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산 아래에 자리잡은 개천사는 통일신라시대 헌덕왕 말기에 도의선사가 장흥 보림사를 창건하고 이어 개천사를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유서깊은 사찰로 비자나무 숲이 유명하다.
한때는 천불전으로 이름나 있어 산 이름이 천불산으로 불리운 적도 있었으며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고 일제시대에는 한때 용화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절집이 소실되었는데 당시 천불전의 천불상이 녹아 내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촌로들은 회고하고 있다. 1963년경에 대웅전과 요사채만이 중건되어 조용한 사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입구에는 불회사나 운흥사에 있는 돌벅수가 아닌 나무벅수 2구가 늙은 몸을 힘겹게 가누고 있다.
화학산 산세가 굽이치듯 유연하고 완급의 경사를 펼친 솜씨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화학산은 험한 능선으로 이어진 산세와 장흥과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동학혁명 당시에는 동학군이 주둔하기도 했으며,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도 의병전쟁, 6.25전쟁 등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화학산은 생각보다 지형이 험하지는 않다. 전형적인 육산으로 수종도 거의 잡목이다. 주능선에도 바위지대가 없이 유순하며 산세는 마치 거대한 공룡의 등줄기처럼 기다란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 게 뻗어 있다. 눈요기 감이라 고는 시원한 나주호의 풍경과 암괴가 형성된 각수바위 정도다.