諾:승낙]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마다,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하늘이 주는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
제1부 ‘욥’[‘아브라함’시대에 실존했던 인물]에게 고통이 임한 이유
(욥1:1,2)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 나니라.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욥’이 ‘사탄’의 도전 때문에, 까닭 없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1장>에는 ‘사탄’이 “하늘총회”[“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지적존재”의 대표자회의]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회의에서 ‘사탄’은 자신이 지구를 두루 다녀 보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구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구에 대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1:6,7).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하나님”께서는 아직 ‘욥’ 같은 [믿음의]신앙인이 있기 때문에, 지구[범죄로 악이 가득 찬 땅]이 ‘사탄’의 소유[所有-소유의 지배권리]가 아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다시 반박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물로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기복신앙[祈福信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사탄’의 고소였습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울타리]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욥1:10). 순수한 동기와 양심적인 확신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번영케 하셨으므로 ‘욥’이 그에 대한 답례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사탄은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욥’에게서 거두시면, ‘욥’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욥’에 대한 사탄의 고소였습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對面]하여 주를 욕[辱]하리이다.”(욥1:11).
“하나님”께서는 ‘욥’의 신앙을 신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명예를 걸고서, ‘사탄’의 도전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몸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1:12). 그리하여 즉시로 ‘사탄’은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욥’에게로 내려갔습니다. 이로써 ‘욥’의 인생에 깊은 고난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재난이 연속적으로 ‘욥’에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외적들이 쳐들어와서 소와 나귀를 다 빼앗고 종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렸다는 종들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불어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욥1:18,19). 엄청난 재난의 소식을 연속적으로 전달받는 ‘욥’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사탄’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는 ‘욥’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사탄’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저주가 나오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욥’은 “일어나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0~22).
‘사탄’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는 증명되었으며, ‘욥’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옹호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욥’의 신앙은 순결한 것이었습니다. ‘욥’의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인생에 왜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했던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또는 ‘사탄’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들은, 모든 천사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욥’의 모본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욥’은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길래 이러한 재난이 이르러 왔는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한 재난의 이유와 원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은, 고통의 이유가 자신의 죄나 부족함에 있는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만일 어떤 특별한 이유 없이 고통이나 재난이 닥쳐왔다고 생각되면, 우리도 ‘욥’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라는 믿음으로, 우리를 향한 ‘사탄’의 도전을 물리쳐야 합니다. ■
★★★<댓글 참고> 그리고 시련과 고통의 시험이 왔을 때, 자신의 잘못과 범죄 함의 불순종이 원인이라면, 성령께서 깨우치시고 경고하심을 외면하며 고의적으로 범죄 하였다고 생각되면, 즉시 자복하고 회개하여, 죄 사함의 용서를 구하고, 구주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절박하며, 간절한 마음과 정성을 다 하여 용서함을 받기위해, 엎드려 빌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의 용서와 약속을 믿고, 말씀과 성령께 완전히 굴복하여야만 합니다. 또한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오더라도, 진실 된 깊은 회개로 성경의 종들이 범죄하고, 참회할 때에 그 시련의 시간이 경감되고, 모두 용서받았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주시는 시련과 아픔을 감사하며, 인내와 회개로 완전한 굴복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한없으신 자비의 은혜를 붙잡아야만 할 것입니다.......아멘 ★★★
만일 과오를 지적당한 자들이 저들의 잘못을 고백한다면 원수의 마력(魔力)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저들이 회개하고 저희 죄들을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시므로 저희 죄를 사하실 것이며 모든 불의에서 저희를 깨끗게 하실 것입니다. 죄를 사유하시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의 더러운 두루마기를 벗기시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히실 것이며 저희 머리에 아름다운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크신 심판의 날에 설 수 있는 성품을 계발할 수 없습니다.(1SM 52.2)
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진리인가!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다.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라.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높이 치켜 세우라.... (1SM 106.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으셔야만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동료를 위하여 신성한 관심을 가지도록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모든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을 통해서 구원 받을 것이다. 참된 회개란 이기심을 떠나 하나님과 인간 동료를 위한 성화된 애정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바야흐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인들이 철저한 개혁 운동을 일으켜 문둥병과 같은 이기심을 버리고 저들의 죄로 얼룩진 영혼을 정결케 할 것인가? (1SM 115.1)
우리 형제들은 자기 자신을 겸비하고 성령의 지배하에 둘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큰 빛을 받은 우리들에게 매일 회개하기를 요구하신다. 바로 이것이 내가 우리의 편집인들과 우리의 모든 합회장들에게 전해야 할 기별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빛을 가진 동안에 빛 가운데서 행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흑암이 우리에게 덮칠 것이다. (1SM 165.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확증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오셨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알맞도록 하나님의 도덕적인 표준이 일점 일획이라도 변개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당신 자신의 의를 주시고 인간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1SM 312.2)
아, 순종과 회개와 찬송과 감사로 드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달아오른 불 앞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을 모든 영혼이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 의의 향기는 자비의 보좌를 둘러싼 구름처럼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1SM 344.3)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들이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통회하는 자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회개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과 약점들을 잘 알고 계시므로 우리들을 분명히 도우실 것이다. (1SM 353.2)
주님께서는 오늘날 당신의 종들이 옛날의 복음 교리, 죄를 위한 슬픔 및 회개와 자복에 대하여 설교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들은 구식의 설교, 구식의 풍습, 구식의 이스라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을 원한다.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임을 깨달을 때까지 끈질기고 열렬하며 빈틈 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힘써 회개하여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연단하여야 한다.—원고111,일자불명.(2SM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